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회의는 1980년대 말에 덴마크에서 처음 개최된 후 불과 20여년 만에 전세계 15개국에 퍼졌을 정도로, 과학기술정책에서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추구하는 여러 시민참여 제도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합의회의가 정책분석 도구이자 시민참여 제도로서 갖는 유효성에 관해 사회 일각에서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서 열렸던 합의회의가 과학기술정책 결정과 행사 참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합의회의의 의의를 평가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해 보려 한다.
 

정책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많은 사람들은 합의회의에서 도출된 결과가 실제 정책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궁금해한다. 시민패널이 작성한 최종보고서에서 제시된 정책제안들이 실제 정책에 법률, 자금지원, 규제지침 등의 형태로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사실 간단하지 않다. 시민패널의 보고서는 자문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않는다. 또 정책결정자들은 시민패널 보고서 외에 전문가, 이해단체 등으로부터 다양한 자문을 얻기 때문에, 정책이 수립되었을 때 어떤 자문 내용이 반영되어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문 시점과 정책결정 시점 사이에 시차가 벌어져 있을 때에는 영향 관계를 따지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합의회의의 원조격인 덴마크의 경우, 일부 주제들에서 이와 같은 실질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예컨대 덴마크 의회는 1989년에 열린 '인간 게놈 연구'에 관한 합의회의 결과를 받아들여 고용 혹은 보험에서 유전자검사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했고 이는 몇 차례의 검토를 거쳐 1996년에 법으로 통과되었다. '농업과 산업에서의 유전공학 적용'에 관한 1987년의 합의회의는 의회가 '생명공학 연구 프로그램'(1987-1990)에서 동물에 대한 유전자조작에 대해서는 자금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반면 덴마크를 제외한 다른 국가들에서는 합의회의가 정책결정에 실질적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덴마크에서는 의회 산하의 기술영향평가 기구인 덴마크 기술위원회(DBT)가 합의회의를 주최하기 때문에 정책결정자와의 제도적 연계가 잘 갖추어진 반면, 다른 국가들에서는 개최 주체가 연구기관, 공공박물관, NGO 등으로 다양해 그런 연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합의회의가 개최된 시점의 문제가 있다. 해당 주제에 관한 법령 제정 등의 중요한 정책결정이 이미 끝난 후에 개최되거나, 해당 주제가 아직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개최되면 자연히 합의회의에 대한 정책결정자, 일반시민, 언론의 관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다. 따라서 합의회의 결과의 정책 반영을 위해서는 합의회의의 주제와 개최 시기를 시의적절하게 결정하고, 주최기관과 정책결정기구 사이에 공식적·비공식적 연결고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일반시민은 어떻게 변모했는가
 

합의회의는 15명 내외의 시민패널이 주어진 주제에 관해 짧은 기간 동안 밀도있는 토론을 거쳐 스스로의 힘으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이 합의회의에 참여한 평범한 일반시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합의회의의 존재의의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합의회의 전후에 시민패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시민패널은 합의회의에서 다루어진 과학기술 관련 주제에 관해 많은 지식을 습득했을 뿐 아니라, 과학기술정책 결정 과정과 그 속에서의 시민의 역할에 대해서도 좀더 향상된 이해를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시민패널은 원래 가지고 있던 해당 주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찬반의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과 역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짐과 동시에 훨씬 더 균형잡히고 폭넓은 쟁점을 고려한 판단을 내리는 쪽으로 변모했다.

캐나다에서 1999년에 열린 식품 생명공학에 관한 합의회의의 시민패널에 대한 조사 결과는 이를 잘 보여 준다. 먼저 1차 예비모임이 열리기 전 시민패널에 "식품 생명공학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시민패널의 답변은 아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호하면서도 전형적인,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었다.
 

실험실에서의 주입, 바늘, 마분지 상자에 담긴 토마토, 소 성장 호르몬, 더 크고 수확은 좋지만 맛은 없는 잡종 식물, 합성 화학물질

거대한 기형 과일과 채소

배양 접시, 실험복을 입은 사람들, 유전물질을 옮겨넣기 위한 주사기

킬러 토마토

변종 동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 두렵다!

그러나 합의회의가 끝난 지 2주 후에 시민패널 각자가 작성한 글에서는 이런 피상적인 인식이 사라지고, 생명공학의 폭넓은 쟁점들에 대한 고려와 함께 과학기술의 불확실성과 시민참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정 과학기술을 막연하게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판단을 내리는 '계몽된 시민(informed citizen)'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최근의 발전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특히 생명공학에 대한 국제적 반응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합의회의 과정을 통해 나는 캐나다의 식품 규제 체계와 유전자조작식품을 섭취했을 때 안전한지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수의 다국적기업들이 생명특허를 통해 생명공학 산업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해 온 것, 그리고 생명공학이 환경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더 불안하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합의회의에 처음 참여했을 때 내가 갖고 있던 많은 우려들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나는 다른 걱정거리를 안고 있다. 나는 우리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는 전문가들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 수준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시민참여가 꼭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정도는 훨씬 약하지만, 시민패널이 겪은 이러한 변화는 합의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시민에게도 어느 정도 공유될 수 있다. 시민패널이 이끌어낸 합의안이 기자회견과 최종보고서의 형태로 널리 확산됨으로써 일반시민 사이에 광범한 토론과 논쟁을 유발해 간접적인 '참여의 확대'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합의회의에 대한 언론보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덴마크에서 개최되는 합의회의의 경우에는 TV 및 라디오 뉴스 취재를 포함해 통상 100여 건 이상의 뉴스보도가 이루어짐으로써 참여의 확대를 돕고 있다.
 

정책결정자와 전문가들은 어떻게 변모했는가
 

합의회의 과정은 정책결정자와 전문가패널의 사고방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객관화된 지표로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합의회의를 개최한 많은 국가들에서 정책결정에서의 시민참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정도로 나타나고 있음이 관찰되었다. 이는 덴마크, 영국, 캐나다 등에서 고위급 공직자 및 국회의원들이 합의회의 본회의를 참관한 후 마지막 날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시민패널 보고서에 대해 논평을 하기도 하고 종종 평가 모임에까지 참여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합의회의가 끝난 후에는 정부부처 내에서 시민패널 보고서를 놓고 토론을 벌인 경우(영국)도 있었고, 해당 정부부처에서 시민패널 혹은 합의회의 실무진을 초청해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다(캐나다). 또한 유사한 시민참여 움직임이 앞으로 있을 때 비영리재단이 지원을 검토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경우(미국)도 있었다. 캐나다의 경우 1999년 3월 식품 생명공학에 관한 합의회의가 끝난 지 몇 개월 후에, 시민패널 중 한 사람이 국가 생명공학 정책을 감독하고 조언을 제공하는 국가자문기구인 캐나다생명공학전략자문위원회(Canadian Biotechnology Strategy Advisory Committee)의 위원으로 위촉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합의회의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가장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곳은 물론 덴마크일 것이다. 1995년에 덴마크 의회 의원 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설문에 참여한 의원들 중 75%가 합의회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고 58%는 세부 주제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37%는 합의회의에 1번 이상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합의회의 보고서를 경우에 따라(59%) 혹은 항상(21%) 읽었고, 70% 이상이 이를 의회에서의 논쟁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용했으며, 75%는 합의회의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합의회의는 행사에 참여했던 전문가패널에 대해서도 인식 변화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미국과 캐나다 합의회의에서 실시한 전문가패널 대상 설문과 인터뷰 결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합의회의 이전에는 과학기술 영역에서 효과적인 시민참여가 가능할지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시민패널과의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의구심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시민패널의 활동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심지어 감정적으로 상당히 고양되기까지 했다. 그들은 시민패널의 "사고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자신들의 생각에 대한 사고와 깊이에서 놀라울 정도의 정교화를 이루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민주적 정책결정의 패러다임 전환의 가장 근본적인 일부분"을 이룬다고 보았고, 그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던 퇴역 사업가와 소수민족 꼬마아이가 함께 토론하는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부른 참여자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상아탑을 빠져나와"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관심사를 듣고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독특한" 경험이었다며 이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합의회의 모델은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가
 

합의회의는 유럽의 작은 국가인 덴마크에서 시작되어 성공을 거둔 시민참여 제도이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합의회의 모델이 덴마크가 아닌 다른 정치적·제도적·문화적 환경에서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상당히 강했다. 회의적 시각을 가진 정책연구자들은 합의회의가 유럽에서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사회적 합의의 정치사회적 전통이 강한 나라들에서 가장 활발하게 개최되어 온 점을 들어,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규모가 크고 사회적 갈등이 정치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합의회의의 성공적 개최가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 점은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시민참여의 전통 자체가 불과 10여 년으로 극히 일천한 우리 상황에서 합의회의가 과연 유효한 정책도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주최 실무진들조차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합의회의 모델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여러 나라들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되면서 합의회의의 유효성에 대한 의구심은 이제 상당히 수그러들었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조작식품이라는 같은 주제로 거의 같은 시기(1999년 3월)에 열렸던 캐나다, 호주, 덴마크 합의회의를 서로 비교해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세 대륙에 위치한 세 국가에서 개최된 합의회의는 제각기 다른 국가적·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제역할을 해냄으로써 합의회의 모델의 적응성이 뛰어남을 잘 보여 주었다. 세 국가의 시민패널들은 각각이 처한 독특한 상황을 반영해 서로 조금씩 다른 측면에 관심을 가졌고, 최종보고서에서도 GMO에 대한 태도, 규제기구에 대한 신뢰, 무역조약과 같은 국제적 제약의 고려, 유기농 등의 대안에 대한 고민 등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패널은 식품안전, 생명특허, 제3세계, 환경에 대한 영향 등 비슷한 질문들을 선정했고 이들 각각에 대해 대체로 조심스러운 접근을 강조하는 등 일반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우려를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이는 합의회의가 다양한 맥락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모델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합의회의는 그 속에 참여하는 시민패널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는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한편으로, 시민패널의 토론과 숙의를 통해 만들어진 최종보고서의 대중적인 유통을 통해 정치권과 일반시민들에게도 토론과 논쟁을 확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모델이다. 참여를 통해 나타난 일반시민의 지식과 통찰은 종종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되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는 다시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 정책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물론 합의회의는 적용가능한 주제, 세부 절차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는 모델이며, 그 속에 내재된 문제를 보완하고 적용가능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현재 진행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회의는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통해 다양한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작동가능한 모델임을 이미 상당부분 입증했으며, 이는 앞으로의 더 많은 적용과 탐색을 위한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출전: 월간 ≪과학과기술≫ 200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