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과 대중: 역사, 이론, 대안
 
 
 

0. 문제제기
 

오늘날 생명공학(biotechnology)은 정보통신기술, 나노기술 등과 함께 21세기를 이끌어갈 핵심기술로 흔히 간주된다. 생명공학은 그 기술을 선도하는 이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자, 인간사회와 생태계에 대한 다양한 혜택을 통해 인류 전체의 미래를 밝혀줄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다. 예컨대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을 이용해 식품의 보존성을 높이거나 작물 재배상의 편이를 도모하거나 영양을 강화한 유전자조작(genetically modified, GM)식품은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며, 인간 유전자의 염기서열 전체를 분석해 그 기능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인간게놈프로젝트(HGP)는 질병에 대한 이해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뿐 아니라 개개인에 대한 맞춤의료까지도 가능케 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한 인간배아 및 간(幹)세포 연구는 개체발생에 얽힌 신비를 밝혀내어 장기이식을 비롯한 의료의 제반 영역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유전자치료(gene therapy)는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여러 불치병들을 야기하는 해당 유전자를 '바꿔끼움'으로써 유전병의 완치를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생명공학의 '장밋빛 미래'는 그에 맞먹는 수준의 비관적 전망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윤리적 논란에 직면해 있다. 농업 생명공학은 마치 실패한 과거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의 경우처럼, 식량부족 사태를 해소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제3세계 농촌의 빈부격차를 더욱 키우고 식량난을 악화시킬 것이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함은 물론, GM 작물로부터의 '유전자 오염' 때문에 생태계의 파괴가 초래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타나고 있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성과는 개개인의 유전정보의 오·남용으로 이어져 교육이나 고용, 보험에서의 차별로 이어질 수 있고 심지어 SF영화에서 봄직한 '유전자 감시사회'를 낳을지도 모르며, 인간유전자에 대한 특허 허용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상품화 ― 'human body shop' ― 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인간배아연구의 유력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는 인간'배아'복제는 인간개체복제로 이어질 수 있는 '미끄러운 경사길(slippery slope)'로서, 시험관아기의 탄생 이후 생겨난 윤리적 딜레마를 더욱 증폭시킬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예측들은 생명공학의 전 영역에 걸치는 격렬한 대중적 차원의 논쟁으로 귀결되고 있다.(주1)

이러한 논쟁 속에서 생명공학의 옹호자들, 특히 생명공학자들은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는 경향을 보인다. 먼저 그들은 1960년대 이후 서구에서 과학기술의 부정적 측면 ― 핵발전소의 위험성, 합성화학물질로 인한 환경오염, 공장자동화로 인한 실업 등 ― 이 부각되면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 반(反)과학적 성향이 널리 퍼졌고, 이런 점이 1970년대 이후 생명공학에 대한 반대로 옮겨졌다고 대체로 생각하고 있다. 즉, 생명공학의 미래에 대한 우려는 과학기술 일반에 대한 거부감의 한 부분으로, 비교적 최근에서야 비롯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두번째 측면으로, 그들은 생명공학에 대한 반대가 언론매체와 대중의 '무지'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생명공학의 발전에 대한 대중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는 '뭘 잘 몰라서 하는 반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GM식품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은 '재래식 육종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GM 작물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미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간배아복제에 대한 반대는 배아복제와 개체복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탓이고, 인간유전정보의 오용에 대한 우려는 신원확인을 위한 유전정보의 추출과정과 DNA은행에 보관되는 정보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따라서 생명공학 옹호자들은 생명공학의 중요 쟁점들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반대측 견해를 대등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를 반과학적 태도로 몰아붙이면서 무시하거나 '계몽'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생명공학의 기초적인 지식에 대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 즉 생명공학의 '대중화'를 통해 생명공학을 둘러싼 사회적·윤리적 논쟁을 피해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과연 지지될 수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위의 두 가지 측면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생명공학에 대한 우려는 막연한 반과학적 태도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없는 기나긴 역사적 연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생명공학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가 단순히 지식의 많고 적음에 기인한다고 보는 관점 역시 문제가 많다. 따라서 생명공학의 대중화를 통해 '과학적 소양(scientific literacy)'을 갖춘 대중이 생겨날 것이고 이를 통해 불필요한 논쟁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명공학 옹호자들의 견해는 순진할 뿐 아니라 심지어 위험하기조차 한 것이다. 뒤에 가서 밝히겠지만, 생명공학의 제반 쟁점들을 둘러싼 사회적·윤리적 논쟁은 일방적 계몽이 아닌, 전문가와 일반대중 사이의 대화와 토론, 그리고 이를 통한 신뢰의 생성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전제로, 필자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풀어나가 보려 한다. 먼저 1절에서는 19세기 초로 거슬러올라가,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생명과학·공학에 대한 대중의 태도가 어떤 계기들을 거치면서 형성되어 왔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이어 2절에서는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PUS)'와 관련된 일반적인 논점을 검토하면서, 대중의 '인지적 결핍(cognitive deficit)'이 생명공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의 원인이라는 통념을 반박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절에서는 1, 2절에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해서 생명공학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한 가지 대안, 즉 '과학기술 민주화'의 개념을 소개하고 그 함의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1. 생명과학에 대한 대중의 태도: 역사적 흐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오늘날 생명공학의 기초가 되는 이론적, 실험적 토대가 확립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디옥시리보핵산, 즉 DNA가 유전에 관여하는 물질이라는 이론이 제시된 것은 1940년대였으며,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규명된 것은 1950년대 초였다 (임경순 1995, pp. 189-202). 그리고 현재 유전공학의 기초로 자리잡은 DNA의 분리 및 접합 기술, 즉 DNA 재조합(recombinant DNA) 기술은 1970년대 초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Krimsky 1992). 이러한 사실로부터 미루어, 생명공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생명공학에 대한 대중의 태도 역시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형태의 생명공학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고 이를 생명 현상에 대한 연구와 개입, 특히 생물을 일종의 기계와 같은 것으로 파악해 그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고 이에 대한 조작을 시도했던 전통으로 확장해서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명'과학'에 대한 대중의 우려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며, 이는 오늘날의 생명공학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인체 해부학이나 생리학과 같은 학문 분야들은 멀리 고대에까지 그 연원을 찾아올라갈 수 있는 분야들로, 르네상스기와 16-17세기 과학혁명기를 거치면서 개념과 기법상의 변화를 겪었고 당대의 교양있는 대중과도 연관을 갖게 되었다 (김영식·임경순 1999, pp. 98-107).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이 대중의 뇌리 속에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로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의 일로, 여기에는 메리 셸리가 1818년에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주2) 시체 조각을 모아서 인간과 같은 형태의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고 그에 의해 파멸해 가는 한 과학자의 얘기인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교양있는 대중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생명에 대한 여러 생각과 실험생물학의 연구관행을 소재로 차용해 이에 신화적 요소를 덧붙임으로써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최근의 과학사 연구에 따르면, 셸리는 "언젠가 인간이 생명을 창조할 것"이라고 믿었던 에라스무스 다윈(찰스 다윈의 조부)의 이론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고,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 ―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모델이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 ― 의 『화학철학원리』도 읽었으며, 시체에 전기자극을 가해 '운동'을 하게끔 만드는 당시 유행했던 '실험'들에 대해서도, 의학교육을 위해 교수형당한 죄수의 시체를 해부하는 관행과 묘지에서 간혹 시체가 도둑맞기도 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놀라운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당대의 생명과학 지식 및 실행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우려들이 작가적 상상력과 상호작용한 결과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조작과 과학자의 오만이 가져올 수 있는 파멸적 결과에 대한 경고'라는 『프랑켄슈타인』의 메시지는 이 작품이 1820년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연극으로 상연되고 좀더 대중적인 형태의 소설로 각색되어 널리 읽힘으로써 일반대중에게도 친숙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19세기와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생명에 대한 기계적·환원론적 이해가 점차 깊어지고 생물체에 대한 실험과 조작이 일상적인 과학 실행의 일부로 자리잡음에 따라 더욱 뿌리깊은 것이 되어 갔다. 20세기 초 생물학의 발전에 고무된 몇몇 과학자들은 머지 않은 미래에 실험실에서 생명체를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피력하기도 했는데, 이런 주장은 당시 상당한 대중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웰즈의 『모로 박사의 섬』(1896),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1)와 같이 오늘날 고전으로 자리잡은 문학작품들 속에 투영되었다. 1930년대 이후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를 소재로 하는 호러 영화의 유행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소재가 대중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로 머물러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Tudor 1989).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70년대 초, 과학자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촉발된 DNA 재조합 논쟁은 유전자재조합된 생물체의 환경방출 가능성이라는 기술적 위험 차원을 넘어 그동안 대중문화 속에서 익숙해진 프랑켄슈타인의 문제틀 속에서 받아들여졌다. 1980년대 이후 생명공학을 둘러싸고 나타난 제반 논쟁들 역시 프랑켄슈타인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불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GM식품에 대해 '프랑켄슈타인 식품(Frankenfood)'이라는 딱지를 붙인 최근의 GM식품 반대운동이 잘 알려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다.

결국 이상의 논의로부터 생명공학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들은 근래에 부상한 반과학적 태도의 귀결로 단순하게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적어도 200여 년을 거슬러올라가야 하는 문화적 태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이 시기를 전후해 일어난 전문과학자와 일반대중의 점차적인 분리, 특정한 생물학 연구 기법의 발전, 대중매체의 확산 등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2. 생명공학과 대중의 현재적 관계: 결핍 모형을 넘어서
 

그러면 두번째 측면의 문제로 넘어가자. 여기서 1절에서의 논의를 접한 생명공학 옹호자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프랑켄슈타인과 같이 강력한 대중문화 영역에서의 표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대중이 현재의 생명공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된'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고 말이다. 즉, 대중문화 텍스트 속의 이미지는 대중이 생명공학에 관한 '사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을 '방해'하며, 따라서 '뭘 잘 모르는 상태에서' 생명공학에 대해 막연한 반대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속에 일말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는 생명공학과 대중의 상호관계에서 핵심적인 지점을 놓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 속에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곧 생명공학에 대한 '긍정적' 태도로 이어질 것이라는, 근거가 분명치 않은 가정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부상하고 있는 과학기술학의 한 분야인 '대중의 과학이해'에서는 과학대중화를 바라보는 앞서와 같은 관점을 '결핍 모형(deficit model)'이라고 부른다.(주3) 이 모형에서는 '대중', '과학', '이해'라는 용어 각각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즉, '대중'은 과학이 결핍된 존재, 즉 (과학이 채워져야 할) 일종의 빈 그릇 같은 대상으로 파악되고, '과학'은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지식'으로 한정되며, '이해'란 (과학자들이 일러준 바대로의) 개별적인 사실 하나하나를 얼마만큼 숙지하고 있는가와 관련된 양적인 척도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 모형에 따르면, 과학'지식'을 그것이 '부족'한 대중에게 부어넣음으로써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고, 이해의 '부족'에 기인하는 불필요한 논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핍 모형에 대해 1980년대 후반 이후 다양한 비판이 가해졌다. 여기서 주된 비판의 목소리는 과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인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적 입장을 견지한 과학학자들로부터 나왔다.(주4) 여기서는 먼저, 과학에 대한 이해를 과학지식을 얼마만큼 숙지하고 있는가로 협소하게 정의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과학은 교과서에 나오는 잘 정의된 일군의 지식들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실행중인 과학은 다양한 불확실한 요소를 그 속에 포괄하는 활동이며, 그 활동의 결과는 과학자사회를 포함하는 일련의 사회적 과정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안정된다.(주5) 또한 오늘날 과학은 대단히 강력한 사회제도 중 하나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여타의 사회제도들과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이해는 과학지식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앞서의 모든 요소들, 즉 과학활동이 실제로 행해지는 과정과 그 속에 내재한 불확실성에 대한 이해, 사회제도로서의 과학과 그것이 다른 사회제도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이해 등을 그 속에 포함해야만 한다.

1999년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급격히 커진 GM식품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과 반대 운동을 한 가지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시판되는 GM 곡물은 대개 수년에 걸친 식품안전성 검사와 야외 포장검사 절차를 거쳐 출시된다. 따라서 농업 생명공학 회사와 생명공학 규제기구들은 GM 작물이 '과학적으로' 그 안전성과 환경친화성이 '입증'되었으므로 대중의 불신은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두 가지 측면의 고려가 빠져 있는데, 우선 GM 작물의 과학적 시험 절차가 이미 특정한 가정에 입각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현재 GM식품의 식품안전성 검사는 이 식품의 생화학적 성분이 원래 식품의 그것과 차이를 보이지 않으면 이 둘을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이른바 '실질적 동등성(substantial equivalence)'의 원칙에 입각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몇몇 과학자들은 이 원칙이 식품안전성에 대한 검사를 위해 충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이 원칙에 따른 검사는 유전자조작 과정 그 자체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유전자 네트워크의 교란과 그로 인한 불확실성은 감지해 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농업 생명공학 회사나 생명공학 규제기구들이 말하는 '입증된 안전성'의 개념 속에는 이런 불확실성이 아예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주6)

둘째로, 농업 생명공학 회사들과 생명공학 규제기구들은 GM식품에 대한 과학적 '보증'을 제시하고 있는 자기 자신, 즉 농업 생명공학을 감싸고 있는 사회제도적 측면에 대한 대중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제초제 라운드업(Roundup)과 제초제저항성 작물인 라운드업 레디 대두(Roundup-ready soybean)를 함께 생산하는 미국의 화학회사 몬샌토(Monsanto)는 1950년대에는 DDT,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에서 뿌려진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를 생산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회사로, 대규모 환경파괴에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기여(?)를 해온 다국적 거대기업이다. 따라서 그 전력으로 인해 이미 많은 환경운동가나 일반대중의 눈총을 받아온 이 기업이 자사의 유전자조작 작물을 환경친화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The Ecologist 1998). 영국에서 GM식품의 안전성이 크게 의심받고 있는 것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96년의 광우병 파동 때 쇠고기의 안전성을 계속해서 '보증'해 왔던 보건당국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거의 바닥까지 추락했다. 따라서 바로 그 보건당국과 과학자들이 GM식품의 안전성을 아무리 '과학적으로' 설득력있게 주장한다고 해도 그 주장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는 것이다 (Jasanoff 1997; ESRC 1999).

방금 살펴본 GM식품의 사례로부터 결핍 모형이 비판받고 있는 두번째 지점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의 과학이해에서 중요한 것이 '지식'의 측면이 아니라 '신뢰'의 측면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곧, 생명공학에 관한 지식의 양이 생명공학에 대한 대중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생명공학과 이를 둘러싼 사회제도들에 대해 대중의 신뢰를 궁극적으로 얻어내지 못하는 이상, 대중화를 통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전달한다고 해도 생명공학에 대한 대중의 반대와 거부감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최근 한국에서 진행중인 논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자면, 신원확인을 위한 유전정보은행의 설립 주체에 과거부터 줄곧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아 온 검찰이라는 권력기구가 끼어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과학'지식'을 전달한다고 해도 그 설립 시도의 배경에 깔린 저의를 의심받을 뿐이라는 것이다.(주7)

그렇다면 이제 지금까지 파악한 문제 상황에 대한 대안의 모색으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3. 대안을 찾아서: '과학기술 민주화'의 개념과 함의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얻어진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생명공학에 대한 대중의 (소극적인) 거부감 혹은 (적극적인) 반대와 이로 인해 빚어진 다양한 차원의 논쟁들은 19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오랜 연원을 지닌 것으로, 대중이 생명공학과 연관된 '사실' 차원에 무지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의 넓은 영역)의 연구와 실행, 응용에 내재한 불확실성 및 위험과 연관된 것이며, 또한 바로 그러한 불확실성과 위험을 다루는 사회제도들 ― 과학계, 생명공학 기업, 정부산하 규제기구 등 ― 에 대한 신뢰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핍 모형에 입각한 과학대중화'에 대한 대안은 그런 불확실성과 위험의 문제에 어떻게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인지, 또 생명공학과 관련된 여러 행위자들 사이에 어떻게 신뢰를 다시 세울 것인지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대안은 '과학기술 민주화'이다. 얼핏 듣기에 이 말은 상당한 오해와 혼란을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민주화는 익히 들은 개념일 테지만, '과학기술의 민주화'란 대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기술 민주화란 과학기술과 관련된 중요한 사회적·정책적 의사결정 과정에 다양한 관련집단뿐 아니라 일반대중의 참여까지를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김환석 1999). 지난 세기, 그 중에서도 특히 2차대전 이후를 돌이켜 보면, 전지구적으로 민주주의의 물결이 확산되는 한편으로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지적되면서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온 반면, 유독 과학기술 영역만큼은 그런 경향에서 예외로 남아 주요한 의사결정을 엘리트 과학자들과 과학정책 관료들 ― '정책 엘리트'들 ― 이 독점해 왔다. 그간 정책 엘리트들은 이런 상황에 대한 정당화 근거로 과학(자)이 갖는 객관성·가치중립성을 들면서, 바로 그런 특별한 성격을 갖는 과학지식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위해 핵심적이라는 점을 들어 왔다.

그러나 앞서의 논의를 통해 과학지식, 특히 오늘날의 정책결정과 연관된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 영역의 과학지식은 내재적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전문가들간의 논쟁은 과학 그 자체만으로는 (과학이 야기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제공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거대과학(Big Science)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과학기술 활동은 일반대중이 낸 세금에 기반한 공공자금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과학의 사회적 책무(social accountability)와 함께 대중참여의 당위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더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이후 과학과 과학자들의 권위와 이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온 것 역시 과학 전문가와 일반대중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신뢰 회복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하겠다 (홍성욱 1999a).

물론 여기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학기술 민주화, 즉 과학기술정책에서의 의사결정에 대한 의미있는 대중참여는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대중참여를 통해 내린 결정은 정책 엘리트들이 내린 결정보다 과연 더 '나을' 것인가, 하는 회의적 시각이 그것이다. 이 중 먼저 첫번째 의문은 과연 일반대중이 과학기술관련 정책결정의 근간을 이루는 과학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라는 과학자들의 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앞서 이미 언급했듯, 과학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이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사회적·제도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의미할 수 있으며, 설사 일반대중이 극히 세부적인 과학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자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문과학자들보다 더욱 잘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1998년과 1999년에 유전자조작식품과 생명복제를 주제로 각각 열렸던 두 차례의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는, 해당 과학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기본적인 과학적 사실은 물론 이를 둘러싼 제반 쟁점들을 훌륭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숙의(deliberation)에 기반한 정책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보여 준 바 있다.(주8)

이어 두번째 의문으로 넘어가자. 과연 대중참여를 통해 내린 결정이 정책 엘리트들이 내린 결정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더 나을 것인가? 이 물음에 간단히 답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대중참여에 기반한 의사결정 역시 심대한 불확실성과 무지에 직면한 상태에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참여에 기반한 의사결정 역시 불완전할 것이며, 참여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기 단계에는 특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 과정 속에 더 많은 관점과 조언들이 포함되는 것은 기존 의사결정 방식 속에 숨어 있던 암묵적 가정들을 드러내고 서로 경합하는 여러 가정들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비성찰적 방식에 비해 의사결정의 질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ESRC 1999).

이와 같은 점들을 정책적으로 인식하고 대안적인 움직임을 지원하고 있는 서구의 여러 국가들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직 '과학기술 민주화'라는 용어 자체부터가 생소하게 여겨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1997년부터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구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를 중심으로 이런 문제의식이 조금씩 확산되면서 지지를 얻어 가고 있으며, 합의회의를 비롯해 시민배심원(citizens' jury), 집중 그룹토론(focus group), 숙의 투표(deliberative poll) 등과 같이 일반시민이 주도하는 정책참여 방식에 대한 연구, 소개, 도입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주9) 생명공학과 대중의 관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단계로 가져가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각  주
 

주1. 생명공학의 제반 영역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관해서는 Rifkin(1998), 김훈기(2000) 등을 참조하라.

주2. 이하 1절에서 제시된 논의 틀은 Turney(1998)의 논지를 대체로 따르고 있다.

주3. '대중의 과학이해' 분야가 부상하게 된 배경과 최근의 이론적 흐름, 그리고 '결핍 모형'에 대한 좀더 세밀한 비판은 김명진(1998), 김동광(1999) 등을 참조하라.

주4. 과학학에서의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홍성욱(1999b)를 참조하라.

주5. 이 점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연구들을 Collins and Pinch(1998a; 1998b)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6. '실질적 동등성'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는 Millstone et al.(1999)를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견해에 대해 다시 가해진 재비판은 Nature 401 (14 October 1999), 640-641에 실린 여러 과학자들의 논평을 보라.

주7. 최근 한국에서 진행중인 인간유전정보 관련 논쟁에 관해서는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운영하는 인간유전정보 보호 시민행동 홈페이지(http://bioact.net)를 참조하라.

주8. 국내에서 2차례에 걸쳐 개최된 합의회의에 관한 평가는 2000년 3월 24-25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대 호암생활관에서 개최된 '과학기술과 시민참여 ― 합의회의 국내 도입을 위한 워크샵'에서 행해졌다. 워크샵 자료집은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홈페이지(http://cdst.jinbo.net)의 '과학기술 일반 자료실'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주9.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펼쳐 온 지난 3년여의 활동에 관해서는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 편(1999), 김환석(2001), 한재각(2001) 등을 참조하라.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매달 발간하는 소식지 ≪시민과학≫의 과월호를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김동광. (1999). 「과학대중화의 새로운 시각」. 『진보의 패러독스』 (pp. 42-61). 당대.

김명진. (1998). 「일반인들의 과학기술 이해, 그리고 그것이 갖는 함의」. ≪연세≫ 50호, 142-153.

김영식·임경순. (1999). 『과학사신론』. 다산출판사.

김환석. (1999). 「과학기술의 민주화란 무엇인가」. 『진보의 패러독스』 (pp. 13-41). 당대.

김환석. (2001).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와 과학기술민주화운동」. ≪다른과학≫ 10호, 19-25.

김훈기. (2000). 『유전자가 세상을 바꾼다』. 궁리.

임경순. (1995). 『20세기 과학의 쟁점』. 민음사.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 편. (1999). 『진보의 패러독스』. 당대.

한재각. (2001). 「한 계단 위, 그곳에서 꾸는 꿈과 도전 ― 2001년 시민과학센터 운동」. ≪다른과학≫ 10호, 36-42.

홍성욱. (1999a). 「20세기 과학의 패러독스 ― 과학의 힘과 권위에 대한 공중(public) 의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과학과철학≫ 10집, 93-123.

홍성욱. (1999b). 「과학사회학의 최근 동향」.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 (pp. 21-67). 문학과지성사.

Collins, Harry, & Pinch, Trevor. (1998a). The golem: What you should know about science, 2n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ollins, Harry, & Pinch, Trevor. (1998b). The golem at large: What you should know about techn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SRC Global Environmental Change Programme. (October 1999). The politics of GM food: Risk, science and public trust. Special Briefing No. 5. University of Sussex. [국역: 「GM 식품의 정치학」, ≪시민과학≫ 14호 (pp. 6-19), 15호 (pp. 7-17)]

Jasanoff, Sheila. (1997). Civilization and madness: the great BSE scare of 1996.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6, 221-232.

Krimsky, Sheldon. (1992). Regulating Recombinant DNA Research and Its Applications. In Dorothy Nelkin (Ed.). Controversy: Politics of technical decisions, 3rd ed. (pp. 219-248). London: Sage. [국역: 「DNA 재조합 연구와 그 응용에 대한 규제」, ≪시민과학≫ 12호 (pp. 26-34), 13호 (pp. 5-11), 14호 (pp. 28-38)]

Millstone, E., Brunner, E., & Mayer, S. (1999). Beyond 'substantial equivalence'. Nature 401 (7 October), 525-526.

Rifkin, Jeremy. (1998). The biotech century: Harnessing the gene and remaking the world. New York: Jeremy P. Tarcher/Putnam. [국역: 전영택·전병기 역. (1999). 『바이오테크 시대』. 민음사]

The Ecologist. (September/October 1998). Special issue: The Monsanto files - Can we survive genetic engineering?

Tudor, Andrew. (1989). Seeing the worst side of science. Nature, 340 (24 August), 589-592.

Turney, Jon. (1998). Frankenstein's footsteps: Science, genetics and popular cultur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