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를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과학 발전에 기여한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이름을 접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튼, 라브와지에, 다윈, 아인슈타인 등등등. 이러한 과학자들은, 설사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한번쯤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들을 다시한번 쭉 살펴보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과학자의 모습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이 남성이라는 것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성과학자의 사례를 별로 접해보지 못했다는 데 기인하는 바가 크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여성과학자는 아마도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퀴리 부인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과연 역사적으로 볼 때 여성과학자는 실제로도 그렇게 숫자가 적었는가, 아니면 단지 그동안 그들의 활동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인가? 만약 여성과학자의 수가 적었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여성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선천적으로 수학이나 과학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여성의 과학 활동에 적대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인가?
 

좌절과 극복의 연대기 ― 역사 속의 여성과학자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에 가깝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여성과학자의 수는 남성과학자에 비해 실제로도 훨씬 적었고, 그나마 몇 안되는 여성과학자의 경우에도 그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아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인 '왜 그랬는지'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한 답은 단연 후자, 즉 여성이 교육과 연구를 통해 과학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과학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역사적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서양과학사의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면, AD 500년경을 전후해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대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서유럽에는 학문 활동에서 이른바 '암흑기(Dark Age)'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다가 AD 1000년을 경계로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으로 다시 소개되면서 학문 활동은 다시 중흥기를 맞는다. 이를 흔히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의 여러 저작들도 이 시기에 서유럽으로 들어왔다. AD 1200년경부터 서유럽의 주요 도시(볼로냐, 파도바, 파리,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에 생겨나기 시작한 '대학'은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저작을 소화해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학문 활동의 전당이었다. 이어 17세기 중엽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나 이내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과학단체'는 이후 분야별로 점차 전문화되면서 과학자들이 연구성과를 서로 교류하고 업적을 승인받는 공식적인 제도로 점차 자리를 잡았다. 1660년에 생긴 영국의 왕립학회(Royal Society)나 1666년에 생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s sciences)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과학단체이다.

여성과학자의 수가 적었던 것은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로 이러한 대학과 과학단체들이 여성의 참여를 애초에 배제했다는 데서 크게 기인한다. 서유럽의 대학들 대부분은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19세기 말까지 여성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경향은 19세기에 높은 과학 연구 수준을 자랑했던 영국과 독일에서 특히 심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당대의 발전된 과학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고등교육의 장에 참여할 기회를 아예 얻지 못했다. 또한 17세기 이후 생겨난 과학단체들은 극히 최근까지도 여성과학자를 회원으로 넣어주지 않았다. 미국의 국립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s)는 1925년, 영국의 왕립학회는 1945년에야 처음으로 여성 회원을 받았으며,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1979년(!)에 와서야 최초의 여성 회원을 선출했다(과학아카데미는 1911년에 두 번이나 노벨상을 수상한 퀴리 부인을 여자라는 이유로 회원 선출에서 탈락시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세기 이전에 과학 활동을 했던 소수의 여성들은 극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동을 해야만 했다. 과학사가들이 최근 역사 속에서 발굴해 낸 여성과학자들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 준다. 마거릿 캐번디시, 마리아 메리안, 마리아 빙켈만, 에밀리 뒤 샤틀레, 라우라 바씨, 캐롤라인 허셸 등과 같이 17-8세기에 과학 분야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조차 생소하게 여길)은 대체로 공식 교육에서 배제되어 가정교사로부터 배우거나 가업(家業)을 도우면서 어깨 너머로 과학을 공부했다. 학회 등의 제도적 공간에 대한 참여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경우 아버지 혹은 남편의 조수로서 활동했고, 익명으로 혹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책이나 논문을 출판해 자신의 연구 업적을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했다. 이를 감안해 보면, 우리가 이들 여성과학자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의 활동은 당시 사회에서 철저하게 무시, 억압받았고, 업적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말 제도교육의 문호가 여성들에게 열리면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다. 20세기 초가 되면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의 대학들이 여성의 입학을 허용하기 시작하고, 과학계에도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학위를 받은 여성과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아직 여성이 과학 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들이 지배적이었고, 여성과학자들은 갖은 수모를 가까스로 견디면서 경력을 이어나갔다. 마리 퀴리는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 피에르의 뒤를 이어 1907년 소르본느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노벨상을 받은 그녀의 업적이 실은 남편의 연구성과일 거라는 수군거림과 질시에 시달렸다. 핵분열 현상의 이론적 규명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베를린대학 조교수가 된 다음에도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에 여자는 출입할 수 없다는 화학과장의 엄포에 못이겨 연구소 정문이 아니라 청소부들이 출입하는 반지하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만년에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은 1927년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10여년 이상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당시 그녀는 옥수수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농과대학에 자리를 잡아야 했지만, 고집센 농부들이 여자 대학교수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며 그녀를 교수로 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여성의 과학 참여를 가로막는 제도적인 장벽이 사실상 사라지게 되며, 과학계의 성적 불균등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들이 취해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 1964년 10월 MIT에서 열렸던 '과학과 공학 분야의 미국 여성'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움이었다. 이 심포지움에서 앨리스 로시라는 사회학자는 "과학 속의 여성 ― 왜 그렇게 수가 적은가?(Women in Science: Why So Few?)"라는 제목의 기념비적인 연설을 했다. 그녀는 연설에서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동원해 여성의 과학 참여를 가로막는 사회적·심리적 요인들을 지적하고 여성의 과학계 진출을 촉진하기 위한 실천 과제들을 제시했다. 이 연설문은 이듬해에 <사이언스> 지에 실리면서 이후 과학계에서의 여성의 위상 문제에 정책적 관심이 집중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라지지 않은 장벽 ― 오늘날의 여성과학자
 

과거 여성의 과학계 진출을 가로막았던 다양한 공식적 장벽은 오늘날 거의 사라졌다. 이제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학에 입학할 수 없거나 학회의 회원 가입을 거부당하거나 하는 사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누구나 성별을 막론하고 '능력만 있으면'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차근차근 밟아나가 대학의 정교수나 연구소의 책임연구원과 같은 높은 지위, 더 나아가 노벨상 수상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가능성과는 달리 아직도 많은 과학 분야들에서 여성과학자의 수는 턱없이 적고, 여성이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는 비율은 남성에 비해 매우 낮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여성들이 남성 위주의 학계 메커니즘에서 알게모르게 소외되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과학 활동을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영역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과학자사회의 구조가 어떠하며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과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석사, 박사과정으로 진학해 지도교수 밑에서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은 후, 박사 후 연구원(post-doc) 등을 거치면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해 연구업적을 쌓아야 한다. 이러한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대학의 교수가 되거나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으며, 여기서도 다시 논문을 발표해 연구업적을 인정받으면 더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 연구업적을 쌓기 위해서는 연구비를 많이 따내어 석사·박사과정 학생들이나 박사 후 연구원으로 연구팀을 조직해 연구를 수행한 후 관련 분야의 학회에서 동료 과학자들의 인정을 받고 학술지의 논문 심사를 통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성과학자들은 바로 이 과정, 즉 논문 주제를 정해 학위를 받고, 연구비를 따내고,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등의 모든 과정에서 알게모르게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데 제약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학계라는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그 비율이 급격히 감소한다. 근래들어 점점 더 많은 수의 여학생들이 대학의 이공계로 진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여자 교수나 연구소의 선임급 이상 여성연구원의 비율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밟아 나가는 매 고비마다 많은 여성들이 떨어져나가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혹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수도관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여성의 진출을 가로막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여전히 온존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한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바로 이 '유리 천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련의 연구들이 나와 과학계를 경악시켰다. 사실 그 동안에는 일부 여성과학자들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은 과거의 일이며 요즘의 과학계에는 그런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남성과학자들의 항변이 계속 먹혀들었다. 만약 여성이 과학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학계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스웨덴과 미국에서 여성과학자에 대한 비공식적, 무의식적 차별의 존재를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등장했다. 스웨덴 의학연구재단이 지원한 한 연구에서는 여성과학자가 동등한 조건의 남성과학자만큼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면 2.2배 더 많은 연구업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 바꿔 말해 여성과학자는 동일한 양의 연구업적을 가진 남성과학자보다 연구비를 따내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이어 1999년에 미국 유수의 공과대학 중 하나인 MIT에서 발표된 연구는 5년간에 걸친 다방면의 자료수집과 인터뷰에 근거해 크게 관심을 모았다. 이 연구의 결과는 과학자의 경력 전반에 걸친 차별의 증거를 밝혀내 연구에 참여했던 여성과학자들마저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에 따르면 과학계에 진입한 여성들은 남성과학자에 비해 더 적은 봉급을 받았고, 학과 내에서 더 낮은 지위를 점했으며, 더 적은 연구실 공간을 배정받았고, 학위를 마친 후 더 안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으며, 더 많은 강의부담을 졌고, 연구비 지원을 받는 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최초의 연구비 지원신청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았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에 직면한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2000년부터 여성과학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안의 모색 ― 악순환의 고리 끊기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여성과학자의 수가 적다는 것은 여성 고급인력의 직업 기회 박탈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제지만, 과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여학생들이 역할 모형(role model)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어진다는 측면에서 더 큰 문제점을 내포한다. 과학 분야에 진학하려는(혹은 이미 진학한) 학생들은 자신이 의지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멘토(mentor)를 찾기 마련인데 대학의 특정 전공분야에 여자 교수의 수가 극히 적거나 아예 없으면 여학생들은 이 분야가 별로 전망이 없다고 보고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다 보면 과학계로 새로 진입하는 여성들의 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고위직에 진출하는 여성의 수가 다시 적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높은 지위에 도달하는 여성과학자의 수를 늘리는 한편으로, 새로 과학에 진입하는 학생들에게 장래의 전망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채용목표제와 멘토링(mentoring) 체제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공립대를 대상으로 추진되고 있는 채용목표제는 새로 임용되는 교수의 일정 비율을 여성에게 할당해 여자 교수의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또한 국내에서 WISE(Women into Science and Engineering)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멘토링 체제는 교수('멘토')와 학생('멘티')를 서로 이어주어 학생들이 진로 결정이나 직업 선택에 필요한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과학계 진출을 쉽게 해준다.

여성들이 '유리 천장'을 뚫고 과학 분야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세상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재능을 사장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학 그 자체가 편향되지 않고 성평등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길이기도 하다. 여성과학자들의 새로운 도전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출전: <OK논구술.net> 2005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