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의식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과학기술은 우리의 일상적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전문가'를 제외한 '보통사람들'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소외는 과학기술이란 뛰어난 재능이 있거나 훈련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전문가들만의 지식이자 활동영역이라는 믿음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짜임새 속에서는 과학기술과 일반시민과의 관계가 일방향적인 것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반시민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한 존재이므로 전문가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계몽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지난 30여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는 과학기술 담론에 대한 전문가의 독점성과 일방적 계몽에 의한 과학기술 대중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결정이 이루어지기 전(前) 단계의 토론과정에 일반시민이 참여하여 이를 사회 전체적인 토론과 논쟁으로 확산시킴으로써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를 '증진'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시민의 정책참여를 촉진하는 새로운 대안적 모델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여기서 소개될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모델인데, 1987년 덴마크에서 처음 시행된 이 모델은 1990년대 초 네덜란드와 영국에 도입된 것을 필두로 해서 최근 몇 년 동안 오스트리아, 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일본 등에서 성공리에 개최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주관으로 지난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합의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합의회의 모델의 역사와 그것이 갖는 특성, 그리고 실제 진행과정에 대해 살펴본 후, 합의회의를 개최한 바 있는 각국의 경험에 비추어 합의회의 모델을 간략히 평가해 보려 한다. 이를 통해 합의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지금까지 개최되었던 각국의 합의회의는 해당 국가들의 정책문화와 참가한 패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합의회의가 시민참여 제도로서 어떤 강점과 약점을 지니는지 등에 대한 일반적 함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합의회의 모델은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다른 모델과 비교해 본다면 비교적 일찍부터 국내에 알려졌고 또 정식으로 도입되어 두 차례에 걸쳐 실제로 개최된 바도 있음을 감안해, 이 글은 합의회의의 '소개'보다 평가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두어 서술되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2. 합의회의의 개념과 역사
 

1) 합의회의란?
 

합의회의는 통상 "선별된 10-16명의 보통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과학기술적 문제를 평가하는 책임을 맡아 진행하는 공개 포럼"으로 정의된다. 선별된 시민들은 자신들이 가진 질문 및 관심사항을 전문가들에게 제기하고 전문가들의 답변을 자체적인 토론을 통해 평가한 후, 그 결과를 합의 보고서로 만들어 최종적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게 된다(Joss & Durant, 1995: 9).

합의회의가 갖는 의의는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먼저 합의회의는 과학기술정책의 입안과정에서 그간 소외되어 왔던 일반시민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 방법으로 널리 각광받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기술영향평가는 기술의 도입과 활용이 가져오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그 중 긍정적인 측면은 극대화시키고 부정적인 측면은 극소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마련된 것으로, 미국의 경우에는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정책결정에 도움이 되는 중립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이영희, 2000). 그러나 이러한 전문가중심 기술영향평가는 전문가들 사이의 합의의 어려움 때문에 애초에 의도되었던 역할을 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영역이 장차 사회적 문제로 부각될 것인가를 예측해서 파악하는 데도 효과적이지 못함이 곧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1980년대 이후 일반시민이 기술영향평가 과정에 참여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참여적 기술영향평가의 문제의식이 널리 확산되었는데, 합의회의는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합의회의는 대중의 과학이해를 '증진'하는 새롭고 보다 유효한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과학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증가하면서 영미권 학계에서는 일반대중이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한 관심이 커졌고, 1985년에 출간된 왕립학회 보고서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는 이에 관한 다양한 실천활동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대중의 과학이해 증진을 위한 초기의 기획들은 공식적·비공식적 과학교육이나 여러 가지 형태의 과학 대중화 활동과 같이 '무지한'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이와 같은 일방향적 모델은 점차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비판자들은 '대중의 과학이해'라는 개념 속에 과학과 일반대중간의 다면적인 '상호'작용을 모두 포괄해야 하며, 특히 과학기술을 둘러싼 대중 논쟁과 의사결정의 측면을 중요하게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Joss & Durant, 1995). 이런 점에서 합의회의 모델은 단순한 일방향적 계몽이 아닌 사회적 토론과 논쟁, 학습의 과정을 촉진할 뿐 아니라 그 결과를 실질적인 정책형성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길까지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대중의 과학이해 증진'을 이뤄낼 수 있는 방안으로 볼 수 있다.
 

2) 합의회의의 역사
 

합의회의는 원래 1970년대에 미국에서 의료기술영향평가(medical technology assessment)의 한 방법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의 합의회의는 '합의도출회의(consensus development conference)'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주로 새로운 의료기술이 가져올 의료적·경제적 영향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기술영향평가 회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합의회의는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의 주최로 1977년 9월에 처음 개최된 이래 현재까지 100회 이상 열렸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합의회의는 일반인들의 방청은 허용하였지만 실제 토론 과정에서는 일반인들의 참여가 배제된 것이었다(Jørgensen, 1995).

의료 분야에서의 합의회의는 이내 주목을 끌어 1980년대 초부터 유럽 여러 국가들에도 전파되었는데, 이러한 전문가 중심의 합의회의 모델은 덴마크에 도입되면서 일반시민이 중심이 되는 토론과 숙의(deliberation)의 과정으로 거듭나게 된다. 1985년 덴마크 의회 산하에 설치된 덴마크 기술위원회(Danish Board of Technology)가 3년여의 다양한 탐색과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 시민들의 지혜와 경험 그리고 전망 ▷ 전문가들이 가진 통찰력과 도구 ▷ 정책결정자들의 요구와 정치적 조건 ▷ 덴마크의 민주주의적 전통 등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영향평가 방법으로 시민중심 합의회의 모델을 고안해 내었던 것이다(Kluver, 1995: 41).

1987년에 처음 열린 일반시민 중심의 합의회의가 성공을 거두면서 덴마크에서는 지금까지 매년 1-2차례씩 과학기술과 관련된 여러 주제들에 대해 합의회의를 개최해 왔다. 덴마크의 성공 사례가 알려지자 1990년대 초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덴마크식 합의회의 모델을 도입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뿐 아니라 북미, 호주, 아시아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2001년 8월 현재까지 세계 14개국에서 46회 이상의 합의회의가 이미 개최되었거나 진행 중에 있다(<표 1> 참조).
 
 

3. 합의회의의 절차와 진행(주1)
 

1) 합의회의의 특성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시민패널은 합의회의에 임할 때 그들의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기본적인 "상식"에 기초하여 주어진 주제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합의회의는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시민패널에 의해 제기된 질문에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동원하여 응답하는 임무를 맡게 한다. 결국 시민패널에 의해 제기된 질문은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응답되는 것이다.

합의회의의 첫번째 단계는 선발된 시민패널에게 관련 주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이들이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항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회의 단계에서는 다양한 전문가 의견들을 듣고 이를 취합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시민패널이 자신들이 청취하였던 다양한 전문가 의견을 평가한 기초 위에서 원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고서로 만들어 제출하게 된다. 이 보고서는 특정 주제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와 기대, 그리고 우려 등을 정치인들과 정책결정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보고서에 담긴 시민패널의 견해는 전문가의 지식이 일반시민의 상식과 혼합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민패널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음으로써 중요한 과학기술상의 이슈에 대해 일종의 "필터"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합의회의에 참여하는 시민패널은 다른 보통사람들 역시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과학기술 관련 논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합의회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해 일반시민과 전문가, 그리고 정치인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합의회의에서 논의될 주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주제가 사회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 주제가 너무 포괄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는 안되고 제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 주제가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어야 한다
▷ 주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목적이 명료화될 필요가 있어야 한다
▷ 주제가 명료해지기 위해 전문가들이 기여할 부분이 있어야 한다
▷ 주제에 대해 이미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전문성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시민패널과 전문가패널은 서로간의 관계에 있어서 명료하게 정의된 역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과정 자체가 투명하고 문서화될 수 있어야 한다
▷ 시민패널 내에서의 회의주제에 대한 의견통일이나 권고안 작성은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최종 보고서는 패널 내에서 최대한 도달할 수 있는 합의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패널 내에서의 소수자 의견은 특별한 경우에만 제시되어야 한다

2) 진행과정과 절차
 

(1) 조정위원회의 구성

합의회의 주제가 선정되면, 먼저 조정위원회(steering committee)를 구성해야 한다. 조정위원회는 통상적으로 3-5명으로 구성되며, 1인의 프로젝트 관리자(합의회의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사람)가 필요하다. 프로젝트 관리자는 프로젝트의 일상적 업무들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조정위원들은 선정된 주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네트웍을 가지고 있으며, 그 주제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1차 조정위원회는 보통 본회의 6개월 전에 열리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사항들에 대해 논의한다. 프로젝트 관리자는 이 프로젝트를 위한 방법으로 합의회의가 선택된 이유, 합의회의의 기본적인 개념, 역할, 그리고 장·단점 등에 대해 조정위원회에 알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정위원회의 역할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앞으로의 시간 계획을 확정한다. 아울러 이해당사자 집단의 리스트를 만들고 시민패널 촉진자(lay panel facilitator, 합의회의의 전반적인 일정 속에서 시민패널을 지원하고 토론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를 선정하는 작업도 한다. 시민패널 촉진자는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교육과 심리학에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토론 사회와 공동작업 촉진에 뛰어난 사람 중에서 선정한다. 또한 조정위원회는 시민패널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합의회의의 주제에 대한 개요와 소개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자료는 논의될 주제에 관한 여러 정보, 예컨대 현재 발전수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그리고 주제에 내재된 갈등요인 등의 내용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어야 한다. 1차 조정위원회 이후에는 선정된 주제와 관련된 이해당사자 집단들이 참가할 수 있는 공청회를 개최해 의견을 청취하기도 한다.
 

(2) 시민패널 선발

이러한 작업이 완료되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특정 주제에 대해 합의회의가 개최될 예정이며,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을 홍보한다. 일반시민들의 참여를 권유하는 이 광고는 가능하면 전국의 모든 지역신문에 실리도록 하여 지방거주자들도 이 회의에 참여할 것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광고에는 회의 주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표 2>는 1994년 영국에서 열렸던 합의회의에 대한 시민패널 지원자를 모집하는 신문광고의 내용이다.
 
 

광고를 통해 일반시민들의 지원이 이루어지면 2차 조정위원회가 열려 지원서, 면접 결과 등을 토대로 10-16명의 시민패널을 최종 선정한다. 시민패널은 가능한 한 전국의 인구통계학적 특성에 부합되는 인적 구성을 갖는 사람들로 구성하게 된다. 선별과정에서 고려되는 기준들은 나이, 성, 교육수준, 직업, 그리고 지역분포 등이다. 물론 아무리 잘 선별한다해도 15명 남짓한 사람들이 전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최소한 그 속에 다양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포괄될 수 있게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패널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토의될 주제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덴마크의 경우 신문광고가 나가면 보통 100명에서 200명 정도가 지원을 한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선별된 패널에는 노동자, 주부, 학생, 대학교수 등이 속하게 된다.
 

(3) 1, 2차 예비모임의 진행

이렇게 구성된 시민패널은 2차에 걸친 예비모임을 갖게 된다. 먼저 본 회의가 열리기 2-3개월 전에 시민패널, 시민패널 촉진자 및 프로젝트 관리자가 참석한 가운데 1차 예비모임이 열린다. 1차 예비모임에서는 선정된 시민패널들끼리의 소개가 이루어지며 프로젝트 관리자는 합의회의의 구조와 진행방식에 대해 시민패널에게 설명한다. 그 후 시민패널은 조정위원회가 위촉한 전문가의 기초 강의를 듣고, 토의될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난상토론(brainstorming)을 통해 그 주제에 대해 일반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관심, 전망 및 질문들을 제기하게 된다. 시민패널은 이 모임에서 본회의 때 던질 질문들을 정리하는데, 보통 8개 내지 10개의 질문들을 만들게 된다. 아울러 시민패널은 조정위원회에서 제공하는 리스트를 토대로 본회의 때 참석할 전문가패널이 어떠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은다. 프로젝트 관리자는 이 1차 예비모임 과정에서 시민패널이 제시한 질문과 의견을 바탕으로 본회의 때 시민패널의 질문들에 대답할 임무를 띠는 전문가패널을 10-15명으로 구성하여 3차 조정위원회 때 승인을 받아야 한다. 물론 주제에 따라 달라지게 되지만 이 전문가패널에는 과학기술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윤리학과 사회과학의 전문가, 그리고 노동조합, 기업체, 환경단체와 같은 이해집단의 대표자들이 속하게 된다.

본회의 1개월 전에 시민패널의 2차 예비모임이 열린다. 이 때는 본 회의에서 토의될 주제에 대해 각자가 연구한 결과와 조정위원회에서 제공하는 또다른 기초적 배경자료들에 기반하여 심층적인 내부토론을 하고, 1차 예비모임에서 논의된 질문 내용들을 더 구체적으로 가다듬어 최종적인 세부질문들을 결정한다. 아울러 프로젝트 관리자가 조직한 전문가패널에 대해 더 참여할 전문가를 제시하거나 내정된 전문가의 배제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문가패널이 확정되면 조정위원회는 전문가패널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시민패널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자신의 관점과 답변을 알기쉽게 제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한다.

지금까지의 준비과정을 일정별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 <표 3>과 같다.
 
 

(4) 본회의 개최

모든 준비가 끝나면 약 3일에 걸친 본회의, 즉 합의회의가 열리게 된다. 이 본회의에는 시민패널과 함께 전문가패널의 구성원들이 참여하게 되며, 언론과 의회의 관련 인사들, 그리고 일반 방청객들이 청중으로 참여하게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언론이 수행하는 역할이 매우 크다. 본회의의 진행을 계속해서 보도함으로써 쟁점이 되고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관심을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회의의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본회의가 열리기 전날 저녁에 시민패널은 간단하게 마지막 예비모임을 갖고 본회의에서 던질 질문 내용들을 명료화하고 주제와 관련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는 등 본회의 준비에 만전을 가한다.

본회의 첫째 날: 첫째 날에는 시민패널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초청된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견해와 문제해결 방안, 그리고 문제에 대한 현재의 지식수준 등에 대해 1인당 20-30분 정도씩 진술하게 된다. 아울러 전문가패널의 구성원들은 시민패널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 이외에도 시민패널이 고려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서도 추가 진술할 기회를 갖게 된다. 본회의의 첫째 날 공식행사가 모두 끝나면 시민패널의 구성원들은 따로 모여서 전문가패널의 대답이 자신들이 제기한 질문의 해결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가에 대해 토의를 하고, 다음날 추가적으로 제기할 질문들과 누가 질문할 것인가를 다시 결정하게 된다.

본회의 둘째 날: 시민패널은 미진한 답변 내용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전날 저녁에 결정된 질문들을 추가적으로 던지고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답변한다. 따라서 이 날의 질의는 반대심문적인 성격도 띠게 된다. 회의를 방청하고 있는 청중들도 주제와 관련하여 부가적으로 질문할 기회를 갖게 된다. 둘째 날은 특히 회의의 사회를 맡고 있는 시민패널 촉진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시민패널의 질문에 대한 전문가들의 답변이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전문가들이 핵심적인 답변이 이루어질 때까지 질문을 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날 공식행사가 끝나면 시민패널은 토론주제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다. 최종 보고서는 핵심적인 질문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 질문들 각각에 대해 시민패널이 도달한 결론과 정책적 권고사항, 향후 더 연구되어야 할 내용 등을 담아야 한다. 시민패널은 회의과정에서 합의에 도달한 쟁점에 대해 요약정리를 하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쟁점에 대해서는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으로 나누어 정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정위원회와 프로젝트 관리자는 보고서 작성과 관련된 편집업무와 행정업무를 지원해 주지만 보고서의 내용은 전적으로 시민패널에 의해 작성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종보고서 작성에 시간이 부족하여 다음 날 하루를 더 보고서 작성에 할애하기도 한다.

본회의 셋째(혹은 넷째) 날: 마지막 날인 셋째(혹은 넷째) 날에는 작성된 최종보고서를 전문가패널에 먼저 보여주어 내용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기술적인 표현의 오류들을 정정한 다음 이를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배포한다. 배포 후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 보고서를 놓고 토론을 벌이게 된다. 이 자리에는 특히 정책결정 담당자들과 의회 의원들 및 언론인들이 초청되어 이 보고서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확산될 수 있도록 한다. 시민패널의 구성원들은 언론사 기자들과 개별적으로 인터뷰를 행하기도 한다. 시민패널이 작성한 최종보고서는 보통 15페이지에서 30페이지 정도인데,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합의회의가 일회적인 토론회나 의견수렴으로 그치지 않고 전사회적인 논쟁과 의견수렴의 기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한다.

참고로, 1994년 영국에서 열렸던 식물 생명공학에 대한 합의회의의 준비 및 진행과정을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4>와 같다.(주2)
 
 

4. 합의회의에 대한 평가
 

앞에서 이미 보았듯, 합의회의는 불과 10여년 만에 전세계 14개국에 퍼졌을 정도로, 과학기술정책에서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추구하는 여러 시민참여 제도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회의는 아직까지 새롭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 모델이며, 따라서 앞으로 열릴 합의회의가 더욱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나아가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열렸던 합의회의 사례에 대한 적절한 평가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평가 작업을 통해 합의회의 개최를 담당했던 실무자들은 그간 드러난 문제점들의 개선을 통해 장래에 더 나은 합의회의 운영을 꾀할 수 있을 것이고, 아직 합의회의를 도입하지 않은 국가들에게는 합의모델의 유효성에 대해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Joss, 1995).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해, 그간 합의회의가 개최된 여러 국가들에서는 많은 평가 연구들이 진행되었고, 합의회의 개최기관의 내부 평가용 자료가 아닌 영어권 학술논문만도 10여편에 달할 정도로 상당한 연구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분석의 편의상 다소의 무리를 무릅쓰고 기존의 합의회의 평가 문헌들을 ▷ 합의회의의 과정 및 절차에 대한 평가 ▷ 합의회의가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 ▷ 합의회의 모델의 보편적 적용가능성에 대한 평가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과정과 절차에 대한 평가
 

합의회의의 준비과정과 진행절차에 대한 평가는 덴마크(Kluver, 1995), 영국(Durant, 1995; Lee, 1995; Joss, 1995), 네덜란드(Hamstra, 1995), 일본(와카마쓰, 1998), 미국(Sclove, 2000), 한국(김환석, 1999; 김두환, 2000b) 등에서 이루어졌다. 아래에서는 과정과 절차에 대한 평가 내용에서 각 나라마다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 주최기관의 공신력과 중립성 유지 여부

합의회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이다. 합의회의는 선별된 일반시민들이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외부로부터의 구속 없이 자유롭게 조사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이런 조사는 사회 속에 내재한 권력, 영향력 및 책임성의 문제를 포함하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시민패널은 또한 주어진 사안의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장래에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가치판단을 내리기를 요구받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반되는 여러 관점들의 경중을 저울질하는 평가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정치 과정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Durant, 1995).

합의회의가 지닌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합의회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주최기관 및 후원기관에 대한 신뢰성의 유지가 핵심적이다. 즉 주최기관과 후원기관은 공신력을 가진 기관 혹은 단체여야 하고, 합의회의의 주제와 관련해 엄정한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며, 진행 과정이 최대한 투명해야 한다. 만약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못한다면 합의회의 모델 그 자체의 유효성 자체가 위협받게 될 수 있다.

합의회의가 맨 처음 시작된 나라인 덴마크에서는 의회 산하에 설치된 덴마크 기술위원회가 자체 예산을 가지고 합의회의를 주관해 왔기 때문에 공신력과 중립성의 문제를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합의회의를 도입한 여러 나라들은 이와 같이 제도화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학계, 소비자단체, 비정부기구(NGO), 과학대중화조직 등 여러 부문 주체들이 단독으로 혹은 연합해서, 정부부처, 대학, 비영리재단 등의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합의회의를 개최했다. 따라서 후발 국가들의 경우에는 공신력과 중립성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며 이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와 관련해 1994년에 개최되었던 영국 1차 합의회의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사례에서는 여러 가지 진행상의 문제점 때문에 합의회의의 중립성에 대한 의문이 일각에서 다소 강하게 제기되었고, 따라서 중립성 유지를 위해 핵심적인 관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시사점을 이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Joss, 1995). <표 4>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식물 생명공학에 관한 영국 합의회의는 AFRC의 후신인 생명공학·과학연구재단(Biotechnology and Biological Sciences Research Council, BBSRC)이 재정지원을 하고 런던 과학박물관이 주최 실무를 맡아 개최되었다. 즉 생명공학 연구의 지원 및 육성을 주로 담당하는 기관과 '대중의 과학이해' 운동을 전개하는 기구의 계약을 통해 합의회의가 열렸던 셈인데, 생명공학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가진 환경운동 집단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이미 특정한 입장을 전제한 편파적인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문제는 합의회의 준비과정상에서 나타난 몇 가지 사건들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BBSRC는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주최 실무를 맡는다는 사실이 미처 알려지기도 전에 합의회의 계획을 2차례에 걸쳐 공표함으로써 마치 BBSRC가 합의회의의 주최기관인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조정위원회의 구성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는데, 생명공학에 대한 제한적 접근을 주장하거나 생명공학 이용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해온 단체의 대표가 조정위원회에 전혀 포함되지 않음으로써 구성 자체가 형평을 잃었다는 비난을 초래했다. 또한 영국 1차 합의회의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을 구성하는 '대중의 과학이해'라는 개념 자체의 모호함 ― 종종 일방적인 과학대중화와 동일시되기도 한 ― 도 합의회의에 대한 회의적 시선에 한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프로젝트 관리자를 비롯한 합의회의 실무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환경운동가들은 합의회의가 '생명공학 진흥책'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고 이런 시각은 일부 시민패널들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다.(주3)

한국의 합의회의는 상황이 이와는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주최로 '유전자조작식품'과 '생명복제'에 관해 열린 두 차례의 합의회의에서는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과민모, 현 시민과학센터)의 대표와 간사가 각각 프로젝트 책임자와 실무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당시 과민모가 과학기술정책에서의 시민참여 확대와 생명공학 연구개발에서의 안전과 윤리 확보라는 이중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무자들에게 갈등의 소지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공정성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다(김환석, 1999). 이는 2차 합의회의 때 일부 전문가패널과 시민패널의 문제제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김두환, 2000b). 이는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극히 부족한 한국의 현실에서 '균형잡힌' 정보 제공을 위해서는 오히려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지만, 합의회의의 성공을 위해 핵심적인 주최기관의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개선책이 요구된다고 여겨진다.
 

(2) 시민패널의 선발 과정

합의회의에서 시민패널의 역할은 두말할 필요없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시민패널은 합의회의 때 다룰 질문들을 선정하고, 질문들에 답할 전문가패널을 선별하며, 본회의 토론과정을 주도하고, 자체적인 숙의를 거쳐 스스로의 힘으로 최종보고서를 만들어내는 등 합의회의 전 과정을 이끌고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의회의가 전문가중심의 과학기술관련 의사결정에 대한 중요한 대안으로 인정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패널을 선발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앞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통계적 대표성을 확보하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가지 지표들을 기준삼아 다양한 견해들이 가급적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며, 특정 이해관계와 연관되었거나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이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합의회의의 시민패널 선발 과정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공평하게 포괄하는 데는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합의회의는 광고를 보고 자원한 시민들 중에서 패널을 선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선발된 시민패널이 높은 참여 의욕을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지만, 교육 수준이 낮고 태도가 덜 적극적인 사람들 혹은 신문이나 라디오 광고 등에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기울이는 사람들을 배제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Joss, 1995). 그 결과 선발된 시민패널들이 교육 수준과 같은 지표에서 보면 불가피하게 편중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간혹 공정성 시비를 일으키기도 한다.

덴마크의 경우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1990년대 중반부터는 무작위표집(random selection)에 의해 시민패널 후보 풀(pool)을 구성하고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응하는 사람들 중에서 시민패널을 뽑는 것으로 선발방식을 바꾸었다. 이를 통해 신문광고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고, 시민패널의 대표성을 상대적으로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Einsiedel et al., 2001; Joss, 2000). 합의회의를 도입한 상당수의 국가들(영국, 캐나다 등)이 신문광고를 통한 원래 모집 방법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몇몇 국가들은 시민패널 선발 방식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나름대로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원격통신과 민주주의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1998년 미국 합의회의의 경우, 무작위표집에 의한 1차 선발을 거친 후 다양한 인종, 연령, 교육 수준, 컴퓨터 사용 정도 등을 반영하기 위해 광고와 지역 시민단체들의 추천을 통해 추가로 패널을 뽑는 보완책을 두었고(Guston, 1999), 프랑스와 호주의 합의회의에서는 주최측이 시민패널을 뽑는 데 직접 개입하지 않고 외부의 리서치 회사에 선발 과정을 의뢰해 공정성 시비를 피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다(Einsiedel and Eastlick, 2000). 한국의 1차 합의회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신문광고를 통해 시민패널을 모집했지만 구성상의 편향을 피하기 위해 시민단체들의 추천을 받아 추가로 패널을 선발하는 과정을 거쳤다(김환석, 1999).
 

(3) 전문가패널의 선정 과정

전문가패널은 본회의 첫째날 시민패널이 선정한 문제에 답하고 둘째날 시민패널의 반대심문에 응해 토론을 벌이는 역할을 맡는다. 합의회의에서는 시민패널에게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전문가패널의 선정 역시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전문가패널의 선정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로 여기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합의회의 과정 자체에서 발생하는 딜레마가 있다. 즉, 전문가패널에 요구되는 자질 ―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겸비 ― 을 갖춘 다양한 입장의 전문가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일찍 전문가들과 접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시민패널이 전문가패널의 선정 과정에 최대한 관여하기 위해서는 전문가패널의 최종결정을 가능한 한 뒤로 미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의 한 달 전에 열리는 2차 예비모임에 이르러서야 전문가패널의 윤곽이 잡히게 되는데, 이때쯤이면 후보가 될 만한 전문가들이 시간상의 문제 등으로 참여가 어려워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결국 합의회의 실무진이 본회의 직전까지 마땅한 전문가패널을 찾아 헤매는 일이 생겨나기도 한다(Joss, 1995). 한국 합의회의에서도 이와 흡사한 문제가 관찰되었는데(김환석, 1999),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전문가패널의 확보와 시민패널의 결정 권한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점이 찾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는 한국의 1, 2차 합의회의에서 공히 제기되었던 문제로, 해당하는 주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 전문가패널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이다(김환석, 1999).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전문가패널 구성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는데, 생명복제기술을 다룬 2차 합의회의의 경우 이에 긍정적 견해를 가진 패널들은 과학자, 의사, 변리사 등으로 세밀한 부분을 다루는 전문가들이었던 반면, 부정적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은 종교학자, 윤리학자, 철학자 등 인문학 전공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시민패널은 생명복제기술의 기술적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 없었고, 이런 한계는 결과보고서에도 반영되었다(김두환, 2000b). 이는 합의회의 모델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대항전문가(counterexpertise) 집단의 형성이 미약한 한국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앞으로의 비판적 과학기술운동을 통해 해결이 모색되어야 할 성격의 문제로 생각된다.
 

(4) 토론 진행의 문제

본회의 첫날과 둘째날 이루어지는 전문가패널과 시민패널간의 토론 및 전문가패널끼리의 토론은 최종 합의안의 도출을 위한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 것은 2차에 걸친 예비주말모임과 본회의 둘째날 밤에 이뤄지는 시민패널간의 내부토론일 것이다. 이 내부토론은 시민패널간의 토론과 숙의를 통해 패널 성원들간의 이견을 좁히고 합의안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인만큼, 그 진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모든 패널들이 균등하게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주의가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합의회의에서는 시민패널 촉진자를 두어 예비모임과 본회의에서 시민패널간의 내부토론이 패널끼리의 협동 속에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촉진자는 토론 사회를 통해 시민패널의 숙의 과정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해당 주제에 대해 잘 알거나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져서는 안되며 개입은 토론의 효율성 및 진행상의 절차에만 한정해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Grundahl, 1995).

이렇듯 촉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이들의 노력은 많은 경우 합의회의 개최 후 시민패널의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의 1차 합의회의에서는 촉진자와 시민패널간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는데 많은 시민패널 성원들은 촉진자가 토론 과정에 지나치게 많이 개입한다고 느꼈다. 나중에 시민패널은 합의회의 주최 및 후원기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결국 본회의 둘째날 밤의 토론에서 촉진자를 배제한 채 자신들만의 힘으로 토론과 보고서 작성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시민패널은 투표를 통해 패널 중 한 사람을 사회자로 뽑아 토론을 진행했다(Lee, 1995). 이는 합의회의 전체의 공정성, 중립성을 인정받기 위해 토론에서의 효율성과 공평성을 다소 희생하고자 한 시민패널의 자구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시민패널 중 한 사람은 합의회의 모델에서 촉진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Durant, 1995; Joss, 1995).

반면 한국 합의회의의 경우에는 예산상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전문적인 토론사회자를 촉진자로 위촉하지 못했다. 대신 예비모임과 본회의 사회는 프로젝트 책임자가 겸했으며, 본회의 둘째날, 세째날의 시민패널 내부토론에서는 패널 중 한 사람이 토론 사회를 맡았다. 토론 과정은 대체로 큰 무리없이 진행되었으나, 토론 말미로 가면서 논쟁이 가열되자 특정한 패널에게 발언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부분적으로 전문적인 토론사회자의 부재에서 비롯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앞으로 열릴 합의회의에서는 촉진자의 역할에 대한 고려가 더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김두환, 2000b).
 

2) 영향에 대한 평가
 

합의회의가 실제로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 역시 여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행해졌는데, 덴마크(Kluver, 1995; Joss, 1998), 네덜란드(Glasmeier, 1995; Mayer et al., 1995), 미국(Guston, 1999), 캐나다(Einsiedel & Eastlick, 2000), 한국(김두환, 2000a; 2000b) 등이 그런 예들이다. 앞서 다룬 과정 및 절차에 대한 평가가 합의회의를 준비할 주최측 실무자들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이제부터 다룰 합의회의의 영향에 대한 평가는 합의회의가 정책분석도구이자 시민참여제도로서 갖는 유효성에 대한 평가로 합의회의의 개최를 검토중인 정책결정자들에게 요긴한 정보라고 할 수 있겠다.

합의회의가 미친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 가지 지점에 대한 합의가 전제될 필요가 있다. 즉, 합의회의는 그 자체로 정책결정(decision making) 과정은 아니며 이를 위한 정책분석(policy analysis)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는 합의회의와 같은 참여민주주의적 제도 틀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것이라는 지적과 서로 맥락이 통하는 것으로, 상당수의 학자들이 공유하는 입장이다(Guston, 1999; Joss, 2000).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이 글에서는 이런 입장에 근거해 평가 작업을 진행한다.

합의회의의 영향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인 정책분석 과정에 대한 평가에 비해 좀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합의회의는 전통적 정책분석에서 간과하는 학습, 대중적 논쟁, 시민참여 등에 방점을 둔 제도적 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다양한 평가 방식이 그간 제안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 중 가장 포괄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거스튼(David Guston)의 틀을 따르도록 하겠다. 거스튼은 통상의 분석 틀을 확장해 평가를 위한 네 개의 범주를 구성했는데, i) 합의회의 결과가 관련 정책에 미친 실질적인 영향, ii) 정책 엘리트(공직자, 정치인, 과학자 등)의 사고방식 일반에 미친 영향, iii) 엘리트 참여자들(전문가패널, 조정위원회, 주최측 실무진 등)에게 미친 영향, iv) 시민지식과의 상호작용 및 일반시민들(시민패널과 참여하지 않은 시민 모두 포괄)에게 미친 영향이 그것이다.
 

(1) 실질적 영향

합의회의가 정책 결정에 미친 실질적 영향에 대한 평가는 네 가지 범주 가운데 가장 알기 쉽고 간단하다. 즉, 시민패널이 작성한 최종보고서에서 제시된 정책제안들이 얼마나 실제 정책에 법률, 자금지원, 규제지침 등을 통해 반영되었는가를 판단해 보면 되기 때문이다.

의회 산하의 기술영향평가 프로그램으로 합의회의가 제도화되어 있는 덴마크의 경우, 일부 주제들에서 이와 같은 실질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덴마크 의회는 1989년에 열린 '인간 게놈 연구'에 관한 합의회의 결과를 받아들여 고용 혹은 보험에서 유전자검사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했고 이는 몇 차례의 검토를 거쳐 1996년에 법으로 통과되었다. '농업과 산업에서의 유전공학 적용'에 관한 1987년의 합의회의는 의회가 '생명공학 연구 프로그램'(1987-1990)에서 동물에 대한 유전자조작에 대해서는 자금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의회 속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방사선조사식품을 다룬 1989년 합의회의 역시 의회가 이를 반대하는 정책을 채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Kluver, 1995; Joss, 1998).

그러나 이상의 몇몇 사례들을 제외한다면, 합의회의를 도입한 여타 국가들에서 합의회의가 정책 결정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 경우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단 한 차례의 정책분석을 통해서 그런 영향이 달성되기는 대체로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며, 많은 경우 합의회의의 주최기관이 정책결정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아닌 시민패널간의 학습을 합의회의의 일차적인 목표로 상정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Guston, 1999: 462).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영향의 측면은 합의회의의 성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설사 그것이 주된 목표가 아니더라도 정책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참여자들 ― 시민패널, 전문가패널, 조정위원회, 주최 실무진을 모두 포함하는 ― 의 동기부여가 매우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캐나다, 한국 합의회의 등에서는 실질적 영향의 부재(혹은 불가능)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시민패널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합의회의의 주최기관은 가능한 한 시민패널의 보고서 내용을 정책결정에 구체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한다.

▷ 주제의 크기: 주제가 지나치게 포괄적인 경우에는 정책결정자의 구체적인 요구에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원격통신'에 관한 미국 합의회의).
▷ 주제의 시의적절성: 해당 주제에 관한 사회적 논쟁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어 있는지, 의회 등의 정책결정기구에서 그와 관련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지 등의 문제가 중요하다(네덜란드의 1, 2차 합의회의 비교). 가능하면 이런 점들을 고려해 합의회의 주제와 개최 시기를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 최종보고서의 논조: 중요한 쟁점에 관해 시민패널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언론이나 정책결정자의 주의를 끌 가능성이 낮아진다(한국의 1, 2차 합의회의 비교).
▷ 정책결정기구와의 연결통로 확보: 합의회의 결과의 정책반영을 위해서는 주최기관이 정책결정기구와 제도적 연결을 갖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덴마크 합의회의).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정책결정기구 내에서 호의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과의 연결통로를 만드는 것도 차선책으로 고려해 볼 만하다.

(2) 정책 엘리트의 사고방식 일반에 대한 영향

합의회의가 정책 엘리트(합의회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합의회의와 관련된 주제에 실질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의 일반적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은 앞서의 경우보다 훨씬 모호하고 측정하기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책에서의 의제 선정, 구사되는 어휘, 문제 틀 설정 등에서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하는 것인데, 특히 정책결정에 있어 시민참여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평가가 흥미를 자아낸다.

객관화된 지표로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합의회의를 개최한 많은 국가들에서 정책결정에서의 시민참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정책 엘리트 사이에서 상당한 정도로 나타나고 있음이 관찰되었다. 이는 덴마크, 영국, 캐나다 등에서 고위급 공직자 및 국회의원들이 합의회의 본회의를 참관한 후 마지막 날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시민패널 보고서에 대해 논평을 하기도 하고 종종 평가 모임에까지 참여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합의회의가 끝난 후에는 정부부처 내에서 시민패널 보고서를 놓고 토론을 벌인 경우(영국)도 있었고, 해당 정부부처에서 시민패널 혹은 합의회의 실무진을 초청해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다(캐나다). 또한 유사한 시민참여 움직임이 앞으로 있을 때 비영리재단이 지원을 검토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경우(미국)도 있었다. 캐나다의 경우 1999년 3월 식품 생명공학에 관한 합의회의가 끝난 지 몇 개월 후에, 시민패널 중 한 사람이 국가 생명공학 정책을 감독하고 조언을 제공하는 국가자문기구인 캐나다생명공학전략자문위원회(Canadian Biotechnology Strategy Advisory Committee)의 위원으로 위촉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Joss, 1995; Einsiedel and Eastlick, 2000; Guston, 1999; Einsiedel et al., 2001). 이에 비하면 한국의 정책 엘리트의 인식 변화는 상대적으로 미미하고 실망스러운 수준이다(김환석, 1999).

정책 엘리트의 인식의 변화를 가장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곳은 물론 덴마크일 것이다. 조스(Simon Joss)는 덴마크 의회 의원 전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1995.10)와 소속 정당이 다른 5명의 의원에 대한 심층 인터뷰(1994-1996)를 통해 합의회의에 대해 이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조사했다(Joss, 1998). 그 결과 설문에 참여한 절반 가량의 의원들 중 75%가 합의회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고 58%는 세부 주제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37%는 합의회의에 1번 이상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합의회의 보고서를 경우에 따라(59%) 혹은 항상(21%) 읽었고, 70% 이상이 이를 의회에서의 논쟁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용했으며, 75%는 합의회의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합의회의에 대한 이러한 높은 인지도와 지지는 소속 정당에 무관하게 나타났는데, 불과 10여년 전 덴마크 기술위원회 설립안이 9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의회에서 통과되었음을 감안해 본다면 인식의 변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의원들에 대한 심층 인터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3) 엘리트 참여자들에 미치는 영향

합의회의 과정은 전문가패널, 조정위원회, 주최 실무진 등의 "엘리트 참여자"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런 엘리트 참여자들은 합의회의를 통해 자신이 배운 것을 이후의 정책 활동 속에 통합시킬 기회를 가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들이 무엇을 학습했는가를 평가에서 비중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엘리트 참여자들의 경우 이미 합의회의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합의회의에서 내용적 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상대적으로 작다. 반면 시민참여의 과정에 대한 절차적·성찰적 학습은 크게 나타났는데, 이는 미국과 캐나다 합의회의에서 실시한 전문가패널 대상 설문과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합의회의 이전에는 과학기술 영역에서 효과적인 시민참여가 가능할지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시민패널과의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의구심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당수의 엘리트 참여자들은 시민패널의 활동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심지어 감정적으로 상당히 고양되기까지 했다. 그들은 시민패널의 "사고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자신들의 생각에 대한 사고와 깊이에서 놀라울 정도의 정교화를 이루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민주적 정책결정의 패러다임 전환의 가장 근본적인 일부분"을 이룬다고 보았고, 그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던 퇴역 사업가와 소수민족 꼬마아이가 함께 토론하는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부른 참여자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상아탑을 빠져나와"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관심사를 듣고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독특한" 경험이었다며 이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Guston, 1999: 468; Einsiedel and Eastlick, 2000: 336).

그렇다면 한국 합의회의의 경험은 어떨까?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된 탓일지도 모르지만, 합의회의를 통해 드러난 것만 보면 한국의 전문가들은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서구의 경우보다 덜 적극적이고 더 권위적인 측면이 강함을 엿볼 수 있다. 전문가패널의 경우 "합의회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자리이지 자신들이 배워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드러내 보였고, 심지어 '합의회의 과정을 통해 견해, 태도, 지식이나 가치가 변화한 것이 있는가'라는 평가자의 설문문항에 대해 자신들에게 할 질문이 아니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해 조사 자체가 무산되기까지 했던 것이다(김두환, 2000a). 이는 '서구보다 더 서구적인' 한국 전문가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생각된다.
 

(4) 시민지식과의 상호작용

마지막으로 합의회의가 일반시민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는 네 가지 범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두말할 나위없이 합의회의가 시민패널간의 토론과 숙의를 통한 합의의 도출을 일차적인 목표로 해서 열리는 행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시민들에 미친 영향은 시민패널에 대한 영향과 합의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시민들에게 미친 영향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합의회의에 참여한 시민패널의 경우, 합의회의에서 다루어진 주제에 대한 내용적 학습뿐만 아니라 정책결정 과정과 그 속에서의 시민의 역할에 대한 절차적·성찰적 학습이 모두 높게 나타났다. 이런 여러 층위의 학습을 통해 시민패널은 원래 가지고 있던 해당 주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찬반의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과 역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짐과 동시에 훨씬 더 균형잡히고 폭넓은 쟁점을 고려한 판단을 내리는 쪽으로 이동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캐나다에서 열린 식품 생명공학에 관한 1999년 합의회의의 시민패널에 대한 조사 결과는 이를 잘 보여 준다(Einsiedel and Eastlick, 2000). 먼저 1차 예비모임이 열리기 전 시민패널에 "식품 생명공학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시민패널의 답변은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모호하면서도 전형적인,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었다.

실험실에서의 주입, 바늘, 마분지 상자에 담긴 토마토, 소 성장 호르몬, 더 크고 수확은 좋지만 맛은 없는 잡종 식물, 합성 화학물질

거대한 기형 과일과 채소

배양 접시, 실험복을 입은 사람들, 유전물질을 옮겨넣기 위한 주사기

킬러 토마토

변종 동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 두렵다!(p. 334)

나는 최근의 발전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특히 생명공학에 대한 국제적 반응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합의회의 과정을 통해 나는 캐나다의 식품 규제 체계와 유전자조작식품을 섭취했을 때 안전한지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수의 다국적기업들이 생명특허를 통해 생명공학 산업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해 온 것, 그리고 생명공학이 환경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더 불안하게 느끼게 되었다(p. 335).

나는 이 문제를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합의회의에 처음 참여했을 때 내가 갖고 있던 많은 우려들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나는 다른 걱정거리를 안고 있다. 나는 우리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는 전문가들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 수준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시민참여가 너무나 핵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p. 337).

여기서 주의깊게 보아야 할 점은 C2, 즉 시민패널에도 속하지 않고 회의에도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합의회의 이후 관련분야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이 증가하였다고 보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합의회의가 시민패널로 참여한 사람은 물론이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일정한 학습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합의회의가 참여하지 않은 일반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겠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왜냐하면 비록 합의회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의 수는 10여 명 가량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시민패널이 이끌어낸 합의안이 기자회견과 최종보고서의 형태로 널리 확산됨으로써 일반시민 사이에 광범한 토론과 논쟁을 유발해 간접적인 '참여의 확대'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합의회의에 대한 언론보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덴마크에서 개최된 합의회의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아, 본회의 첫날과 마지막 날에 대해서는 TV 및 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의 취재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며, 통상 100여 건 이상의 뉴스보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Kluver, 1995). 영국 1차 합의회의의 경우, 합의회의 결과에 대한 TV 보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보도 양은 이와 유사한 정도였다. 앞서 언급했던 조스의 연구는 언론보도의 결과로 합의회의와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인지도가 실제로 높아졌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덴마크에서 열린 1995년의 유전자치료 합의회의가 열리기 4주 전과 4주 후에 각각 1000명씩의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합의회의의 인지도(17%에서 21%로 4% 상승)와 합의회의 주제인 유전자치료에 대한 인지도(61%에서 66%로 5% 상승)가 모두 상승했음을 볼 수 있었다(Joss, 1998).

그러나 합의회의를 개최한 모든 국가들에서 반드시 이 정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다. 1999년 캐나다 합의회의와 네덜란드의 1, 2차 합의회의의 경우 각각 50여 건 정도의 언론보도가 이뤄진 것으로 조사되었으며(Einsiedel and Eastlick, 2000; Glasmeier, 1995), 한국 합의회의의 경우 구체적인 보도 건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횟수는 이보다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김환석, 1999). 이 때문에 상당수의 합의회의에서 주최 실무진과 시민패널로부터 언론보도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종종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는 합의회의의 개최 시기, 주제의 시의적절성, 해당 국가의 정책문화, 주최기구의 홍보전략 등이 언론보도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주4)
 

3) 합의회의 모델의 보편적 적용가능성에 대한 평가
 

마지막으로 여러 국가들의 합의회의 경험에 대한 간단한 비교평가를 해보도록 하겠다. 합의회의는 한두 국가에서만 주로 시행되어 온 여타의 실험적 시민참여 제도들과는 달리 대단히 다양한 문화권에서 여러 차례 개최된 바 있고, 이는 비교평가를 위한 좋은 조건을 제공한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합의회의 도입을 처음 시도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합의회의 모델이 덴마크가 아닌 다른 정치적·제도적·문화적 환경에서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상당히 강했다. 회의적 시각을 가진 정책연구자들은 합의회의가 유럽에서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사회적 합의의 정치사회적 전통이 강한 나라들에서 가장 활발하게 개최되어 온 점을 들어,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규모가 크고 사회적 갈등이 정치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합의회의의 성공적 개최가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 점은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시민참여의 전통 자체가 불과 10여 년으로 극히 일천한 우리의 상황에서 합의회의가 과연 유효한 정책도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주최 실무진들조차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합의회의 모델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성공적으로 개최됨에 따라 합의회의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은 이제 상당히 수그러든 것으로 생각된다.(주5)

이런 사실은 유전자조작식품이라는 같은 주제로 거의 같은 시기(1999년 3월)에 열렸던 캐나다, 호주, 덴마크 합의회의의 진행과정과 시민패널 보고서를 비교분석한 최근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Einsiedel et al., 2001). 이 연구에 따르면, 각기 다른 세 대륙에 위치한 세 국가에서 개최된 합의회의는 다양한 국가적·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도 제역할을 해냄으로써 합의회의 모델의 적응성이 뛰어나다("travels well")는 점을 잘 보여 주었다. 세 국가의 시민패널들은 각각이 처한 독특한 상황을 반영해 서로 조금씩 다른 측면에 관심을 가졌고, 최종보고서에서도 GMO에 대한 태도, 규제기구에 대한 신뢰, 무역조약과 같은 국제적 제약의 고려, 유기농 등의 대안에 대한 고민 등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패널은 식품안전, 생명특허, 제3세계, 환경에 대한 영향 등 비슷한 질문들을 선정했고 이들 각각에 대해 대체로 조심스러운 접근을 강조하는 등 일반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우려를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이는 합의회의가 다양한 맥락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모델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5.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합의회의는 그 속에 참여하는 시민패널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는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한편으로, 시민패널의 토론과 숙의를 통해 만들어진 최종보고서의 대중적인 유통을 통해 정치권과 일반시민들에게도 토론과 논쟁을 확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모델이다. 참여를 통해 나타난 일반시민의 지식과 통찰은 종종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되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는 다시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 정책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물론 합의회의는 적용가능한 주제, 세부 절차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불완전한 시민참여 모델이며, 그 속에 내재된 문제를 보완하고 해결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합의회의의 신규도입과 추가 개최를 검토중인 여러 국가들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회의는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통해 다양한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작동가능한 모델임을 이미 상당부분 입증했으며, 이는 앞으로의 더 많은 적용과 탐색을 위한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각   주 >

(주1) 이 절에서의 서술은 Grundahl(1995)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주2) 영국 1차 합의회의는 합의회의 개최 준비에 들어간 시점부터 실제 개최까지 걸린 시간이 1년 6개월 가량으로 상당히 긴 편에 속한다. 덴마크의 경우에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1, 2차 합의회의의 준비 및 진행일정에 관해서는 한재각(2000)을 참조.

(주3) 영국 1차 합의회의에 대한 영국 내 좌파 쪽으로부터의 비판으로는 Barns(1995), Purdue(1996) 참조.

(주4) 언론보도의 횟수 못지않게 언제 언론보도가 이뤄지는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캐나다의 경우 합의회의 개최 이전(4%) - 본회의 기간(32%) - 최종보고서 발표 직후(64%)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도 건수가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영국은 언론보도가 합의회의 개최를 알리는 기자회견 때 정점에 달했다가 이후에는 오히려 감소했다.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시민패널이 작성한 최종보고서보다 오히려 전문가 워크샵이나 전문가패널의 발표에 언론이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보고되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일반시민의 토론과 숙의를 위한 장으로서 합의회의가 갖는 의미를 축소시킬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주최기구의 홍보전략에서 비중있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주5) 물론 국가마다 합의회의가 동일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덴마크식 합의회의 모델을 근간으로 하긴 하지만, 각각의 합의회의들은 해당 국가의 실정과 현실적인 제약에 맞추어 원래 모델을 나름대로 변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앞서 설명했던 시민패널 선발방식이나 시민패널 촉진자 운영방식 등에서의 차이가 그런 예들이며, 일본의 1차 합의회의는 참가자들의 시간 사정을 감안하여 예비주말 없이 본회의만 3번의 주말에 나눠 진행하기도 했다(와카마쓰,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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