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구조론(plate tectonics)은 20세기 지구과학 분야에서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이론적 성과이다. 판구조론은 1960년대 말에 제안된 직후부터 하나의 '혁명'으로 일컬어졌고, 불과 몇 년이 지난 1970년대 초가 되면 이미 지구과학자들 대부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판구조론은 고생물학, 지질학, 지진학, 해양학 등 오늘날 지구과학의 분과 학문으로 자리잡은 여러 분야의 연구성과를 종합한 결과로서, 그 이전까지 풀리지 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의문들, 가령 왜 특정 지역에서 화산과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지, 또 알프스나 히말라야 같은 거대한 산맥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같은 문제들에 대해 하나의 이론 틀에 의한 설명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판구조론의 정립 과정이 2차대전 이후의 미-소 냉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학자들의 해석이다. 심지어 저명한 한 지구과학자는 반농담조로 판구조론과 현재의 지구과학은 '냉전의 산물'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얼른 생각할 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얘기다. 판구조론 혁명은 '순수'과학에서 자연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물리학이나 화학의 일부 분야들처럼 위력적인 무기(원자폭탄, 화학무기)를 발명하거나 군사 장비(레이더)를 생산해내는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지구과학에서의 이론적 '혁명'이 냉전과 대체 어떤 연관이 있었다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판구조론의 선조격이 되는 대륙이동설의 등장 시점부터 역사적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올 필요가 있다.
 

알프레드 베게너와 대륙이동설의 제기
 

20세기 초의 지구과학자들에게는 산맥의 형성과 대륙 및 해양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 질문에 대해 당시 과학자들이 선호했던 답은 1846년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그는 나중에 켈빈 경이 된다)이 제안한 중력수축설에 기반한 것이었다. 톰슨은 매우 뜨거운 불덩어리였던 원시 지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냉각되면서 자체 중력에 의해 부피가 줄어들고 있다고 믿었고, 이에 기반해 지구의 나이가 1억 년 정도라는 계산치를 내놓기도 했다. 19세기 말 비엔나대학의 지질학 교수였던 에두아르드 쥐스는 톰슨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지형의 형성을 설명하려 시도했다. 썩어 가는 토마토가 표면이 쭈글쭈글해지는 것처럼, 지구가 수축할 때에도 표면에 '주름'이 잡히게 되는데 이러한 '주름'이 바로 산맥과 계곡의 형성을 의미한다는 것이 쥐스의 생각이었다. 1896년에 베크렐에 의해 우라늄의 방사선이 발견된 이후 지구가 계속 식어가며 수축하고 있다는 쥐스의 견해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지질학자들은 수축설의 기본 가정들을 좀처럼 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기존의 견해에 반기를 들면서 대륙과 해양, 산맥의 형성 과정에 대해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사람이 독일의 기상학자인 알프레드 베게너(1880-1930)였다. 베게너는 원래 행성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내 기상학으로 관심 분야를 바꿨고, 그 외에도 고생물학, 지질학 등 여러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는 1912년부터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915년 『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내어 '대륙이동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지구의 모든 대륙들이 먼 옛날에 '판게아(Pangaea, 그리스어로 '모든 땅'이라는 뜻)'라는 하나의 거대한 대륙으로 뭉쳐 있었는데, 대략 2억 년 전부터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여러 개의 대륙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구가 냉각하면서 수축해 산맥이 형성된다는 쥐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그보다는 대륙의 땅덩어리가 서서히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충돌해 산맥이 생겨났다는 자신의 설명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사실 베게너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시피, 대륙이 과거에도 항상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그가 처음 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300여년 전인 1596년에 이미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인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가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해안선 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이들 대륙이 원래 하나였다가 이후 "지진과 홍수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과 아프리카로부터 뜯겨져 나갔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이런 주장은 19세기에 다시 제기되었는데, 1858년 지질학자인 안토니오 스나이더-펠리그리니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원래 하나의 대륙이었다가 나중에 분리되었다는 견해를 설득력있게 반복했다. 그러나 베게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견해가 다양한 고생물학적, 지질학적, 고기후학적 증거들과 잘 부합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우선 베게너는 대서양 양편에서 특정 생물의 화석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데 주목했다. 대표적인 예가 2억 8천만 년에서 3억 2천만 년 전에 지구상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도마뱀류인 메소사우루스(Mesosaurus)인데, 베게너는 몸 길이가 40cm 안팎에 불과한 이 작은 동물이 바다를 건너 먼 거리를 여행하기에는 너무 약한 생물이라는 점을 들어 과거 한때 두 대륙이 붙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남극, 호주 등에서 모두 화석이 발견되는 양치류 식물인 글로솝테리스(Glossopteris)의 경우 역시 과거에 이들 대륙이 붙어 있었다고 하면 쉽게 설명될 수 있었다. 아울러 대륙이 이동했다고 가정하면 일부 대륙에서 나타나는 과거 기후변화의 증거를 설명하기에도 용이했다. 가령 남극에 석탄이 매장되어 있는 것은 이곳이 예전에는 열대 식물이 울창하게 자랄 수 있는 적도 인근에 위치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며,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빙하의 흔적은 이곳이 한때 극지방 가까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고 그는 주장했다.

원래 독일어로 출간되었던 『대륙과 해양의 기원』은 1922년에 출간된 3판이 영어 등 다른 언어로 번역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와 같은 베게너의 이론을 받아들였던 학자들은 극히 적었고, 대다수의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지구물리학자들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우선 천문학과 기상학을 전공한 '아웃사이더'인 베게너가 지질학과 고생물학의 문제에 대해 '한 수 가르치려' 드는 것 자체에 반감을 품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지질학자가 아닌 베게너의 '자격'을 암암리에 문제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더 큰 문제는 대륙을 움직이는 물리적 힘이 무엇인지를 베게너가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대체 어떤 종류의 힘이 그토록 거대한 땅덩어리를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베게너의 이론에 대한 반감은 특히 미국에서 심했는데, "말도 안된다"거나 "자아도취 상태로 빠져든" 이론이라는 식의 비판은 그나마 준수한 편에 속했고, 과학도 아니라거나 심지어 "아주 위험한" 개념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언사가 동원되기도 했다.

괄괄한 성격의 베게너는 이런 비판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줄기차게 옹호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물리적 근거가 희박한 베게너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다른 대안적 설명을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대륙에서 동일한 화석이 발견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지금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잇고 있는 것과 같은 '육교'가 예전에 여러 대륙들을 이어 주었으나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산맥의 형성에 대해서는 '지각 평형설(isostasy)'이 유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지구 표면을 덮고 있는 지각이 그 두께에 따라 서로 다른 밀도를 갖는다는 이론으로, 가령 산맥과 산맥 아래의 지각은 해양 지각보다 밀도가 낮아서 상대적으로 위로 솟아오르게 된다는 식이었다. 1930년 베게너가 그린랜드로 기상학 원정을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후, 이론의 주창자를 잃은 대륙이동설은 사실상의 동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새로운 증거의 등장과 판구조론의 정립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륙이동설의 지지자는 여전히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다양한 새로운 증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지구과학자들이 답해야 하는 새로운 질문들을 던져놓는 한편으로 베게너의 아이디어를 둘러싼 논쟁을 다시금 부활시켰다.

먼저 해저 지형과 해저 지각의 나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나타났다. 19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양의 수심에 대해 추측만 해볼 따름이었고, 해저는 별다른 지형이랄 만한 것이 없이 평평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긴 줄에 추를 달아 바다의 깊이를 재 보려는 체계적인 시도가 등장했고, 1855년에는 예상을 뒤엎고 대서양 한가운데 해저 산맥이 있다는 최초의 증거가 제시되었다. 이는 1860년대에 미국과 영국을 잇는 대서양 해저 전신 케이블을 부설하는 과정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때까지 아직 원시적인 수준이었던 측정 장비는 1차대전을 계기로 음파를 이용한 수심 측정 장치가 개발되면서 크게 발전했다. 1950년대 들어서는 각국이 해양 탐사에 나서면서 그러한 해저 산맥이 대서양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대양을 마치 야구공의 솔기처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저 산맥은 총 길이가 5만 km가 넘었고, 평균 높이도 4천 5백 미터에 달했다.

한편 1947년에 미국의 탐사선 아틀란티스 호에 승선했던 지진학자들은 대서양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퇴적층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얇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구상에 바다가 존재한 것이 대략 40억 년 전부터임을 감안한다면 훨씬 두꺼운 퇴적층이 존재해야 했지만, 실제로 측정된 퇴적층의 두께는 2억 년 정도 된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이후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해저 퇴적물의 연대측정이 이루어지면서 다시금 확인되었다. 해저 암석은 가장 오래된 것도 3억 년을 넘기는 경우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왜 대륙 지각과 달리 해양 지각의 나이가 훨씬 젊은가 하는 골치아픈 질문을 던졌다.

1950년대는 또한 바다 밑에 대한 고지자기학 연구가 새로운 성과를 내놓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들어 과학자들은 해저 암석의 자기 극성을 알아볼 수 있는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자기계라 불리는 측정 장치는 비행기에서 해저의 잠수함을 탐지할 수 있도록 2차대전기에 개발되었던 기기를 변형한 것이었다. 이 장비를 가지고 해저의 자기 극성을 측정해 이를 지도로 만드는 작업이 1950년대 내내 계속되었는데, 그 결과는 해저 자기의 극성이 마치 얼룩말 무늬와 같이 규칙적인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해저 산맥을 중심으로 양쪽에 정상 극성과 역전 극성의 띠가 번갈아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나중에 자기 띠무늬(magnetic striping)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지자기학 연구의 이전 성과들 고지자기학은 과거의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추적하는 학문 분야인데, 이미 20세기 초에 고지자기학자들은 강한 자성(磁性)을 갖는 자철광 성분을 많이 함유한 암석에 크게 두 종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암석 조각은 그 자체로 작은 나침반과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는데, 이 중 정상 극성(normal polarity)을 지닌 암석은 오늘날의 지구 자기장과 같은 극성을 가리켰다. 즉 암석의 N극 쪽이 현재의 북극 방향을 가리켰고 S극이 남극을 가리켰다. 반면 역전 극성(reversed polarity)을 가진 암석은 반대로 N극이 현재의 남극 방향을, S극이 북극 방향을 가리켰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마그마가 식어 화성암을 형성할 때, 그 속에 있는 자철광 성분이 암석이 형성되었을 때의 지구 자기장의 방향을 그대로 '기록'한 채 굳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고지자기학자들은 과거 지구 자기장의 방향이 여러 차례 역전되었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 놓고 있었다.

광범한 해저 산맥의 존재, 해저 지각의 예외적으로 젊은 나이, 자기 띠무늬 현상과 같은 새로운 증거들은 이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 체계의 정립을 요구했다. 1963년 프린스턴대학의 해리 헤스는 해저 확장설(seafloor spreading)을 제시함으로써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는 2차대전 때 해군 대령으로 활동했고 전쟁 후 프린스턴대학의 지질학 교수를 지내면서도 군복을 완전히 벗지 않고 예비역 장성까지 진급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뜨거운 마그마가 해저 산맥에서 솟아올라 새로운 지각을 형성하며, 이렇게 생성된 해저 지각은 차차 해저 산맥으로부터 밀려나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깊은 해구 속으로 사라진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는 해저 산맥의 온도가 주위보다 높게 나타나는 이유, 해저 지각의 나이가 젊은 이유, 자기 띠무늬가 생기는 이유 등을 한꺼번에 설명해 주었다.

뒤이어 1967년과 1968년에는 프린스턴에 있던 제이슨 모건과 케임브리지에 있던 댄 매켄지가 각각 판구조론의 이론적 틀을 제시했다. 이들에 따르면 지구의 표면은 각각 수백 km 정도의 두께를 가진 10여개의 '판'으로 덮여 있고, 대륙이나 해양의 움직임이 아닌 이들 '판'의 움직임이 각종의 지질 현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가령 두 개의 판이 갈라지거나 하나의 판이 다른 판 밑으로 끼어들어가는 곳에서는 지진이나 화산 등의 활동이 활발하며, 두 개의 대륙 판이 충돌하는 곳에서는 산맥이 형성된다는 설명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판과 판 사이의 경계가 반드시 대륙과 해양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륙이동설과 구분되지만, 대륙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규명해냈다는 점에서는 베게너의 이론을 현대적으로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판구조론 정립의 냉전적 맥락
 

지금까지 판구조론이 대륙이동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지구과학의 다양한 분과 학문들을 한데 묶는 현대적 종합을 이뤄낸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이 대체 냉전과는 어떤 상관이 있었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1950년대 이후 지구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 틀의 형성을 촉진했던 새로운 증거들 모두가 냉전 하에서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기에 이미 군대는 잠수함 작전을 위한 해저 음파 탐지, 전쟁수행에 긴요한 새로운 석탄·가스·석유 매장지 탐사 등을 위해 지구과학자들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군대와의 밀월관계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군대는 잠수함 작전을 위해 자세한 해저 지도(특히 연안 지역의)가 있어야 했고, 이를 위한 해저 탐사에 아낌없이 돈을 지원했다. 또한 핵실험의 위력을 측정하기 위해 지진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데, 196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정교한 지진 감지 네트워크가 발전하게 된 배경도 1963년에 체결된 제한핵실험금지조약의 이행 여부를 상호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항미사일의 설계와 유도를 위해 지구물리학과 측지학(geodesics)에 대한 지원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군대는 날씨를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군사 작전에서 우위를 점하기를 원했고, 이는 기상학의 일부 분과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졌다.

군대와 지구과학자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계약'은 지구과학 연구가 수행되는 방식도 완전히 바꿔 놓았다.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지구과학의 여러 분과학문들은 석유 탐사를 제외하면 실용성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으로 여겨졌고, 대다수의 지질학자와 해양학자들은 대학으로부터 불과 몇백 달러 정도의 연구비를 얻고 자비를 보태어 연구를 꾸려나갔다. 이 시기만 해도 지질학자들은 방학 때를 이용해 옆구리에 망치 등의 간단한 도구를 매달고 식량과 비품이 든 배낭을 맨 채 며칠씩 야영을 하면서 황무지를 돌아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 해양학자 역시 해양 탐사를 위해서는 어선이나 군함을 얻어 타거나 학회 등이 지원한 소형 연구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군대가 당장의 실용성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지구과학 연구를 후하게 지원하면서부터 이런 모습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황무지에서 연구하는 지질학자에게는 헬리콥터가 지원되었고, 해양학자들은 값비싼 장비들을 가득 실은 해군 소속의 연구선을 타고 해양 탐사를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군대의 '개입'은 지구과학 연구의 질적 비약을 가능케 했지만, 그에 따른 대가도 수반했다. 이제 지구과학자들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자유분방한 연구의 이점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군대의 돈을 받는 학자들은 1950년대의 매카시즘 열풍(이른바 '빨갱이 사냥') 속에서 정부의 신원조회를 통과해야만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해저 지도 같은 연구성과 중 일부는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논문으로 발표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판구조론 혁명, 더 넓게는 오늘날의 지구과학 연구 역시 20세기 후반을 휩쓸었던 냉전의 자장권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출전: <OK논구술.net> 200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