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의 세상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산물들로 철저하게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면, 역사적으로 살펴봤을 때 지구상에 나타난 지 겨우 백년 남짓하거나 채 백년도 못되는 갖가지 인공물들이 우리의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규정짓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에컨대 전기와 수도, 그리고 각종의 전기기기들(TV, 냉장고, 세탁기...)의 보급은 가정에서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고, 자동차의 대중화와 철도·지하철 건설의 결과로 도시의 공간적 재구조화가 이루어졌으며, 각종의 작업장기술과 컴퓨터의 도입으로 노동의 방식도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결과, 백년 전의 세계에 비해 보았을 때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평균적으로 '향상'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련한 '지금-여기'에서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부터 도출된 결과들이 여러 가지 사회적·환경적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현재 과학기술의 발전방향이 과연 진정으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쪽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과학기술이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자율적인 발전경로를 거치는 초(超)사회적 실체라는 전통적인 믿음이 1960-70년대 이후에 도전을 받게 되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에게서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앗아간 '지금-여기'에서의 문제들은, 그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좀더 일찍 시작되었겠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1) 이 시기에 처음으로 대기오염, 수질오염과 같이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파괴의 사례들이 사회적으로 인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70년대 이후에는 염화불화탄소(CFC)에 의한 오존층 파괴,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 등과 같은 전지구적 환경재해의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었다. (2) 또한 핵발전소가 내포하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과 핵폐기물 처리의 기술적 어려움이 60년대 말 이후 점차로 알려지고 1970-80년대에 걸쳐 드리마일 섬과 체르노빌에서의 대형사고가 터짐으로써 핵발전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였다. (3) 주요 작물의 엄청난 생산성 증대를 이룩함으로써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1960년대의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은 오히려 제3세계의 식량문제를 악화시키고 전통적 공동체를 파괴하였으며, 남북격차를 심화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4) 1970년대 초 DNA 재조합 기술의 실용화 가능성이 알려지고 80년대 중반부터 인간유전자의 염기서열을 해독하려는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시작된 이래로 생명공학이 낳을 수 있는 여러 정치적·경제적·윤리적·법적 문제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다국적 거대기업들에 의한 유전자정보의 독점과 그 남용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유전자조작된 생물체(GMOs)에 의한 환경·보건적 위해의 가능성은 그 문제들 중 일부에 불과하며, 작년의 '돌리 파동'은 자그마한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이다. (5) 유기화학의 발전으로 19세기 말 이후 새로이 등장한 유독성 합성물질들이 작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건강상의 위해를 가하는지, 또 컴퓨터를 이용한 신기술의 도입이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숙련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등의 문제들은 1970년대를 경과하면서야 비로소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6)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를 통틀어 계속된 가사기술(household technology)의 발전은, 여성들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들의 사회진출을 도와 준 것으로 그동안 인식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면서 도리어 가정 내에서의 성 역할 분담을 더욱 고착화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어찌보면 더욱 커다란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사회적·환경적 문제들을 직·간접적으로 양산했다는 것보다, 그것이 갖는 잠재력이 사회 속을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의 이해와 요구를 무시한 채 왜곡되면서 비극적으로 낭비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생물학 영역에서 대부분의 연구개발 자원은 환경위기의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생태학 분야보다는 당장에 '돈이 되는' 분자생물학 분야로 몰리고 있다. 그리고 일찌기 1970년대 중반에 영국 루카스 항공(Lucas Aerospace)의 노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술이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제공한 것 사이에는 지금도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우리는 음속의 두 배 이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설계할 수 있는 기술적 수준을 갖추고 있지만 연금생활을 하는 노인들을 추위저하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난방체계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으며, 엔지니어들은 시속 120마일에서 유체역학적으로 안정한 자동차 차체를 설계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대도시 내에서의 평균교통속도는 시속 10마일도 채 못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동원가능한 과학기술적 자원이 일반인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socially useful)' 그 어떤 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여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진단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과학기술은 그냥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좋은 어떤 무엇이 아니라, 그 발전 방향과 속도를 적절히 '통제'해야 하는 실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통제'는 과학기술을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 접하는 일반인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필수적인 사회적·경제적 필요를 여전히 충족시키면서도 민주적 공동체와 정치참여와 사회정의를 유지하는 데 역시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안적인 과학기술의 상을 그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이러한 대안적 과학기술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몇 가지 실험적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전문가 신화' - 과학기술의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들만이 과학기술과 관련한 의사결정과정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 를 해체하고 새로운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주민이나 사회단체들의 요구에 기반한 대안적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중 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시도로는 주요한 과학기술정책 이슈에 대해 일반인 패널이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통해 합의된 보고서를 제출하는 형태의 합의 회의(consensus conference)가 있고, 후자에 해당하는 시도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70년대 말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대안적 연구개발센터인 과학상점(science shop)과 연구개발 과정에 일반인들의 참여를 수반하는 참여설계(participatory design)가 있다. 특히 과학상점은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에만 좌우되는 대학 내에서의 편중된 과학기술 연구방향을 교정할 수 있는 유효한 장치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서울대를 중심으로 과학상점을 매개로 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실험들이 '과학기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시도의 전부는 물론 아니겠지만, '민주주의의 원칙'과 '사회적 유용성'의 결합을 이루어내려는 이러한 실험들은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상대적으로 뒤쳐진 우리나라에서도 주목해야만 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듯하다.
 

출전: 『경북대학보』 1998년 5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