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한 가지 밝혀 두자. 이 글은 <아폴로 13>에 대한 '영화'평이 아니다. 따라서 혹시 이 글을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동을 되씹고 싶거나, 이 영화가 볼만한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쯤에서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림이 바람직할 것임을 미리 말해 둔다. 필자는 <아폴로 13>이 조작적으로 썩 '잘 만들어진' - '좋은' 영화와는 다른 의미에서 - 영화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필자가 말하려는 바는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아폴로 13>을 통해 거대과학기술체계의 구조적 결함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미국의 원자탄 개발을 그 본격적인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오늘날의 거대과학기술체계는 그 건설과 유지를 위해 수많은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대표적인 거대과학기술체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핵발전의 경우, 핵물리학자, 지질학자, 원자핵공학자, 토목공학자, 컴퓨터공학자 등을 기본으로 필요로 하며, 이 외에도 수많은 기술자(technician)들과 현장관리인원을 요구한다. <아폴로 13>에서 다루어진 미국의 아폴로 우주계획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화 속에서 보이는 NASA의 관제실에는 수십가지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기판을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거대과학기술체계가 앞에서 든 그 성격상 구조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 체계를 위해 결집한 전문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분야에서만 '전문적'이며, 조금만 그 분야를 벗어나면 일자무식이기 일쑤이다. 따라서 그 체계 '전체'에 대해 전문가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경우가 많으며(핵발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전체를 통제하고 책임지는 것은 대체로 정치관료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여기에 내재한 위험을 설명하기 위해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진부한 경구까지 끌어올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전체적인 통제에 구멍이 생긴 거대과학기술체계는 종종 어이없는 지점에서 결함을 노출하며, 이것이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 결국 전체적인 재앙에까지 이르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전체적인 재앙에 대해 실질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전체의 문제에 있어 각 분야 하나하나의 개별 과학기술자들을 문책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이러한 문제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가 영화 <아폴로 13>이다.

이제 <아폴로 13>으로 돌아오자. 필자에게 이러한 얘기를 꺼내게 한 장본인이 바로 <아폴로 13>이니까. 비록 장대한 휴먼드라마 속에 숨어있긴 하지만, <아폴로 13>에는 필자가 언급했던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우선 아폴로 13호를 위기에 몰아넣었던 '의문의' 산소탱크 폭발부터가 그렇다. 그 책임은 사실상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다. 폭발의 원인은 우주선의 기계선 부품의 불량일 수도 있고, 부품 조립상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기계공학자의 계산오류일 수도 있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요인 탓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우주선 정비사의 근무태만 탓일 수도 있다(사실상 이 마지막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대중적 관심영역을 어느 정도 벗어나 안정권에 접어든 거대과학기술체계가 안게 되는 또다른 치명적 결함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아폴로 11호보다는 아폴로 13호가 사고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누가 그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문제를 일으키겠는가? 최근 고리의 원전 폐기물 유출 사건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런 문제는 나중에 주의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섭다). 그리고 원인은 사실 이 모두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고 발생 후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자. 달에서 실어올 월석의 무게까지 계산해서 지구재진입궤도를 정할 정도의 용의주도함을 보이던 사람들이, 사령선과 달착륙선의 이산화탄소 제거기를 장착하는 구멍이 서로 맞지 않아 호환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좋은가? 이는 부문간 커뮤니케이션의 치명적인 부재를 의미하며, 거대과학기술체계의 맹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사령선과 달착륙선은 서로 다른 회사에서 서로 다른 과학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들은 기초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상호합의를 거쳤겠지만 이러한 어찌보면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또다른 문제점 하나가 드러난다. 거대과학기술체계에서 무엇이 문제가 될지는 '당해봐야 안다'는 것. 아마도 이러한 사고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산화탄소 제거기의 착탈 구멍이 한쪽은 원형이고 다른 한쪽은 사각형이라는 식의 '사소한' 문제는 전혀 문제로 대접받지도 못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영화에선 이 다음부터가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들을 NASA의 과학기술자들은 하나하나 해결해 가서 결국은 아폴로 13호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게 만든다. 사실상 이 부분이 영화의 핵심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을 다소 다르게 읽었다. 즉 이것은 거대과학기술체계의 구조적인 결함을 일련의 공학적 puzzle-solving, 즉 수수께끼풀이로 치환(delegation)해 버린 것이라고.

잘 생각해 보자. 영화 속에서는 체계의 구조적인 결함 따위를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현란한 수수께끼풀이의 과정이 그것을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NASA의 과학자들은 "정부가 하는 일은 항상 이 모양이라니까..." 운운하는 불평을 눌어놓지만 그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은 채, 양말짝이나 서류를 싸는 비닐 등등의 주어진 재료만 가지고 네모꼴을 원형으로 맞추어 넣고, 또 한편으로는 주어진 전력만을 써서 지구대기권으로 재돌입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등의 공학적 수수께끼풀이에 몰두한다. 아마도 이런 부분들이 공학도들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재료만을 가지고, 주어진 에너지만을 써서, 주어진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공학자들이 그 해결에 있어서 희열을 느끼는 대표적인 공학적 퍼즐이 아니던가? 따라서 아폴로 13호의 무사귀환은 "내 밑의 대원들은 한 명도 잃지 않는다!"라는 NASA 관리실장(에드 해리스에 의해 카리스마적으로 연기되는)의 호언장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NASA의 과학기술자들이 보여준 신기의 솜씨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지점에서 영화를 보던 공학도들은 스스로가 공학도임을 뿌듯하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았다. 아폴로 13호가 무사귀환했으니, 그러면 모든 문제는 만사 O.K.라고 과연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항상 이런 치환 과정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폴로 13호는 단지 새턴 1A 로케트(지상발사대에서의 화재로 3명의 우주비행사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 챌린저 호, 드리마일 섬, 체르노빌 발전소라는 일련의 리스트에 포함되는 것을 요행히 모면했을 따름이다. 그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던 것이다. 영화는 모든 대원들이 살아돌아오는 것으로 감동적으로 끝맺지만, 만일 우주선이 돌아오는 과정의 어떤 지점에서라도 정말 폭파해 버렸거나 대기권 재진입 중에 녹아 버렸다면 과연 어땠을까? 필자는 그 때 호언장담하던(사실 영화 속에서는 이것이 예정된 결말을 향한 하나의 신념의 표현이자 과학기술체계의 전능성에 대한 굳건한 신앙 비슷한 것으로 표현되지만) 관리실장의 표정이 어땠을지 정말 궁금하다. 무너진 삼풍백화점 앞에 서서 "이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되뇌던 정부관계자들의 표정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결국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거대과학기술체계 자체가 소위 '전문가'들의 호언장담과는 별개로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전체 체계 중 일부분에 종사하는 개개 과학기술자가 결코 타인들에게 보장하거나 스스로 믿어버릴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의 잔재주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과학기술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이는 그 거대과학기술체계의 어느 일부분에 직접적으로 몸을 부대끼는 당사자들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왔던 영화 속의 한 토막. 아폴로 13호가 사고가 났을 때 정작 목숨을 걸고 있던 당사자들인 3명의 비행사들은 거의 아무런 할 일이 없이 속수무책이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지구대기권 재진입 궤도에 맞추어 우주선을 다시 손으로 조종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든 문제를 NASA의 과학기술자들과 관리자들의 지시에 일일이 따라야 했으며, 심지어 일부 문제들은 우주비행사들의 '동요'를 우려해 - 이건 너무나 진부한 이유가 아닌가! - 아예 우주선으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우주비행사들이 "우리도 무슨 문제들이 있는지를 알 권리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필자에게 있어 우주비행사들이 몸에 붙은 의료장비들을 떼버리는 장면은 단순한 반항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상당히 의미심장했다는 얘기를 덧붙이기로 하자.
 

출전: 『공대저널』 1995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