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 영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유전자조작(GM) 작물의 상업적 재배를 처음으로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환경부 장관인 마거릿 베킷은 이날 하원 의회에 출석해 GM 옥수수 1품종의 상업적 재배를 허용하는 한편 또다른 검토 대상이었던 GM 사탕무와 유채의 재배는 불허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배가 허용된 작물은 Chardon LL이라는 이름의 제초제저항성 GM 옥수수로 제초제 글리포시네이트 암모늄에 저항성을 갖고 있으며, 독일의 생명공학 기업인 바이엘 크롭사이언스(Bayer Cropscience)가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품종이다. 베킷 장관은 이 자리에서 "모든 GM작물의 무조건적 승인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GM작물을 무조건 금지해야 한다는 과학적 증거도 없다"며, GM 작물에 대한 규제는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 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GM 작물의 상업적 재배로 이르는 과정에는 아직 여러 겹의 장애물들이 가로놓여 있다. 먼저 해당 옥수수 품종을 경작하기 이전에 이를 국가 종자 목록에 등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며, 글리포시네이트 암모늄 역시 제초제로 공식 허가를 얻어야 한다. 이는 형식적인 절차일 수도 있지만, GM 작물에 대해 썩 호의적이지 않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지방 정부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빠르면 2005년 초부터 GM 옥수수의 상업적 재배가 시작될 수 있는데, 이를 경작하는 농부는 농장규모평가(아래 참조)에서 쓰였던 엄격한 관리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의 경작 허가는 2006년 10월까지만 유효하므로, 해당 기업이 기간 연장을 원하는 경우에는 경작 과정을 모니터해 나온 새로운 증거와 추가적인 과학적 분석을 제시해 허가를 갱신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제약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GM 작물에 문호를 개방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정에 이르기까지
 

2000년 이후 영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GM 작물의 상업적 재배를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숙고를 거듭하면서, 최종 결정에 참고하기 위해 다방면의 평가 및 자문 과정을 가동해 왔다. 우선 2000년부터 2003년까지 3년 동안 옥수수, 사탕무, 유채의 3개 작물을 대상으로 제초제저항성 GM작물이 농장의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농장규모평가(farm scale evaluation, FSE) 연구를 수행했다. 작년 10월 중순에 발표된 FSE 연구결과는 GM 옥수수가 통상작물에 비해 환경에 좀더 이로운 반면, GM 사탕무와 유채는 통상작물보다 환경에 좀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뒤섞인 결론을 내놓았다. 아울러 2002년 여름부터 2003년 가을까지는 GM 작물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GM dialogue' 과정이 GM 작물의 경제성 평가, 과학적 검토, 그리고 대중논쟁이라는 3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2003년 여름과 가을에 발표된 'GM dialogue'의 결과 중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GM 대중논쟁이었는데, 이를 통해 영국 국민들의 대다수가 GM 식품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으며 또 과반수를 훨씬 넘는 사람들이 GM 작물의 조기 상업화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국 정부는 베킷 장관의 발표에 앞서 The GM Dialogue: Government Response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해 이러한 일련의 자문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자문 과정이 법적 구속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처럼 서면으로 답변을 내놓은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이는 정부의 결정이 이러한 평가 및 자문 과정을 충분히 감안해 내려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가 GM작물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따라서 GM 대중논쟁에서 드러난 압도적인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재배 허용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그만큼의 명분쌓기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이번 결정에서는 GM 옥수수가 일반 옥수수보다 더 환경친화적이라는 FSE의 결과발표가 바로 그러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강력한 역풍
 

그러나 정부의 발표는 즉각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하원 의회의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의원들은 이런 결정을 내릴 바에야 GM 대중논쟁은 대체 왜 한 거냐며 베킷 장관을 압박했다. 환경부 장관을 역임한 마이클 미처(그는 애초에 FSE를 발족시켰던 장본인이다)는 정부의 결정이 과학에 의한 것도, 수요에 따른 것도, 대중의 견해를 존중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백악관을 등에 업고 있는 다국적 생명공학 기업들의 이윤을 위한 것이라며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영국 유전자감시(Genewatch UK), 그린피스(Greenpeace) 등 환경단체들과 토양협회(Soil Association) 같은 유기농단체들 역시 이번 결정이 일반대중을 우롱하고 이들의 견해를 철저히 무시한 것으로, 노동당 정부가 이후 총선 등에서 엄청난 정치적 역풍을 맞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또한 이들은 GM 옥수수의 재배 허용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FSE의 실험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결정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FSE에서는 GM 옥수수의 대조군이 된 통상작물의 재배 과정에서 독성이 심해 2006년부터 사용이 금지되는 아트라진(Atrazine)이라는 제초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만약 아트라진 대신 독성이 좀더 약한 제초제를 통상작물에 사용했다면 통상작물의 재배가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이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GM 옥수수가 일반 옥수수보다 더 환경친화적이라는 FSE 결과의 정당성은 상당히 흔들리게 된다). 2000 명이 넘는 시민들은 만약 GM 옥수수의 재배가 시작된다면 경작지를 찾아내 작물을 뽑아버리는 등의 실력 행사로 이를 저지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리부터 예견되었던 환경·시민단체의 반발보다 영국 정부를 더욱 당혹케 한 것은 생명공학 산업계의 반응이었다. 생명공학 기업들은 처음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지만, 이후 GM 작물 경작을 둘러싼 영국 정부의 입장 발표에 대해 적지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영국 내에서 재배할 수 있는 유일한 품종을 보유한 바이엘 크롭사이언스는 자사의 GM 옥수수의 경작 신청을 전격 철회했고, 2008년까지 적어도 향후 4년간 경작 신청을 않기로 했다. 왜 바이엘측이 어렵사리 따낸 경작 허가 결정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을까? 이 점을 이해하려면 베킷 장관의 3월 9일 발표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비GM 작물을 경작하는 농부가 이웃 농부의 GM 경작으로 인해 종자가 오염되어 금전적 손실을 보았을 때 이를 보상해 주는 절차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기 들어가는 비용은 정부나 비GM 경작 농부가 아니라 GM 산업부문(생명공학 기업이나 GM 경작 농부)에서 부담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이런 입장은 정부자문기구인 농업환경생명공학위원회(Agricultural and Environment Biotechnology Commission, AEBC)에서 2003년 11월에 내놓은 GM Crops? Co-existence and Liability라는 제목의 보고서 내용을 반영해 나온 것이었다. 즉, 농부들이 유기농과 같은 통상작물과 GM 작물 사이에서 선택해 재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해 온 ―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기농 부문의 성장을 장려해 온 ― 영국 정부로서는 GM 작물에 의한 통상작물의 오염, 그리고 이로 인해 유기농 농부들이 겪게 되는 금전적 손실 문제에 어떤 식으로든 대응 방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참고로 현재 영국의 유기농 인증 기준은 GM성분이 전혀 포함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영국농민연맹(National Farmers Union)과 같은 GM 옹호 진영에서는 보험가입을 주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현재 NFU Mutual과 같은 영국의 주요 보험사들은 GM 오염 피해에 대한 배상보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또한 설사 비GM 농부의 보험가입이 허용된다 하더라도 그 비용을 비GM 농부가 부담하는 것은 수익자부담 원칙에 어긋난다.

GM작물이 재배될 경우 유전자 오염은 사실상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마당에 ― 이는 2003년에 진행된 GM작물의 과학적 검토에서 도출된 주요 결론 중 하나였다 ― 영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잠재적 부담을 GM 산업부문에 떠넘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생명공학 기업들에게 이는 GM작물의 경제성을 갉아먹는 과도한 부담이었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GM작물 경작을 원하는 농부들과 이를 원치 않는 농부들의 선택권을 동시에 보장해 줄 수 없다는 것 ― 이것이 바로 영국 정부가 처해 있는 딜레마인 셈이다.
 

GM 작물의 '약한 고리' ― 유전자 오염 문제
 

사실 GM작물로 인한 통상작물의 오염은 최근 영국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등 이미 GM작물을 대규모로 경작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문제이다. 유전자 오염과 연관된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GM작물이 널리 재배되어 통상작물과 뒤섞여 유통되면서 농부들이 이식 유전자가 섞여 있지 않은 종자를 구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올 초 미국의 과학자단체인 우려하는 과학자동맹(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UCS)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 잘 드러났다. UCS는 재래 종자를 가지고 자체 실험을 해본 결과 콩의 50%, 옥수수의 50%, 캐놀라의 83%에서 이식 유전자가 검출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GM이 아닌 통상작물을 재배하고자 하는 농부가 앞으로 종자 확보에서 점점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연구결과이다. 이 점은 영국 정부의 발표가 있기 불과 나흘 전인 3월 5일에 영국 하원 환경감사위원회가 내놓은 조사보고서에서도 강조되었다. 환경감사위원회의 보고서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나타난 종자 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영국 정부가 재배 허용 결정을 유예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었다.

그리고 둘째는 GM작물을 재배하지 않는 농부의 경작지가 이식 유전자에 의해 오염되어 의도치 않게 GM작물을 재배하는 셈이 되고, 이 때문에 종자 특허료를 물지 않고 GM작물을 파종했다는 이유로 농부가 소송에 피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견 황당한 가정인 듯하지만, 최근 캐나다에서는 실제로 이런 소송이 진행되었다. 캐나다의 농부인 퍼시 슈메이저는 1998년 자신의 밭에서 몬산토사의 GM 유채 종자가 발견된 후 몬산토사에 의해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피소되었다. 그는 GM 작물을 몰래 재배하는 인근의 밭에서 꽃가루가 날아와 그런 일이 생겼다며 자신도 유전자 오염의 피해자라고 주장했지만, 2001년 3월 캐나다 지방법원은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죄를 인정해 종자대 15,000달러와 그 해에 수확물을 팔아 얻은 70,000달러의 수익을 몬산토사에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슈메이저는 항소심에서도 패했고, 올해 5월에 있었던 대법원 확정 판결 역시 생명공학 기업의 종자 통제권을 인정함으로써 몬산토사의 손을 들어 주었다. 다만 대법원은 슈메이저가 몬산토사에 대해 종자대와 수확물을 팔아 얻은 수익, 소송에 들어간 비용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슈메이저에게도 부분적인 승리를 안겼다.

GM작물의 유전자 오염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들은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토지가 매우 광활한 나라에서 생긴 것들이다. 영국의 환경주의자들은 토지가 훨씬 좁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영국의 경우, GM작물의 상업적 재배가 허용되면 이런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게 나타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GM작물 경작시 인근의 비GM 경작지와의 거리설정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만약 피해가 발생했을 때 보상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올해 여름에 바로 이 문제를 놓고 다시한번 광범한 대중자문 절차를 운영할 계획인데, 이 자문의 결과에 앞으로 영국에서 GM작물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영국과 다른가
 

우리나라는 현재까지 상업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GM작물은 없지만, 수십 가지 GM 품종들이 현재 농촌진흥청 등에서 포장시험 단계를 거치고 있어 머지않은 미래에 GM작물 경작이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외국에서 수입된 GM곡물의 일부가 식용이나 사료용이 아닌 종자용으로 용도변경되어 시장에 팔려나갔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가 일부 발견된 바 있다. 이는 영국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가 남의 나라 일이 아님을 말해 준다. 영국처럼 경작지 규모가 작고 이웃 경작지간 거리가 좁은 우리나라 농촌의 실정을 감안한다면, 영국 농부들이 우려하는 유전자 오염의 문제와 이를 규제하는 영국 정부의 딜레마가 이곳에서도 그대로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상업적 재배를 하고 있지 않으니 별문제 없다는 식의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출전: 『시민과학』 2004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