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DNA 재조합 연구와 그 응용에 대한 규제
 

셸든 크림스키
 
 

기술과 그 부산물들을 규제함에 있어, 미 연방 정부는 과학적 실행과 과학의 응용을 서로 명확히 구분해 왔다. 과학적 탐구는 단기적인 실용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우가 드물고, 이윤 창출을 위한 사업으로서 추구되는 일이 거의 없으며, 대체로 그 내적 가치를 위해 수행된다는 분명한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점들과 여타의 다른 이유들 때문에 과학은 우리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기술을 통제하는 복잡한 규제 법률로부터도 면제되어 왔다. 정부가 과학 연구자들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그 동안 수정헌법 제 1조에 대한 위배에 비유되어 왔다. 즉,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연구가 갑갑한 행정적 규제조항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을 권리에 대한 제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기술과 꼭 마찬가지로 중대한 사회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자연의 어떤 측면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은 무의식중에 과학자, 실험실 연구자, 지역 주민, 혹은 자연환경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적 탐구가 위험을 야기할 경우 사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개인이나 기관이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를 수행할 권리와 그러한 행위들의 안전성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이들의 우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DNA 재조합(recombinant DNA, rDNA) 논쟁은 생물학 연구의 위험에 대한 우려가 한정된 학문분야 내부의 토론에서부터 국제적인 정책 논쟁으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 과학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rDNA 논쟁은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고, 1970년대 말이 되면 애초에 논쟁을 촉발시켰던 우려들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유전자 접합(gene-splicing)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초점이 맞추어졌을 뿐이었다. 실험실에서의 실험에 초점을 맞추었던 한 가지의 중심적인 우려는 [1980년대 들어] 생명공학의 새로운 산물들과 과정들의 응용에 관한 십여 가지의 다른 대중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유전학 논쟁의 이러한 상이한 측면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공통의 질문은, 그것이 가져올 영향을 쉽게 내다볼 수 있는 [특정한] 과학을 규제함에 있어 정부의 적절한 역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생명공학에 관한 공공정책은 두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해 왔다. 첫번째 단계는 1974년경에 시작되어 약 6년간 지속되었다. 이 단계에서의 대중적 우려들은 잠재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한 연구 기법(research technique)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두번째 단계는 1980년경 응용유전학의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방향으로 뻗어나간 새로운 정책상의 쟁점들이 등장했으며, 과학 기구들과 시민조직들이 대중적 토론에 광범하게 참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글에서는 먼저 rDNA 논쟁의 초기 단계를 분석한 후, 이어 생명공학의 상업적, 의학적 응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2세대 논쟁으로의 전이를 검토할 것이다. 나는 초기 rDNA 논쟁이 협소한 기술적 차원의 문제로부터 유전학 연구의 수행기준에 관한 연방정부의 조치와 개별 주 혹은 지역 차원의 행동을 초래한 국제적 쟁점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나는 rDNA 논쟁의 독특한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 개발된 유전자 이식 기법의 사용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사건들은 중요한 의미에서 전례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많은 점에서 다른 환경 관련 논쟁들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혁신적이고 강력한 과학연구 기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례들과 구분된다. 재조합 DNA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다른 생물원으로부터 얻은 DNA 조각들을 세포 바깥의 계(cell-free system)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새로 만들어낸 DNA 분자를 가리킨다. 1970년대를 통해 DNA 분자를 특정 위치에서 자르는 데 특정한 효소들을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이와 동시에 DNA 분자들을 접합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으로써, 과학자들은 다양한 종들로부터 나온 유전물질들을 결합시키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DNA 분자구조의 발견이 모든 생물체의 형식적 통일성을 보여 주긴 했지만, 생물학적 종들간에 유전물질을 교환할 때 존재할지 모르는 어떤 장벽을 뛰어넘는 데 있어 DNA 재조합 기법은 주요한 문제였다.

분자유전학 연구는 유전자가 세포 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규명하고 유전자의 구조와 유전자의 기능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만약 한 유기체의 게놈(genome)에 대한 지도가 완전히 그려진다면, 다시말해 유전자 각각에 대해 그것의 산물 내지 기능을 파악해 낼 수 있게 된다면, 임의의 특정 종의 세포에 대해 한 가지 목표가 달성될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DNA를 자르고 접합하는 능력에 기반해 복잡한 계(고등 유기체의 세포, 즉 진핵세포)로부터 유전자 조각들을 선택해서 그것들을 더 간단한 계(하등 유기체의 세포, 즉 원핵세포)에 이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고등 종들에서 유전자 발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관한 신비를 해명해 주리라는 최초의 실질적인 희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기법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태를 띄고 나타났다:
 

◇ 새로운 병원체(pathogen)를 만들어 내거나 위험한 독소 혹은 바이러스를 환경 속에 퍼뜨릴 수 있다는 잠재적 위험에 대한 두려움;
◇ 과학의 새로운 도구가 유전공학이라는 유해한 형태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
◇ 과학자들이 그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진화의 구조를 바꾸는 불길한 힘을 갖게 될 것에 대한 우려;
◇ 종들간에 유전자를 뒤섞는 것, 혹은 세포를 다시 프로그램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반대;
◇ 산업체들이 그 기법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불신.


최근에 일어난 많은 [과학기술 관련] 논쟁들은 기술혁신이 가져올 수 있는 불확실한 결과나 이미 알려진 기술의 영향을 둘러싸고 과학 전문가들간에 존재하는 의견의 불일치를 드러내보여 왔다. DNA 재조합의 경우에는 기술적 전문가들 스스로가 문제를 제기하여 과학적 책임에 대해 특별히 공개적 평가를 할 것을 요청했다. 외부로부터의 규제가 실험실에 있는 생물학자들의 활동을 통제한 예는 드물다. 실험실 내에서 생물 요소(biological agent)들의 안전한 취급에 관한 기준은 질병통제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CDC)에서 발령하지만, 이를 강제하고 실험실을 모니터하는 것은 대체로 수석 연구자의 책임이다. 이러한 과학의 자율성에 대한 드문 예외 중 하나는 인체대상 실험의 영역인데, 여기서는 이중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리뷰 패널이 연구 규약을 심사하여 피험자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또 피험자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DNA 재조합에 관한 논쟁 기간을 거치면서, 규제의 측면에서 과학과 대중 사이의 관계에 있어 많은 선례들이 확립되었다.
 

1. 자신들이 개발한 어떤 연구 기법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 우려를 품은 과학자들이 특정한 종류의 실험에 대해 자발적인 일시중지(moratorium)를 요청했다.
2. 최초로 만들어진 일련의 포괄적 지침들이 생물학에서의 기초연구를 규제하는 정부기구에 의해 발령되었다.
3. 생물학 연구 기법이 야기할 수 있는 환경적 영향에 관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4. 지역 시 정부가 유전학 실험에 대한 일시중지를 선포하여 연방기구의 결정을 사실상 무효로 만들었고, 기초연구를 규제하는 시 차원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5.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패널이 과학 연구의 위험을 평가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6. 의회는 생물학에서의 기초연구를 규제하는 몇몇 법안들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7. 생명체에 대한 특허가 미 대법원에 의해 승인되었다.
8. 미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은 유전자조작된 유기체를 이용하는 야외 과학실험(field experiment)을 규제하였다.


처음에 자신들의 발견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생명체를 개조할 수 있게끔 하는 새로운 힘을 풀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전망에 직면했을 때, 분자생물학자들은 상호 합의된 실험상의 안전조치들에 자발적으로 따를 것을 강조하면서 자체적인 규제 체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과학자들은 그들이 유지하고자 애썼던 자율성을 부분적으로 잃어버리게 되었다. 미국에서 생물의학 연구에 돈을 대는 주요한 자금원인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은 연구비 수혜자들이 지켜야 하는 의무적 규칙들을 제정했다. 의회는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같은 도시들이 [유전학 실험의 일시중지를 선포하는] 지방 조례를 발령한 이후, [연방 차원의] 입법을 위한 중대한 의제를 놓고 논쟁에 돌입했다. 1980년대 초가 되면 미 농무성이나 환경보호청과 같은 규제기구들은 생명공학의 몇몇 측면들 ― 예컨대 유전자조작된 식물이나 미생물에 대한 실험적인 야외 테스트 ― 에 대해 감독을 실시하게 되었다.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생물학은 실험실의 생물위험(biohazard), 특허, 인간 유전학, 이해관계상의 갈등, 생물학 무기, 생태학 등의 쟁점들을 포괄하는 연방 입법의 주요한 일부분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문제가 이해되었던 방식은 주로 과학자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처음에 쟁점이 정의되었던 방식
 

1971년 여름, 스탠퍼드 대학의 생물학자 폴 버그(Paul Berg) 밑에서 일하는 한 대학원생이 콜드 스프링 하버에서 열린 종양 바이러스에 관한 워크샵에 참석했다. 자넷 머츠(Janet Mertz)라는 이름의 그 학생은 자신의 지도교수가 계획한 하나의 실험에 대해 설명했다. 이 실험은 시미언 바이러스 40(Simian Virus 40, SV 40)으로부터 추출한 DNA를 대장균(E. Coli)에 이식하는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처음에 원숭이에서 분리해 낸 것으로 갓 태어난 햄스터에 주입하자 종양을 유발하였다. 과학자들은 SV 40에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동물 세포를 감염시키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DNA를 동물 세포에 집어넣는 벡터(vector)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종양을 유발시키는 바이러스의 발견은 인간의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성 원인을 찾고자 했던 이들에게 있어서는 희망적인 신호였다.

과학자들은 DNA 조각들을 재조합하는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암 연구에서 새로운 탐구 수단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들은 동물 종양 바이러스의 DNA를 추출하여 단순화된 박테리아 시스템에 주입할 수 있었는데, 이 박테리아를 증식시키면 삽입된 DNA 역시 복제되었다. 그 전까지는 SV 40과 같이 종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의 성질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이 그 특성을 연구하기 위해 이를 값싸게 대량으로 복제하는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에 의해 열린 연구의 가능성은 1971년 암 대비법(Cancer Act)에 의해 연구 자금의 증가가 약속된 상황에서 ― 암 관련 연구비는 1971년 1억 4000만 달러에서 1978년 8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 특별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머츠가 그 실험에 대해 설명했을 때 콜드 스프링 하버 회의에 참석했던 한 연구자가 그것의 안전성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다. 비록 SV 40이 인간에게는 감염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것의 DNA를 인간의 장 속에 흔히 살고 있는 박테리아에 이식하는 것은 바이러스의 전염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잠재적인 위험을 던져줄 수 있었다. 암의 발병까지는 잠복기가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SV 40 바이러스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바이러스학자들 및 다른 동료들과의 토론을 벌인 후, 폴 버그는 위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때까지 SV 40 실험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과학적 책임"은 격동의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적지 않은 주목을 끌었던 개념이었다. 여기서 '책임'이란 개방성, 과학의 오용에 관해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도덕적 쟁점에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동료 과학자들에 대한 포용력, 그리고 공공의 복지에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은 대중의 이해관계를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 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의 도덕적 분위기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연구 기법에 대한 소수 과학자들의 우려를 중요한 대중적 논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변화는 뉴햄프셔 주 뉴햄튼에서 1973년 6월 15일에 핵산(nucleic acid)을 주제로 해서 열린 고든 회의(Gordon Conference)에서 시작되었다. 회의에서 공동의장을 맡았던 과학자들인 맥신 싱어(Maxine Singer)와 디터 죌(Dieter Soell)은 DNA 재조합 연구의 잠재적 위험의 문제를 회의 의제에 집어넣는 데 동의했고, 새로운 생화학적 기법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공개 서한들을 보내는 것을 회의에서 지지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실시했다. 첫번째 투표에는 약 90명 가량이 참가한 가운데 그 중 78명이 국립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edemy of Sciences, NAS)에 서한을 보내는 것을 지지했다. 두번째 투표에서는 48명 중 42명이 『사이언스 Science』 지에 서한을 보내는 것을 옹호했고 이 서한은 1973년 9월 21일자에 실렸다.

고든 회의에서 서한들의 공개 배포를 지지했던 이들은 과학자사회 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기준을 설정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스스로의 집단적 책임으로 인식한 것을 이행해야 한다는 도덕적 원칙에 입각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즉 과학자들이 문제를 파악했고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이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과학 내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립과학아카데미가 책임을 맡고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NAS는 폴 버그를 의장으로 하여 분자생물학자들로 구성된 연구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버그 위원회의 성원들 중 여덟 명은 위험을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 특정한 종류의 유전자 접합 실험을 자발적으로 삼가 줄 것을 과학자들에게 요청하는 서한(『사이언스』 1974년 7월 26일자에 실린)에 서명함으로써 또하나의 전례를 남겼다. 버그 위원회의 서한은 이어진 논쟁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이 되었다. 생물학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그에 비견할 만한 사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서한에 서명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조심스럽고 책임있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의 일시중지를 권고함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전문가 영역 내부로의 봉쇄
 

일단 분자생물학 영역의 핵심 과학자들이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한 상황에서, 몇 가지의 정책적 선택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NAS가 주체가 되어 연관된 모든 과학분야들에 경고를 내린 후 가능한 잠재적 위험에 관한 논문들을 제출할 것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혹은 이 쟁점에 대한 조사를 바로 의회로 넘길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면, 과학 연구분야들 및 보건학 분야의 과학자들과 공익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의회 혹은 대통령 산하에 설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여기서 NAS 산하의 버그 위원회는 자신들의 역할을 사실 규명의 차원으로 한정하는 길을 택했다. 일단 관련된 기술적 정보를 확보하고 나면 정책적 쟁점들은 NIH로 넘겨질 예정이었다.

논쟁의 첫번째 단계에서, 논쟁은 공공정책상의 쟁점이 아닌, 기술적 쟁점으로 이해되었다. 논쟁의 해결은 여전히 과학자들 및 주요 자금지원 기구들의 과학자문위원들간의 논의를 통해 도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버그 위원회의 서한은 위험성 평가에 있어 실험실 봉쇄(laboratory containment) 문제에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입장에 중요한 배경을 제공하였다.

버그 위원회의 서한이 게재된 『사이언스』 지의 같은 호에 실렸던 리포트는 이와 같이 기술적인 쟁점에 초점을 맞추는 입장의 한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버그 그룹의 제안의 배경에 깔린 동기는 생물학 전쟁이나 유전공학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장기적인 차원의 우려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기법에 의해 창조된 유전자변형 박테리아가 가져올 수 있는 건강상의 위해에 대한 직접적인 염려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버그 위원회는 연구가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NIH가 자문기구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위원회는 연구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려는 자신들의 책임과 관심영역을 넘어선 것으로 간주했다.

버그 위원회의 서한이 『사이언스』 지에 실리고 나서 7개월이 지난 후에 NAS는 캘리포니아 주 아실로마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155명의 참석자들은 모두 초청에 의해 참가하였고, 회의를 주최한 그룹 성원들에 의해 주로 [과학자사회의]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선별되었다. 그 중 대부분은 생화학자 혹은 분자생물학자였지만, 법학, 보건학, 전염병학, 바이러스학, 발생학 분야의 전공자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언론 쪽에서도 몇 사람이 초청되었는데, 이들은 모임이 끝날 때까지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실로마 회의의 주최측은 비판의 시험을 견뎌내지 못할 아직 완결되지 않은 성명이나 주장들을 언론에서 미리 터뜨릴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아실로마 회의는 위험의 분석이 그 본질상 기술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맥락 때문에, 위험의 평가 과정에 광범한 대중 참여와 다양한 과학연구의 성과들이 투입되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회의의 공식적 의제는 애초에 연구의 일시중지를 요청했던 이들의 우려를 반영하여, 유전자 접합 기법이 병원성 유기체를 만들어내거나 퍼뜨리는 데 어느 정도로 이용될 수 있는지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회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이 초청되었다: DNA 재조합을 위해 가장 널리 쓰이는 숙주인 대장균의 생태; 동물 바이러스의 잠재적 위험과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 세포 바깥의 DNA 혹은 플라스미드(유전자 이식에서 운반체로 쓰이는 둥근 DNA 조각)가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능력.

아실로마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들은 종간의 경계를 넘어 유전자를 옮기는 작업이 내포하는 위험의 유형과 성격, 그것의 상대적인 정도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고, [이에 기반해] 과학자사회가 받아들일 만한 위험 통제 대책을 수립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자발적인 일시중지를 끝내고 연구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압력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실로마 회의는 과학자사회와 환경운동단체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야기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중요한 위험성 평가의 영역이 그에 대해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많은 과학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고 항의했다. 연구에서의 위험과 관련된 측면을 다룬 논문은 오직 초청된 이들만 제출할 수 있었고 핵심적인 전문 과학학회들에 대해 전반적인 논문제출 요청이 없었기 때문에, 불과 몇 안되는 전염병 전문가, 임상 미생물학자, 공공보건 전문가들만이 이 역사적인 모임에 기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아실로마 회의에는 생태학과 환경운동단체를 대표하는 과학자들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실로마 회의의 결과물이 일단 NIH에 전달되고 나면 중요한 과학 정책상의 결정이 뒤이어 내려질 것이었고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은 대단히 영향력있는 정책적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실로마 회의를 주최한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합의를 신속하게 이끌어내기 위해 발표의 수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합의가 없이는 대중이 과학자들간의 의견의 불일치를 눈치채고 신뢰를 잃어버려 과학자들의 손에서 결정권을 빼앗아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연구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합의점을 찾기 위해 새심한 노력을 기울였던 과학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실로마 회의에서 도출해 낸 합의는 상당한 정도의 견해차이로부터 구성해낸 깨지기 쉬운 단일성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대중이 이 쟁점에 보다 많이 관여하게 됨에 따라 아실로마 회의에 참석했던 과학자들간의 견해차이는 상당한 정도로 완화되었다.
 

문제에 대한 기술적 응답
 

과학자들은 실험 절차의 안전성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가? 안전성을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근본적인 원칙이 없는 상황에서, 아실로마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들은 상대적인 추정상의 위험 정도에 따라 실험들을 분류하려 하였다. 동물 바이러스 DNA를 대장균에 옮겨넣거나 항생제 내성을 박테리아에 이식하는 등의 실험은 ― 비록 그 위험의 성격이 어떤 것일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 위험도가 높은 실험으로 분류되었다. 뭔지 잘 알지 못하는 유형의 DNA를 이식하는 실험 ― '무작정 실험(shotgun experiment)'이라고 불린 ― 은 순수한 DNA 조각들을 재조합하는 경우보다 위험도가 더 높은 범주로 분류되었다. 여기서 주된 우려는 인체에 대한 위험 여부였기 때문에, 포유류 세포나 인체에 들어와 살 수 있는 미생물체를 숙주로 하는 DNA 이식의 경우가 가장 위험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기술적 해법에서 다음 단계는 이러한 위험의 등급 각각을 실험실에서의 일련의 절차들에 대응시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생물학적 봉쇄와 물리적 봉쇄라고 이름붙인 봉쇄의 두 가지 제한 요소를 도입했다. 생물학적 봉쇄는 이식되는 DNA 조각의 수용체가 되는 숙주의 유형에 적용되는 것이고, 물리적 봉쇄는 실험실의 물리적 상태와 안전 규칙을 반영하는 복합적 지표이다. NIH는 아실로마 회의의 권고를 따라 동물 및 식물 DNA들에 대해 생물학적 봉쇄(EK-1에서 EK-3까지)와 물리적 봉쇄(P-1에서 P-4까지)의 수준을 정하는 분류법을 개발하였다. 나중에 과학자들은 이 결정에 대해 종종 의문을 제기하곤 했다: 예를 들어, 새에서 대장균으로 유전자를 옮겨넣는 것이 왜 개구리에서 대장균으로 유전자를 옮겨넣는 것보다 더 위험한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아실로마 회의를 지켜본 한 사람은 당시의 타협을 두고 "견고한 과학의 영역보다는 공상과학(SF)의 영역에 종종 더 어울릴성싶은 어휘들을 빌어 수행된 기술적 협잡의 에피소드"라고 평했다.

DNA 분자구조의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상을 받았던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이런 식으로 위험을 상대적으로 분류해서 편리하게 표 형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과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 믿었고 "아실로마 회의에서의 경험이 한 편의 부조리 연극 같다고 생각했다." 아실로마 회의에서 행해진 위험성 분석의 불합리성에 대한 왓슨의 의견은 회의를 주도적으로 조직했던 이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었다: "그것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 과학적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아실로마 회의]에는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냉혈동물을 가지고 실험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부인들에게 있어 아실로마 회의는 새로운 유전자 접합 기법의 위험을 평가하는 데 과학지식을 이용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드러난 바에 따르면, 여기서의 기술적 논의는 가치와 개인적 이해관계라는 요소들과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실로마 회의는 이후에 정책 수립가들이나 정부기관의 관료들이 공공의 안전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계기였다.
 

NIH의 역할
 

NIH는 1974년 7월, 버그 위원회의 서한이 『사이언스』 지에 실린 직후에 DNA 재조합 논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버그 서한에서는 NIH가 위험성 평가를 감독하기 위해 자문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재조합 DNA 분자의 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한 절차들을 개발할 것을 권고한 바 있었다.

버그 서한이 발표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당시 NIH의 원장이었던 로버트 스톤(Robert S. Stone)은 재조합 DNA 분자 프로그램 자문위원회(Recombinant DNA Molecule Program Advisory Committee) ― 나중에 재조합 DNA 자문위원회(Recombinant DNA Advisory Committee, RAC)로 명칭이 바뀌었다 ― 의 설치를 공표했다.

RAC가 내세운 목표는 버그 위원회의 그것보다는 분명히 폭이 넓었지만, 연구의 사회적·윤리적 함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고려도 하고 있지 않았다. RAC는 기술적 문제를 관장하는 위원회로 정의되었다; RAC가 조사하는 범위는 애초부터 다음의 사항들에 대한 것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DNA 재조합체, 자연 상태에서 그것의 생존가능성, 그리고 다른 유기체에 그것이 전이될 수 있는지의 여부 등에 관해 지식과 기술의 현재 상태를 조사하는 것; 특정 DNA 재조합체의 확산 가능성과 그것이 공중 보건 및 환경에 가할 수 있는 위험을 평가하기 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권고하는 것; 그리고 연구 결과에 바탕해 규제 지침을 제안하는 것. 본 위원회는 특정한 구체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립된 기술위원회이다.


NIH 산하에 새로 만들어진 재조합 DNA 자문위원회는 아실로마 회의가 끝난 직후에 만나 연구 지침의 초안을 작성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최초로 만들어진 지침 초안은 과학자들로부터 너무 약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두 개의 버전이 추가적으로 더 만들어졌다. RAC는 이 중 세번째 것을 채택하여 1975년 12월에 NIH 원장인 도널드 프레드릭슨(Donald Fredrickson)에게 제출했다.

이 단계까지는 아실로마 회의 때의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있었던 과학자들만이 지침을 평가했다. 과학자사회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지침 작성 및 평가 과정에 사실상 전혀 접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NIH가 위험성 평가의 과정을 광범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들을 것으로 우려한 프레드릭슨은 원장직속자문위원회(Director's Advisory Committee, DAC)를 소집했다. NIH와 보건교육후생성(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HEW) 공동명의로 된 한 문서에 따르면, DAC는 "과학자사회와 일반 대중이 제안된 지침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특별 자문위원회는 지침 초안의 작성을 담당한 기술 그룹에 비해서는 좀더 광범한 대상층을 포괄하도록 구성되었다. DAC는 보건학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판사 한 명, 생명윤리학자 두 명, 소비자단체 대표 한 명, 변호사 두 명 등을 포함하는 일군의 자문위원들로 구성되었다. 프레드릭슨은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자신 직속의 자문위원회인 DAC를 대중 참여를 고무하는 수단으로도 이용하였다. DAC는 1976년 2월 9일에서 10일까지에 걸쳐 메릴랜드 주 베쎄스다에서 최초의 공개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환경단체 대변인들과 과학자들은 이러한 시도들이 주요한 정책상의 쟁점에 대해 대중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는 지극히 미미한 노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NIH는 새로운 유전자 접합 기법과 연관된 문제들을 여전히 기술적인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규제지침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역할이 지니는 정치적 함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즉, 미국 내에서 DNA 재조합 연구에 돈을 대는 가장 주요한 후원기관인 NIH가 이제는 규제 및 감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었다. 프레드릭슨은 이 역할을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NIH가 그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곧 과학자들이 유지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있는 자율성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했다. NIH의 관료 구조는 과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터였고, 과학자들은 NIH의 관리들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구 승인의 평가를 같은 분야의 동료 과학자들이 맡는 구조는 신뢰를 더욱 강화시켰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NIH가 자신들의 적이라기보다는 대변자라고 생각했다 ― 설사 NIH가 규제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NIH는 [자신의 역할에 내재한] 이해관계상의 갈등에 대해 가해질 대중의 비판을 면하기 위해, DNA 재조합 연구 프로젝트들을 감독하는 여러 겹의 위원회 구조를 규제지침 속에 포함시켰다. 먼저, DNA 재조합 연구를 수행할 모든 기관들은 상설적인 생물위험 위원회(biohazards committee)를 의무적으로 구성하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위원회들은 해당 기관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사항들에 대해 조언을 제공하는 한편으로, 연구지원 신청들을 검토하고 프로젝트가 NIH의 DNA 재조합 분자 규제지침을 따르는 형태로 수행될 수 있음을 보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NIH의 동료 과학자 심사(peer-review) 그룹이나 연구 부서(Study Section)들이 책임을 맡았다. 이 그룹들은 각각의 연구승인 신청들이 지닌 과학적 가치, 제안된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들, 그리고 각 기관의 생물위험 위원회들이 내놓은 권고사항 등을 검토했다. 결국 이 그룹들은 과학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의 차원을 넘어 규제기관에 준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셈이었다.

NIH의 재조합 DNA 자문위원회(RAC)는 보건교육후생성 장관에 대해 보고의 책임을 지면서 규제 과정에 또하나의 단계를 추가했다. RAC는 규제 지침들을 갱신하고, 숙주 벡터 시스템의 안전성을 보증하고, 대규모 실험들을 승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NIH의 책임자들이 규제지침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연구 승인과 계약들을 검토하는 책임을 졌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상과 같은 검토 과정이 자신들의 연구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면 다른 이들은 규제지침이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검토 과정이 심각하게 고안된 것이 아니라고 ― 즉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들에 대한 유의미한 대응이라기보다는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 보았다. NIH 자문위원회에 속한 많은 성원들이 DNA 재조합 연구를 수행하는 실험실과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계속해서 이해관계상의 갈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18개월간 지속된 연구의 일시중지 ― 이것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 를 풀어 달라는 과학자들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해, NIH 원장을 맡고 있던 프레드릭슨은 모든 종류의 유전자 이식 실험에 적용되는 잠정적 규제지침을 1976년 6월 23일에 발령했다.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은 이러한 조처가 규제지침의 공포 이전에 환경영향평가발표(environmental impact statement, EIS)와 대중적 차원의 검토를 의무화하고 있는 연방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에 대한 위반이라고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프레드릭슨은 공포된 규제지침과 함께 배포된 27쪽에 이르는 논평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문제는 '천천히 가자'는 우려들과 빨리 전진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균형 ― 실은 정책상의 합당한 '편향' ― 을 이룰 것인가에 있다."

그는 또한 실험실 안전은 기술적 해법을 요하는 기술적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시기쯤에 이르면 DNA 재조합 연구의 비판자들에 의해 이 연구가 유전공학과 연관될 수 있다는 우려들이 공공연하게 표출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드릭슨은 이 문제가 NIH의 권한 밖이라고 간주하면서 자신의 논평에서 이에 대해 단지 간접적인 언급만을 했을 뿐이었다. "이 연구가 인간의 유전자를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대중이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 만약 미래에 그런 작업이 시도된다면 DNA 재조합 연구에서 개발된 기법들 중 일부는 연관을 가질 수도 있긴 하겠지만." DNA 재조합과 인간유전자에 대한 개입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존재함을 부인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NIH는 공공정책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초기에는 인간 유전자치료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불과 수년 후, NIH는 인간 유전자치료의 주창자이자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감독기관이 되면서 입장을 선회했다.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NIH의 규제지침 하에서 작업하는 것과 의회가 제정한 규제조치들 하에서 작업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NIH의] 규제지침은 그 본질상 과학자들이 스스로를 모니터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었다. 연구를 감독하는 NIH의 다층적 위원회 구조는 동료 과학자들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은 고등 유기체와 하등 유기체간의 유전물질 교환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이 얻어지면 실험실 봉쇄에 대한 제한도 완화되어 연구가 가속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NIH의 담당자들은 규제지침이 유연성을 유지해야 하며 위험에 관한 새로운 지식에 즉각 반응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했다.

그러나 NIH는 자신이 맡은 새로운 역할과 관련해 점차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먼저 국방성이나 농무성과 같은 다른 연방기구들에 의해 자금지원을 받는 DNA 연구는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었다. 또한 NIH 규제지침은 민간기업이 돈을 대는 산업연구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셋째로, NIH는 마치 과거의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의 경우와 같이, 동일한 연구의 육성과 규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곤란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보건교육후생성 장관은 가해지고 있는 비판을 완화시키기 위해,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DNA 재조합 연구에 관한 연방기구간 위원회(federal interagency committee)를 설립함으로써 다른 정부기구들에서도 규제지침을 채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려 하였다. 또한 NIH 원장인 프레드릭슨은 관련 산업체들이 자발적으로 규제지침을 준수해 주기를 희망했다 ― 비록 몇몇 비판자들은 DNA 재조합 연구를 최초로 산업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경쟁이 불붙는 시점에서 이런 희망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러나 대체로 볼 때 제약 및 화학산업 측이 규제조치들에 맞서 강력한 로비를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했다. 몇몇 기업들은 민간연구소나 대학 연구시설에 대해서도 유사한 기준을 설정하는 법령의 제정을 심지어 환영하기까지 했다.
 

논쟁에 대한 대중의 참여
 

NIH 산하 DNA 재조합 연구에 관한 원장직속자문위원회(DAC)가 1976년 2월 9일에서 10일 이틀간에 걸쳐 개최한 공개 회의는 연방 차원의 정책 수립에서 대중의 의견을 반영시킬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NIH는 17개의 공익집단을 대상으로 공청회의 개최에 관해 공식적으로 통보하고, 규제지침 초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를 파견할 수 없는 단체들은 입장을 진술하는 문서를 제출하도록 권고하였다. 지구의 친구들은 NIH가 쟁점을 협소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법적 책임, 지침 이행 여부에 대한 조사, 이행을 강제하는 절차 등이 제대로 정의되어 있는지, 산업적 응용으로부터 어떤 사회적·윤리적 문제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대중참여를 위해 심각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어떤 정치적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전미과학자연맹(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은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공청회 자리에 제출했다. 그에 따르면, 322명의 응답자 가운데 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과학자의 30%와 생물학 전공자의 25%가 NIH 규제지침이 "충분히 조심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는 더 폭넓은 과학자사회 영역 ― 대학에 자리잡은 학자들에서부터 전문가이지만 생물학에는 문외한인 일반대중까지 ― 을 논쟁 속에 끌어들이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이어 『보스턴 글로브 The Boston Globe』 지는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좀더 정교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보스턴 글로브』의 과학면 필자였던 로버트 쿡(Robert Cooke)은 19,000명의 경험있는 중견급 실험생물학자들 중 임의로 선정된 1,2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지를 우편발송하는 조사 작업을 지휘했다. 대학, 산업체, 정부에 고용된 490명의 과학자들이 회신을 보내 왔는데, 이에 따르면 이들 중 거의 대다수가 상호 연관이 없는 생물 종들간에 유전자를 옮겨넣는 작업은 다소의 위험을 수반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응답자의 39%는 NIH의 규제지침이 좀더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익명으로 이루어진 이런 설문조사의 결과들은 NIH의 규제지침에 대해 과학자들이 공개석상에서 발언한 내용에서 시사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회의적 태도가 과학자사회 내에 존재함을 보여 주었다.

그 다음으로 NIH의 규제지침에 대한 공개적 대응이 나온 것은 환경영향평가발표(EIS) 초안이 1976년 9월에 『연방 연감 Federal Register』에 실렸을 때였다. 점차로 대중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주제라는 점을 감안하여, EIS 측은 상당히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에 대해 서면으로 광범한 의견을 제출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에 대해 선출직 정부관리들, 공공기구 종사자들, 그리고 전미자원보호협회(National Resources Defense Council), 환경보호기금(Environmental Defense Fund), 시에라 클럽(Sierra Club),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 보스턴 지부 등을 포함하는 시민단체 및 과학운동단체들로부터 38통의 서면 의견서가 제출되었다. 대부분의 의견서들은 실험실 봉쇄 문제를 여전히 주요한 쟁점으로 다루고 있었지만, 유전공학, EIS의 평가과정, 그리고 어떻게 민간기업들이 지침에 따르도록 만들 것인지의 문제 등에 대한 우려들도 표출되었다. 그러나 EIS에 대한 의견서들에서 제기된 이러한 많은 쟁점들은 문제를 기술적인 성격의 것으로 정의하는 NIH의 틀 구조 속에서는 마땅한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우려들은 말많은 소수파들이 지닌 우려로 치부되면서 10여 년 후가 되어서야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NIH가 규제지침에 대해 의견을 제출해 주도록 공개적으로 요청한 시점으로부터 4개월 후에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는 P-3에 해당하는 DNA 재조합 연구에 대한 일시중지를 자체적으로 선언했다. 다른 지역사회들은 주와 지역 시 정부 차원의 조치들이 확산되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자] 한때 생물학적 및 물리적 봉쇄의 기준이 효과적인 것인지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했던 과학자들은 이제 NIH의 규제지침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발빠르게 입장을 전환하였다. 유전학 연구와 관련된 지역사회 차원의 행동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로,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이 더욱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 것 ― 즉, 과학 연구에 관한 의사결정에 대중이 개입하게 되는 사태 ― 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간의 기술적 의견불일치를 옆으로 제쳐두게 되었다. 둘째로, DNA 재조합을 규제하는 지역과 주 차원의 조례가 통과되면서 규제가 현실화되자, 연방 입법에 대한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않았던 과학자들이 이제는 [모든 지역에서] 일관된 정책 시행을 바라면서 연방 의회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케임브리지 시가 취한 조치는 그것이 지니는 상징적인 가치 하나만 갖고 보더라도 지역 시민의 입장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취임에 분명했다. 케임브리지 시에서 DNA 재조합 연구가 대중적인 쟁점이 된 것은 하버드대에서 낡은 실험실 하나를 개조해서 P-3에 해당하는 DNA 재조합 연구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계획을 다룬 지역 신문들의 보도가 케임브리지 시장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그는 시 의회 차원의 청문회를 소집했다. 그 지역의 과학자들로부터 이틀간에 걸쳐 판단의 근거로 삼을 상반되는 증언들을 들은 후, 시 의회는 투표를 통해 NIH가 상당한 정도의 위험이 있는 단계(P-3)로 분류한 모든 연구를 일시적으로 중지하도록 결정했다. 시 의회는 또한 이 문제를 연구해서 시에 조언을 제공할 심사위원회의 설치를 요청했다.

시 행정담당관은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패널을 구성하는 쪽을 택했고, 이 패널은 케임브리지실험심사위원회(Cambridge Experimentation Review Board, CERB)라고 불리게 되었다. CERB는 시 구역 내에 P-3 등급의 DNA 재조합 연구시설을 두는 것이 인간 건강에 어떤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임무를 맡았다. CERB는 5개월간에 걸쳐 과학자들로부터 증언을 들은 후, 실험을 허가하기 전에 NIH 규제지침에 별도의 안전조치를 추가할 것을 권고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여기서의 안전조치는 실험실에 대한 상시적 모니터링과 함께, 유전자변형된 유기체가 임상적으로 쓰이는 항생제에 대해 저항성을 갖는지 여부를 지속적으로 반드시 검사할 것, 그리고 유전자 접합 실험에 대해서는 최고 수준의 생물학적 봉쇄를 도입할 것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CERB는 또한 의사결정상의 권위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조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DNA 재조합 연구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가 맡은 책임 영역을 넘어서는 심오한 철학적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전학 연구가 내포한 사회적·윤리적 함의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 내에서 가능한 한 광범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대화는 과연 모든 지식이 추구할 만한 가치를 갖는 것인지에 관한 쟁점을 다루어야 한다. 또한 지식을 추구하는 어떤 특정한 경로가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소중한 자유들을 침범할 우려는 없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자연적·사회적 생태에 가해질 수 있는 장기적 차원의 위험을 다루는 기술영향평가의 문제도 제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정책 결정을 참여민주주의의 틀 구조 내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국가 전체 차원의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시 의회는 CERB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 지역 내에서 수행되는 모든 DNA 재조합 연구를 규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조례에는 각 기관 내에 있는 생물위험 위원회와 연관을 맺고 있지 않은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시 생물위험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케임브리지 시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보도되었고, 미국 전역에 걸쳐 유사한 연구위원회가 생겨났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논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연방 차원의 입법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과 주 차원의 행동이 가속화되자, 많은 과학자들은 지역 차원의 의사결정 기구들에서 나오는 [모든 지역에] 일관되지 못한 기준들보다는 연방 차원의 단일한 일련의 규제지침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록펠러대학교의 생물학자인 노턴 진더(Norton Zinder)는 과학자사회가 규제의 필요성에 대해 점차로 느끼고 있던 것을 다음과 같이 표출했다:
 

나는 DNA 재조합 연구에 관해 연방 차원의 규제 입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것에 있어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서로 다른 주와 지역에서 서로 다른 규제지침을 채택하는 지역 차원의 선택이 확산되면, 관련된 과학자들 사이에는 혼돈과 혼란의 상황이 초래될 뿐이며 이는 궁극에 가서는 위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손을 써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일단 연방 차원의 입법이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부각되자, 과학자들과 대학 관료들은 그러한 입법의 결과가 연구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타나도록 조직적인 노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월터 길버트(Walter Gilbert)는 의회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1977년 열린 핵산에 관한 고든 회의에 참석했던 과학자들의 관점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DNA 재조합 연구의 결과 나타날 것으로 우리가 예견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혜택 ― 실용적인 차원과 기초학문적 차원 모두에서 ― 이 자유로운 연구를 질식시키는 입법과 규제 때문에 아예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규제 입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나라 전체에 걸쳐 일관된 기준을 적용해야 하며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만들어져야 한다.


여기서 표출된 길버트의 이중적 태도는 과학자사회 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보면 연방 차원의 입법은 과학의 관료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과학자들은 이로 인해 궁극적으로 미국이 생물의학 연구에서 점하고 있는 주도적 지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연방 차원의 입법이 없이는 DNA 재조합 연구에 대한 규제가 마치 조각천을 모아 짠 넝마 이불과 같은 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NIH에 권력을 집중시켜 지역 정부들이 독자적인 규제 조항을 둘 수 없도록 하는 약한 형태의 연방 입법이 통과되기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이었다.
 

연방 의회의 활동
 

DNA 재조합 연구를 다룬 최초의 연방 의회 청문회는 아실로마 회의가 끝난 지 불과 2개월 후에 개최되었다. 상원 보건소위원회 주최로 1975년 4월 22일에 열린 청문회는 "자유 사회와 그 속의 과학자 공동체간의 관계에 대한 검토"를 주제로 내걸었다. 소위원회 의장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은 관련된 쟁점들이 기술적인 생물위험의 범위를 넘어 보다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특히 DNA 재조합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광범한 사회적 함의들에 비추어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논쟁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케네디를 의장으로 하는 소위원회는 또한 NIH의 규제지침이 NIH와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는 연구에만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적용가능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응해] 프레드릭슨은 1976년 11월, 연방 자금을 써서 개발된 연구 기법이나 새로운 유기체들에 대해 특허권을 승인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정책을 검토하는 연방기구간 위원회(interagency committee)를 소집하였다. 이곳에서의 초기 회합들은 나중에 연방 정부가 rDNA 개발과 산업정책을 연계시키는 과정에서 수행하게 되는 역할을 위한 틀 구조를 확립하였다.

케임브리지 시가 DNA 재조합 연구를 규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을 때(1977년 2월 7일), 연방 하원과 상원의 소위원회들은 이미 이 쟁점을 다룬 배경 문서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1월 19일에 하원에서 채택한 한 결의안에서는 DNA 재조합 연구가 "미국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파괴할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케임브리지 시의 결정에 곧바로 뒤이어 의회의 활동이 가속되기 시작했고, DNA 관련 입법에 대한 고려는 의회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7년 3월까지 DNA 재조합 연구의 규제를 위한 다섯 개의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어 이 법안들에 관한 의회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한편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연방기구간 위원회는 HEW 장관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재조합 DNA 분자의 이용과 생산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안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연방기구간 위원회는 "본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모든 DNA 재조합 연구에 명확한 영향을 행사할 단일한 법적 기구, 혹은 기구들의 연합체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런 판단에 근거해, 위원회는 이 분야의 연구자들의 자격에 대한 인가와 프로젝트의 등록을 HEW 장관에 대해 의무화하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권고하였다. 이는 모든 형태의 지역 입법을 차단하는 한편, HEW 장관의 손에 상당한 재량권을 남겨두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일단의 과학자들이 재조합 DNA 실험에 대해 처음 우려를 표명한 때부터 4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제 생물의학 연구자 공동체는 엄혹한 정치적 현실에 의해 문제가 복잡해진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미국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나의 기초연구 프로그램이 그토록 철저한 조사와 평가의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의회는 기초연구에 대한 규제라는 발상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게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정책상의 쟁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행정적 통제권은 어느 기구에 두어야 하는가? 지침의 시행은 어떤 방식으로 강제되어야 하는가? 연방 차원의 입법은 주나 지역 차원의 [독자적] 조치를 차단해야만 하는가? 그러한 입법은 DNA 재조합 연구에 의해 촉발된 사회적·윤리적 질문들에 대해서도 다소간의 대응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가?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공공기구에서 규제지침의 시행을 책임질 것인지가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정책결정이 가능한 한 NIH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엄청난 중요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NIH는 자체적인 생물의학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DNA 재조합 연구를 육성하고 여기에 자금을 대는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NIH가 규제지침의 시행 역할을 맡는 것에 반대하는 논리도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동안의 경험들은 연구 및 기술의 규제와 육성 기능을 하나의 기구에서 모두 담당하는 것이 실패로 귀결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정된 다섯 개의 법안들 중 하나는 규제를 시행하는 행정단위가 될 별도의 독립 위원회 ― 핵규제위원회(Nuclear Regulatory Commission)의 경우와 같은 ― 를 설립하는 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안(案)은 정부 관료 구조를 간소화하는 것이 의회의 일차적인 우선순위로 부각되어 있는 시점에서 제안되었다. 반면 HEW 장관에게 규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새로운 기구를 만드는 대신 기존의 정부 부처의 권한을 확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의회에 상정되었던 법안들은 또한, 지침을 강제하기 위한 절차들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반영하였다. 지침을 위반하는 것은 곧 연구비의 지급 중단을 의미할 수 있었다. 이는 과연 충분히 강력한 제재조치인가? 그리고 민간기업이 자금을 대는 연구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일부 법안들은 연구를 하는 개인들이나 연구가 수행되는 시설에 대한 인가제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HEW가 규제를 담당할 기구로서는 준비도 미비하고 경험도 일천하며, 따라서 현장 점검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효과적인 모니터링을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연구자들과 감독기구(HEW) 사이에 신뢰에 근거한 합의를 이뤄내기를 희망한 반면, 다른 이들은 직업안전보건청(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 OSHA)에서 담당하는 것과 유사한 기구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인 규제 절차의 도입을 요구했다. 그들은 연구자들에게 자신들의 실험실 안전 기준을 공표하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보호 조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었던 정책 쟁점은 연방 입법이 과연 지역 차원의 조치를 못하게 막을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과학자들은 지역적 조치의 차단을 위해 맹렬한 로비를 벌였고, 과학자들이 연방 입법에 반대했던 애초의 입장을 180도 선회하여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 문제 때문이었다. DNA 재조합 관련 입법에 지역적 조치의 차단에 관한 구절을 넣자는 주장을 뒷받침했던 가장 그럴싸한 근거는, 그것이 국가 전체에 일관된 기준이 적용되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지지자들은 만약 지역마다 서로 다른 기준이 적용되면 규제가 최소로 적용되는 지역으로 연구의 중심이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대학들은 [그렇게 되었을 때] 성가신 규칙들에 넌더리가 난 우수한 연구자들이 자기 학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봐 전전긍긍했다. 하버드대는 의회 소속 위원회에서 발의되는 모든 법안에 지역적 조치의 차단을 명시하는 구절이 포함되도록 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맹렬한 로비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으로, 지역적 조치의 차단을 반대하는 집단에 맞서 전국적인 차원의 역공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반면 지역 차원의 조치를 못하게 막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에는 주, 시, 소도시 등의 지역자치체들이 대중의 건강과 복지를 보호할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었다. 연구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사회와 지역 정치체들은, 불확실한 위험에 맞서 자신들이 얼마만큼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가를 선택할 권리와 함께 그러한 연구가 사회에 가져올 잠재적 혜택과 이러한 위험을 서로 비교해 따져 볼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 의사, 인문학자, 환경운동가 등을 포함한 600명의 회원을 거느린 책임있는 유전학 연구를 위한 연합(Coalition for Responsible Genetics Research) ― 현재 책임있는 유전학을 위한 회의(Council for Responsible Genetics, CRG)로 이름을 바꿔 활동중인 ― 은 지역적 조치의 차단이 HEW 장관이라는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하는 로비를 펼쳤다.

의회에서 벌어진 또하나의 정책 논쟁은 DNA 재조합 연구를 감독할 위원회의 설립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발의한 법안(S.945, 95th Congress)은 DNA 재조합 연구 및 기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 for the Study of Recombinant DNA Research and Technology)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케네디가 발의한 법안은 위원회의 구성이 "의학, 법학, 윤리학, 신학, 생물학, 물리학, 환경과학, 철학, 인문학, 보건행정, 정부, 공공업무"의 영역에 속한 개인들을 포함하도록 규정하였다. 위원회의 임무는 DNA 재조합 연구 및 기술의 발전이 내포하는 윤리적, 사회적, 법적 함의들을 연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의회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제안된 위원회는 DNA 재조합 연구가 내포하는 보다 광범하고 심대한 함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단지 보다 긴급한 기술적 우려들 ― 전염성 생물원이나 독소 확산이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의 문제 ― 에 충실할 것인지의 문제를 연방 정부에 제기하는 것이었다.

케네디가 제안한 위원회 개념에 비판적인 이들은 위원회의 설치가 가져올 수 있는 장기적인 사회적 함의를 고려할 때, 이는 곧 특정한 유형의 과학 연구를 제한, 통제 혹은 금지하기 위한 1단계 포석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HEW 장관이었던 칼리파노는 HEW에 자문을 제공하는 외부 기구가 이미 너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러한 위원회 개념에 반대했다. 칼리파노가 보기에, 또다른 위원회를 추가로 설치하는 것은 규제에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1977년 내내 많은 청문회가 열리고 법안들이 상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안 통과를 결정하기 위한 투표 단계에까지 도달한 법안은 한 건도 없었다. 과학자들은 두 가지 새로운 정보를 인용하여 입법을 연기시키는 데 기여했다. 먼저 이 분야의 핵심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스탠리 코헨(Stanley Cohen)은 DNA 재조합 기법을 쓰지 않고도 고등 유기체의 세포(진핵 세포)로부터 나온 DNA가 박테리아(원핵 세포)로 옮겨질 수 있음을 실험으로 보여 주었다. 그동안 비판자들은 만약 자연상에 존재하는 [종간의] 장벽이 우회된다면 이는 진화 과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이에 대해 코헨의 실험은 고등 유기체와 하등 유기체 사이에 자연적인 장벽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실험 결과의 미출판 원고는 의회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돌려 읽혀졌다.

의회의 관심이 강력한 규제법안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데 일조한 두번째 정보는 터프츠 의과대학의 전염병학과장인 셔우드 고르바크(Sherwood Gorbach)로부터 나왔다. 고르바크는 매사추세츠 주 팔무스에서 열린 한 회의의 의장을 맡았는데, 여기서 DNA 재조합 실험의 잠재적 위험을 평가하는 워크샵들이 개최되었다. 모임 회의록의 공개와 워크샵의 결과 발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고르바크는 프레드릭슨에게 편지를 써서 "대장균 K12는 실험실에서의 DNA 삽입 조작에 의해 전염성 병원체로 전환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고르바크의 진술은 특히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왜냐하면 팔무스에 초청된 50명의 참가자들은 그동안 DNA 재조합 연구의 위험 문제에 관해 가진 지식을 제공할 기회가 없었던 여러 분야들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임상전염병학, 장내 세균학, 면역학, 역학(疫學)과 같은 영역의 전문가들이 포함되었다. DNA 재조합에 관한 핵심적인 위험성 평가 회의에서 분자생물학자가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78년에 개회된 95차 연방의회에서도 로비는 계속되었다. 책임있는 유전학 연구를 위한 연합, 민중을 위한 과학, 그리고 소수의 환경운동집단들을 제외하고 나면, 다른 과학관련 집단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NIH의 규제지침을 지지했다. 의회가 보여 주었던 열정적인 입법 움직임에 대한 지지는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지역사회 차원의 행동이 잦아들고 지역에서의 강력한 로비 덕으로 시민들의 움직임이 추가적인 규제조치를 부과하지 못하는 듯 보이게 되자, 과학자들은 이제 연방 입법에 대해 보냈던 지지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연방 입법 대신 공공보건서비스법 361조에 의거해 HEW의 권한을 확장하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 NIH는 대부분의 DNA 재조합 실험들에 대해 봉쇄 요구조건을 대폭 낮추는 방향으로 지침을 수정하였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이제 설사 연방 입법이 통과되더라도 대다수 등급의 유전자접합 실험을 하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연방 차원에서 법률 제정을 위한 마지막 시도는 아들라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 상원의원(민주당, 일리노이 주)으로부터 나왔다. 1980년 봄, 스티븐슨은 모든 연구기관들 ― 일차적으로는 민간 부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 이 HEW 장관에게 rDNA 연구를 등록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S.2234)을 상정했다. 그러나 이 시기쯤에 이르면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지지세력이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연방 입법을 통해 rDNA 실험을 규제하려는 3년여에 걸친 의회의 노력은 중단되고 말았다. 유전자접합 실험에 대한 감독은 전적으로 NIH의 관리하에 남게 되었다.
 

DNA 재조합 연구에서 유전공학으로
 

1980년이 되자 이제 과학자들은 rDNA 연구에 대해 그간 과도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행정적 요구사항들과 실험실 봉쇄의 조건들을 대폭 완화시키기 위해 NIH에 로비를 벌였다. 비록 그 수는 적었지만 규제지침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자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1981년 9월에 RAC는 투표를 통해 규제지침을 과학자들의 자발적인 실행상의 규정으로 전환할 것을 의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권고안은 보다 점진적인 규제 완화 쪽을 선호한 NIH 원장에 의해 거부되었다.

실험실 연구의 안전성에 대해 과학자들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rDNA 기술의 상업적 이용에 대해서까지 유사한 합의가 곧바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NIH는 규제지침의 적용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우려에 대응해, 민간자금을 지원받는 rDNA 연구를 자발적으로 등록하도록 하고 이를 인증해 주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였다. 등록과 인증 절차를 규정한 조건들 ― 대규모(10리터 이상)의 rDNA 조직배양은 RAC에서 건별로 검토를 하는 것을 포함하는 ― 은 1980년 1월에 NIH 규제지침의 공식적인 일부분이 되었다.

NIH는 규제의 초점을 대규모 프로젝트의 검토, 더 큰 상업적 유용성을 지닌 새로운 숙주-벡터 시스템의 인증, 그리고 유전자조작된 유기체(genetically engineered organisms, GEOs)와 유전자조작 식물의 환경 확산 문제 쪽으로 옮겨갔다. 1983년에 의회 소속 위원회들로부터 권고안이 강력하게 제시된 이후,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은 민간자금의 지원을 받는 rDNA 야외 실험을 감독하던 NIH의 역할을 대신하여 GEOs 환경 방출에 대한 규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EPA는 또한 대학에서 지원하는 GEOs 방출 실험도 자신의 관할권에 놓이게 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론적으로는 EPA가 모든 야외 실험들뿐 아니라 생물 폐기물에 대해서도 관할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다른 연방 기구들이 유전자 접합의 새로운 산물을 감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기 시작함에 따라, 전반적인 규제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 행정부(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 대통령 또는 대통령 보좌관 직할 연방 기관의 총칭 ― 역주) 소속의 과학기술정책국(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에서는 1986년 "생명공학규제조정체제(Coordinated Framework for the Regulation of Biotechnology)"를 공포했다. 이 체제하에서 생명공학과학조정위원회(Biotechnology Science Coordinating Committee)라는 이름의 기구간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관련된 규제 기구들 사이에 규제 관할권, 규제 대상, 그리고 분자유전학의 기법들을 분류할 일관된 용어에 대한 합의를 이뤄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체제는 4년 동안 운영되었는데, 4년이 지난 후에도 생명공학의 감독과 관련된 몇몇 핵심 쟁점들 ― 예컨대 새로운 유기체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성요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 에 대해서는 주요 연방 기구들간에 여전히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규제의 원칙들을 결정하는 보다 강력하고 직접적인 역할을 백악관 직속 경쟁력위원회(White House Council on Competitiveness)가 맡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 위원회에 생명공학 정책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응용유전학의 연구와 상업화에 있어서의 미국 주도권 확보를 [생명공학 정책수립시 고려해야 할] 우선순위로 설정했다. 공화당이 내건 의제에서는 새로운 전지구적 시장의 추구와 함께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생명공학의 산물들을 수출하는 데 유리하도록 하는 국제적인 규제의 통일이 높은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었다. 공익집단들은 부시 행정부의 조치가 신중한 규제 과정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말뿐이고 실제로는 관심이 없다고 보았다.

1970년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실험실 생물위험에 대한 우려들은 70년대 말이 되면서 급격하게 쇠퇴하였지만, 그 대신 새로운 일련의 쟁점들이 부상하였다. 정치적 관심의 초점은 rDNA 기술의 산물 및 부산물들과 유전학 연구의 사회적 맥락에 맞추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논쟁들은 여러 층위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가진 압력단체들과 지역 공동체들은 생명공학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생명공학의 경우에는 과학과 기술이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생명공학의 산물들에 대한 반대는 과학연구의 자율성에 대한 위협으로 종종 해석되었다. 그 결과 [생명공학의 산물들에 대한] 반대 운동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조건을 통제할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과 사회가 과학 영역에 대해 안전 조치를 부과하고 대외적 책임성의 증대를 요구할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 사이의 견해차이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어질 내용은 응용 분자유전학의 2세대 논쟁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몇몇 쟁점들을 요약한 것이다.
 

1. GEOs의 의도적 방출

생명공학의 규제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쟁점은 형질전환된 식물, 미생물, 동물들을 환경에 방출할 때의 적절한 안전 기준을 정하는 문제였다. 연방 정부에서 승인한 최초의 환경 방출 실험은 1987년 아이스 마이너스(ice minus)라는 이름의 미생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 실험은 역사상 가장 안전한 야외 실험들 중 하나라는 식으로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이 실험에서 사용된 아이스 마이너스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토양 미생물 종으로부터 하나의 유전자를 제거한 것으로, 기온이 0℃ 이하로 떨어졌을 때 얼음 결정이 생기는 것을 더 어렵게 함으로써 작물이 입는 냉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과학자들은 두 개의 연방 기구와 법정 소송을 포함해 5년간에 걸친 규제의 장벽을 거친 끝에 캘리포니아대학에 있는 농업 야외 시험소에서 아이스 마이너스를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농업과학자들은 온실과 야외 시험장이 자신들의 실험실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형질전환 유기체의 야외 시험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연방과 주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이는 시간의 지체와 함께 연구비용의 상승을 초래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소규모의 GEOs 야외 시험의 경우에는 통제된 조건하의 실험이라는 근거를 들어 대학을 규제로부터 면제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러한 관점은 생산물을 특정한 제조 과정에 의해 평가해서는 안되며 최종산물이 지닌 관련된 성질들만을 근거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에게 반향되어 있다. 몬타나 주립대학의 한 식물병리학자는 자신의 분야를 규제하기 위해 새로 도입된 무분별한 관료적 절차에 맞서는 시민불복종 행동의 일환으로 EPA의 야외 실험 규칙을 고의로 위반하기도 했다.
 

2. 생명공학 연구시설의 부지선정

1980년대에는 님비(NIMBY, not-in-my-backyard) 현상이 생명공학의 덜미를 잡았다. 한때 인근 지역공동체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대학의 연구시설들은 이제 대학에서 실험실 시설을 확장하거나 개조할 때마다 의심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은 1976년 케임브리지 시에서 rDNA 연구를 위해 새로운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설계·개조한 하버드대의 생물학 실험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사추세츠 주의 다른 지역들도 케임브리지 시의 선례를 좇아 rDNA 연구개발과 연관된 안전성 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조례를 통과시켰다.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대학(UCSF)은 UCSF 약대에 연구소를 새로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상류층이 주로 사는 인근의 로렐 하이츠 지역공동체의 반대에 직면했다. 반대의 대체적인 근거는 rDNA 유기체와 독성 폐기물의 방출이 인근 지역공동체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물보호 운동가들이 동물 해부 반대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성 폐기물 반대 운동가들과 손을 잡게 되자, 이들간의 연합은 대학의 로비에 맞서는 무시못할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87년 스탠포드대학이 메디컬 센터 자리에 실험 동물 시설(Research Animal Facility)을 새로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이를 계기로 동물보호 운동가들은 환경운동가들과 다시한번 제휴하였다. 대학측에 따르면, 이 시설은 실험 동물에 대해 보다 나은 중앙집중적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스탠포드대의 다른 시설에 존재하는 물리적 결함을 보완한 것이었다. 실리콘 밸리 독성폐기물 반대 연합(Silicon Valley Toxics Coalition)은 팰로 앨토 동물애호 협회(Palo Alto Humane Society)와 연대하여, 이 시설은 위험물질들을 처리하게 될 것이고 또한 전염성 생물원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퍼져나가 인근 지역공동체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른다고 주장하며 프로젝트에 반대하였다. 지역 집단들로부터의 격렬한 압력에 직면한 스탠포드대학측은 건물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보고서 작성에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데 동의했다. 이 때문에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건물의 건설이 연기되었고 따라서 그 기간 동안 연구도 수행되지 못했다.
 

3. 대학-산업체 연계

산업체와 대학간의 적절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놓고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시기가 유전공학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 그 세력을 넓혀갔던 시기와 서로 겹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만은 아니다. 생물의학 연구는 사회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가치 때문에 연구의제의 순수성과 결과의 질에 대해 엄청난 사회적 관심이 뒤따르게 된다. 새로운 생명공학 산업의 발전은 대학과 산업체간의 협력관계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입장은 둘로 나뉘었다. 그러한 협력관계를 선호하는 입장은 그 근거로 기술이전이 향상되고, 과학적 혁신의 중심과 산업 발전의 중심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며, 대학에서의 과학연구를 위한 자원이 증가한다는 점 등을 들었다. 반면 그러한 협력관계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근거로 학문 문화(academic culture)와 사실상 동의어가 되어 온 여러 가치들이 침식될 것이고, 학문 연구 공동체의 독립성이 상실되며,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이에게 지식을 팔아먹는 풍조가 생겨날 것이고, 전반적으로 보아 순수과학(academic science)의 에토스가 보다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기능 쪽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점 등을 제시했다.

대학-산업체간 협력관계에 대한 정치적 우려는 이해관계상의 갈등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의회에서는 뉴스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던 몇몇 사례들에 주목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재정적 이해관계가 걸린 생산품을 평가하기 위해 공공자금을 받은 한 과학자의 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의회가 연구 승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반면, 과학자들은 새로운 법률이 통과되면 연구승인 신청을 제출할 때 그 일부로 재정상황에 대한 공개를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과학자사회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이는 또하나의 성가신 관료적 절차를 한 겹 추가하는 것처럼 보였고, 성실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연구자의 창의성을 키우는 활동으로서의 과학연구 행위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과학에서의 사기행위, 대학의 연구자금 유용, 만연하는 교수들의 창업 열기 등을 다룬 언론 보도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연구자금의 이용에 관한 정부의 책임 강화가 진작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4. 인간 유전공학

DNA 분자 재조합 기술은 인간, 태아, 배아, 수정란의 유전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두 종간에 유전자를 전이시키는 작업이 상대적으로 쉽다는 사실은 형질전환 동물 실험에서 충분히 입증된 바 있었다. 특정한 기능을 가진 인간 유전자가 생쥐의 게놈 속에 통합되기도 했고, 쥐의 유전자를 이식해서 쥐만한 크기의 생쥐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rDNA 기술의 배후에는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행위가 제기하는 윤리적, 사회적 쟁점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만약 선이 그어지게 된다면 어디쯤에 그어져야 할 것인가? 과학자들은 인간의 난자와 태아 조직을 가지고 자유롭게 실험을 해도 되는 것인가? 인간 유전자의 조작을 목표로 하는 연구 프로그램의 정당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과학자들은 연구 의제의 선정에 영향을 미쳐 온 일련의 복잡한 사회적 쟁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태아 연구는 지난 20여년 동안 과학이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 이는 "생명권을 옹호하는(Pro-life)" 낙태 반대 로비가 직접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인간 유전자치료는 NIH 산하의 RAC를 경유하여 보건복지성(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에 의해 건별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인간의 유전자를 동물에 전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사회적으로 가장 민감한 종류의 실험은 인간의 수정란에 대한 유전자조작을 포함하는 것인데,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곧 우생학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영역이 앞으로 대중적 감시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굳이 이 영역에서가 아니더라도] 새로 이루어지고 있는 발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 유전자를 탐구하고 변형시키는 데 있어 과학의 적절한 역할이 내포하는 딜레마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5. 생물학무기 연구

1972년 생물학무기의 제조, 사용, 저장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이 체결되어 100여개 국이 여기에 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약의 유효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계속 존재해 왔다. 미국과 여타의 협약 서명 국가들이 자국의 생물학무기 비축분을 파기했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명 국가들이 협약의 조항들을 확실히 준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전자접합 기법의 발견은 현대전에서 생물학무기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불안감을 자아내었다. 군대가 내세운 목표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몇몇 관측자들은 공격용 연구와 방어용 연구 사이의 경계는 획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신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모든 악성 병원체는 또한 언제든지 잠재적인 무기로도 연구될 수 있었다.

생물학 연구의 군사화를 우려한 많은 과학자들이 생물학무기 연구에 종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반면 다른 과학자들은 국방성(Department of Defense, DOD)에 의해 지원받는 과학 연구와 NIH에 의해 지원받는 과학 연구를 구분하지 않으려 했고, "생물학무기 연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서약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1990년까지는 생물학무기 협약의 조항들은 국제법상에서 인정받는 국가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개인이나 기업, 테러조직 등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 해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생물학무기 반(反)테러 법(Biological Weapons Anti-Terrorism Act)에 서명했는데, 이로써 협약의 조건들을 위반하는 것은 국내법을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되게 되었다. 개별 과학자가 국방성이 후원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관여함으로써 법을 어기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한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법률은 생명공학의 발전에 따라 생물학자들이 직면하게 된 점증하는 책임의 네트워크의 또하나의 예를 과학자 공동체에 제기했다.
 

결론
 

DNA 재조합 분자 연구의 이용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과학과 사회간의 관계에 내재한 많은 문제들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이었던 쟁점들 중 하나는 과학의 자율성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신념을 둘러싼 것이었다. 가장 격렬했던 논쟁은 규제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어떤 연구가 그 본성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을 때 과학자들 자신이 이를 규제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DNA 재조합 논쟁의 사례에서 나타났던 [과학자사회] 외부로부터의 통제의 위협은 과학을 둘러싼 미래의 정책 논쟁의 성격을 예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DNA 재조합 사건이 하나의 반동적인 흐름을 촉진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특정한 연구 프로그램의 잠재적 위험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과학자들은 동료들로부터 DNA 재조합 연구와 관련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되새겨 보라는 식의 충고를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따져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시민집단들은 연구를 금지시키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의회도 분자생물학의 목을 조르지 않았다. 교회조직들은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유전자조작을 비난하거나 하지 않았으며, 책들이 불태워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일부 시민들은 그 이전보다 과학에 대해 더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과학자들의 우려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연구 프로그램의 목표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연구비를 배분하고 위험을 평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있어 과학이 과학자들만의 일(internal affair)로 남아있지 않게 되면, 과학의 내용을 포함한 과학활동이 정치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2차대전 이후의 과학이 정부를 주요한 후원자로 하면서 이로부터 점점 더 많은 혜택을 입어 왔다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민간지원 연구에 대한 공공지원 연구의 비율이 지난 30여년 동안 엄청나게 증가해 왔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대중적 감시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대다수 과학자들의 입장에 따르면, 지원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과학을 대중이 감시하는 것은 결국 나쁜 과학으로의 귀결을 의미할 뿐이다. 예를 들어 MIT의 생물학자 데이빗 볼티모어의 말을 들어 보자:
 

생물학자들은 기초연구의 규제를 맡게 될 최초의 위원회의 설립을 막기 위해 의회 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미국이 과학의 문제에 이어 연구의 자유라는 전통을 계속 유지해 갈 것인가 아니면 정통 교의의 철권 아래 놓일 것인가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믿는다.


과학연구의 자유가 침해될 것이라는 우려는 과학에 대한 감독권이 전문과학 영역으로부터 과학자들과 대중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보다 넓은 영역으로 옮겨질 때마다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DNA 논쟁에서 이용되었던 "과학연구의 자유"라는 표현을 잘 살펴보면, 이는 "과학의 자율성" 혹은 "과학자들 스스로 규제할 자유(freedom of self-regulation)"를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질되고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이 논쟁에 관여한 과학자들은 DNA를 탐구하는 물리적 행위와 인식적 탐구를 서로 혼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물리적 탐구에 대한 규제"가 곧 "과학연구에 대한 제한"이라는 식으로 손쉽게 의미를 바꿔치면서, 유전자접합 기법의 이용에 대한 대중적 감시에 반대하는 데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은유로 후자를 이용했다.

DNA 재조합 연구를 둘러싼 대중적 정책 논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과학연구가 경쟁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 저명한 생화학자가 논평했듯이, "과학연구 자금이 극도로 부족했던 시기에, 오직 분자생물학만이 유행을 따르는 프로젝트에 주어지는 손쉽고 풍족한 지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통제 및 기준을 정하는 것이나 사회로부터의 규제책임기구를 설립해 연구를 지체시키는 것은 모두 연구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야기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대중이 검토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내부적 논쟁을 잊고 일치단결해서 의사결정 과정을 개방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맞서 움직였다. DNA 논쟁은 또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자금 지원에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에는 효과적인 로비스트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둘째로, DNA 재조합의 사례는 공공기구가 기초연구의 위험을 평가하는 기회를 가진다고 해서 이것이 곧 과학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시민들은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점증하는 영향에 종종 놀라기도 하지만, 과학이 가져다줄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도 또한 이해하고 있다.

세째로, 과학은 오늘날 거대한 사업이 되었으며, DNA 재조합 연구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연구를 규제하는 영구지침이 발령되기도 전부터 많은 액수의 자금이 새로운 연구소를 짓는 데 투자되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DNA 연구의 산업적 응용가능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기법이나 유전자조작된 생물종에 대해 특허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과학자들은 민간기업들에 자문을 제공하거나 자신이 직접 자금을 출자해 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DNA 재조합 연구의 규제를 둘러싼 싸움은 과학을 지식의 생산과정으로, 그리고 기술을 상품의 생산과정으로 각각 간주하는 오래된, 그러나 의심스러운 구분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과학과 기술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 성취와 그 기술적 응용간의 간격이 좁혀지고, 과학연구가 공공자금과 기업자금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지원을 받으며, 과학연구의 방법이 사회에 위험을 가져오는 기술을 포함하게 됨에 따라 설득력이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술을 통제하는 건전한 정책들 ― 기술영향평가와 대중적 책임 등을 포함해 ― 은 과학에 대해서는 부적합한 것으로 여전히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과학 기관들은 사회에서 지원하는 과학연구의 본성, 목표,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영향 등에 대해 대중이 가질 수 있는 우려들에 대처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