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사회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일반대중의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굳이 이런저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이, 현대 과학기술의 성과에 의해 만들어진 여러 인공물(artifact)들이 없으면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제 상식에 속할 터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과학기술이 생산되고 이를 위한 정책이 입안되는 과정은 일반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 전문가들의 독점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과학기술의 난해함과 전문성, 과학기술자들이 갖는 가치중립적 성격 등으로 돌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과학기술(정책)의 생산에 일반인들의 '개입'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 연구들은 이런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과학/기술사, 과학/기술철학, 과학/기술사회학 등의 연구성과들은 과학기술의 성격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능케 해줌과 동시에 과학기술 전문가와 일반인(layman)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과학기술 영역에 대한 시민참여의 근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
 

1960년대 초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유일무이한 과학 방법론과 '합리적'인 과학자사회에 대한 신화를 파괴함으로써 과학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촉발하였다. 이로부터 영향받아 1970년대에는 과학지식 그 자체와 그것의 생성 과정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과학사회학, 즉 과학지식사회학 연구가 등장하게 되었다. 영국 에딘버러 대학과 바스 대학에 자리잡은 배리 반즈, 데이빗 블루어, 스티븐 셰핀, 해리 콜린즈 등의 연구자들은, 과학지식의 생성 과정이 과학자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영향받으며 과학 논쟁의 종결은 과학자집단 사이의 협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과학자들의 활동과 그 결과물로서의 과학지식이 '사회'로부터 분리된 것이라는 뿌리깊은 통념을 공격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실체로 흔히 인지되어 오던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해 주었다.

한편 과학지식사회학, 축적된 기술사 연구, 기술에 대한 맑스주의적·페미니즘적 접근 등으로부터 자극받아 1980년대에는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으로 통칭되는 기술사회학의 여러 조류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특정한 기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연구를 집중하여, 그 과정에 관여하는 여러 '행위자(actor)'들의 이해관계나 가치체계가 기술이 특정한 형태로 틀지워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기술의 발전경로를 이전보다 우수한 인공물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 인공물들의 연쇄로 파악하는 단선적 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특정한 기능을 갖는 인공물을 만들어 내는 '유일하게 가장 좋은' 설계/생산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통념에 반기를 들었다.

이와 같이 과학기술을 '사회적 구성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은 과학기술이 사회와는 동떨어져 그 내적 논리에 의해 발전해 간다는 신화를 파괴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개입이 가능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 주었다고 하겠다.
 

대중의 과학이해의 '결핍 모형' 비판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주류 STS 분야는 주로 과학기술의 생산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사회 내부 혹은 특정한 기술 프로젝트 내부의 동학(dynamics)을 기술하는 데 대체로 주력하였고 일반대중의 역할이나 전문가-일반인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1980년대 이후 새로 등장한 STS의 한 분야인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PUS)'가 메꿔주게 된다.

PUS 분야가 최근 관심의 초점이 된 배경에는 일차적으로 과학자/정책수립자 등 과학기술 엘리트의 이해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1960년대 이후 핵, 환경, 자동화, 작업장안전, 생명공학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쟁점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점차 빈발하게 되자 과학기술 엘리트 사이에 일반대중이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1980년대 중반 이후 하나의 학문분야로까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관심을 반영해, PUS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초기 논의들은 과학기술 대중논쟁이 왜 일어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답을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무지'에서 찾았다. 즉, 일반대중은 과학기술에 대해 '뭘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특정한 과학기술의 도입을 반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일반대중이 과학기술 지식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조사한 대규모 설문결과는 일반대중의 '무지'를 입증해 주는 듯 보였고, 따라서 상황의 타개를 위해서는 과학을 '대중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PUS 연구자 공동체 내에서 이런 문제인식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점차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PUS를 바라보는 앞서와 같은 관점을 '결핍 모형(deficit model)'이라고 부르면서 비판을 정식화하였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결핍 모형은 두 가지 잘못된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우선 일반대중이 과학지식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그들이 과학에 '무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과학 활동은 교과서에 나오는 잘 정의된 일군의 지식들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실행중인 과학은 다양한 불확실한 요소를 그 속에 포괄하는 활동이며, 또한 오늘날의 과학은 단순한 지식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강력한 사회제도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일반대중의 과학 이해는 과학 활동에 내재한 불확실성에 대한 이해, 사회제도로서의 과학에 대한 이해 등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일반대중이 과학에 반드시 '무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과학대중화의 주창자들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PUS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측면이 아니라 '신뢰'의 측면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곧,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의 양이 그것에 대한 대중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즉, 과학기술과 이를 둘러싼 사회제도들에 대해 대중의 신뢰를 궁극적으로 얻어내지 못하는 이상, 과학 대중화를 통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전달한다고 해도 특정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반대와 거부감은 수그러들지 않으며 과학기술 논쟁을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영국을 강타한 광우병 파동이나 유전자조작식품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결핍 모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대중과 과학기술의 현재적 관계에 있어 일방적인 과학 대중화를 통한 지식 전달 이외의 어떤 대안이 필요함을 말해 주고 있다.
 

대안으로서의 과학기술 민주화
 

여기서 필자는 '과학기술 민주화'라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얼핏 듣기에 이 말은 상당한 오해와 혼란을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정치 민주화, 경제 민주화는 익히 들은 개념일 테지만, '과학기술 민주화'란 대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기술 민주화란 과학기술과 관련된 중요한 사회적·정책적 의사결정 과정에 다양한 관련집단뿐 아니라 일반시민의 참여까지를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세기, 그 중에서도 특히 2차대전 이후를 돌이켜 보면, 전지구적으로 민주주의의 물결이 확산되는 한편으로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지적되면서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온 반면, 유독 과학기술 영역만큼은 그런 경향에서 예외로 남아 주요한 의사결정을 과학기술 엘리트가 독점해 왔다. 과학기술 민주화는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기된 것이다.

물론 혹자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과학기술 민주화, 즉 과학기술정책에서의 의사결정에 대한 의미있는 시민참여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회의적 시각이 그것이다. 이런 시각은 과연 일반시민이 과학기술관련 정책결정의 근간을 이루는 과학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라는 과학자들의 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과학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이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사회적·제도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의미할 수 있으며, 설사 일반시민이 극히 세부적인 과학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자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문과학자들보다 더욱 잘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1998년과 1999년에 유전자조작식품과 생명복제를 주제로 각각 열렸던 두 차례의 합의회의는, 해당 과학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기본적인 과학적 사실은 물론 이를 둘러싼 제반 쟁점들을 훌륭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숙의(deliberation)에 기반한 정책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보여 준 바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정책적으로 인식하고 대안적인 움직임을 지원하고 있는 서구의 여러 국가들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직 '과학기술 민주화'라는 용어 자체부터가 생소하게 여겨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1997년부터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구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를 중심으로 이런 문제의식이 조금씩 확산되면서 지지를 얻어 가고 있으며, 합의회의를 비롯해 시민배심원, 포커스 그룹, 시나리오 워크샵 등과 같이 일반시민이 주도하는 정책참여 방식에 대한 연구, 소개, 도입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단계로 가져가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연대대학원신문』 200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