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일반대중의 일상생활에 다양한 측면에서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 지식과 실행, 그리고 그것의 연구개발과 규제를 둘러싼 정책결정은 대중의 즉각적인 이해(理解)와 영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데 위치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은 과학자·정책전문가·기업 고위층 등을 포함하는 이른바 '정책엘리트'들이 내린 결정에 따라 전문 과학기술자들이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것이 지배적인 상황이며, 대중은 그 속에서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수동적인 수용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을 뿐이다.

대중과 과학기술간의 이와 같은 '괴리'에 심각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 인식의 등장에는 몇 가지 배경이 존재하는데, 먼저 1960년대 이후 과학기술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적 논쟁을 통해 점차 부각됨에 따라 과학기술의 진보가 자동적으로 인간의 복지를 보편적으로 증진시킨다는 식의 낙관이 깨어졌고, 이것이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대중의 각성과 개입을 불러왔다는 점이 중요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참여민주주의 논의는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기본적인 환경을 형성하는 데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과학기술 영역 또한 민주주의의 적용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주1) 이런 배경 하에서 '시민참여를 통한 과학기술의 민주적 재구성', 즉 '과학기술 민주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다(김환석, 1999a).

서구의 경우에는 대략 1970년대 말경을 기점으로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논의가 활성화되고 여러 제도적 실험이 시작되었던 데 반해, 한국에서의 과학기술 민주화 논의 및 실천은 이제 맹아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지난 2-3년 동안 과학기술 민주화, 혹은 '시민과학론'의 이론적·실천적 근거와 실제 적용 사례들을 제시한 여러 글들이 국내에서 출간되었으며(김환석, 1999a; 이영희, 2000; Sclove, 1999), 이와 맞물려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구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를 중심으로 그런 문제의식에 입각한 실천활동도 조금씩 전개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일천한 역사 탓인지, 과학기술 민주화 논의는 국내에서 아직 대중적으로 썩 널리 알려진 편이 못될뿐더러, 설사 그 개념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은 과학기술 민주화의 개념 자체가 갖는 포괄성과 다의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 개념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과학기술 민주화의 개념을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시론적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과학기술 민주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정의내리기보다는, 필자가 그간 시민과학센터 활동을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들어보았던 과학기술 민주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몇 가지로 정식화해 이를 비판하고 또 반추해 보는 식으로 글을 전개해 나갈 생각이다. 이런 '간접적인' 방식을 택한 이유는, 과학기술 민주화의 개념과 제도들을 잘 소개한 글들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 민주화는 …이 아니다"라는 식의 서술을 통해 오히려 과학기술 민주화의 의미와 외연이 분명해질 수 있다고 필자가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명제는 크게 다음의 4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 "과학기술은 민주화의 대상이 아니다" 혹은 "과학기술 민주화는 위험한 발상이다"
 

과학기술 민주화는 과학기술의 산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받는 일반대중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적·정책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한마디로 말해 '시민참여'가 가장 기본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과 정책전문가들은 시민참여의 대의가 무엇인가 ― 즉, 시민참여가 어떠한 근거에서 정당하며 또 필요한가 ― 와 무관하게, 과학기술 영역에 대한 '의미있는' 시민참여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 이유는 과학기술관련 쟁점들에 내포된 과학 이론이나 기술적 세부사항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정책결정에 수반되어야 하는 장기적 안목을 일반대중이 결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일반대중에게 맡기면 교실에서는 진화론이 아닌 창조과학만을 가르치게 될 것이고, 영구기관 개발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될 것이며, 검증되지 않은 '돌팔이' 의료행위들이 창궐하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다분히 협박조인 과학자들의 인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뿌리가 깊은, 다분히 편견섞인 사고방식이다. 과학기술 민주화는 우선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완전한 배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가진 전문지식(expertise)과 그에 입각한 견해는 여전히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된다. 다만 과거와 같이 전문가들의 견해가 바로 사회 전체가 취해야 할 방향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견해차이 ― 전문가들간의 견해차이일 수도 있고, 전문가와 일반대중간의 견해차이일 수도 있는데 ― 를 '민주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과학기술 민주화는 전문가와 일반대중, 어느 한쪽의 배제가 아니라 이들간의 상호작용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 민주화가 전제하는 참여의 주체로서의 '시민'은 통상적인 설문조사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피상적인 여론의 담지자가 아니라 '충분한 정보와 균형잡힌 견해를 제공받은(informed)'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는 주체로 상정되어 있다는 점이다(김환석, 1999b). 흔히 '정보의 홍수'로 표현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의 경우, 설사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쟁점에 대해 다양한 정보와 견해를 충분히 접해보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그 이유로는 편향된 과학 보도, 과학기술 쟁점의 '난해함', 무관심 등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과학기술 민주화는 균형잡힌 정보와 견해에 근거한 일반시민의 참여 및 의사결정을 추구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주2) 특정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시민이라고 할지라도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면 복잡한 쟁점을 이해하고 숙의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도출해 낼 수 있음은 여러 차례의 합의회의 등에서 잘 드러난 바 있으며, 이는 앞 장의 말미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2. "과학기술 민주화는 반과학적이다"
 

이 역시 과학기술 민주화를 비난하는 전형적인 수사(修辭)에 속한다.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실천은 종종, 충분한 숙고와 사회적 합의 과정 없이 과학계나 정책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사회 전반에 위험 혹은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특정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반대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지난 수년간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수행해 온 생명공학 관련 활동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중단은 곧 경쟁력의 상실이자 진보의 중단을 의미한다고 맞서면서, 이는 (심층생태주의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 일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극단적인 반과학적(anti-science) 성향의 표출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간혹 이런 주장은 서구에서 지난 수년간 진행되어 온 '과학전쟁(Science Wars)'(주3)의 대립구도와 겹쳐지면서, 과학학 연구에서의 특정 입장을 비난하는 것과 맞물려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글에서 이미 잘 지적되었듯이(이영희, 2001), 특정 과학기술을 반대하거나 비판한다고 해서 바로 반과학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모든 과학기술을 찬성하거나 모든 과학기술을 반대하는 단 두 가지의 선택만이 존재한다는 식의 흑백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과학기술이 근본적으로 선하다(혹은 불가피하다)거나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식의 본질주의적·운명론적 사고의 귀결인 셈인데, 그런 점에서 볼 때 과학기술 민주화는 과학기술에 대한 본질주의적 사고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오히려 과학기술 민주화는 과학기술의 민주적·생태적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믿고, 시민지식의 투입이 이 재구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본질주의적 사고와는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하겠다.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은 찬·반으로 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특정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제기를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식의 문명 거부와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모든' 과학기술이 아닌 '특정'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제기는 많은 경우 과학자들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며, 이는 종종 과학계 내부의 논쟁으로 비화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3. "기술의 민주화지, 과학의 민주화는 아니다"
 

이제 이 명제부터는 상당한 주의를 요하는, 다소 미묘한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어 차분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 민주화 논의에서 상당히 자주 나타나는 대응 중 하나는,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 이 중 기술의 민주화는 말이 되지만 과학의 민주화는 가능하지도 않으며 용인될 수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즉, 과학은 기본적으로 "사실에 대한 설명"인 반면 기술은 "인간 생활에 유용"할 것을 목적으로 "지식을 응용"하는 것으로 서로 엄격하게 구분되는 개념이며, 이 둘을 섞어 '과학기술'이라고 부르면서 '과학기술 민주화'를 주장하는 것은 개념상의 혼동에 기반한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이문웅, 1998; 이덕환, 2001).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과학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과학 이론을 결정하는 것을 국민투표를 통해 할 수는 없"으므로 과학의 민주화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Levitt & Gross, 1994).

이 입장은 과학기술 민주화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입장으로부터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일반대중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기술적' 결정에 대한 시민참여의 의의를 대체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앞의 1이나 2의 입장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입장은 20세기 들어 과학활동에 일어난 일련의 중요한 변화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여기서의 논점과 관련해 필자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우선 2차대전 이후 현재까지의 과학은 그 이전과 같이 개별 연구자들이 주머니돈을 털어서, 혹은 '독지가'의 후원에 힘입어 소규모의 연구를 수행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계적으로 조직된 연구자집단이 값비싼 기자재를 이용해 대규모의 연구를 수행하는 거대과학화 경향을 보여 왔다(임경순, 1995). 이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세금에 기반한 공공자금의 이용을 전제로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시민참여의 정당한 근거가 생긴다고 볼 수 있다(입자가속기, 허블 우주망원경, 슈퍼컴퓨터 등을 이용하는 거대연구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보통의 이공계대학 실험실의 예만 들더라도 과학 연구에 얼마나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거대과학 연구의 경우에는 관련 분야의 과학자들이 거의 대부분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통상적인 동료심사(peer review) 과정이 무의미하게 되고 연구방향 설정이나 연구비의 지원 여부가 정치적 상황과 로비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만약 제도권 정치기구들 ―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군부나 다국적 거대기업에 이르기까지 ― 이 과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실제로도 미쳐 왔다면 시민이 과학 연구개발의 우선순위 결정에 참여해서는 안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Kleinman, 1995)

이어 둘째로, 앞서 1부에서도 얘기했듯 과학과 기술을 여전히 서로 구분되는 활동으로 봐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20세기 들어 적어도 몇몇 분야에서는 이 둘간의 거리가 현저하게 좁혀져 왔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리가 좁아지는 분야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가장 극적인 예로는 2차대전기의 원자탄 개발과 전후 양심적 물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된 반핵군축 활동을 들 수 있다. 원자탄 개발에 물리학자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텔러(Edward Teller) 같은 물리학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하면서 수소폭탄 연구를 계속 진행한 반면, 질라드(Leo Szilard)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비롯한 상당수의 물리학자들은 책임을 느끼면서 무기 연구에서 손을 뗐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이런 논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과학연구와 기술개발 사이의 좁아진 간극을 다소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송성수, 1999).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이후의 생명공학처럼 연구와 개발 사이의 간격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 단적인 예로 과학연구의 결과가 바로 특허출원의 대상이 되는 ― 분야가 등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1970년대의 DNA 재조합 논쟁은 과학연구의 결과물이 인근 지역사회에 직접 위험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례가 되었다(Krimsky, 1992). 따라서 과학과 기술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과학의 민주화가 불합리함을 보여주는 반대 증거로는 충분치 못함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고 싶은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책수립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과학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 혹은 '정책을 위한 과학(science for policy)'을 과학 '그 자체'와 구분해, 이 중 전자를 훨씬 더 큰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파악하는 일련의 시도들이다(Schneider, 2000). '정책을 위한 과학'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추정치를 얻고자 하는 정책수립자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종종 불완전한 데이터,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요인들의 존재, 시간적 제약 등에 의해 제한을 받는, 다분히 주관적인 성격이 강한 영역이다. 예컨대, 이른바 '온실가스'가 과연 지구온난화 현상의 원인인지, 만약 그렇다면 지구 평균기온 상승 중 얼마만큼이 온실가스 탓이고 앞으로 기온은 얼마나 더 상승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온실가스 감축 규제조처가 필요한지와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지구의 기후-생태시스템이라는 극히 복잡한 계를 취급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고도의 불확실성이 개입하며 어떤 모델링 기법을 채택하고 얼마나 많은 변수를 고려할 것인가에 따라 전문가들마다 조금씩 ― 때로는 상당히 ―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는 힘들고, 특히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정치적 고려가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여기서 과학 연구와 관련된 쟁점에 관한 시민참여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하겠다. 불확실성을 이유로 온실가스 감축을 꺼리는 다국적기업 혹은 이들을 비호하는 정부에 대해, 미래에 닥칠 위험을 상대적으로 경감시키는 방향의 정책수립을 시민집단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4. "과학기술의 민주화가 아니라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가 맞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정리한 과학기술 민주화의 의의와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를 제기할 여지는 남아 있다. 예컨대 누군가가 필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말한 내용에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과학기술 민주화'의 내용을 따져보면 그것은 사실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가 아닌가. 그것을 '과학기술 민주화'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과학자들로부터 불필요한 공격 ― 앞서 인용했던, "과학 이론의 결정을 국민투표로 할 수는 없다"는 식의 ― 을 초래할 수 있다. 전문가집단이 지녀야 할 더 큰 책임성을 요구하고, 과학기술 연구개발 우선순위의 결정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자는 것이지, 과학기술 연구개발 그 자체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것은 아니니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주4)

이 충고에는 귀담아 들을 대목이 분명히 있고, 필자도 상당부분 그 내용에 공감을 하는 편이다. 글의 서두에서도 이미 말했듯 과학기술 민주화라는 개념은 그간 상당히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왔고, 적어도 필자가 아는 한 과학기술 민주화 주장을 하는 그 어떤 사람도 일반시민이 입자가속기를 이용하는 소립자물리학 연구를 할 수 있다거나 과학 이론의 진위를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식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적이 없음에도 마치 이런 주장이 과학기술 민주화의 핵심인 양 받아들여져 온 데는 개념상의 모호함도 한몫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민주화'라는 개념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 말이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라는 말로 포괄할 수 없는 뭔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뭔가'는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라는 말 속에는 대니얼 클레인맨(Daniel Lee Kleinman)이 언급했던 '지식생산의 민주화'라는 차원을 포괄하기 어렵다. 클레인맨은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과학정책의 민주화와 지식생산의 민주화라는 두 차원으로 나누면서, 이 중 후자가 과학자의 자율통치(scientist self-governance)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과학기술 민주화의 보다 진전된 단계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는 후자의 예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워번(Woburn)의 주민들이 그 지역에 빈발하는 백혈병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 수행했던 대중 역학(popular epidemiology) 연구와 1980년대 후반 AIDS 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에 기반해 AIDS 치료법의 조기 발견을 위해 분투했던 AIDS 치료 활동가들(AIDS treatment activists)의 노력, 두 가지를 제시한다(Kleinman, 2000). 이 두 가지 사례에서는 흔히 과학자들의 독점적인 영역으로 여겨졌던 연구방법론의 선택, 데이터의 수집, 임상실험의 실시 등을 이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시민들이 전문가들과 다른 관점에 기반해 직접 해냈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와 같은 사례들은 아직 그 수가 많지 않고 환경, 보건 등과 관련된 몇몇 분야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 민주화가 단지 '정책'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일반인 지식(lay knowledge)이 과학지식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는 충분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는 조금 궤가 다르지만, 과학상점(science shop)이나 참여설계(participatory design)에서 볼 수 있는 전문가와 일반시민의 만남과 상호작용 역시 과학연구의 의제설정, 방법론 선정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지적할 것은, 과학기술 민주화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과학자사회의 민주화'가 빠질 수 없다는 점이다. 과학자사회의 민주화는 여러 측면에서 추진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중 두드러진 것 몇 가지만 들어 본다면 ▲ 여성과학자에 대한 진입장벽과 처우상의 차별 철폐 ▲ 불리한 조건에 처한 집단(장애인, 저소득층 등)이 과학기술 교육을 평등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 보장 ▲ 대학원생, 박사후 연구원 등 청년·소장과학자들의 발언권 보장 ▲ 내부고발자(whistle-blower)에 대한 보호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런 내용들은 2000여명의 전세계 과학자, 정책수립자 등이 참여해 199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과학회의에서 채택된 두 개의 문서에도 중요한 과제로 언급되고 있다(과학기술부·유네스코한국위원회, 1999).

혹자는 '과학자사회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전적으로 과학자들의 몫이며, 시민단체와 같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은 부당한 것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자사회의 민주화'는 필자가 지금까지 언급한 과학기술 민주화 일반과 중요한 연관을 갖는 사안이다. 이는 전문직업으로서의 과학자집단이 사회에 더 큰 책임을 지도록 일반시민이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또 앞에서도 언급했듯,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해서는 과학자와 일반시민의 적극적인 협력이 요구되는데 과학자사회의 비민주성 ― 예컨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시민단체와 협력하는 과학자를 집단으로부터 '왕따'시키는 등의 ― 이 이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따라서 '과학자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과학자들 자신의 노력이 필수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외부로부터의 요구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기술 민주화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을 짚어 보았고, 이를 통해 왜 '기술의 민주화'만도, '과학의 민주화'만도,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만도 아닌 '과학기술의 민주화'여야 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하고자 했다. 결국 과학기술 민주화는 위험하고 반과학적인 발상의 산물이 아니며,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 '지식생산의 민주화', '과학자사회의 민주화' 등에 걸친 다양한 차원의 실천들을 그 속에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 이로부터 분명해졌으리라 믿는다.

우리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면, 한국에서의 과학기술 민주화 운동은 2차례에 걸친 합의회의의 개최, 생명공학감시운동의 활발한 전개, '과학기술기본법' 제정에 대한 대응, 공익연구운동의 제기 등 의미있는 성과들을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다양한 차원을 포괄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고 판단된다(김환석, 2001). 이는 앞으로의 운동 방향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제 한국의 과학기술 민주화 운동은 현재 충분치 못한 실천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으로,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지식생산의 민주화', '과학자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 민주화의 이론과 실천에 관심가진 모든 이들이 나누어 져야 할 몫일 터이다.
 
 
 

각주
 

주1) 참여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논의는 김대환(1997), 강정인(1997)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주2)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일반시민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그 정보가 반드시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더 많은' 과학지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정책결정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과학지식에 대한 숙지는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사회 속에 자리잡은 형태나 과학 연구가 실제로 수행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일 수 있다. 바꿔말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결정(informed decision)'을 위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형태의 과학대중화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주3) '과학전쟁'이란 전통적 과학관을 고수하는 과학자들과 사회구성주의적 과학관에 동조하는 과학사·과학철학·과학사회학자들간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1996년 '소칼의 날조(Sokal's hoax)' 사건을 계기로 크게 달아오른 바 있다. '과학전쟁'의 진행과정과 그 속에 내포된 쟁점들에 대한 분석으로는 홍성욱(1999)를 참조할 수 있다. 최근(2001년 4월 27-28일) 한림대에서 열렸던 '과학전쟁' 대토론회에서 발표된 여러 글들을 구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주4) 이와 유사한 입장을 홍성욱(2000)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강정인, 「대안민주주의」, 참여사회연구소 편, 『참여민주주의와 한국 사회』, 창작과비평사, pp. 49-75.

과학기술부·유네스코한국위원회 (1999), 「과학과 과학적 지식의 이용에 관한 선언/과학의제-행동강령」.

김대환 (1997), 「참여의 철학과 참여민주주의」, 참여사회연구소 편, 『참여민주주의와 한국 사회』, 창작과비평사, pp. 15-48.

김환석 (1999a) 「과학기술의 민주화란 무엇인가」,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 편, 『진보의 패러독스』, 당대, pp. 13-41.

김환석 (1999b), 「시민참여를 실험하다 ― "유전자조작식품 합의회의" 체험기」,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 편, 『진보의 패러독스』, 당대, pp. 289-321.

김환석 (2001),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와 과학기술민주화운동」, ≪다른과학≫ 10호, 19-25.

송성수 (1999), 「현대 산업사회에서 과학기술자의 윤리」,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소식지 ≪자연과학≫ 7호, 57-63.

이덕환 (2001),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대토론회 "과학전쟁" 발표논문집, pp. 8-21.

이문웅 (1998), 「과학기술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던져주는 교훈 ―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경계한다」, ≪자연과학≫ 5호, 73-83.

이영희 (2000), 「과학기술과 시민참여」, 『과학기술의 사회학』, 한울, pp. 257-287.

이영희 (2001), 「"과학전쟁"과 사회적 구성주의: 비판적 검토」, 대토론회 "과학전쟁" 발표논문집, pp. 22-33.

임경순 (1995), 『20세기 과학의 쟁점』, 민음사.

홍성욱 (1999),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 ― '과학 전쟁'의 배경과 그 논쟁점」,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 문학과지성사, pp. 68-126.

홍성욱 (2000), 「과학기술의 민주화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성찰」, ≪경제와사회≫ 46호, 315-322.
 

Kleinman, Daniel Lee (1995), "Why science and scientists are under fire ― and how the profession needs to respond,"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September 29), B1-B2.

Kleinman, Daniel Lee (2000), "Democratizations of science and technology," D. L. Kleinman (ed.), Science, technology, and democracy,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p. 139-165.

Krimsky, Sheldon (1992), "Regulating Recombinant DNA Research and Its Applications," D. Nelkin (ed.), Controversy, 3rd ed., London: Sage, pp. 219-248. [국역: 「DNA 재조합 연구와 그 응용에 대한 규제」, ≪시민과학≫ 12호 (pp. 26-34), 13호 (pp. 5-11), 14호 (pp. 28-38)]

Levitt, Norman, & Gross, Paul (1994), "The perils of democratizing science,"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October 5), B1-B2.

Schneider, Stephen H. (2000), "Is the 'Citizen-Scientist' an oxymoron?" D. L. Kleinman (ed.), Science, technology, and democracy,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p. 103-120.

Sclove, Richard E. (1999),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중시되는 기술정치」,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 편, 『진보의 패러독스』, 당대, pp. 86-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