토머스 휴즈는 195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해온 미국의 대표적인 기술사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이로스코프의 발명으로 잘 알려진 발명가 엘머 스페리에 관한 전기 Elmer Sperry: Inventor and Engineer(1971)를 저술했고, 이어 미국, 독일, 영국에서 전기시스템이 등장해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비교사적으로 서술한 역저 Networks of Power: Electrification in Western Society, 1880-1930(1983)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으로 미국기술사학회(Society for the History of Technology, SHOT)에서 그 해의 가장 훌륭한 기술사 단행본에 수여하는 덱스터 상(Dexter Prize, 현재는 Edelstrin Prize로 이름을 바꿈)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휴즈가 1989년에 처음 출간(2004년 개정판 출간)한 American Genesis: A Century of Invention and Technological Enthusiasm, 1870-1970은 그 이전까지 휴즈의 연구를 집대성하면서 더욱 확장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흔히 '2차 산업혁명(second industrial revolution)'으로 불리는 19세기 말 미국과 독일에서의 기술혁신을 출발점으로 하여 논의를 특정 기술분야에 한정하지 않으면서 지난 100여년간의 미국 기술의 흐름을 폭넓게 기술하고 있다. 대학 출판부가 아닌 바이킹 펭귄(Viking Penguin)에서 출간된 이 책은 펭귄 북스로 재출간된 이후 비단 기술사나 관련 역사 전공자로 한정되지 않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혔고, 아깝게 수상은 놓쳤지만 퓰리처상 최종후보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 책이 미국 기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를 길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혹자는 이 책이 일종의 '통사'에 해당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 미국 기술사를 통사적으로 다룬 책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여러 권이 이미 나와 있다.(주1) 하지만 휴즈의 이 책을 그와 같은 통사로 간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보다는 휴즈 특유의 연구 프로그램인 '기술시스템 이론'을 미국 기술사의 특정 사건들에 적용해, 오늘날의 미국 사회를 형성한 주된 힘이 어떻게 발생하고 성장해 나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사회에 뿌리내리게(혹은 그렇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책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얼개를 이해하려면 먼저 휴즈가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인 기술시스템 이론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필수적이다. 휴즈는 1950년대부터 기술을 인공물(artifact)과 등치하고 기술의 발전을 진보(progress)와 동일시하는 식의 기술사 서술에 반기를 들면서 기술을 바라보는 독특한 ―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반화된 ― 관점을 발전시켜 왔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기술은 흔히 말하는 기술적 요소(기계, 설비, 공장 건물 등)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이와 연관된 정치, 경제, 문화, 조직, 노동의 측면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령 오늘날의 석유 시스템을 예로 들자면, 이는 정유공장, 유조선, 시추설비 등과 같이 서로 뒤얽혀 있는 기술적 구성요소들뿐 아니라 석유 시스템에 이해관계를 지닌 정치인들, 정유공장이나 시추설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정제된 휘발유를 연료로 쓰는 자동차를 모는 데 익숙해져 있는 일반 시민들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도 그 속에 포괄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산업사회는 이처럼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린 거대 기술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커진 사회로서, 일반 시민들의 일상생활은 이러한 기술시스템 없이는 단 하루도 지탱될 수가 없다.

휴즈에 따르면, 새로운 기술시스템은 발명(invention)-개발(development)-혁신(innovation)-성장, 경쟁 및 공고화(growth, competetion, and consolidation)-모멘텀(momentum) 획득이라는 크게 다섯 개의 발전단계를 거쳐 진화해 나간다.(주2)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도입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구성요소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시제품의 규모를 확장시키며 회사 등을 설립해 이를 사회에 내놓는 발명-개발-혁신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 세 단계 모두를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책임지는 경우에는 휴즈가 발명가-기업가(inventor-entrepreneur)라고 부르는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880년대 전기조명 시스템의 개발에서 토머스 에디슨이 수행한 역할이 대표적인 예인데, 에디슨은 발전기, 배전체계, 송전선, 백열전구, 소켓, 계량기, 퓨즈 등과 같은 기술적 구성요소를 발명하고 특허를 얻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경쟁기술인 가스등 시스템에 이해관계를 가진 뉴욕 시의원들을 설득하고, 가스등과 비교했을 때 전기조명이 가격 경쟁력을 갖도록 기술적 구성요소를 설계하고, 전기조명이 시대를 앞서나가는 '모던'한 기술이라는 식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주는 등 복합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1882년 말 최초의 전기조명 시스템이 뉴욕 맨해턴의 펄 스트리트에 실현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즉, 에디슨은 특정 기업으로부터 독립해 활동하는 발명가(independent inventor)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발명을 사회 속에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활동도 아울러 수행하는 기업가 내지 혁신가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단 사회에 도입된 기술시스템은 경쟁기술에 맞서면서 규모를 확장시키고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성장 및 공고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에디슨과 같은 혁신적 발명가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기술적 문제의 해결은 대기업 부설 산업연구소에 속한 과학자나 엔지니어의 몫이 되며, 덩치가 커진 기술시스템을 유지·보수하고 시스템의 확장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는 관리자(manager)나 금융가(financier)의 역할이 증가한다. 공고화의 단계에 진입한 기술시스템은 이제 수많은 기술적, 조직적 요소들을 그 속에 포괄하게 됨으로써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의도에 의해 쉽게 변화되지 않는 일종의 관성, 즉 '모멘텀'을 갖게 된다. 이는 기술결정론에서 흔히 언급되는 '자율적 기술(autonomous technology)'의 관념과 일견 유사해 보이지만, '모멘텀'은 해당 기술시스템에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조직과 사람들이 변화에 저항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기술 '그 자체'를 마치 생명력을 가진 실체처럼 묘사하는 기술결정론적 논의와 구별된다고 하겠다.

위에서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휴즈의 이론 틀은 American Genesis에서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서술해 나가는 데 기본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 휴즈가 1870년대를 서술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는 에디슨 같은 독립발명가들의 활동에 힘입어 전화, 전기, 석유 등과 같은 오늘날의 기술시스템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책의 1-3장까지는 에디슨, 스페리,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니콜라 테슬라, 엘리후 톰슨 등 독립발명가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4장은 이들을 대신해 새롭게 기술적 문제 해결의 담당자로 나선 산업연구소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5장은 책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헨리 포드나 새뮤얼 인설과 같은 '시스템 건설자(system builder)'들이 에디슨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생산시스템과 전력 네트워크를 건설해 미국 기술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겼음을 보여 준다. 이어 6장과 7장은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적 기술이 소련에 수용되는 과정과 그것이 유럽의 모더니즘 예술 분야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있으며, 8장은 대공황기와 2차대전을 거치면서 정부가 테네시 유역 개발 계획과 맨해턴 프로젝트를 통해 기술시스템 건설에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에필로그격인 9장에서는 1960년대 이후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흐름과 대형 기술사고(드리마일 섬 핵발전소 사고, 챌린저 호 폭발)의 반향 속에서 거대 기술시스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가 모멘텀을 '해체'해 거대 기술시스템의 쇠퇴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기술시스템의 진화 과정에 대한 휴즈의 이론 틀은 다소 도식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지난 한 세기 동안에 걸친 미국 기술사의 큰 줄기를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휴즈의 서술에는 한계도 있다. 기술시스템이 사회에 자리잡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에디슨과 같은 발명가-기업가, 포드나 인설 같은 시스템 건설자의 '영웅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휴즈식의 접근은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2차대전기까지는 그럭저럭 잘 들어맞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오늘날의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는 썩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는 휴즈가 자신의 시스템 접근법을 2차대전 이후로 확장하려 시도하고 있는 최근 저작인 Rescuing Prometheus(1998)에 대한 논평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는데, 특히 폐쇄적으로 진행되는 군사적 연구개발 계획보다 많은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공공개발/토목 계획에 대한 서술에서 그런 한계가 두드러진다.

휴즈는 American Genesis 발간 15주년을 맞아 2004년에 출간된 개정판에 초판의 결론을 다시금 되짚어보는 새로운 서문을 달았다. 여기서 그는 거대 기술시스템의 쇠퇴와 미국의 주도권 상실을 내다보았던 초판에서의 예측이 틀렸음을 시인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대항문화의 가치가 거대 기술시스템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대형 기술사고의 잇단 발발로 거대 기술시스템의 쇠퇴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처럼 보였던 1980년대는, 돌이켜보면 영국의 산업혁명과 제 2차 산업혁명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기술혁명, 즉 정보혁명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이 새로운 서문에서 휴즈가 내세우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매우 흥미롭고 생각해볼 여지를 남기는 입장 변화지만, 그럼에도 초판 결론의 시사점을 크게 바꾸어놓는 것은 아니다. 거대 기술시스템이 지닌 모멘텀은 여전히 조직적, 인적 이해관계의 결합체이고, 따라서 과거의 기술시스템뿐 아니라 현재 정보혁명 ― 혹은 생명공학혁명, 나노혁명, 그 외 앞으로 다가올 그 어떤 '혁명'이라도 ― 이 갖고 있는 모멘텀 역시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의해 해체될 수 있다는 시사점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즈의 구체적 입장 변화와 무관하게, 그가 정초한 기술시스템 이론이 제시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함의가 될 것이다.
 
 
 

각  주

1. 가령 Ruth Schwartz Cowan,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Technolog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Carroll Pursell, The Machine in America: A Social History of Technology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5); Alan I. Marcus and Howard P. Segal, Technology in America: A Brief History, 2nd ed. (Orlando: Harcourt Brace & Co., 1999); Gary Cross and Rick Szostak, Technology and American Society: A History (Englewood Cliffs, NJ: Prentice Hall, 1995) 등을 보라.

2. 휴즈의 기술시스템 이론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은 송성수 편, 『기술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새물결, 1999)에 수록된 휴즈의 논문 「거대 기술 시스템의 진화」를 참조하라.
 
 
 
 

출전: ≪서양사론≫ 88호 (20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