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변형생물체(LMO)는 식품의 인체안전성, 환경에 대한 영향, 소수 다국적 농기업의 농업 장악, 종교적·윤리적 고려 등의 쟁점을 둘러싸고 전세계적으로 크게 논란을 빚고 있는 기술이다. 이러한 논란은 과학자나 정책결정자, 정치인 등의 정책 엘리트들간의 의견대립으로 그치지 않고 일반 시민들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 일반 시민들이 LMO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일차적인 이유는 이것이 식품의 안전성이라는 매우 민감한 사안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 차례의 식품파동을 겪은 유럽 소비자들의 LMO에 대한 거부감은 EU 내에서 강력한 규제체계의 수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수입규제나 표시제 시행 등을 놓고 미국, 캐나다 등의 농업수출국들과 심각한 통상마찰을 빚고 있다. 흔히 '대서양 분할(Atlantic divide)'이라고 불리는 미국과 EU간의 대립은 최근들어 아프리카나 아시아 같은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LMO와 관련된 정책의 영역에서 일반 시민이 더 이상 수동적인 주체로 간주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지구적인 참여민주주의의 진척과 함께 이제 비단 LMO뿐 아니라 새로이 도입되는 모든 기술이 사회에 수용될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일반 시민의 태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LMO처럼 민감한 쟁점을 여럿 건드리는 기술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LMO와 관련해 그 기술의 최종 소비자이자 잠재적 위험 부담자인 일반 시민에게 관련된 정보를 적절하게 제공하고 그들이 가진 인식과 이해를 조사하며, 더 나아가 관련 정책의 입안과 수립, 집행 과정에서 일반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은 기술의 궁극적 성패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2001년에 OECD에서 발간한 보고서 『파트너로서의 시민 Citizens as Partners』은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이 보고서는 국가 전체의 정책결정에 대한 일반 시민의 관여(civic engagement)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정부와 시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① 정보제공(information): 정부가 정보를 생산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일방향 관계를 말한다. 시민들의 요구에 의한 "수동적" 정보제공과 정부가 주도하는 "능동적" 정보제공이 있다. ex. 공공기록에 대한 접근성 보장, 간행물 발간, 정부 웹사이트 운영 등

② 자문(consultation): 시민들이 정부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하는 쌍방향 관계를 말한다. 정부가 의제를 설정하고 자문 절차를 마련하면 시민들이 이에 대해 자신들의 관점과 견해를 피력한다. ex. 의견조사, 법안 초안에 대한 코멘트 등

③ 적극적 참여(active participation): 정부와 시민의 파트너쉽을 말하며, 시민들이 정책결정의 과정과 내용 모두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최종 결정에 대한 책임은 정부가 지지만, 시민들이 의제 설정, 정책적 선택지 제안, 정책 대화의 형성 등에서 정부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ex. 합의회의, 시민배심원 등

이러한 분류는 비록 정부와 시민 양자간의 관계로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LMO 영역에서의 정보제공과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살펴보기에 적절한 개념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 틀을 원용해 우리나라의 경우 LMO 영역에서 이런 세 가지 유형의 커뮤니케이션과 참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외국의 상황과 비교할 때 어떤 측면에서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정보제공
 

일반 시민들은 LMO에 관한 정보의 대부분을 언론매체를 통해 얻는다. 그리고 LMO의 경우 그 쟁점의 중요성 때문에 언론매체에 보도되는 빈도나 기사의 수 자체가 상대적으로 그리 적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신문·잡지·방송 등의 언론매체에 보도되는 내용은 최근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단순 보도기사가 대부분이며, 분석기사의 경우에도 매우 일반적인 논점과 대립구도만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자들의 전문성 부족 등으로 인해 보도 내용에 오류가 있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따라서 언론 보도만 접한 일반 시민들이 LMO와 관련된 최근의 동향이나 부각되고 있는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가 일반 시민들이나 언론을 대상으로 직접 정보제공에 나서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관련 정부 부처(산자부, 농림부, 과기부, 환경부, 보건복지부 등)나 산하 혹은 유관 기관들(농수산물유통공사, 식의약청, 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 등)은 이런 활동에 있어 상당히 소극적이다. 유전자변형작물의 국내 개발 현황이나 유전자재조합식품/농산물의 도입 및 표시제의 운영 현황에 관한 정보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식의약청 등 관련 기관의 홈페이지에는 표시제의 시행에 관해 매우 개괄적인 정보만을 담은 홍보물이 올라와 있을 뿐이며 그나마 변동 상황을 반영해 수시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않아서, 일반 시민들이 표시제 시행에 정말 궁금해할 수 있는 부분을 채워 주기에는 크게 미흡해 보인다. 예컨대 표시제의 시행 여부는 어떤 경로로 모니터링되고 있는지(혹은 그렇지 못한지), 표시제를 어겨 유통업자가 처벌을 받은 사례가 실제로 있는지, 표시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유전자재조합(GM)' 표시가 붙은 식품이나 농산물을 시장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지, GM 표시가 붙어 있지 않은 식품에서 GMO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소비자단체나 환경단체의 발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관해 유관 기관의 홈페이지 등에서 친절한 설명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반면 과기부, 농림부, 환경부 등 여러 부처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는 외국 자료의 번역 등을 통해 좀더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긴 하지만, 이를 정리해 일반 시민이 접하기 쉬운 형태로 가공하려는 노력은 크게 부족해 보인다. 이 때문에 표시제 시행상황이나 농수산물 수입현황, 국외의 LMO 관련 동향 등에 대해 일반 시민들은 언론 등을 통해 매우 파편화된 정보를 접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정보제공에서의 소극성만큼이나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제공되는 정보의 편향성이다. 예컨대 식약청 등에서 발간한 GM식품 관련 홍보 책자들은 '무지한' 시민들이 GM식품과 표시제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겠다는 계도성 목적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소비자들도 그렇지만) 여러 차례의 식품 파동을 겪어 규제당국에 대한 신뢰가 그리 높지 않은 우리나라 시민들이 '유전자재조합식품은 그 안전성이 확인되었으니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는 식의 일방적 홍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일 것이다. 이런 식의 홍보를 통해서는 일반 시민들이 지닌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규제당국이 공공의 안전보다는 생명공학 산업의 이해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식을 빚어냄으로써 오히려 신뢰가 더욱 추락하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보다는 오히려 GM식품에 대한 상반된 입장과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논란들을 가능한 최신의 정보까지 균형있게 소개하는 사실 문서(fact sheet)를 정기적으로 만들어 널리 배포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2. 자문
 

시민들에 대한 정보제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정부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알아보고 의사를 수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존재한다. 이를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전화, 설문지, 인터뷰 등을 이용한 의견조사(opinion poll)이다. LMO를 포함한 생명공학 전반에 대한 의견조사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이 시행되었는데, 1980년대 후반 이후 현재까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EU, 일본 등을 포함해 적어도 20개국 이상에서 대규모 조사가 시행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대중적 사안들에 대한 유럽 시민들의 인식을 조사하는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 조사를 들 수 있는데, EU에서는 이 조사의 일환으로 대략 3년에 한번꼴로 생명공학에 대한 의견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최초의 조사는 1991년이었고, 이후 1993년, 1996년, 1999년, 2002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는 다단계 무작위 표집 절차를 통해 15세 이상 인구를 통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정하며, 국가별로 대략 1,000명씩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87년에 시행된 기술영향평가국(OTA)의 의견조사를 시작으로 1990년대 이후 정부 부처, 생명공학 기업, 대학, 연구비지원 기구 등 다양한 곳에서 생명공학에 대한 일반 시민 의견조사를 시행해 왔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국립과학재단(NSF)에서 매년 시행하는 과학 및 공학 지표(Science and Engineering Indicators, SEI) 조사의 일부로 생명공학에 대한 의견조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초에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주관한 대규모 의견조사가 있었고,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 ELSI 연구의 일환으로 2001년에서 2003년에 걸쳐 여러 차례의 의견조사 연구가 시행된 바 있다. 또한 2001년 이후에는 소비자단체나 환경단체의 주관 하에 LMO에 관한 몇 차례의 의견조사가 있었고 그 결과가 언론에 보도되어 대중적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LMO관련 의견조사는 외국에서 시행되는 그것에 비해 여러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여론조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단발성 행사로 끝난다는 점이다. 이는 조사대상 집단의 인구통계학적 구성과 표본 선정 방법, 설문 문항을 일정하게 유지한 채 정기적으로 의견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일반시민의 견해 변화를 시계열로 분석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유로바로미터나 SEI 조사와 대비된다. 이런 문제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떤 정해진 기관이 의견조사 업무를 맡아 이를 정기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견조사는 분명 일반 시민들이 LMO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수단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의견조사는 조사대상이 되는 시민들에게 미리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시행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의견조사에 쓰이는 설문 문항들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며 피상적인 지식이나 인식 수준만을 묻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의견조사는 특정 주제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이에 대해 충분히 숙의를 해봄으로써 도출될 수 있는 견해를 잡아내는 데는 한계를 내포한다.

일반 시민들의 의사를 좀더 적극적으로 물어보는 방법은 국가에서 마련한 어떤 규제안이나 정책 초안을 놓고 일정 기간 동안 일반 시민의 견해를 청취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쓰이는 공청회나 의견서 제출 요청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그 개최 사실이 사전에 언론 등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채 시행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몇 안되는 환경·시민단체를 제외하면 일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의견을 내놓기는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공청회나 의견서 제출의 경우 그런 절차를 거쳐 수렴된 의견이 나중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피드백이 없기 때문에 그런 절차 자체의 무용론이 종종 제기되곤 한다.

1990년대 말부터 일본 정부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공공정책의 결정에서 일반 시민이나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활용하고 있는 퍼블릭 코멘트(public comment)는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훌륭한 제도적 장치이다. 이는 정부가 마련한 지침안에 관해 언론 등을 통해 의견모집을 공표한 후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양식에 맞추어 시민들의 의견을 받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의견수렴 기간이 끝난 후에 어떤 의견이 누구로부터 얼마나 들어왔고, 이들 각각에 대해 어떻게 회답했으며, 이것이 해당 지침안의 수정에 얼마나 반영되었고 반영되지 않은 경우 어떤 이유로 그러했는지를 정부가 홈페이지 등을 통해 반드시 공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퍼블릭 코멘트는 작년 10월 일본 정부의 바이오안전성의정서 비준을 앞두고 관련 국내 법령 및 시행규칙의 제정 과정에서 주요하게 활용되었다.

참고로, 2000년 12월에 문부성, 후생성, 통상산업성, 그리고 과학기술청이 합동으로 내건 "인간게놈 및 유전자해석연구에 관한 윤리지침(안)에 대한 의견(퍼블릭 코멘트)모집"에 쓰인 의견제출용지서식은 다음 <표 1>과 같다.
 
 

3. 적극적 참여
 

LMO와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일방적인 정보제공도, 관련된 사전 정보의 제공 없는 인식조사나 의견수렴도 아닐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과학자, 정책결정자,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 환경·시민단체, 언론, 일반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사회적 토론과 학습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통상적인 정책 환경에서는 이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가능케 하는 공간을 새로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199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많이 개최되고 있는 합의회의나 시민배심원과 같은 숙의적 논의 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합의회의는 "선별된 일단의 보통 시민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논쟁적이거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적 혹은 기술적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질의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답을 청취한 다음 이 주제에 대한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여 최종적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는 하나의 포럼"이라고 정의되는 시민참여의 새로운 모델이다. 1987년 덴마크에서 처음 도입된 이 모델은 1990년대 초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각각 개최된 것을 필두로 해서 최근 몇 년 동안 오스트리아, 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일본 등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주관으로 지난 1998년과 1999년에 합의회의가 개최된 바 있으며, 이 중 첫 번째 합의회의는 'GM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를 주제로 열렸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합의회의는 세계 각국에서 적어도 50차례 이상 개최되어 왔는데, 합의회의가 열렸던 주제들 중 절반 이상이 바로 생명공학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가치의 대립을 수반하는 중간 정도 범위의 과학기술 관련 주제'를 다루는 숙의에 적합한 합의회의의 성격에 GM식품, 인간게놈연구, 유전자치료, 생명복제와 같은 생명공학의 여러 쟁점들이 잘 부합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표 2>는 생명공학을 주제로 열린 합의회의들을 국가별로 정리해본 것인데, 이를 보면 그간 개최된 생명공학 관련 합의회의들 중 GM식품을 주제로 한 것이 가장 많아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GM식품을 주제로 한 합의회의는 GM식품이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전세계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1990년대 후반에 특히 집중적으로 열렸다. 이는 각국의 일반 시민들이 GM식품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와 우려를 정책결정자에게 전달하고 사회적 토론을 활성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GM식품에 관한 사회적 학습 및 토론과 관련해 합의회의 이외에 또하나 주목할 만한 사례는 작년에 영국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던 GM 대중논쟁이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광우병 논쟁의 진원지이며 1999년 이후부터 GM식품을 놓고 엄청난 논쟁이 겪었던 국가인데, 2002년에 GM작물의 영국 내 경작 허용여부 결정을 앞두고 다시한번 논란이 일자 영국 정부가 폭넓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GM식품에 대한 대규모 평가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GM 대중논쟁 사례는 GM식품에 대한 사회적 토론을 조직하는 방향에 대해 상당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되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GM 국가?(GM Nation?)'라고 이름붙여진 대중논쟁 과정은 영국 시민들이 GM식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손쉬운 의견조사 방법에 의존하는 대신, 다양한 정보전달 매체와 시민참여 방식들을 결합시켜 심층적인 토론 과정을 창출해냈다. 대중논쟁의 조직을 맡은 조정위원회는 먼저 영국 각지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을 수 차례의 워크샵에 초청해 난상토론을 벌임으로써 대중논쟁에서 다루어질 의제들을 정했다. 이어 독립영화 감독에게 의뢰해 GM식품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담은 영화를 제작했고, 작년 2월부터 시민들이 GM식품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토론 촉진을 위해 CD-ROM과 문서자료를 만들었다(영화는 비디오테이프로 모두 1,150개가 제작되었고 6,000장의 CD-ROM과 20,000권의 자료집이 배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준비에 근거해 작년 6월 초부터 모두 670여 차례에 이르는 토론모임이 영국 곳곳에서 6주간 진행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들 모임 대부분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정위원회는 대도시에서 초기에 열린 6차례의 토론모임만을 직접 주관했을 뿐이며, 나머지 모임들은 지역에서 토론을 조직해 자료를 요청해 오면 조정위원회가 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형태는 공장에서의 소모임, 지역 마을회관의 집회, 농산물 시장에서의 토론 등 매우 다양했다. 대략 2만여 명의 시민들이 토론모임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토론 후 참가자들은 주어진 양식의 용지에 자신의 의견을 기재해 조정위원회로 보내왔다.

토론모임 진행과 아울러 시민참여를 위한 또다른 시도들도 병행되었다. 조정위원회는 토론모임이 참여에 적극적이거나 GM식품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개방되어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의 견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에 답해, 다양한 집단을 포괄할 수 있도록 무작위추출된 77명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10개의 토론그룹("Narrow-But-Deep")을 조직했다. 이 그룹의 참가자들은 생명공학계에 종사하거나 찬성 혹은 반대의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구성했다. 이 그룹들은 2주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 모였는데, 참가자들은 첫 번째 모임에서 GM작물의 쟁점에 관한 소개를 받은 후 2주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일기를 쓰며 주위 사람들과 얘기를 해보도록 권장되었으며, 이후 두 번째 모임에서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고 토론을 벌였다. 이는 앞서의 토론모임에 대한 일종의 대조군(群)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년 8월에는 뉴캐슬대학의 정책, 윤리 및 생명과학연구소(Policy, Ethics and Life Sciences Research Institute, PEALS)의 주관으로 GM작물에 관한 시민배심원이 두 곳에서 개최되었다. 두 개의 시민배심원은 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성별이나 연령 등을 안배해 무작위추출한 15명 내외의 시민들로 각각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시민배심원은 주최측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의 증언을 듣고 숙의를 거쳐 '평결'을 내리는 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보통인데 반해, PEALS의 'DIY(Do-It-Yourself) 시민배심원'은 논의될 의제의 틀을 배심원들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시민배심원이 내린 결론은 이후 GM 대중논쟁이라는 더 큰 틀 속에 반영되었다.

토론모임, 웹포스팅, 편지, 이메일 등을 통해 모두 37,000명이 의견을 밝힌 이 모든 논의의 성과물은 작년 9월 말에 발간된 결과보고서 속에 정리되었는데, 이 보고서는 GM식품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인식과 견해를 알아보려는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4. 향후의 전망
 

현재 우리나라는 유럽은 물론이고 이웃 일본이나 대만과 비교해서도 GM식품에 대한 공론화 정도가 매우 낮고 공개적 논의가 미약한 상황이다. 그 결과 GM식품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있으되 이에 대한 대응은 '각자 알아서 하는' 식의 개인적 수준으로 미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사회적 논쟁의 부재는 일견 '불필요한' 비용의 절약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충분한 공론화를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돌발 사건이 발생하면 그간 숱하게 겪어왔던 '∼파동' 같은 패닉 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미 언급했듯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98년 11월에 GM식품에 관한 합의회의가 열려 일반 시민들이 이 문제에 관해 숙의하고 토론을 통해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낸 바 있다. 이 시도는 GM식품에 관한 사회적 토론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는 측면뿐 아니라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합의회의로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1998년은 전세계적인 GM식품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GM식품에 관한 공론화가 크게 미흡했던 시점이어서 당시 열린 합의회의가 GM식품과 관련된 여러 쟁점들을 충분한 정보에 근거해 다루었다고 보기에는 상당히 아쉬움이 남는다. 외국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같은 주제에 관한 합의회의를 여러 차례 개최하기도 한다(GM식품 합의회의를 두 차례 이상 개최한 국가들에는 뉴질랜드, 노르웨이, 일본이 있다).

따라서 지난 수 년 동안 변화한 상황을 반영해 국내에서도 합의회의나 영국의 GM 대중논쟁과 같은 GM식품에 관한 사회적 토론의 공간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공간은 단순한 의견조사나 정부의 규제안에 대한 의견서 제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견해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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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2004 바이오안전성백서』(한국생명공학연구원, 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