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쿤과 과학전쟁 (1)
 
 

쟈우딘 사다르
 
 

포스트모던한 속임수: 소칼 사건의 배경
 

1995년 초, 저널 ≪소셜 텍스트 Social Text≫의 편집자들은 '과학전쟁(Science Wars)'을 다룬 특집호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럿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의 현대문화비판분석센터(Center for the Critical Analysis of Contemporary Culture)에서 편집 책임을 맡고 듀크대 출판부(Duke University Press)에서 발간하는 ≪소셜 텍스트≫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이론 분야의 주요 학술지로 손꼽혀 온 저널이다. '과학전쟁'에 대해 다룬 ≪소셜 텍스트≫ 합본호는, 과학을 공세적으로 옹호하면서 이와 동시에 '문화 연구'와 과학 비평의 학문적 충실성 그 자체를 문제삼는 당시의 숱한 시도들에 맞서, 그에 대한 답변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리처드 헤른슈타인과 찰스 머레이가 공저한 『벨 곡선 The Bell Curve』(1994)의 출간은 IQ와 우생학에 관한 오랜 논쟁에 다시 불을 붙여 놓았다. 스미소니언 미국사 박물관에서 열린 '미국인의 삶 속에서의 과학'이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놓고, 많은 전문 과학학회들이 과학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못한 이미지를 전시했다고 강한 공격을 퍼부은 사건도 있었다. 넉넉한 자금에 홍보도 잘된,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학술회의들이 잇따라 열려, 서로 폭넓게 제휴한 과학자들, 사회과학자들, 그리고 여타 학자들을 과학 옹호 전선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이런 학술회의들 중 가장 널리 홍보되었고 또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뉴욕과학아카데미가 후원해 1995년 여름 뉴욕에서 열린 '과학과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제목의 학술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 분야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사회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페미니스트들이 과학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회의에서는 과학에 대한 사회적 이론들을 공격했고, 페미니스트 인식론은 '부질없는 짓거리'이고 과학 비평은 '흔해빠진 넌센스'라고 선언했으며, 대다수의 과학 비평가들을 '돌팔이들'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과학전쟁'을 다룬 ≪소셜 텍스트≫ 특집호가 나오게끔 자극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보다 1년 전에 출간된 폴 그로스와 노먼 레빗의 책 『고등미신 ― 학계 좌파와 과학과의 불화 Higher Superstition: The Academic Left and Its Quarrels with Science』(1994)였다. 생물학자인 그로스와 수학자인 레빗은 "미국의 학문공동체에서 규모가 크고 영향력있는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학계 좌파'가 본질적으로 반과학적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반과학적 적대감은 학계 좌파들이 정치·경제적 세력들에 의해 과학기술이 이용되는 방식 ― 군사 무기, 감시, 산업 오염, 환경 파괴 등에서와 같이 ― 을 싫어하는 데 단순히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그와 같은 과학기술의 오용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스와 레빗에 따르면, 적대감은 "과학이 그 속에서 제도화되는 사회구조에까지 확장되고 있으며, (실제와 부합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과학자들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사고방식에까지 미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과학지식의 실질적인 내용에 대해, 그리고 과학지식이 충분히 신뢰할 만하며 건전한 방법론에 입각하고 있다는 전제 ― 식자층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해도 됨직한 ― 에 대해 공공연한 적대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로스와 레빗은 이러한 적대감이 '중세적'인 것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이는 '계몽사조의 가장 강력한 유산'에 대한 명백한 거부이자 '진보'에 대한 부정이라고 덧붙였다.

'과학전쟁' 특집호의 목적은 페미니스트, 다문화주의, 그리고 과학에 대한 사회적 비평에 맞서 '악을 써대는 반발의 어조'에 답하는 것이었다. ≪소셜 텍스트≫는 이런 반발이 반과학 운동에 대해 겁을 주기 위한 얘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과학에서의 젠더의존적인 가정들, 과학적 경험주의의 자본주의적 토대, 사회와 환경에 대한 과학기술의 파괴적 영향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나서는 사람들이 움찔해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고안된 반발이라는 것이다. 뉴욕대 미국학 프로그램의 주임교수이자 비판과학 운동의 권위자인 앤드류 로스는 특집호의 서문에서, "과학의 권위가 하락했다거나, 혹은 비합리주의 세력이 사방에서 공격해 과학이 위험에 처했다는 식의 항의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썼다. 과학은 이미 새로운 종교가 되어버렸고, 과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제 문명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로스는 단언했다. 오늘날 과학의 평판이 완전히 손상되고 또 과학이 산업화·상품화되어 왔음을 감안해 본다면, "오염되지 않은 진리 주장에 대한 믿음이 전투적인 형태로 부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 전쟁의 배후에 위치한 과학 전사(crusader)들이 과학이라는 신전 바깥으로 내던지려는 대상은 자금 제공자들[즉, 과학을 상업화시킨 장본인들 ― 역주]이 아니다. 그들의 분노는 무엇보다도 그 신전이 어떻게 지어졌으며 그곳에서의 의식(儀式, ritual)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보여주는 이들, 즉 구성주의적 학계 좌파에게 겨누어져 있다." ≪소셜 텍스트≫ 특집호는 과학의 수호자들이 제기한 공격에 답하기 위해 이런 구성주의자들 중 많은 수를 불러모았는데, 그 중에는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대가인 샌드라 하딩, 사회적 인식론의 창시자인 스티브 풀러, 그리고 영국 급진과학운동에서 명성을 날렸던 힐러리 로즈 등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 뒤늦게 한 편의 논문이 덧붙여졌다.

저널 편집 작업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즈음, 한 편의 논문이 '과학전쟁' 특집호에 새로 투고되었다. 「경계를 넘나들기: 변형적인 해석적 양자중력을 향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논문은 뉴욕대 물리학과 교수인 앨런 소칼이 쓴 것이었다. 이 논문은 ≪소셜 텍스트≫의 1996년 봄/여름 합본호('과학전쟁' 특집호)에 때맞춰 실렸다.

소칼의 논문에 대해 합당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졌더라면 이는 금새 편집자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 논문은 현재 같은 틀로 설명할 수 없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합함으로써 포스트모던한 '해방적' 과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 논문에는 매우 유쾌할 정도의 어리석은 주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논문은 파이(?)가 보편적인 상수가 아니라 실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상대적이며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역사성'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논문이 제시한 상대주의는 정신이상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정도였다. 논문에 붙은 참고문헌 목록은 분명 과학 비평가들의 '인명사전(who's who)'을 의도한 것처럼 보였으며, 논문의 내용과는 거의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소칼은 데리다, 리오따르, 라깡과 같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대가들의 인용과 ≪소셜 텍스트≫의 편집자인 앤드류 로스와 스탠리 아로노비츠의 글에 대한 아부성 인용을 통해 자신의 어리석은 주장들을 영리하게 은폐함으로써 패러디 논문을 싣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소칼은 즉각 자신의 날조 사실을 ≪링구아 프랑카 Lingua Franca≫의 지면에 폭로했다. 스캔들은 ≪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s≫,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르 몽드 Le Monde≫와 여타 신문들의 1면을 강타했다. 과학전쟁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과학자들과 그 비판자들 사이에 진행되어 온 기나긴 전쟁에서 가장 최근에 벌어진 집중포화에 해당한다. 이는 많은 희생자들 ― 경력의 손상과 아이디어의 주변화, 양자 모두의 의미에서 ― 을 낳고 과학의 정신 그 자체에도 영향을 준 격렬한 전쟁이었다. 먼저 우리는 1960년대와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의 출간을 과학의 수호자와 비판자들 사이에 공개적 전쟁이 촉발되었던 시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쿤은 과학이 객관성과 진리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이미 받아들여진 신념 양식 내에서 문제풀이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쿤의 아이디어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역사적 맥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기 전에도 과학자들과 그 비판자들간의 적대감은 수십 년 동안 수면 바로 아래에서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과학전쟁의 기원을 급진과학운동의 형성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과학전쟁의 기원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한 세기 동안[즉, 19세기 내내 ―역주] 과학은 영웅적인 용어들을 빌어 널리 묘사되어 왔다. 고독한 과학자들은 오직 절대진리만을 위해 모든 것과 맞서 싸웠다. 과학은 순수하고 자율적인 행위였으며, 기술과 산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사회를 초월한 곳에 위치했다. 과학 연구의 순수성은 특히 연구가 지식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고 미래 세대 과학자들이 훈련받는 곳인 대학에서 보증되었다. '과학자(scientist)'라는 용어는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윌리엄 휴얼(1794-1866)에 의해 처음 쓰였다; 그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자연철학자'라고 불렸다. 휴얼은 과학자들이 독특한 사회적 역할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보호를 필요로 하며 사회의 여타 부문으로부터 자율적인 그런 존재였다. 과학자들, 그 중에서도 위대한 과학자들이 과학사가 및 과학철학자들의 탐구 대상이었고, 이에 따라 과학사는 위대한 과학자들이 해낸 발견들, 그리고 과학의 유일무이한 객관성, 불편부당성,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발견들에 대한 정당화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과학이 항상 진리라고 하더라도 교정해야 할 '오류'들은 있게 마련이었다. 역사책에서의 설명은, 일단 진리가 밝혀진 후에 오류를 계속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일종의 나쁜 과학자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절대적 순수성에 관해 모든 이들이 완전히 납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과학이 미래에 나아갈 방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1838-1916)는 실험물리학자들이 점차로 산업체 및 군부와 연관을 키워 가고 있던 1차 대전 이전의 여러 해 동안, 인간적인 목표 충족에 맞춰 보다 규모를 축소시킨 이용자친화적 과학을 할 것을 주장했다. 마흐는 또다른 저명한 독일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1858-1947)의 반박을 받았는데, 플랑크는 보다 자율적인 과학의 이상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그들간의 논쟁은 많은 중요한 인식론적·정치적 쟁점들에 걸쳐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오랜 반향을 남긴 것은 과학철학에서의 실재론(realism, 주어진 진술이 인간의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에 의해 예외 없이 진위가 판별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도구론(instrumentalism, 경험적 증거에 의해 지지되는 것 이상으로 진리 혹은 실재에 대한 주장을 할 수는 없다는 이론) 사이의 논쟁이었다. 이들간의 논쟁에서 플랑크가 승리한 것으로 널리 인식됨에 따라, 진리에 대한 총체적 신념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실험과학자의 플라톤적 시각의 수용은 더욱 더 공고화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과학의 순수성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믿음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전쟁은 대영 제국의 기술적 취약점을 드러내었고 과학의 관리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게끔 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학이 유일한 연구기관으로서 누리던 지위는 공공 자금과 사적 자금을 지원받는 새로운 기관들이 설립됨에 따라 깨어졌다.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 특히 맑스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과학과 경제 사이의 연관은 명백하게 드러나 보였다. 이는 1918년 과학에 대해 확실한 사회주의적 의제를 내건 영국과학노동자연맹(National Union of Scientific Workers, 나중에 과학노동자연합[Association of Scientific Workers]으로 개칭)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중앙집중화된 계획과 과학에 대한 지출 증대는 과학이 지닌 해방적 잠재력을 풀어놓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연관은 1931년에 명시적으로 제시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해에 런던에서 열린 과학사 학술회의에 초청되었던 (당시) 소련 대표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학술회의 때 있었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보리스 헤센이 「뉴튼의 '프린키피아'의 사회적·경제적 기원」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었다. 헤센은 뉴튼의 주요 저작인 '프린키피아'가 과학적 천재의 산물 혹은 과학의 내적 논리의 결과물이 아니라 17세기 영국의 사회적·경제적 힘들이 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 책이 영국 부르주아지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 학술회의에 참가했던 영국의 젊은 좌파 과학자 및 과학사학자들이 헤센의 주장의 완전한 의미를 알아채는 것에는 수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1939년 존 버널의 책 『과학의 사회적 기능 The Social Function of Science』의 출간과 함께 급진과학운동이 진정으로 도래했다. 버널은 과학이 그 본성상 사회주의의 동맹 세력이라고 보았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의 기능은 민중에게 봉사하고 그들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버널은 자신이 지닌 맑스주의적 인도주의를 기술관료적이고 환원주의적인 동기와 결합시켰다. 버널은 [과학과 연관된] 그 모든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탐구 양식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이 오염되지만 않는다면 모든 이들을 위해 평화와 풍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소련에서 처음 제시된 '사회주의 과학'의 이념은 영국에서도 널리 퍼졌다. 그러나 정작 소련에서는 그 이념의 실현이 조악하고 기회주의적인 활동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뤼셍코 사건(Lysenko affair) ― 일군의 소련 유전학자들이 환경적 조작과 접목에 의해 유전이 변형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주류였던 멘델 유전학을 부정했던 사건 ― 은 사회주의 과학의 이념에 엄청난 손상을 입혔다. 후일, 급진성을 전면에 내걸었던 단체인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영국 협회(British Society for Social Responsibility in Science, BSSRS)는 "사회주의 과학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놓고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거기서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대중의 과학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2차 세계대전은 1차 대전이 시작했던 과정을 완결지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과학은 전쟁터에서 위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였다. 과학자들은 새롭고 더욱 치명적인 형태의 화학 무기와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원자폭탄을 구상하고 생산하고 결국에는 그것의 무시무시한 힘을 풀어놓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은 과학의 순수성이 통용되었던 시대의 종언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제 과학과 전쟁간의 연관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고, 과학과 정치의 공모관계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며, 모든 과학적 자율성의 관념들은 말끔히 증발해 버렸다. 이제껏 과학의 혜택에 관해 대체로 관심을 보여 왔던 대중은 갑자기 그것의 파괴적인 내리막길에 대해 우려를 하게 되었다.

군사화된 과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맨해턴 프로젝트에 의해 완전히 환멸을 느끼게 된 핵물리학자들에 의해 ≪원자과학자회보 Bulletin of Atomic Scientists≫가 미국에서 창간됨으로써 시작되었고, 1950년대 후반 핵군비 축소를 위한 행동(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CND)의 등장으로 더욱 공고화되었다. 우리가 지금 과학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의 최초의 포화는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났다. 많은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이 물리학 발전의 피할 수 없는 귀결로 간주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렇게 되면 원자폭탄에 대해 윤리적 우려를 지닌 젊은 과학자들이 물리학 연구를 단념하게 될 거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에 맞서 과학자들이 취한 책략은 과학은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과학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것을 선하게 혹은 악하게 이용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이다, 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과학의 중립성 주장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과학을 방어하는 주요한 논증이 되었고, 많은 과학자들이 한편으로 정치적 급진성을 표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국방부 연구자금 지원까지 받아가며 아무 거리낌없이 원자물리학 분야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급진과학운동은 과학의 중립성을 문제삼고 그 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나서는 등의 활동을 펼쳤지만, 여전히 과학을 서구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했다. 과학에 관한 거대한 신화들 중 하나는 그것이 여타의 문화나 문명들로부터의 기여가 거의 혹은 아예 없이 온전히 서구 문명이 이뤄낸 산물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지금껏 서구의 과학사는 비서구권 문화의 과학을 거의 눈에 띄지 않게끔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급진적 과학사학자들은 사회적 힘들이 어떻게 과학의 발전을 형성하는가를 보여 주는 데 열심이었지만, 과학의 형성에서 비서구권 문화들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예컨대 버널은 자신의 저서 『역사 속의 과학 Science in History』(초판 1954)를 집필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난 30년간 대개는 맑스주의 사상의 영향에 힘입어, 자연과학자들의 연구에 이용되는 수단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론적 접근에 영향을 주는 아이디어 역시 사회의 사건들이나 압력에 의해 조건지워진다는 인식이 성장해 왔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는 열렬하게 지지되는 만큼이나 격렬하게 이의가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 논쟁 과정에서 과학이 사회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보다 초기의 관점이 지닌 중요성은 덜 부각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나의 목표는 자연과학의 진보가 사회 그 자체의 진보를 결정하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다시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과학적 발견의 응용에 의해 경제적 변화들이 일어났다는 점뿐 아니라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영향이 일반적 사고틀에 효과를 미쳤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버널은 여기서의 '사회'를 자율적인 서구 사회로 상정하였고, 그에게 있어 문명(항상 단수로 표기되는)은 본질적으로 그리스에서 시작해 '우리 시대'까지 일직선으로 진보하는 서구 문명을 의미했다. 총 4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저작에서 그는 이슬람 과학에 10페이지가 채 못되는 분량을 할애했다. 중국과 인도는 아예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사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토대는 진정 기념비적인 두 개의 연구업적에 의해 세워졌다. 첫 번째는 1927년부터 1948년 사이에 출간된 조지 사튼의 저서 『과학사 서설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Science』이었다. 사튼의 연구에서 놀라운 점은 연대기적 서술을 따라 총 4권으로 구성된 이 저작에서 처음 3권의 내용 대부분이 이슬람 과학에 대한 서술에 바쳐졌다는 사실이다. 사튼은 서구 과학이 이슬람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과학을 전적으로 서구적인 기획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이슬람의 온전한 과학적 기여 ― 양과 질 모두의 측면에서 ― 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연구는 여러 권으로 구성된 조셉 니덤의 방대한 저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이었는데, 195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출간되고 있는 이 저작은 중국에 대해 같은 기능을 더욱 설득력있게 수행했다.

사튼과 니덤은 모두 과학이 서구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비서구권 사회 역시 고도로 발달되고 정교한 과학 문화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에게 있어 서로 다른 과학들, 혹은 서로 다른 과학의 정의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니덤은 중국 과학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들 ― 예컨대 침술과 같은 ― 을 추려내어 여기에 '비과학'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과학은 정치로 오염될 수도 있고 군부와 연루될 수도 있지만, 대체로 볼 때는 여전히 중립적·객관적·보편적인 진리 추구로 이해되었다.

미국에서 1950년대 ― 쿤이 여러 대학들을 옮겨다니던 시기 ― 는 극도의 정치적 억압이 지배했던 시기였다. 미국의 대학들에서는 공포 분위기가 실제로 전개되고 있었다. '반미행위조사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라는 곳에서 대학 당국에 압력을 가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아무런 구제책도 없이 해고되어 피해를 입었다. 우리는 많은 헐리우드 인사들이 매카시 상원위원의 반미행위 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통을 겪은 학자들은 수도 더 많았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사회적(social)'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곧 '사회주의자(socialist)'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는 '동무(Commie)'라는 말과 동격이었다. 과학의 사회사를 주장해 왔던 몇몇 학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다른 학자들은 위협을 받았다. 당시의 지도적 과학사학자였던 알렉산드르 코아레는 갈릴레오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작업의 사회적 맥락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가 잘 알려진 실험을 실제로 했다는 것조차 의심할 정도로 관념화된 갈릴레오의 상을 선보였다. 과학 혹은 과학자들에 대한 사회적 영향을 막연하게나마 암시하는 모든 것들을 코아레는 '맑스주의적'인 것이라고 공격하면서 이를 평가절하했다. 코아레의 영향력 때문에 과학사에 대한 버널의 '외적' 접근법은 학문의 전당 바깥에 굳게 위치지어지게 되었다.

원자폭탄 때문에 자신들의 위신이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한 물리학자들은 과학적 엄정성의 수호자로 자청해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조롱한 대상은 과학에 대한 학문적 비평이 아니라 ― 미국 내에서는 이런 흐름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 창조론과 같은 비합리적 세력들이었다. 거대한 고에너지 프로젝트들의 취소와 함께 나타난 '거대과학'의 위기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눈앞의 적을 만들어내게끔 강제했다. 다행히도 그런 것이 하나 있었다. 앨프리드 디 그라찌아의 책 『벨리콥스키 사건 The Velikovsky Affair』(1968)의 출간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매뉴얼 벨리콥스키는 다국어에 능통한 정신분석학자였는데, 그는 성서에 나오는 시기에 행성들의 궤도에 격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자신의 별난 논제를 증명하기 위해 산더미같은 역사적 사료를 섭렵한 후 성경에 나오는 헤브루 문명의 선차성을 주장했다. 그는 『충돌하는 세계 Worlds in Collision』(1950)를 비롯한 여러 저서들을 통해 인근 행성들과 그 내부의 우주공간이 지니는 다양한 특성들을 예측했는데, 이는 나중에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천체물리학자들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고 그 중 일부는 히스테리컬한 어조를 띠기도 했다. 디 그라찌아는 과학자들이 벨리콥스키의 주장을 조사하고 다루는 과정에서 모든 통상적인 규칙들을 어겼음을 보여 주었다. 과학전쟁에서의 이 작은 충돌은 나중에 칼 세이건이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모임에서 벨리콥스키와 직접 일대일로 논쟁을 벌이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 늙은 벨리콥스키가 비록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똑똑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생각되긴 했지만, 실은 괴짜 노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갑자기 모든 이들에게 분명히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벨리콥스키 사건과 이와 유사한 종류의 여타 사건들은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수행했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적들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대중과 정부의 지원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 모든 사실은 미국에서 과학의 사회적 차원들을 무시한 것이 학자들의 신중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냉전의 결과였음을 잘 보여 준다.

영국의 1950년대 역시 급진주의자들에게는 힘든 시기였지만, 그래도 조셉 니덤이 『중국의 과학과 문명』 1권에서 마오저뚱에게 찬사를 보낸 것 같은 상황이 여전히 가능했다. 니덤은 한국전쟁 때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북한 측의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학계에서 상당히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케임브리지 카이어스 칼리지의 학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결국 영국에서는 공인된 급진주의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던 편이었다. 1960년대 말이 되면 영국의 급진과학운동은 매우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게 되었다 ― 비록 그 중에서 실제 학문적 활동에 종사하는 급진주의자들은 몇 안되었지만. 이들 중에 두드러진 인물로는 먼저 '과학과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종합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던 힐러리 로즈와 스티븐 로즈가 있었다. 다윈과 다윈주의에 대한 사회적 해석을 제기했던(그래서 다윈 성인전 산업[Darwin hagiographical industry]을 격분케 했던) 로버트 영은 나중에 급진과학운동의 거물이 되었고 『급진과학저널 Radical Science Journal』에 지도격으로 깊숙이 관여했다. 그리고 제리 라베츠가 있었는데, 그는 과학사 연구 외에 핵산업의 광기와 '거대과학' 내부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분석에 주로 관여했다.

쿤이 이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자신의 연구를 진행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냉전 분위기 속에서였다.
 

쿤과 『과학혁명의 구조』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를 출간함으로써 토머스 새뮤얼 쿤은 과학의 이해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제쳤다.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1922년에 태어난 쿤은 하버드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계속해서 그는 이론물리학 분야로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학위논문을 마치기 직전에 과학사로 전공을 바꿀 것을 결심했다. 『과학혁명의 구조』 서문에 있는 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비자연계 학생에게 물리과학을 가르치는 실험적인 학부 과정에 참여하게 된 행운은 나에게 처음으로 낡아빠진 과학 이론과 실천에 접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과학의 본질과 그 특별한 성공의 이유에 대해서 품고 있던 나의 기본 관념의 일부를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관념들은 더러는 과학적 훈련 과정 그 자체로부터 이미 터득했던 것들이었고, 더러는 과학철학에 대한 오랫동안의 취미와도 같은 관심으로부터 얻어진 것이었다. 아무튼 그 관념들의 교육적 효용과 추상적 개연성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관념들은 역사적 고찰에서 드러났던 과학의 실제와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그런 관념이 과학의 여러 논의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들이 사실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내게는 철저히 따져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이런 곡절로 해서 내 생애의 계획은 그 방향을 급선회하여 물리학으로부터 과학사로, 그 다음에는 점차로 비교적 직설적인 과학사의 문제로부터 애초에 나를 역사로 끌어갔던 보다 철학적인 관심사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쿤이 연구하고 사색하고 『과학혁명의 구조』를 썼던 기간 동안, 하버드대학은 특정한 이데올로기 속에 푹 빠져 있었다. [하버드대학이 위치한]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는 거대과학을 만들어내고 맨해턴 계획에도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활동의 구심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학으로 돌아오면서 산업적 규모로 행해지는 과학뿐만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까지 캠퍼스로 끌고 들어왔다. 특히 하버드대학의 총장이었던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난트는 과학 연구에 대한 독일의 대규모 '산업적' 모델을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학에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코난트는 또한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에서 의회와 로스 앨러모스 팀 사이를 매개한 프로젝트 관리책임자였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펴게끔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코난트는 쿤의 은사(恩師)였으며, 쿤을 설득해 과학 교양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하도록 한 것도 그였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의 테제들을 다듬은 곳이 바로 여기였고, 나중에 이 책은 코난트에게 헌정되었다.

결국 쿤은 과학이 점차로 산업화되어 가면서 하나의 직업(vocation)에서 경력(career)으로 변형되었던 시기에 성장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과학철학의 주류 학파는 대체로 비엔나 써클(Vienna Circle)과 칼 포퍼(1902-1994)의 연구 업적이 점하고 있었다. 비엔나 써클은 철학자, 수학자 및 과학자들로 구성되었고 1920년대에 창립되었다. 그 지적 유래는 에른스트 마흐에서 시작되는데, 루돌프 카르납이나 오토 노이래쓰와 같은 몇몇 영향력있는 구성원들은 교권반대(anti-clerical)와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시키는 수단으로 이 써클을 사고했다. 비록 포퍼가 이 써클과 느슨하게 연계되어 있긴 했지만, 그는 써클의 구성원은 아니었고 그것의 철학적 입장 중 일부 측면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비엔나 써클은 형이상학과 신학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검증이 불가능한 진술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논리실증주의로 알려진 이 써클의 교의는 철학이 형식논리에 근거한 순수하게 분석적인 학문이며, 과학에 관한 담론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요소라고 파악했다. 써클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암살당하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비엔나 써클의 구성원들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포퍼는 뉴질랜드에 자리를 잡았다가 1948년에는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교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그가 쓴 반공산주의 저작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1945)에 힘입은 것이었다. 과학연구 절차의 본질에 대한 포퍼의 생각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독일 원판, 1934; 영역판 1959)에서 발전되었다. 그는 'A는 B'라는 특정한 사례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모든 A는 B'라는 보편적 원리를 확립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귀납'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들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또한 비엔나 써클이 '입증(verification)'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했다. 그가 보기에 '반증(falsification)', 좀더 정확하게는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야말로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진정한 경계였다. 따라서 그는 과학에서 최종적인 진리란 없으며, 과학의 진보는 일련의 '추측과 논박'(이는 1963년에 출간된 그의 논문집 제목이 되었다)을 통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포퍼에게 있어 자기비판 정신은 과학의 핵심이었다.

포퍼와 [미국 이주 이전의] 비엔나 써클은 과학철학이 사회 전체에 관한 사안들과 심지어 정치적인 사안들에까지 유효한 것이라는 공통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반면 쿤의 은사들은 [대학에 자리잡은] 학자들이었고 기술적 문제에 몰두한 과학자들이었다. 쿤은 P. W. 브리지먼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브리지먼은 당시 상당히 널리 알려진 아마추어 과학철학자였다. 그러나 브리지먼은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철학자는 아니었고, 그의 과학 연구는 엄격하고 무신경하며 생각을 멍하게 할 정도로 실용적인 문제, 즉 매우 높은 압력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것과 연관된 것이었다. 결국 쿤의 사상은 과학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엄격하게 학문적인 용어들 속에서 이해되었던 시기 동안 무르익어 갔다. 심지어 코난트가 '하버드 과학사 사례연구' 프로그램 ― 나중에 과학학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 을 통해 학문적 연구를 지원했을 때에도 여기서의 과학사 연구는 엄격하게 '과학 내적'인 것이었다. 비엔나 실증주의자들의 분투는 미국에 와서 협소하고 제한적인 교의로 변형되었다. 미국에서 '과학'과 '신학'간의 전쟁은 이미 끝난 후였다(인민주의적 성향의 미 중부 지역에서 부상했던 창조론자들은 예외였지만). 쿤이 받아들인 과학의 이데올로기는 [과학의 입지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신조가 아니었다. 그가 경험한 것이라고는 배타적인 '현대적 사고'의 교의뿐이었는데, 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과학은 여타의 모든 생산물들 ― 창조적 작업, 믿음, 혹은 심지어 과거의 과학까지 ― 이 그에 견주어 판단되는 유일한 중재자였다.

쿤은 박사학위를 마친 후 신진연구원(Junior Fellow) 자격으로 하버드에 남아 있었지만, 그곳의 과학사 교수 자리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고 보다 인정받은 역사학자였던 I. 버나드 코헨에게 돌아가자 하버드를 떠났다. (인사위원회는 쿤이 코난트의 후의를 입어 하버드에 머물러 왔다고 생각해 1956년 쿤에게 종신자격[tenure]을 부여하지 않았다. 코난트는 그 이전에 최초의 서독 주재 미국 대사로 발령을 받아 이미 하버드 총장직을 떠나 있었다.) 쿤은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소재)으로 가서 강의를 했는데, 이곳에서 그는 가장 생산적인 연구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으로 옮겼다가 결국 다시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초기 연구는 열역학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그가 낸 첫 번째 책인 『코페르니쿠스 혁명 The Copernican Revolution』(1957) ― 코난트가 서문을 쓴 ― 은 르네상스 시기 태양중심설의 발전에 관한 연구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든 것은 많은 이들이 20세기의 핵심 저작들 중 하나로 꼽는 『과학혁명의 구조』였다.

쿤은 전문역사가의 특정한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았다. 그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분석을 통해 실제 활동 속에서 과학의 진정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와 같은 더 큰 주제들을 탐구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그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내는 대담한 모험가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관 속에서 작업하는 퍼즐 풀이자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쿤은 과학에서의 퍼즐 풀이를 지탱하는 신념 체계를 설명하기 위해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나는 실제 과학 활동의 몇몇 인정된 실례들 ― 법칙·이론·응용·기기법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례들 ― 이 그로부터 과학 연구의 특정한 일관된 전통이 생겨나는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 이는 과학사학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또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또는 '뉴튼 역학'), '입자 광학'(또는 '파동 광학') 등의 제목 하에 기술하는 전통들이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즉, 독단적인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작업하는 사람들은 이론을 정교화하고, [이론과 잘 맞지 않는] 골치아픈 데이터들을 설명하고, 표준에 대해 보다 더 정확한 측정치들을 확립하고, 그 외 정상과학의 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하는 데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투입한다.

쿤의 구도 속에서는 이러한 독단적인 안정이 때때로 일어나는 혁명들에 의해 중단된다. 그는 혁명적 과학의 시작을 생생한 필치로 묘사했다: "정상과학은 . . . 근본적인 새로움(novelty)을 흔히 억압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러한 새로움이 정상과학의 기본 공약들을 필연적으로 전복시키기 때문이다 . . . [그러나] 과학이라는 전문직업이 과학 활동의 기존 전통을 파괴하는 이상 현상(anomaly)들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을 때 . . ." 통상에서 벗어난 연구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위기가 오직 낡은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성에 자리를 내어주는 혁명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면, '혁명적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한때 혁명적이었던 것은 다시 안정되어 새로운 정통, 즉 새로운 정상과학이 된다. 따라서 쿤은 과학이 순환적으로진보한다고 주장했다: 정상과학에는 혁명이 뒤따르고 이는 다시 정상과학이 되며 또다시 혁명이 뒤따르는 식으로 말이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그 패러다임을 정의하고 형성하는 특정한 업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Physica』, 뉴튼의 『프린키피아 Principia』와 『광학 Opticks』, 라이엘의 『지학 Geology』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과학 분과에서 패러다임을 정의했던 업적들의 예이다.

과학을 합리적으로 선택된 실험 틀 구조에 기반한 진보적·점진적·누적적인 지식의 획득으로 묘사했던 전통적인 상과는 정반대로, 쿤은 '정상'과학을 독단적인 활동으로 그려내었다. 만약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 역학, 플로지스톤 화학, 혹은 칼로릭 열역학과 같이 한물간 과학 이론들을 신화로 간주한다면, 현재의 이론들 역시 마찬가지로 비합리적이고 독단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시대에 뒤지는 이러한 믿음을 신화라 부르기로 한다면, 신화는 현재의 과학지식을 낳은 동일한 종류의 방법에 의해 생산될 수 있고, 동일한 종류의 이유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반면, 우리가 이를 과학이라 부르기로 한다면, 과학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과는 크게 부합하지 않는 믿음의 무리를 포함한 것이 된다. . . [이는] 과학의 발전을 점진적인 증대 과정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쿤은 책 전체를 통해, [과거와 현재에] 공통된 요인들을 파악하고 과학적 방법론의 본질에 내재한 결함을 강조하면서, 역사적 실례들을 써서 현재의 과학 활동을 조망했다. 그 결과,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주장을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과학적 방법론 ― 관찰, 실험, 연역, 결론에 이르는 이상화된 과정 ― 이란 실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쿤은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실험의 종류, 그들이 던지는 질문의 유형, 그리고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 등을 결정하는 것이 다름아닌 패러다임이라고 지적했다. 주어진 패러다임이 없이는 과학자들은 심지어 '사실들'을 수집하는 일조차 할 수 없다: "패러다임 내지 패러다임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는, 주어진 과학의 발전에 관계될 수도 있는 사실들이 모두 동등한 정도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가 십상이다. 그 결과, 초기의 사실 수집이란 이후의 과학 발전에서 우리의 눈에 익숙해진 것에 비해 훨씬 더 무작위적이다시피 한 활동이 되고 만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연구의 바탕에 깔린 근본 개념들을 변화시키고, 증거에 대한 새로운 표준들, 새로운 연구 기법들, 그리고 이론과 실험의 새로운 통로들 ― 낡은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공약불가능'한 ― 의 등장을 자극한다.

쿤에 따르면 대부분의 과학 활동은 '정상과학'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뤄진다. 여기서 정상과학이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발견하는 과학이며, 또 연구가 "과거에 있었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들, 즉 어떤 특정 과학자사회가 일정 기간 동안 한걸음 더 나아간 활동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그런 성취들에 근거해 이뤄질" 것을 요구하는 과학이다. 이와 같이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퍼즐풀이식 과학 활동은 나름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갖는다. 한편으로 이는 과학자 공동체가 체계적인 기반 위에서 데이터를 수집해 과학의 첨단으로 재빨리 밀고나갈 수 있게 해준다:
 

개별 과학자가 하나의 패러다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때, 그는 제일 원리들(first principles)로부터 출발해 자신이 도입한 개념 하나하나를 정당화하면서 그 분야를 새롭게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주요 작업으로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것은 교과서의 저자에게 맡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교과서가 주어지면 창의적인 과학자는 그 책이 끝나는 곳에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속한 과학자집단의 관심을 끄는 자연 현상의 가장 미묘하고 해득하기 어려운 측면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상과학은 과학자사회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킨다. 쿤은 설사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퍼즐풀이 형태로 환원할 수 없다면 이는 무시되며, 패러다임의 개념적·도구적 조망 외부에 있는 것은 무엇이건 연관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과학에 대한 쿤의 접근은 본질적으로 '휘그적 역사 해석(Whiggish interpretation of history, 역사는 자유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온 선형적 진보의 과정이며 현재는 그 정점이라는 식의 사고)'에 대한 대응이었다. 휘그적 역사는 [과거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거꾸로 읽어들어가며 현재는 과거의 성취들이 누적된 산물이라고 파악한다. 과학사에서 휘그적 역사를 추방한 것은 그 누구보다 알렉산드르 코아레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쿤은 코아레에게 커다란 지적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쿤은 하나의 역사적 전통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통을 형성하는 데 관여했던 이들의 사회적 행위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이에 대해 배리 반즈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바로 이런 통찰력이 그의 역사적 감수성과 더불어 쿤의 연구에 독창성과 중요성을 부여해 주는 요소인 것이다. 주어진 형태의 문화가 존속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사회화와 지식 전달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고, 수용된 의미들과 재현의 범위를 나타내 주는 절차들이 존재하며, 수용가능한 혁신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정당성을 공인해 주는 방법이 있음을 의미한다. 주어진 문화의 개념과 재현들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그 문화의 구성원들 자신에 의해 기능이 유지되어야 한다. 주어진 문화 형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면, 거기에는 인식적 권위와 통제의 원천이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쿤은 과학 연구가 연구자 공동체, 그것이 물려받은 권위적 전통, 그리고 그것이 처한 환경, 이 3자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연구 과정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이성'과 '논리'가 과학 지식의 진보를 위한 유일한 기준이 되는 지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자들로부터 나온 반응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쿤이 한 일은 영웅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지녔으며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절대진리의 추구자이자 자연과 실재의 탐구자라는 과학자에 대한 기존 관념을 밑바닥부터 뒤엎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의 설명에 대한 패러디들이 잘 보여주었듯, 쿤은 과학을 지루한 순응적 활동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다가 갑자기 비합리적 일탈에 의해 단절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무언가로 축소시켰다. 그러나 [과학자뿐 아니라] 과학철학자들도 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때까지 과학 연구와 그 진보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내는 책임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들의 공식화되고 이상화된 연구결과에 비추어 볼 때, 쿤의 설명은 거의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신학, 종교적 개종, 정치혁명과의 비교는 과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 모두를 질겁하게 만들었다. 철학자들은 또한 쿤의 상대주의에 거부감을 보였다. 과학사 및 과학철학 학계에서 『과학혁명의 구조』는 독창적이지 못하고 건조하며 뒤죽박죽인 저작으로 묘사되었다. 실증주의적 사실 수집의 이미지에 대한 대응으로는 스티븐 툴민이 이미 '틀 구조(framework)'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바 있었고,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R. G. 콜링우드도 예전에 유사한 생각을 도입한 적이 있었다. 특히 하버드의 실용주의 철학자인 C. I. 루이스는 세계관의 공약불가능성에 관한 쿤의 가장 급진적인 진술들 중 많은 것들을 이미 예견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이 되자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철학에서 혁명적인 저작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20개 국어로 번역되어 1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으며,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학술서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이 제시한 패러다임 전환의 개념은 정치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분야들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학에서 이 책은 열광적으로 수용되었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비판적 과학사회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등장했다. 과학사학자 이언 해킹에 따르면 『과학혁명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관념들의 종말을 초래했다.

실재론: 과학은 하나의 실재 세계에 관해 알아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세계에 관한 진리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관하게 진리이다; 과학의 진리는 실재의 어떤 측면을 반영한다.

경계설정: 과학 이론과 여타의 신념 체계 유형 사이에는 선명한 구분이 존재한다.

누적: 과학은 누적적이며 이미 알려진 것 위에 쌓아가는 것이다. 예컨대 아인슈타인 이론은 뉴튼 이론의 일반화이다.

관찰자-이론 구분: 관찰 보고와 이론 진술 사이에는 매우 현저한 차이가 있다.

토대: 관찰과 실험은 가설과 이론을 위한 토대와 정당화를 제공한다.

이론의 연역적 구조: 이론들의 검증은 이론적 전제로부터 관찰 보고들를 연역해 냄으로써 진행된다.

정확성: 과학적 개념들은 매우 정확하며 과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은 고정된 의미를 갖는다.

발견과 정당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은 별개이며, 우리는 발견이 행해지는 심리적 또는 사회적 환경을, 발견된 사실들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와 구분해야 한다.

과학의 단일성: 하나의 실재 세계에 관해서는 하나의 과학만 있어야 한다; 덜 심오한 과학은 더 심오한 과학으로 환원가능하다; 예컨대 심리학은 생물학으로, 생물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학으로 각각 환원될 수 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