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단 1년 남겨두고 있는 20세기의 끝자락에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과학기술이 지난 그 어떤 시기보다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사회 전 영역에 있어서 과학기술의 성과들이 광범하게, 점차 그 속도를 빨리해 가면서 도입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일상생활과 사회구조는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사회에 더 많은 재화와 더 많은 편리,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확대된 평등을 가져다 준 것으로 나타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전 시기에 비해 보았을 때 20세기는 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상대적으로 좀더 평등하게 분배받은 시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20세기의 후반부에 가까와지면서 과학기술의 여러 '첨단' 성과들이 오히려 사회 속에 구조화된 위험과 불평등의 심화, 각종의 환경적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차츰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 중 일부가 이미 단순한 우려 이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학기술을 낙관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점차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설문조사와 같은 피상적인 조사형식에서 드러나는 일반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지난 수십년간 큰 변화를 겪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과학기술과 관련된 구체적인 쟁점들에 대한 시각은 상당한 변화를 겪은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대중적 논쟁의 등장이다.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대중적 논쟁은 서구 각국에서 사회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던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환경과 핵 등의 몇몇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를 지나면서 논쟁의 수와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의 논쟁들은 새롭게 등장한 전지구적 쟁점들을 포괄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 쪽으로 그 성격을 바꾸어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논쟁을 다루는 사회학적 연구 역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 왔다.

아래에서는 먼저 서구 사회에서 지난 30여년간 진행되었던 논쟁들 중 네 가지 사례를 뽑아 그것의 전개과정과 특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어 각각의 논쟁들이 지니는 함의를 전체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논쟁들이 현재의 한국사회에 어떠한 함의를 던져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사례연구들의 정리는 Dorothy Nelkin (ed.), Controversy: Politics of Technical Decisions (London: SAGE, 1979; 2nd ed., 1984; 3rd ed., 1992)에 크게 힘입었다.
 

사례 1. 케이유거 핵발전소 부지 선정 논쟁 (1967∼1973)

케이유거 호는 미국 뉴욕 주 중부에 위치한 호수로, 길이는 61킬로미터, 깊이는 130미터이다. 이 호수는 12월에서 5월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전체적으로 등온층을 형성하지만, 5월에서 12월까지는 호수가 서로 수온이 다른 세 개의 층(표수층, 수온약층, 심수층)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수온 주기를 갖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1967년 6월, 뉴욕 주 전기가스회사가 케이유거 호수변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 것은 케이유거 호가 1년 단위의 냉각 주기를 갖고 있어 호수의 물을 냉각수로 사용하기 용이하다는 점, 호수가 깊어 원자로를 배에 실어 나르기가 용이하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결과였다. 전기가스회사 측은 1973년 중반까지 발전소를 완공하여 운전에 들어간다는 계획 하에 1968년 3월 미 원자력위원회에 건설 허가를 제출하고 1968년 4월부터는 이미 사들인 발전소 건설 예정 부지의 정비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발전소의 건설이 호수생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와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우려가 등장하게 된 것에는 발전소 건설 예정 부지에서 불과 20km 떨어진 곳에 코넬 대학이 위치하고 있었고, 이곳에 자신들의 지역사회에 관심을 지닌 과학자와 엔지니어 집단이 모여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1968년에 이 대학 자원보존학과의 앨프리드 아이퍼(Alfred Eipper)와 클래런스 칼슨(Clarence Carlson)은 각각 여러 분야에 걸치는 연구집단을 조직하여 건설예정인 발전소가 호수생태에 어떠한 열 오염과 방사능 오염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5월과 12월에 각각 발표했다. 먼저 아이퍼 보고서는 심수층에서 찬물을 퍼올려 냉각수로 사용한 다음 온도가 상승한 물을 표수층에 방류하는 것이 호수의 정상적인 성층 유형을 교란하여 자연적 부영양화 과정이 강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를 막기 위해 아이퍼 보고서는 냉각 연못이나 냉각 탑의 설치를 강력하게 권고했다. 칼슨 보고서는 발전소에서 냉각수에 섞여 호수로 방출되는 저준위 폐기물이 물의 흐름이나 소용돌이, 동·식물의 먹이사슬 등을 통해 국소적으로 농축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방사성 핵종의 방출을 보다 엄격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1968년 여름에 수행된 코넬 공과대학의 연구결과가 1969년 2월에 제출되었는데, 여기서는 물을 퍼올려 냉각수로 사용하는 강제적 혼합의 결과 영양 물질의 수직 교환이 10%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으며 아울러 호수 전체가 받는 열도 7% 정도 증가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구 결과의 등장에 자극받아 1968년 중반이 되면 시민조직들이 점차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미 1950년대부터 존재하던 케이유거 호수 보존 협회(CLPA)는 이 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지만, 9월에 새로 만들어진 조직인 케이유거 호수 구하기 시민대책위원회(CSCL)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CSCL은 데이빗 코미(David Comey)가 책임을 맡으면서 조직을 확충하고 다른 지역의 자치체들과 연대의 고리를 만들었으며, 언론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전기가스회사 측은 발전소의 건설이 가져올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을 가장 주요하게 내세웠고, 이는 기업가들과 자치체의 공공조직들, 건설노조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전기가스회사 측은 정보를 공개하는 데 느렸고 대중과의 접촉을 꺼렸으며,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해 실질적인 반박을 시도하기보다는 방어에 급급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1968년 11월에 열린 공청회 자리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났는데, CSCL을 비롯한 반대집단들은 발전소의 건설 그 자체에 반대하기보다는 열과 방사능에 의한 오염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의 설계 변경을 주장하는 온건한 입장을 취한 반면, 발전소 건설에 찬성하는 집단들은 이에 대한 마땅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다. 반대 집단들은 공사가 늦어질수록 공사 비용이 상승하기 때문에 단지 공사를 지연시키는 것만으로도 전기가스회사 측의 계획을 단념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반발에 부딪친 회사 측은 1969년 4월 원자력위원회에 대한 건설허가 신청을 2년에서 3년 정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회사 측은 약 15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코넬 항공연구소와 수자원 센터에 호수생태에 대한 영향을 평가하는 연구 용역을 주었다. 이 연구 결과들은 1969년 9월에 각각 발표되었는데, 먼저 항공연구소는 냉각수의 방출에 의한 영향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변동과 같은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적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수자원 센터 역시 수온 상승으로 인한 조류의 성장이나 산소량의 감소가 무시할 만한 정도일 것으로 해석했다. 비록 '불확실성이 존재하며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단서가 붙어 있긴 했지만, 이는 분명히 회사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이에 고무된 전기가스회사는 1973년 3월 예전과 거의 유사한 핵발전소 설계를 다시 제안했다.

1973년에 재개된 논쟁 2라운드는 이전 시기와는 다소 달라진 양상을 보였다. 전기가스회사 측이 후원한 연구결과에 대해 앞서 보고서를 내는 데 참여했던 코넬의 과학자들은 "부적절하고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였고, 시민조직들은 전문가들간의 기술적 논쟁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의견상의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소 건설 계획의 폐기를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지난 5년간 핵발전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 제기된 쟁점들이 추가되어 핵폐기물 처리, 원자로의 노심 손상과 같은 사고의 가능성에도 주의가 기울여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CSCL이나 새로 생긴 케이유거 호수 보존 연합(CCCL)과 같은 조직의 방침도 발전소의 설계 변경보다는 핵발전소 그 자체에 대한 반대로 선회하였다. 환경관리회의와 이타카 시 의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공조직들은 여전히 발전소 건설에 찬성했지만, 접수된 편지와 청원서 등을 통해 드러난 여론은 극히 부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전기가스회사 측은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고 점차로 생각하게 되었다. 회사 측은 그 대신 전력수급을 위해 동일한 용량의 화력발전소를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나중에는 결국 이 계획도 무산되었다.
 

사례 2. 성층권 오존층 파괴 논쟁 (1974∼)

염화불화탄소(CFCs)에 의한 성층권 오존층 파괴 논쟁은 오늘날 그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는 전지구적 환경 문제를 다룬 최초의 논쟁이다. 1970년대 초에 처음 가설 형태로 문제가 제기된 이후 15년 이상의 시간을 끌었던 오존층 파괴 논쟁은 (1) 그것의 여파가 현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 나타나게 된다는 점, (2) 지역이나 국민국가 차원의 행동만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전세계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 (3) 구체적인 "물증" 없이 과학이론과 컴퓨터 모델만으로 규제를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정책수립자들에게 제공했다는 점, (4) CFCs의 특이한 성질 때문에 여러 정책목표의 조정을 요구하는 상황이 나타났다는 점 등에서 다른 논쟁들과는 다소 구분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CFCs는 1930년대 초에 미국의 듀퐁(DuPont) 사에 의해 냉장고의 냉매로 개발되어 '프레온(Freon)'이라는 상표명을 달고 판매되기 시작했다. CFCs는 이전에 냉매로 사용되던 암모니아에 비해 냄새가 없고 인체에 거의 해가 없으며 에너지 효율이 높고 대단히 안정된 화학적 성질을 가진 '우수한' 물질이었다. CFCs의 용도는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자동차나 건물의 냉방장치, 에어로졸 스프레이의 분사제, 스티로폼과 같은 플라스틱류의 제작, 전자기기에 들어가는 부품들의 세척 등으로 확대되어, 그 사용량은 1970년대에 이르면 매년 백만 톤에 이르게 되었다.

CFCs가 지닐 수 있는 문제점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1970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발전된 기체 감지기를 이용하여 대기 중에 CFCs가 1조분의 60의 농도로 분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1971년에서 1973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그는 남극으로 가는 해양 탐사선을 타고 50곳 이상에서 측정을 반복하여 CFCs가 지구 전체적으로 대기의 낮은 부분에 분포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러브록의 연구 결과는 미국의 과학자인 마리오 몰리나(Mario Molina)와 F. 셔우드 롤랜드(F. Sherwood Rowland)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들은 대기 중에 분포한 CFCs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연구의 방향을 집중하였다. 이들은 잘 분해되지 않고 물에도 녹지 않는 CFCs가 수년 동안 대기 중을 떠돌다가 성층권으로 올라가 강한 자외선을 만나 분해되고, 여기서 나온 Cl 원자가 촉매 반응을 일으켜 성층권의 오존을 파괴할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성층권 오존의 감소는 지구상에 내리쬐는 자외선의 양을 증가시켜 피부암을 증가시키고 식량 생산을 감소시킬 것으로 생각되었다. 1974년 Nature 지에 발표된 몰리나와 롤랜드의 연구는 즉각적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CFCs의 규제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CFCs와 관련 제품의 생산과 무역은 미국에서만도 매년 8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물량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제가 가져올 경제적 여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각종의 용도에서 CFCs를 대체할 만한 '이상적인' 물질을 개발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실제로 성층권 오존의 양이 감소하고 있다는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화학회사들은 CFCs로 인한 오존층 파괴를 단순한 '이론'일 뿐이라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몇몇 과학자들이나 환경운동 단체들의 주장과 같이, CFCs의 사용량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절한 시기에 규제하지 못할 경우 나타날 재앙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수 있었다. 1976년, 연방 정부가 국립과학아카데미에 요구한 연구의 결과가 몰리나/롤랜드의 가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오자 연방 정부는 우선 CFCs를 대체할 만한 물질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에어로졸 분사제(당시 총 소비량의 50-60% 차지)에서 CFCs의 사용을 금지하는 조처를 1978년에 내렸다. 그러나 다른 용도의 CFCs 이용에 있어서는 마땅한 대체 물질을 개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산업체 측의 반발 역시 심했으므로 1980년대 전반에 CFCs의 규제는 소강 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84년에 나온 영국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였다. 이들은 남극 상공에서의 오존 수위를 지속적으로 측정한 결과 매년 봄에 40%에 달하는 오존의 감소―현재 '오존 구멍'이라고 널리 알려진―가 나타난다고 보고했고, 1988년 미국의 ER-2가 이 사실을 확인했다. 많은 이들은 이것을 몰리나/롤랜드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화학회사들은 여전히 CFCs와 오존 감소 사이의 인과관계를 문제삼았지만,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몰리나/롤랜드의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듀퐁과 같은 회사들도 점차로 CFCs의 오존층 파괴를 이론이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CFCs 규제를 위한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졌는데, 이제 정책의 중심은 유엔 환경 계획(UNEP)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적인 장으로 옮겨졌다. CFCs 규제를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은 선진 산업국가들과 개발도상국가들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넘어서 1987년 몬트리올 조약(Montreal Protocol)의 성립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몬트리올 조약은 1986년 수준으로 CFCs의 생산과 소비를 동결하고 1994년까지 20%를 추가로 감소시키며 궁극적으로는 50%의 감소를 목표로 하였다. 몬트리올 조약은 이후에 두 차례에 걸쳐 수정되면서 규제를 강화해 왔는데, 1992년 코펜하겐 회의에서는 선진국에서 1996년까지 CFCs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할 것을 결정했고(개발도상국의 경우 15년의 유예기간 부여) 그간 대체물질로 알려져 왔던 HCFCs의 생산 역시 2030년까지 중단하기로 했다. 그리고 1995년, 몰리나와 롤랜드는 오존층 파괴의 가능성을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사례 3. 작업장 내 염화비닐 규제 논쟁 (1974)

염화비닐은 1920년대에 상업적 생산이 시작되어 1930년대에 이미 대규모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중합체인 폴리염화비닐(PVC)은 1975년 기준으로 연간 170만 톤 가량이 소비되는, 오늘날 미국에서 두번째로 많이 쓰이는 플라스틱의 하나이다. PVC는 염화비닐 단량체(VCM)와 물, 그리고 필요한 화학물질들을 서로 반응시켜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분말 형태로 만들어진 PVC는 최종 완성품 공장에서 파이프, 타일, 레코드, 전선 피복 등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염화비닐, 그 중에서도 VCM이 인체에 대해 지니는 독성은 그것이 상업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알려져 있었고 이에 대한 연구도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VCM의 독성에 대한 최초의 역학적 증거는 1949년에 러시아 의학 저널에 발표되었고, 1950년대 말에는 염화비닐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때 간과 신장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다우케미컬 사의 자체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다른 화학회사들은 이러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고 500ppm 정도가 노출허용 한계치로 적당하다고 보았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선단골연화증이라고 불리는 질병이 염화비닐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점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화학회사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사전에 배제하도록 의학 검사를 실시하는 미봉책으로 그쳤고 500ppm의 한계치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편, 1970년대 초부터는 VCM에 대한 노출과 암의 발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의 연구자들은 30000ppm 정도의 높은 농도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쥐의 귓구멍, 허파, 뼈에 암이 생긴다는 증거를 제시했으며, 이어 250ppm 정도의 낮은 농도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암이 생김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1973년 초 비밀리에 미국 내로 유입되었는데, 화학회사 측은 이 결과를 확증하기 위해 다시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4년 1월, 세 사람의 염화비닐 노동자가 대단히 희귀한 질병인 간의 혈관육종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고, 이 해 5월까지 동일한 질병으로 모두 13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이에 노동조합들은 정부가 염화비닐의 노출 수준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가하도록 촉구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50ppm 정도의 낮은 농도에서도 실험 동물에 암이 발생했다는 이탈리아 과학자의 연구결과가 다시 보고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직업안전보건청은 4월 5일에 노출 수준을 50ppm까지 낮출 것을 지시하는 긴급 임시표준을 발령했다. 임시표준은 6개월 이내에 영구표준으로 대체 발령되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5월 10일에는 직업안전보건청에 의해 영구표준 시안이 발표되었다. 영구표준 시안은 "검출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노출 정도를 낮추도록 규정했는데, 직업안전보건청은 이에 대해 공청회를 열어 관련 집단들의 의견을 수렴하려 하였다.

공청회에서는 영구표준 시안에 반대하는 화학회사, 산업화학자들과 그것을 옹호하는 노동조합, 독립활동 과학자, 규제 기구들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이들간의 대립은 "실현가능한" 조치란 무엇을 말하는지, 또 규제 법령을 만들 때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하는지의 쟁점들에 주로 맞추어져 있었다. 먼저 화학회사 측은 검출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노출 수준을 낮추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따라서 영구표준 시안이 통과될 경우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이는 엄청난 일자리의 소멸과 경제적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으로부터의 이익에 견주에 평가되어야 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들은 대안으로 20-40ppm 정도의 노출 한계치를 제안했고, 자신들이 그동안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줄곧 활동해 왔음을 강조했다. 반면 노동조합 측은 산업체 측이 쟁점을 경제적 지출과 기술적 실현가능성의 문제로 몰아 가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직업안전보건청과 같은 규제 기구의 임무는 노동자들의 보건과 안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만약 노동자들의 건강을 보장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아예 불가능하다면 공장을 폐쇄하고 대체 물질을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50ppm 이하의 농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으므로 안전을 위해서는 적절한 완충 범위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과거의 경험을 예로 들어 경제적 손실에 관한 산업체 측의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직업안전보건청은 10월 4일 영구표준을 발령하였다. 영구표준은 화학회사 측의 주장보다는 노동조합 측의 주장을 크게 받아들여 1ppm(짧은 시간에 한해 5ppm)을 노출한계치로 정하였다. 화학회사 측이 경고했던, 이 조치에 따른 경제적인 대손실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산비용의 5% 상승). 그러나 직업안전보건청의 결정은 기술적·경제적 이유를 이유로 들어 애초 시안에서 제시되었던 "검출불가능한 수준"을 거부하였고, 필요할 때 보조호흡장치의 사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양쪽의 주장 사이에서 타협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타협의 측면은 이후에도 발암 물질을 규제하는 유사한 사례에서 "실현가능성"의 문제를 주요하게 고려해야만 하게 되는 부담을 직업안전보건청 스스로에 대해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이라도 하듯 직업안전보건청의 이후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며, 발암물질들을 통합적으로 규제하는 것에도 실패하고 있다.
 

사례 4. 태아 연구 논쟁 (1972∼)

인간의 태아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연구, 즉 태아 연구(주 1)는 새로운 진단 수단을 개발하고 태아의 발육과정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였으며 미숙아의 생명 유지를 위한 새로운 테크닉을 정교하게 하는 등 의학의 진보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태아 연구는 새로운 약품이나 백신의 시험을 가능하게 했고, 최근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태아 조직 이식은 당뇨병이나 뇌·척수 손상,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등의 질환에 대한 치료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여년 동안 태아 연구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반대자들은 인간의 태아를 과학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태아 조직을 연구와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작업이 지니는 윤리적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전통적으로 과학자들의 고유한 책임영역으로 인정되어 왔던 연구 관행에 있어 개입을 시도하였다. 반대자들은 태아 연구의 쟁점을 낙태 반대운동과 연결시켜 파악하였고, 이 점에서 이 둘을 별개의 쟁점으로 파악하는 의료전문가들 및 행정가들과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자들은 크게 세 가지 쟁점을 두고 전문가들과 충돌하였다. ① 태아의 정의: 반대자들은 인간 이전과 이후를 가르려고 시도하는 어떠한 기준도 임의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태아도 기본적인 존엄성을 갖는 특수한 형태의 개체생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연구 옹호자들은 태아가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몸의 생물학적 연장인 하나의 '조직'에 불과하며 따라서 별도의 도덕적·법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고 보았다, ② 사회적 이득 對 개인의 위험: 옹호자들은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혜택이 엄청나며 이미 낙태된 태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이 겪어야 할 위험도 적다고 본 반면, 반대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 생명의 가치는 협상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태아 연구에 연구재료를 제공하기 위한 낙태가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③ 누가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 옹호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에 대해 과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반대자들은 이들의 책임성이 부족하다고 보고 지역공동체의 참여를 요구했다. 이를 위해 기관별 검토위원회(IRB)가 대학과 연구소별로 만들어졌으나 반대자들은 주로 과학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 위원회의 활동이 미흡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대중적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초, 낙태 클리닉에서 연구기관들로 태아들이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영국 의회에서 폭로되면서부터였다. 영국 의회는 이 문제에 대응하여 존 필(John Peel)을 위원장으로 하는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여 대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자극되어 미국 후생성에서도 규제 지침을 1972년부터 비공개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논의 내용이 1973년 공개되면서 미 국립보건원 앞에서 태아 연구의 전면 금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등 격렬한 대중적 논쟁이 시작되었다. 1974년 보스턴의 의사인 에들린 박사가 태아 살해 혐의로 체포·기소된 사건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에들린 박사는 규정된 의학적 절차에 따라 낙태를 시술하였고 태아 연구 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사가 태반으로부터 분리한 태아가 당시 살아 있었고 박사가 이를 목졸라 죽였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작용하여 그는 배심원들로부터 유죄 평결을 받았다. 비록 형량은 가벼웠지만(집행유예 1년), 이 사건은 전문가들의 판단이나 과학적 절차와는 무관하게 배심원들이 태아를 보호받아야 할 인간으로 간주했다는 도덕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이 사건에 뒤이어 여덟 개의 주와 한 개의 시 정부가 태아 연구를 제한하는 법률을 자체적으로 제정하였다.

연방 차원의 규제안은 1973년 11월에 미 국립보건원에 의해 초안이 제출되었고, 국립보건원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청취하기 시작하였다. 규제 초안은 태아에 혜택을 주지 못하는 모든 태아 연구를 금지시킴으로써 낙태된 태아를 연구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하고, 연방 차원에서 윤리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일반인들의 가치가 연구과제의 평가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초안은 과학자들로부터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치료 절차의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해 낙태된 태아를 이용하는 연구"는 허용하는 것으로 수정되었고, 1975년 7월에는 이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는 사실상 대부분의 태아 연구가 계속될 수 있음을 의미했고 실제로도 태아 연구는 계속되었다. 1980년대 초에 보수적인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논쟁은 거의 동일한 형태로 여러 번 반복되었으나 1975년의 수정안을 뒤집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힘을 얻은 반대자 그룹은 정치적 로비를 통해서 태아 연구에 연방 자금의 지원을 막는 것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88년, 태아 조직 이식 실험이라는 새로운 쟁점이 나타나면서 논쟁은 다시한번 부활하였다. 태아 조직 이식을 통한 난치병의 치료 가능성은 과거와 같은 문제를 좀더 적나라한 형태로 제기하였다. 국립보건원은 쟁점의 첨예함을 의식하여 태아 조직 이식 연구에 관한 연방정부의 지원을 잠정적으로 금지하였고, 부시 행정부로 바뀌면서 이 조치는 무기한 연장되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이 조치가 연구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종의 검열이라고 비판하였으며, 1993년 새로 취임한 클린턴 대통령은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 금지 조치를 해제하였다. 그리고 1997년, 파킨슨병 증세의 호전을 위해 태아 조직을 골수에 이식하는 실험이 인간을 대상으로 최초로 시행되었다.
 

사례연구가 주는 함의

이상에서 개괄한 네 개의 사례연구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다음 몇 가지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모든 논쟁 상황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과학적(혹은 사회적)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발전소의 건설로 인해 케이유거 호가 정말 심하게 오염될 것인지, CFCs가 오존층 파괴에 기여하는지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주요한 요인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낮은 농도의 염화비닐에 장기간 노출되면 암이 발병할 가능성이 확실하게 존재하는지, 태아 연구를 용인하면 낙태가 증가할 것인지 등의 문제들은 논쟁 상황에서 확실한 '과학적' 답변을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문제 그 자체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논쟁이 벌어진 특수한 상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불확실성의 존재는 곧 구체적인 쟁점들에 대한 전문가들간의 기술적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기술적 논쟁이 논쟁 상황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논쟁 그 자체는 많은 경우 더 큰 사회적 가치의 대립 속에 위치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발전소의 건설로 인한 열 오염으로 호수 표면의 온도가 몇 도 상승하는지보다는 호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유지될 것인지, 자연자원의 보호가 이루어질 것인지가 더 근본적인 문제이며, CFCs가 과연 오존층 파괴에 기여하는지보다는 현 세대는 후속새대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며 CFCs 산업이 대체 물질을 개발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낮은 농도의 염화비닐의 독성 여부보다는 노동자의 건강이 경제적 이익과 견주어 평가되어야 하는지의 물음이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고, 태아가 몇 주를 지난 다음부터 인간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 근저에는 연구의 자유를 옹호하느냐,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을 옹호하느냐의 가치판단이 가로놓여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 관련 논쟁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기술적 논쟁이 일종의 '대리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로, 전문성(expertise), 혹은 전문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첨예한 논쟁 상황에서 우리는 전문가들 역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내놓는 과학적 설명이나 데이터 역시 그런 편향을 반영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이런 관찰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염화비닐 규제 사례에서 보듯, 전문성 내지는 전문가사회가 지니는 모종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의 규약을 전적으로 무시해서도 안된다. 상당수의 과학기술 논쟁들에서 최초로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이 과학자집단이며, 기술적 논쟁의 존재 그 자체가 대중적 논쟁의 역동성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전문성과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쟁들이 한국사회에 제공하는 함의를 짧게 짚어 보겠다. 한국사회에서는 80년대 중반 이후 과학기술 관련 논쟁이 점차 활성화되는 추세이며,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과학적 불확실성의 영역을 두고 전문가집단 사이에 기술적 논쟁이 나타나는 등 논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물론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전문가집단의 존재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논쟁의 특징은 최근 서구에서의 경향과는 달리, 여전히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보다는 분배 정의나 의사결정 절차상의 문제, 즉 권력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최근 생명공학이나 의료윤리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논쟁에 있어서는 그다지 플러스 요인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가 지니는 이러한 특수성이 앞으로의 다양한 과학기술 논쟁의 전개에 어떠한 함의를 지닐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주 1) 태아 연구는 크게 다음 다섯 가지 정도의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정상적인 태아 발육에 관한 과학지식을 확장하기 위한 연구, (2) 태아의 질병이나 기형을 진단하는 것과 관련된 연구, (3) 태아에 대한 약물투여의 영향에 관한 연구, (4) 생존불가능(nonviable) 태아를 대상으로 수행되는 연구, (5) 태아 조직 이식과 관련된 연구.
 
 
 

출전: 참여사회아카데미 1999년 봄 과학기술강좌 제 5강 발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