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시민참여는 이제 거의 시대적 요청으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1987년 이후 상대적으로 확장된 정치공간 속에서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시민참여를 향한 욕구는 점차 커져 왔다. 그리고 그간 다양한 시민단체들의 활동으로 열린 참여의 장 속에서, 시민들은 이제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해 줄 것을 막연하게 바라기보다는 직접 참여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또한 여러 사회적 갈등을 예방하거나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등의 '실용적'인 이유에서라도 시민참여는 불가피한 것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모토로 내세운 '참여정부'나 새로 설치한 '국민참여수석실' 등은 시대적 요청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이와 같은 욕구와 필요에 비추어 볼 때, 한국사회에서 시민의 직접참여를 위해 도입되고 있는 제도적 장치들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시민단체 대표가 참여한 자문위원회나 각종 정책결정시에 요식행위로 치러지고 있는 공청회만 가지고 시민참여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민참여를 위한 더 많은 모델이 제시되어야 하며 더 많은 실험들이 시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민참여'라는 구호만 난무할 뿐 정작 새롭게 검토되고 적용되어야 할 다양한 시민참여 모델들은 외면되고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첫 해가 저물어 가는 현 시점에서 이보다 더 시급하게 부각되고 있는 문제는, 각종 국가 정책현안에서 그나마 제안된 몇 가지 새로운 시민참여의 시도들이 기형적인 형태로 도입되고 이 때문에 다름아닌 이해당사자나 지역 주민들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다양한 숙의적 시민참여 제도들이 제대로 소개되거나 활용되고 있지도 못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는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민참여의 본뜻과 여러 제도들의 강점 및 약점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시민참여 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고, 그럼으로써 앞으로 이런 방식의 문제해결 시도가 아예 거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부안 핵폐기장, 북한산 관통터널, 기술영향평가 시범사업 등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올해의 시민참여 관련 시도들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그 각각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노정되고 있는지를 밝히고 시민참여 제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주민투표: 부안사태의 후퇴를 위한 명분용?
 

먼저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둘러싼 대립구도에서 갈등해결 수단으로 부각된 '주민투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난 7월 14일 김종규 부안군수의 핵폐기장 유치신청으로 불거진 속칭 '부안사태'는 일차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무시된 채 일부 관료와 지자체장의 독단적 결정에 의해 핵폐기장 유치가 추진됨에 따라 빚어진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부안 주민들은 군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핵폐기장 유치신청 자체가 원천무효라고 선언하고, 부지선정의 무조건 백지화를 주장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말 MBC TV토론 자리에 나온 부안군수가 핵폐기장 문제에 관한 주민 찬반투표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김두관 당시 행자부 장관이 이를 수용할 뜻이 있음을 밝힌 것이 논의의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부안군민대책위는 절차를 무시한 유치신청은 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이에 반대했고, 산자부 장관도 주민투표의 법률적 근거가 미비하고 국책사업을 지역주민의 투표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들어 역시 수용불가 의사를 밝힘으로써 논의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다.

주민투표가 다시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부상한 것은 정부와 주민간의 공동협의회에 중립인사로 참여했던 최병모 민변 회장이 11월 초 '연내 주민투표 실시'를 중재안으로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이 안에 대해 대책위는 핵폐기장 백지화라는 기존의 입장을 양보해 주민투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번에는 정부에서 연내실시 불가 입장을 밝혀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빚어진 '부안민란'에서 정부의 문제해결 의지에 대한 불신이 커다란 요소로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주민투표의 연내 실시를 통한 문제 해결은 사실상 어려워졌지만, 주민투표 실시 시기와 절차를 놓고 정부와 대책위간의 실무회의가 조만간 열릴 예정으로 있다.(주1) 시민사회·종교계 대표자들은 현재 주민투표 조기실시를 통한 문제 해결을 지지하고 있으며, 시민사회단체 중재단을 만들어서 정부와 부안 주민들 사이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

부안 핵폐기장 문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평가를 지금 시도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주민투표를 둘러싼 일련의 공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민투표라는 제도적 틀을 부안 핵폐기장 논란으로부터 떼내어 본다면, 이는 지역주민 모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두말할 나위없이 바람직하며 시급히 도입되어야 마땅한 제도일 것이다.(주2) 그러나 현재까지의 부안 핵폐기장 논란에서 주민투표제는 문제 해결에 별반 도움이 못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이는 주민투표가 제안된 시점이 적절치 못했으며 제안 주체가 이미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주민투표는 사회적 갈등요소가 극한적 상황에 도달하기 전에 이를 조정하고 토론을 거쳐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한 제도로서 기능하는 것이 적절하다. 즉, 핵폐기장 유치신청 이전에 거쳐야 할 절차상의 한 과정으로 의당 고려되었어야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순서가 뒤바뀌어 이미 유치신청이 이루어지고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빚어진 후에 주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임시변통으로 주민투표가 제시됨으로써 그 의미가 크게 퇴색하고 말았다. 또한 제안 주체가 이미 주민들의 신뢰를 잃은 부안군수와 행자부 장관이었다는 점 역시 주민들이 그 배후에 숨은 의도를 의심케 하고 초기에 이를 거부하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주민투표를 둘러싼 청와대, 행자부, 산자부, 한수원간의 엇박자와 말바꾸기 역시 주민들이 품은 회의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대책위 측에서 주민투표를 받아들여 협의가 진행중인 현 상황에서도 정부가 주민투표를 진지한 시민참여의 시도로서 고려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주민투표의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찬성쪽 주민들을 압박해 부안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계속 추진하려는 속셈일 거라고 의심하거나 기껏해야 부안에서 퇴각하기 위한 명분으로 주민투표를 고려하고 있을 뿐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일 것이다.

이번 주민투표의 한계는 또 있다. 부안군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민투표를 통해 '부안사태'는 정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것은 여전히 미봉책일 뿐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어딘가에 결국 핵폐기장이 건설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정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보다 거시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국 에너지정책의 미래, 그리고 그에 따른 핵폐기물 처리 방식과 핵폐기장 입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는 것이 급선무이다. 만약에 사회적 합의를 얻어내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가 계획되지 못한다면, 안면도-굴업도-위도로 이어지는 격렬한 저항의 역사에 새로운 지역이 추가될 것이 분명하다.
 

공론조사: 이해당사자가 외면하는 시민참여 모델?
 

이어 올해 제기되었던 또다른 시민참여 방식인 '공론조사'가 한국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돌면서 유명무실화되고 있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는 현재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환경갈등 가운데 하나인 북한산 관통터널 문제와 관련해 정부가 제기한 것이다. 이 터널은 서울외곽순환도로 구간 중 일부로, 지난 2001년 논쟁이 본격화된 이후 환경단체와 불교계는 사찰 수행환경 저해와 국립공원 생태계 파괴를 이유로 의정부 외곽을 우회하는 대안노선을 주장한 반면 한국도로공사측은 공사비의 증가와 추가 환경파괴를 이유로 기존노선을 고수하면서 팽팽하게 맞서 왔다. 그 과정에서 불교계·환경단체·지역주민들과 시공·용역회사 사이에 여러 차례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고 공사중지 가처분신청과 업무방해 혐의 고소 등 법정소송으로 비화하기도 했다.(주3)

이러한 상황에서 올 4월, 건교부와 불교계가 공사를 잠정 중단하고 관련 전문가들로 노선재검토위원회를 만들어 논의하자는 데 합의함으로써 일단 극한 대립상황을 넘어 논의를 위한 장은 마련되었다. 그러나 노선재검토위원회는 6월 초의 최종 표결에서 의정부 우회노선 지지 4명, 북한산국립공원만 우회하는 노선 지지 2명, 기존 관통노선 지지 5명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결과는 논쟁 양측이 그 결과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결국 최종 결정은 국무총리실로 넘어갔다.

그리고 지난 9월 19일에 정부는 북한산 관통도로에 대한 결정을 유보하고 '공론조사'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불교계와 환경단체는 기존노선에 대한 반대가 우세했던 노선재검토위원회의 결과를 무시한 처사이며, 공론조사는 기존노선 강행에 앞선 요식절차에 불과하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 10월 21일 정부는 공론조사 실시를 위해 이해당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를 열었지만 불교계와 환경단체 관계자들은 공식적으로 단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아 설명회는 사실상 무산되었다. 현재 불교계는 공론조사 참여의 전제조건으로, 대안노선에 대해서도 기존노선과 같은 수준의 연구조사가 수행되어 기초설계자료 등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을 내걸고 있다.(주4) 지금으로서는 대등한 토론을 위한 토대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공론조사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정부는 불교계가 공론조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연말부터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또 한차례의 물리적 충돌이 예고되어 있다고 하겠다.

결국 현 상황은 정부가 학계의 조언을 얻어 공론조사라는 갈등해결 방법을 제안했으나 불교계와 환경단체가 이를 거부했고, 정부가 공론조사 없이도 기존노선을 강행할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로써 또 하나의 시민참여 모델이 미처 시작도 해보기 전에 사장되어 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앞선 주민투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 역시 공론조사라는 방법론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 제안했던 이화여대 김원용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공론조사가 "상호토론이 가능하도록 참가자의 범위를 축소하되, 과학적 확률표집을 이용하여 참가자 표본을 추출함으로써 대표성을 확보하여 <토론과 대표성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제도적 장치라는 데 별다른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주5) 문제는 또다시 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를 담아 이러한 제도적 장치의 도입을 주장했는가에 있다. 이렇게 보면 지난 9월 19일의 정부 발표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정부는 "사패산 관통노선이 대안노선인 북한산 외곽우회노선, 의정부 우회노선보다 산림을 덜 훼손시키고 경제성이 높으므로 불가피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공론조사의 도입을 발표했다. 이는 노선재검토위원회의 결론을 일방적으로 해석한 것일 뿐 아니라 그간 격렬한 공방을 벌여 온 쟁점에 관한 사회 일반의 토론을 제안하는 첫마디치고는 지나치게 편향된 발언이었다. 여기에 정부는 북한산 관통도로에 대한 결정 유보를 경부고속전철 천성산·금정산 노선 강행 결정과 나란히 발표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합리적 근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천성산·금정산 터널 역시 거의 같은 기간에 노선재검토위원회가 운영되었고 표결 결과에서도 북한산의 경우와 비슷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결정 유보, 다른 한쪽은 강행으로 결론이 났다는 점 자체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정부는 '공론조사'라는,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생소한 방법론을 갈등해결 수단으로 도입하는 문제를 불교계나 환경단체 등의 이해당사자와 한마디 협의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우를 범했다. 이 때문에 발표 직후에 불교계와 환경단체, 심지어는 관련 연구자들까지도 '공론조사'가 과연 뭘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웃지못할 광경이 빚어지기도 했다.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는 쟁점일수록 그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절차와 과정에서부터 합의를 이루어야 하는 법인데, 정부는 이런 기본 원칙을 저버렸고 이로써 관련 이해당사자의 신뢰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공론조사 발표 후 정부의 행보 역시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이유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보더라도 건교부가 공론조사 결과에 미리부터 '자신감을 보이고' 있으며 이 때문에 조속한 시행을 희망하고 있다고 나오는데 누가 이런 제안에 선뜻 응하려 하겠는가. 건교부의 '자신감'은 이미 다른 구간의 공사가 일부 진척되어 있고 대안노선의 상도 분명치 않은 현재 상태에서는 일반시민들 역시 이미 투입된 '본전' 생각을 안할 수 없고 따라서 자신들을 지지할 거라는 안일한 기대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론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안노선에 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 각각의 노선들의 장단점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불교계의 반발은 기본적으로 정당한 것이라 하겠다.(주6)

북한산 관통도로를 둘러싼 논쟁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좀더 두고봐야겠지만 적어도 당장의 시점에서 보면 이 논쟁에서 가장 타격을 크게 입은 것은 공론조사라는 시민참여 방법론 그 자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공론조사가 시행 단계로 미처 옮겨지기도 전에 특정 의도를 담은 것으로 의심받고 이해당사자에 의해 거부당했으며, 앞으로도 그런 오명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술영향평가: 시민참여와는 무관해진 '앙꼬없는 찐빵'?
 

마지막으로 과학기술기본법에 규정되어 올해 시범사업이 수행된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 TA) 제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TA는 그 자체가 시민참여의 한 방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미국에서 TA는 해당 쟁점에 관한 전문가들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해당사자들의 자문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되어 시민의 직접참여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서유럽, 특히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TA 제도는 시민참여적 요소를 대폭 반영하고 있다. 이는 시민참여를 통해서 새로운 기술 분야가 시민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안은 무엇인지를 보다 적절하게 평가해낼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른 기술영향평가제도가 '시범사업'의 성격을 가지고 시행되었다. 결과는 아직 발표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이 이해당사자와 일반시민의 광범한 참여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우선 주제 선정에서부터 시민사회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했다. 올해 대상기술로 선정된 것은 'NBIT 융합기술'로서 일반인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분야였다. 평가주체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NBIT를 나노기술(NT), 생명공학(BT), 정보통신기술(IT)이 융합된 기술 분야라고 제시하고 있는데, 스스로도 NBIT 융합기술의 모호한 개념으로 인해서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무슨 기술인지조차도 모호한 상태에서 그 영향을 평가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TA를 필요로 했던 더 시급한 당면 현안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TA(특히 시민참여적 TA)가 이루어졌더라면 좋았을 현안은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국가교육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논쟁이다. 교육현장에 정보통신기술을 전국적인 차원으로 도입하여 학생들의 정보를 집적·이용하기 위한 이 계획은 학생들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작년 말부터 논란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올해 초부터 논쟁은 교육부와 교원단체, 인권·시민단체, 학부모·학생단체 사이의 반목과 갈등으로 발전해 시행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 이러한 갈등은 NEIS 구축을 위한 업무처리재설계(BPR) 시에 교사, 학부모 등 관련 당사자가 참여해 논의가 이루어졌더라면 사전에 예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주7)

NEIS 사례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5월에 전교조 등의 진정을 받아서 NEIS의 프라이버시권 침해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한 것을 두고, NEIS에 대한 실질적인 TA가 이루어졌다는 평가가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 갈등이 있는 기술과 관련된 현안을 마다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수렴과 면밀한 검토를 통해서 의견을 제출한 국가인권위원회의 태도는 '민감한 현안을 피한다'는 주제 선정기준을 암암리에 적용한 KISTEP의 그것과 대조적이라 하겠다. 게다가 '사회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첨단기술 분야'라는 또다른 주제 선정기준은 결과 여부와 무관하게, TA 제도를 단순히 새로운 기술분야를 부각시키는 도구로만 보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번에 NBIT 융합기술을 TA 대상기술로 선정한 것은 앞으로 정부가 생각하는 TA 제도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시민과학센터는 과학기술기본법 제정 논의 때부터 TA 제도가 관료적으로 '타락'할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해 왔다. 당시 시민과학센터는 의견서를 통해 TA의 시행주체로 지정된 KISTEP이 과학기술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이번의 TA 시범사업을 통해 주제 선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구조가 대단히 취약하다는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현행 제도 하에서는 과학기술부 장관이 다른 부처와 협의해서 주제를 선정하도록 규정되었을 뿐, 시민들이 우려하는 기술과 관련된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TA를 실시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통로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시범사업에서는 기술영향평가위원회에 시민단체 대표가 소수 참여하여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지만 의제 설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TA 연구가 실제 수행되는 과정에서도 기술영향평가위원회와 분과위원회에 시민단체 대표를 참여시켰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시민참여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TA 시범사업에 대해 일반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언론 지상에 이번의 기술영향평가가 소개된 횟수가 단 1차례에 불과할 정도이며, 결과를 공개하는 절차도 공청회가 아닌 전문가간담회로 결정된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름뿐인 '시민참여' 제도,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참여정부' 원년의 끝에 받아든 과학기술·환경정책에서의 시민참여 성적표는 거의 참담한 수준이다. 부안 핵폐기장과 북한산 관통도로 논쟁에서 정부는 주민투표와 공론조사라는 새로운 시민참여 방안을 해법으로 꺼내들었으나 이는 모두 초기에 지역 주민 혹은 이해당사자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위에서 자세히 본 바와 같이 이런 사태가 빚어진 데는 기본적으로 정부측의 잘못이 크다. 정부는 이와 같은 시민참여의 수단을 사전 의견수렴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대신 일단 내려진 결정에 대한 주민반발을 무마하거나 이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내놓았고, 이로써 지역 주민과 이해당사자의 불신을 자초했다. 또한 올해 시범사업이 실시된 기술영향평가는 그 각 단계에서 시민참여의 요소를 체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시민의 뜻이 반영되지 못하는 관료적 장치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상식적인) 사항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선 시민참여를 위한 시도를 최대한 해당 사업이나 프로젝트 초기에 진행해야 한다. 가능하면 사업의 설계 과정부터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 앞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한 영향들에 관해 논의를 같이하면 더 좋을 것이다.(주8) 사업이 이미 상당부분 진행되었을 때 시민참여 제도의 시행을 추진하는 것은 진정 이해당사자들의 의사를 반영할 의지가 있는지 의혹을 사기 쉽다. 또한 이미 많은 이권이 걸린 상황으로 전개된 이후에는 이해당사자들이 시민참여 제도를 전략적으로 이용 내지 거부하려는 경향을 낳기 쉬우며, 이는 시민참여 제도 자체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다. 둘째로 많은 개발사업에서 중립적 행위자가 아닌 사실상의 이해당사자 노릇을 하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중립적 시민단체 등에서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쟁점에 개입해 시민참여 제도의 시행을 제안하고 진행과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제안 주체가 이미 신뢰를 잃어버려 시민참여 제도 자체가 불신을 받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  각   주  >

1. 이 글의 초고가 완성된 이후인 12월 10일에 정부는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 데 대해 공식사과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도 부지 유치신청을 받겠다고 밝혔다. 이는 부안 핵폐기장에 대한 사실상의 '백지화' 선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또한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제부터 부지 유치신청을 하는 지자체들은 우선 주민 50% 이상의 청원을 받아 지자체장이 예비신청을 하고 TV토론을 거쳐 주민투표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주민반발을 감안해 기존의 부지신청 절차를 상당히 보완한 것으로 환영할 만한 조치이다. 그러나 정부는 부안의 경우 이미 지자체장이 유치신청을 했기 때문에 주민투표에서 유치의사가 확인되기만 하면 타 지역에 대해 우선권을 갖는다고 밝힘으로써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2. 사실 주민투표제의 필요성은 1991년에 지방자치 제도가 부활하는 당시부터 인식되어 왔다. 진정한 지방자치를 위해서는 '주민소환제'와 함께 '주민투표제'가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구화된 형태로 도입된 지방자치 제도에 의해 주민투표제도 빠진 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하승수, 「시민자치 역량강화를 위한 과제」, 『시민과세계』 제4호[2003년 하반기], 참여사회연구소). 이 때문에 주민투표제가 빠진 지방자치 제도는 그 의미를 상실했다는 비판과 함께 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오래 전부터 비등한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는 올해 10월에 주민투표법안을 준비해 국회에 상정해 놓고 있으며, 빠르면 내년 여름에 법이 발효될 예정이다.

3. 북한산 관통도로 논쟁은 사실 성격이 상당히 다른 두 개의 논쟁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이는 서울외곽순환도로의 기존노선이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 등 3곳을 터널로 뚫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중 북한산국립공원 구역에 해당하는 사패산터널의 경우 국립공원 내에 자리잡은 여러 사찰들이, 수락산과 불암산터널의 경우 인근 지역주민들이 주요 이해당사자였으며,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우이령보존회,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들은 이 둘 모두에서 활동한 행위자였다. 따라서 환경파괴 외에 전자의 경우 사찰의 수행환경 저하가, 후자의 경우 후자는 지역주민들의 환경권 침해가 주된 쟁점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전자가 국립공원 구역을 포함했고 또 이해당사자(불교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 컸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전자 쪽에 집중되었다. 실제로 사패산터널은 현재 굴착을 시작도 못한 상황인 반면, 수락산·불암산터널 공사는 이미 상당히 진척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4. 참고로 현재 불교계는 공론조사 수용 여부를 놓고 내부적으로 입장이 분열되어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은 현 상황에서 정치권과의 타협을 통해 공론조사를 수용할 의사를 내비치고 있는 반면, 불교환경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반대진영은 선행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5. 김원용, 「공론조사」, 공론조사 설명회 발표자료(2003.10.21).

6. 그러나 이번 북한산 관통도로 논쟁은 정작 공청회가 열리고 노선이 결정된 1998년이 아니라 공사가 시작된 후인 2001년에 본격 점화되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단 공사를 진행시켜 놓고 보자는 식으로 밑어붙이기식 강행을 일삼는 도로공사나 건교부의 관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7. 황주성·최선희, 「전자정부 사업과 개인정보보호 이슈: NEIS를 중심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2003년 6월.

8. 여기서 최근 핵폐기장 부지 선정과 관련해 선진국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핵폐기장 부지 선정에서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한 후, 사업계획 첫단계부터 주민참여를 통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신뢰를 얻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1997년 핵폐기장 부지 선정에서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영국은 1999년 이후 핵폐기물 처리에 관해 다양한 시민참여 방식(여론조사, 워크샵, 합의회의, 시민패널, 포커스그룹 등등)을 동원해 일반시민들의 의견을 묻는 한편, 정책결정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김명진, 「외국의 핵폐기장 부지 선정이 주는 교훈」, ≪시민과학≫ 48호(2003년 9/10월) 참조.
 
 
 

출전: 『시민과학』 49호 (2003.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