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이후 독일(아니, 유럽) 과학계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기만행위 사건으로, 프리드헬름 헤르만과 마리온 브라흐라는 두 명의 분자생물학자가 기만행위를 저지른 주요 인물이다. 1997년 초에 같은 연구팀 일원이었던 젊은 박사후 연구원의 내부고발로 조사가 시작되어, 1990년대 초·중반에 헤르만과 브라흐가 공동으로 발표한 수십 편의 논문들에 실린 데이터가 날조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기만행위 문제에 대해 낙관하고 있던 독일 과학계를 경악시켰고, 독일에서 기만행위와 연구윤리 문제를 다루는 제도적 장치가 정비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후속 조사를 통해 2000년에는 조작된 논문의 수가 애초의 조사결과보다 훨씬 많다는 검토 결과가 나왔다.

[배경] 헤르만과 브라흐는 대단히 성공적인 학문적 경력을 같이 밟아 왔다(기만행위가 드러난 1997년에 헤르만은 47세, 브라흐는 37세). 1980년대에 그들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동연구를 했고, 1988년에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으로 돌아왔다. 1992년에 그들은 베를린으로 옮겼고, 헤르만은 베를린자유대학의 정교수 겸 대학 산하 로버트 뢰셀레 암 센터의 선임 자문위원이 되었다. 헤르만은 독일 통일 후 동베를린에 세워진 국가 연구센터인 막스 델브뤽 분자의학 센터(MDC)에도 실험실 공간을 제공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20여명의 과학자들로 연구팀을 조직했는데, 브라흐는 팀에서 네 명의 그룹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자리는 그녀가 독일의 교수자격논문인 '하빌리타찌온'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96년 초에 헤르만과 브라흐는 베를린을 떠나 서독의 울름에 자리를 잡았고, 헤르만은 울름대학 교수로 자신의 임상 및 연구 활동에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97년까지 헤르만은 독일에서 유전자치료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혔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브라흐는 함부르크 인근에 있는 뤼벡대학의 정교수 자리를 제안받아 울름을 떠났다. 그녀는 뤼벡대학에 새로 생긴 분자의학 연구소의 소장을 겸직했으며, 암 치료법에서 시토카인과 다중약물내성 유전자에 대해 주로 연구했다(Nature, 387, 442; 1997).

[발단 및 사건의 전개] 베를린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던 연구자들은 그들의 데이터 중 일부가 조작되었다는 의심을 계속 갖고 있었지만, 헤르만과 브라흐가 자신들의 앞날을 가로막을까 우려해 공개적인 문제제기를 꺼리고 있었다. 1997년 초 그들 중 한 명인 박사후 연구원 에버하르트 힐트는 멀리 뮌헨에 있던 자신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지도교수는 울름대학과 뤼벡대학의 의대 학장과 막스 델브뤽 센터 소장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Nature, 398, 13-17; 1999). 울름대학 의대 학장인 귀도 아들러는 이 해 3월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헤르만과 브라흐에게 고발 내용에 대한 서면 진술을 요구했다. 이에 브라흐는 자신이 1994년에서 1996년 사이에 발표된 4편의 논문에서 데이터를 변조했다고 실토했다. 그녀는 서로 연관이 없는 방법론을 사용한 서로 무관한 실험들에서 나온 이미지 파일들을 "뒤섞고 잘라붙여" 새로운 실험 데이터를 만들었으며, 헤르만 역시 조작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헤르만은 베를린에 있을 당시 연구 프로젝트는 네 명의 그룹 책임자들에게 일임하고 있었고 자신이 공저자로 들어간 논문 원고를 읽어보았을 때 위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며 관련 여부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이 사건은 1997년 5월 <포커스> 잡지의 보도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두 사람의 실험실로 들어가던 연구비 지급이 전면 중단되었으며 헤르만이 갖고 있던 독일연구재단(DFG, 미국의 NSF에 해당하는 대학연구 지원 기구)의 자문위원 자격도 중지되었다. MDC와 두 대학은 즉각 조사위원회를 꾸렸고, 각 조사위원회의 대표와 관련 전문가들이 모이는 국가위원회('Bonn committee')도 만들어졌다(나중에 조사 대상이 확대되면서 프라이부르크대학도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 위원회는 헤르만과 브라흐가 발표한 다른 연구논문들의 조작 여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관련 논의 과정을 공개했고 해당 주의 교육 당국과도 긴밀한 협조를 유지했다(독일에서 대학교수는 대학에 고용된 것이 아니라 대학이 속한 해당 주의 교육당국에 고용된 공무원 신분이다. 따라서 대학교수의 임용과 파면은 교육당국의 소관이다)(Nature, 387, 442 & 750; 1997).

1997년 6월에 헤르만과 브라흐는 주 교육당국으로부터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정직 처분을 받았다(Nature, 388, 11; 1997). 이어 9월에는 브라흐가 뤼벡대학 교수직에서 파면되었고(Nature, 389, 432; 1997), 울름대학이 속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과학부는 헤르만의 공무원 신분을 박탈하기 위한 법적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헤르만은 여전히 결백을 주장했고, 9월에 울름대학 의대 학장인 귀도 아들러와 DFG 등이 자신의 경력을 망쳐놓았다며 이들을 상대로 1천만 마르크(60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이 조작 논문들에서 "선임 저자 내지 번역자"에 불과했고 이미 정상급 과학자의 지위에 오른 자신에게는 기만행위를 저지를 만한 아무런 동기도 없었다며 모든 책임을 브라흐에게 돌렸다(Nature, 389, 105; 1997). 한편 조사의 대상이 베를린 시기에서 그 이전의 프라이부르크 시기까지 확대되면서 의혹 대상이 된 논문의 수는 10여편에서 20여편, 30여편으로 계속 불어났고, 조사를 담당한 국가위원회는 최종적으로 두 사람이 발표한 37편의 논문들에서 데이터가 변조된 것이 확실하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most probably)"고 결론지었다(Nature, 395, 533; 1998).

[제도적 장치의 정비] 이 사건은 독일 과학의 정직성에 관한 과학자들의 자기만족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이 사건 이전에 독일의 연구기관이나 지원기관 중 과학에서의 부정행위 고발 처리에 관한 공식 지침을 갖추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간혹 일어나는 소소한 부정행위들에 대해서는 임시방편적인(ad-hoc) 방식의 대응이 이루어졌고,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이런 상황에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막스플랑크 국제형사법 연구소의 알빈 에써 등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일을 대비해 표준적인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었을 뿐이었다. 막스플랑크연구회(MPS)는 1996년부터 기만행위를 다루는 절차 마련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해 에써를 위원장으로 임명한 바 있었으나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들의 발언권은 미미했다.

사건이 터진 후 독일 내 73개 기초연구기관을 관할하는 MPS는 에써 위원회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997년 12월, 부정행위로 의심되는 사건이 생겼을 때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내부 규정을 승인했다. 새로운 절차는 부정행위 사례들이 재빨리 처리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내부고발자와 무고하게 고발된 사람 모두를 보호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에 따르면 MPS 산하 연구기관에서 부정행위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을 때, 해당 기관의 소장은 내부고발자의 신원을 보호하면서 즉각 기관 내에서 비공식 조사를 실시하고 MPS의 연구담당 부총장에게 이 사실을 비밀리에 알려야 한다. 부정행위 고발을 당한 사람은 2주간 소명의 기회가 주어지며, 이로부터 다시 2주 내에 공식 조사가 발족될지 여부에 대해 전해듣게 된다. 공식 조사가 발족되는 경우 이는 새로운 상임 위원회가 담당하게 되며, MPS 이사회에서 선출되는 조사위원장은 MPS나 그 산하기관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조사위원회는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처벌에 대한 권고안을 낼 수 있다. 가능한 처벌 방법은 단순 경고, 연구비 환수, 파면,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검찰에 대한 고발 등이 포함된다. MPS의 총장은 이 중 어떤 처벌을 내릴 것인지 결정한다.

아울러 MPS 이사회는 젊은 연구자들을 위한 연구윤리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이 프로그램은 부정행위를 저지른 소수의 과학자를 잡아내는 것보다 부정행위의 예방이 더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믿음을 반영하여, 실험 노트를 정리하는 올바른 방법, 논문의 저자를 결정하는 기준, 논문에 대한 기술적 기여를 인정하는 기준 등의 쟁점들과 연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의 내용을 교육하게 했다(Nature, 390, 430; 1997). 2000년 12월에 MPS는 78개 산하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과학자들에 대해, 훌륭한 과학 실천을 위한 지침을 지키겠다는 동의서에 대한 서명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규정은 연구자들이 10년간 실험 자료를 접근가능한 형태로 보관해야 하고 논문에 쓰인 실험 프로토콜이 복제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또한 논문에서 명예 저자표시를 불허하고 젊은 과학자들이 적절한 지원과 감독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Nature, 408, 762; 2000).

한편 대학연구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는 DFG 역시 위원회를 구성해 훌륭한 과학 실천을 위한 지침을 마련했다. 대학은 좋은 과학 실천의 규칙들을 교육해야 하며, 대학마다 옴부즈맨(민원조사관)을 두어 의심이 가는 과학 실천이 있을 때 젊은 과학자들이 상담할 수 있는 독립적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DFG는 이러한 지침의 강제를 위해 2002년까지 규정을 갖추지 못한 기관에게는 DFG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거라는 엄포를 놓았고 이는 효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DFG는 각 대학의 옴부즈맨 외에 자체적으로 세 명의 상임 옴부즈맨을 따로 두어 지방 차원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담당하게 했다(Nature, 390, 430; 1997).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내부고발은 독일에서 여전히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DFG의 지침은 내부고발자 보호보다는 피고발자의 보호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일었고, 정상급 과학자들이 서로서로를 보호해주는 것은 아닐까 우려해("old-boy network") 젊은 과학자들이 옴부즈맨의 사무실을 찾기보다는 언론사에 해당 사실을 제보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Nature, 424, 117; 2003). 이 때문에 내부고발자가 그 대가로 업무에서 좌천되는 것과 같은 불이익을 막기 위한 조치 ― 가령 내부고발자의 후속 경력을 추적해 그들을 해치거나 지위를 떨어뜨리려는 시도가 생기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 ― 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Nature, 426, 218; 2003).

[소송 제기와 후속 조사] 브라흐는 파면 후 뉴욕으로 건너가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헤르만은 1998년 9월에 교수직을 스스로 사임한 후 개업의로 전향했다(헤르만은 사임 후에도 끝까지 결백과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헤르만과 브라흐의 전 직장이 있었던 3개 지역(바덴-뷔르템부르크 주, 울름, 베를린)의 검사들은 이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울름의 검사들은 헤르만과 브라흐가 교수직에 지원할 때 허위자료를 포함하는 논문을 증빙자료로 제출했으므로 이는 사기행위에 해당한다는 요지로 소송을 준비했다. 그리고 베를린의 검사들은 두 연구자가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 허위진술을 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따라 두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했던 DFG와 독일 암 원조 재단, 티센 재단 등 3개 기구는 베를린의 검사들에게 관련 서류를 제공했고, 유죄 판결이 날 경우 연구비를 회수하기 위한 소송 절차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Nature, 395, 532-533; 1998). 그러나 두 사람 다 연구직을 떠났고 브라흐는 미국으로 이주한 상황에서 소송 제기는 쉽지 않았다. 이 중 울름에서는 1999년 6월에 콘라드 멘츠 검사가 두 과학자를 사기죄로 기소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나 유죄 판결을 받아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Nature, 399, 725; 1999).

한편 DFG는 헤르만과 브라흐의 기만행위가 과학계에 미친 파장을 좀더 완전히 평가하기 위해 1998년 4월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했다. 뷔르츠부르크대학의 생물학/면역학 교수인 울프 라프가 이끄는 이 팀은 두 과학자(와 예전 동료들)가 발표한 500여편의 논문들을 세세하게 검토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를 위해 DFG로부터 1년짜리 연구 프로젝트를 받았다. 울프 라프가 팀장이 된 데는 그가 1994년 독일로 돌아오기 전까지 25년간을 외국에서 지냈다는 점에서 독립성을 인정받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Nature, 395, 533; 1998).

태스크포스 팀은 DFG 등에서 제공한 75만 마르크(약 4억원)의 경비로 애초 예정이었던 1년을 훌쩍 넘겨 2년 이상 작업을 계속한 후 2000년 6월에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저널 편집자에게 편지를 띄워 논문의 제출 원본을 받았고, 논문의 다른 공저자들에게 연락해 관련 자료의 송부를 요청하거나 이들을 직접 인터뷰해 각각의 실험이 이뤄진 과정을 재구성하려 했다. 아울러 그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논문에 실린 데이터와 그림들의 조작 여부를 조사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1985년에서 1996년 사이에 헤르만에 의해 발표된 347편의 논문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이 중 94편의 논문(85편의 학술지 논문과 책에 실린 9편의 논문)이 조작된 것이 확실하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지었다. 이 94편 중에는 브라흐와의 공저가 53편이었고, 프라이부르크대학의 혈액·종양학과 교수인 롤란트 메르텔스만과의 공저(브라흐까지 들어간 논문 포함)가 59편이었다. 347편 중 깨끗한 것으로 판명난 것은 132편에 불과했고, 나머지 121편은 다른 공저자들의 미협조 등으로 데이터 조작이 있었는지 여부를 입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회색 지대'에 속하는 논문들이었다. 라프는 메르텔스만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으나 그는 자신이 명예 저자에 불과했으며 해당 논문에서 묘사된 실험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Nature, 405, 871; 2000).

테스크포스 팀이 지적한 94편의 조작 논문들은 해당 학술지에 대한 통보 미비 등으로 2002년까지 상당수가 계속 철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2002년 7월 <네이처>의 조사에 따르면, 94편의 논문을 실은 29개 학술지에 대해 문의한 결과(20개 학술지 응답, 총 60편), 5개 학술지는 논문 모두를 거둬들였지만(총 22편) 1개 학술지는 3편 중 하나만 거둬들였고 나머지 14개 학술지는 단 한 편도 거둬들이지 않았다. 이는 논문 철회에 있어 학술지들 사이에 정해진 표준 절차가 없다는 데 부분적으로 기인한 결과인 듯 보인다(헤르만은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단 한 편의 논문도 스스로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과학계 지도자와 부정행위 조사자들은 어렵사리 부정행위를 밝혀내도 이러한 나쁜 정보를 문헌에서 제거하는 신뢰할 만한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Nature, 418, 113;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