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 분야는 환경·지역계획 분야와 함께 최근 시민참여의 시도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분야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생명공학 분야의 발전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어서,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시민참여의 문제의식과 제도적 장치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과 시기적으로 겹쳤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생명공학의 여러 응용분야들이 커다란 편익을 제공할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녔으면서도, 생명 현상에 대한 개입을 필연적으로 수반함으로 인해 환경·윤리·보건의 측면을 둘러싼 대중 논쟁을 빈번하게 야기해 왔다는 점도 이 분야에 대한 시민참여의 시도가 잦은 또다른 이유가 되겠다.

1970년대 초 DNA 재조합 기술이 등장한 이래 외국에서는 생명공학을 둘러싼 정책결정과 관련해 행정부와 의회의 직·간접적 지원 하에 많은 시민참여 시도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다양한 시민참여 방식들을 활용해 이루어졌는데, 아래에서는 분석의 편의상 이를 크게 선호취합적(preference gathering) 방식과 숙의적(deliberative) 방식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물론 이 두 가지 방식에 속하는 시민참여 방법들이 반드시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며, 최근에는 이들이 서로 섞여서 보완적으로 사용되는 사례들이 증가하고 있다.

시민참여의 사례들은 인간 유전정보 이용과 관련된 인간유전학(human genetics) 분야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흥미로운 시사점을 주는 시도라고 판단되는 경우 유전자조작(GM)식품 같은 생명공학의 다른 응용분야들에 대한 사례도 부분적으로 포함할 것이다.
 

1) 선호취합적 방식
 

선호취합적 방식은 사람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견이나 선호 등을 다양한 방법을 써서 단기간에 취합하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선호취합적 방식은 연구자나 정책결정자가 '이미 존재하는' 의견이나 선호를 단순히 뽑아내는 데서 그치며, 추가적인 정보 제공이나 사람들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방향적인 속성을 갖는다.

선호취합적 방식에는 의견조사(opinion poll/survey), 공청회(public hearing/inquiry), 퍼블릭 코멘트(public comment), 자문(advisory committee/panel), 국민투표(referendum) 등이 있다.
 

(1) 의견조사
 

의견조사는 정책결정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사안에 대해 인구의 일정 부분을 표집하여 설문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의견을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공학에 대한 의견조사는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해서 생명공학에 대한 이해정도나 태도, 견해 등을 묻는 문항들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인데, 1980년대 후반 이후 현재까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EU, 일본 등을 포함하는 20개국 이상에서 대규모 설문조사가 시행되었다(Davison et al., 1997: p. 320의 표 참조).(주1) 이처럼 많은 나라들에서 생명공학에 대한 의견조사가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는 것은 각국의 정부와 산업계가 생명공학을 국제경쟁력과 지속적 경제성장을 위한 핵심 기술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생명공학 기반 산업의 성공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생명공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수용성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의견조사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EU 차원의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 조사를 들 수 있다. EU는 대중적 사안들에 대한 유럽 시민들의 인식을 조사하는 유로바로미터 조사의 일환으로 1990년대 들면서부터 대략 3년에 한번꼴로 생명공학에 대한 의견조사를 실시하고 있다(Gaskell et al., 1997, 2000). 최초의 조사는 1991년이었고, 이후 1993년, 1996년, 1999년, 2002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주2) 조사는 다단계 무작위 표집 절차를 통해 15세 이상 인구를 통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정하며, 국가별로 대략 1,000명씩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정기적으로 의견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일반시민의 견해 변화를 시계열로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여러 국가들에서 거의 동시에 시행함으로써 국가별 비교를 가능케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87년에 시행된 기술영향평가국(OTA)의 의견조사를 시작으로 1990년대 이후 정부 부처, 생명공학 기업, 대학, 자금지원 기구 등 다양한 곳에서 생명공학에 대한 일반시민 의견조사를 시행해 왔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국립과학재단(NSF)에서 매년 시행하는 과학 및 공학 지표(Science and Engineering Indicators, SEI) 조사의 일부로 생명공학에 대한 의견조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Priest, 2000). 그 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에서도 여러 기구들의 후원 하에 의견조사가 자주 시행되고 있으며, 특히 호주·뉴질랜드·일본 3개국을 비교한 의견조사가 여러 차례 있었다(Einsiedel, 2000; Macer and Ng, 2000).

이러한 의견조사 결과는 국가별, 시기별, 또 설문문항별로 상당한 편차를 보이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몇 가지 공통된 요소가 관찰된 바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 일반시민들의 태도가 응용분야의 성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점(예컨대 의료 분야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농업 분야에 대한 부정적 태도) ▲ 윤리적 쟁점이 태도 결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예컨대 동물과 인간을 포함하는 응용분야보다 식물과 미생물을 이용하는 응용분야에 더 호의적) 등이 있다. 또한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을 서로 비교해 보면 다른 지역의 시민들에 비해 유럽 시민들이 생명공학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소위 'Atlantic Divide').

그러나 이러한 의견조사 방식에 대해 그간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비판은 '의견조사가 대중의 견해를 측정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수단'이라는 주장에 대해 집중되었다. 비판자들은 대규모 의견조사가 통계처리를 거친 총합 견해에 특권을 부여하고 활동적 소수의 견해를 주변화하며 적극적인 형태의 대중 논쟁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해 왔다(Davison et al., 1997).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비판에 대응해, 최근에는 대규모 의견조사를 다른 시민참여 방식(특히 시민의 숙의를 그 속에 포함하는)과 병행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구체적인 사례들은 아래에서 다룬다).
 

(2) 공청회
 

공청회는 특정 사안에 대해 정부나 의회, 혹은 그들의 대리기관이 의제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말한다. 공청회는 정해진 사안에 대해 의견을 청취함에 있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식이며, 대다수의 선진국들에서는 입법이나 규칙제정 과정에서 공청회 실시가 의무화되어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행정기관의 규칙제정 및 개정시 행정절차법(Administrative Procedure Act)에 따라 이를 연방관보(Federal Register)에 공지하고 다른 행정기관을 포함한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수렴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조현석, 2002). 또한 연방자문위원회법(Federal Advisory Committee Act)은 각종 자문위원회들이 회의록을 공개하고 회의의 일정 시간을 대중의 발언(public testimony)에 할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President's Council on Bioethics, PCB)는 미국 각지를 돌면서 회의를 공개로 운영하며, 회의 중 일정 시간을 할애해 미리 신청한 일반 시민에게 발언 기회를 줌으로써 회의 장소가 일종의 공청회로서의 기능도 하도록 하고 있다(홈페이지: http://bioethics.gov).

공청회는 일반시민이 정부나 담당기관의 정책 의도를 처음으로 전해 듣고 이에 대해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정부 역시 이를 통해 상반된 해석과 이해관심을 사람들로부터 직접 듣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공청회는 시민참여의 방식으로 부적합하며 충분치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공청회는 ▲ 정책수립 과정 후반부에 뒤늦게 개최되어 시민들이 이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고 ▲ 공청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의 수나 발언 시간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 전문가들이나 대규모 이해집단이 일반시민에 비해 우위를 장악하기 쉽도록 의사소통 구조가 암묵적으로 편향되어 있고 ▲ 시민의 의견을 진정으로 반영하기보다는 단순히 법적 요구절차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최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불공평한 제도이다. 이 때문에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시민이 공청회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공청회 과정이 적대적 이해관계들의 대결장으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Webler and Renn, 1995; Carson and Martin, 1999: 129).

최근에는 공청회의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 최근 급속도로 보급되고 있는 인터넷을 이용해 온라인 공청회를 개최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 공청회의 초기 시도 중 하나로 영국 보건성 산하 유전자검사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Genetic Testing, ACGT)가 1996년 말에 운영한 전자자문(electronic consultation) 절차를 들 수 있다. ACGT는 상원 과학기술위원회의 1995년 보고서 Human Genetics: The Science and Its Consequences에 대응해 영국 정부가 1996년 7월 설립한 자문기구였다. ACGT는 당시 낭포성 섬유증에 대한 상업적 유전자검사가 영국에서 최초로 제공되기 시작한 상황에 발맞추어 1996년 11월에 "대중에게 상업적으로 직접 제공되는 인간 유전자검사를 위한 실행지침" 초안을 발표하고, 이 초안에 대한 논평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문서를 통한 통상적 의견접수와 병행해, 웹상에 지침 초안을 띄워놓고 이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포럼을 운영했다. 자문 일정이 매우 촉박했고 이때만 해도 아직 인터넷 보급 초기였기 때문에 웹 포럼을 통해 그리 많은 의견제시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1달 동안 총 22건의 게시물), ACGT의 전자자문 시도는 정책기구가 운영한 온라인 공청회의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Finney, 1999).

올해 들어 영국에서는 GM작물의 영국 내 상업적 재배 허용 여부를 놓고 정부 자문기구인 농업 및 환경 생명공학위원회(Agricultural and Environment Biotechnology Commission, AEBC)와 식품표준국(Food Standards Agency, FSA)이 공동으로 국가적 차원의 대중 논쟁을 조직하고 있다. 이 대중 논쟁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GM대중논쟁조정위원회(GM Public Debate Steering Board)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ACGT의 그것과 형태가 유사한 온라인 공청회 방식이 활용되고 있어 주목된다(홈페이지: http://www.gmpublicdebate.org.uk). 올 2월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논쟁 사이트에는 쟁점의 민감함과 최근 인터넷의 보급 추세를 반영하듯, 매달 수백 건 이상의 의견들이 올라오고 있다.
 

(3) 퍼블릭 코멘트 (생략)
 
 

(4) 자문
 

자문이란 특정 사안에 대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정부나 의회가 그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전문가(집단이나 개인)들의 의견을 청취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문은 보통 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의 형태를 띠는데, 대다수의 선진국들에서는 정부 부처나 의회 산하에 다양한 자문위원회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상설 자문위원회이며, 법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경우도 상당수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1995년 시점에서 정부 각 부처에 존재하는 자문기구의 수가 807개에 달하며, 이들 중 많은 수가 보건성, 환경성, 농어업식품성 등 과학기술 관련 부처 산하에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기술 관련 자문위원회들은 대체로 과학기술 전문가들로 구성되며, 폐쇄적 구조 속에서 협소한 범위의 다른 전문가들로부터 나온 자료와 증거를 검토해 자문을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이들의 견해는, 그것이 법적으로 구속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책결정자에 대해 거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재서노프는 이러한 자문위원회들에 속해 있는 수천 명의 전문가 구성원들을 가리켜 정부의 "제 5부(fifth branch)"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 과학기술 관련 자문위원회들은 대중의 견해로부터는 물론이고 그 속에 포괄되지 못한 독립적 전문가의 견해로부터도 격리된 "후견인 통치(guardianship enclaves)"의 통로이자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현의 장애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Finney, 1999).

그러나 최근들어 이러한 자문 과정에서도 민주적 참여의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이는 생명공학 관련 자문위원회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영국의 정부 자문기구로 1999년 말에 새로 만들어진 인간유전학위원회(Human Genetics Commission, HGC)는 자체 활동계획 마련에서 대중자문회의(public consultative meeting)와 서면으로 접수된 의견을 적극 활용한 데 이어, 유전자검사의 규제와 관련해 정부에 제출할 권고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다각적인 대중자문 과정을 운영했다(홈페이지: http://www.hgc.gov.uk/) 우선 HGC는 일반시민을 대표하는 1,000여 명의 패널에 대해 인터뷰를 통한 의견조사를 실시하는 한편으로, 자문 과정을 위한 50쪽짜리 쟁점정리 문서 "Whose Hands on Your Genes?"를 만들어 두 차례의 공개회의에서 발표한 후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받았다. 2000년 11월부터 2001년 3월까지 모두 250건이 넘는 의견이 들어왔는데, HGC는 이를 반영해 권고안을 작성했고 2002년 1월에는 이를 다시 유전병에 걸린 사람이나 가족들로 구성된 자문 패널(consultative panel)에 보내 의견을 청취한 다음 2002년 5월에 최종 권고안을 담은 보고서 "Inside Information: Balancing Interests in the Use of Personal Genetic Data"를 발간했다. HGC는 올 4월에도 유사한 대중자문 절차를 거쳐 (일반의나 병원을 통하지 않고) 대중에게 직접 제공되는 유전자검사에 대한 규제 권고안을 담은 보고서 "Genes Direct: Ensuring the Effective Oversight of Genetic Tests Supplied Directly to the Public"을 발간했다.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다. 한 예로, 보건복지부(DHHS) 산하에 설치된 유전자검사 장관자문위원회(Secretary's Advisory Committee on Genetic Testing, SACGT)는 1999년 12월부터 2000년 1월까지 '유전자검사의 감독에 관한 대중자문(A Public Consultation on Oversight of Genetics Tests)' 절차를 운영했다. 이를 위해 모두 5가지 방법이 쓰였는데, 1) 연방관보에 공지, 2) 관심있는 조직과 개인들에게 우편 발송, 3) 웹페이지를 통한 의견수렴, 4) 대중자문회의 개최(2000년 1월 27일), 5) 과거 문헌의 리뷰 및 분석 등이 그것이다(홈페이지: http://www4.od.nih.gov/oba/sacgt.htm. 이곳에서 대중자문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볼 수 있다). 또한 1998년에 국립보건원(NIH) 산하에 설립된 연방자문위원회인 NIH원장직속 시민대표위원회(NIH Director's Council of Public Representatives, COPR)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국 전역에서 지원을 거쳐 선발된 21명의 시민대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환자, 환자 가족, 보건의료 전문가, 과학자, 과학언론 종사자, 교육자 등이 포괄되어 있어 NIH의 활동과 연구 우선순위 결정 과정에서 일반시민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홈페이지: http://copr.nih.gov).
 

(5) 국민투표
 

국민(주민)투표는 특정 사안에 대한 정책을 지역주민 전체 혹은 전국민의 투표로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참여방식이다. 국민투표는 모든 주민이 정책결정에 참여하므로 의회에 의한 정책결정에 비해 더 큰 정당성을 가지며, 이해집단의 압력에 노출되거나 자기 이해관계에 좌우되기 쉬운 대표자들에 비해 좀더 대중적 이해관심에 부합하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국민투표를 시행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고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국민투표의 시행 여부 판단이 정부의 재량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국민투표가 실제로 자주 시행되는 나라는 드물다. 아울러 국민투표는 그 의제 선정이 정부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과정 속에 숙의를 위한 절차를 포함하기 않기 때문에 일반시민의 참여 정도에는 상당한 한계가 존재한다(Carson and Martin, 1999: 48-50).

스위스와 미국의 일부 주들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시민발의(citizens' initiative)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일군의 시민들이 정책을 제안하고 이를 승인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일정 수 이상 모으면 그 제안(proposition)에 대해 국민투표가 실시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독특한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자리잡고 있는 스위스에서는 일정 기간 내에 150,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특정 제안을 발의해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 발의된 제안은 의회와 정부 차원에서 토론되어야 하는데, 의회나 정부는 발의에 대해 지지 혹은 거부 입장을 밝히거나 제3의 입장을 담은 대항제안을 내놓을 수 있다. 발의된 제안은 발의 시점으로부터 5년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져야 하는데, 만약 대항제안이 있을 경우 이 둘 모두가 국민투표에 붙여진다(Bonfadelli et al., 2002). 스위스에 독특한 이러한 제도적 장치는 국민투표의 직접민주주의적 함의를 살리면서 동시에 시민의 주도권을 보장하고 언론보도 등을 통한 숙의의 여지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스위스에서는 지금까지 생명공학을 주제로 한 시민발의와 국민투표가 모두 두 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인간에 대한 생식기술과 유전자기술의 남용 제한을 위해' 1987년 발의된 "Beobachter Initiative"였다. 이 발의는 1985년 태어난 스위스 최초의 시험관아기와 배아 양도에 관한 언론보도, 그리고 이와 연관된 유전자기술(생식계열 유전자치료 같은)의 남용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되었고, 이들 기술에 대한 연방 차원의 규제를 요구했다. 이 발의에 대해 연방 의회가 생식기술과 유전자기술의 규제를 위한 연방헌법 수정안을 넣은 대항제안을 내놓았고, 1992년 5월의 국민투표에서 의회의 대항제안이 74%의 찬성으로 통과되어 헌법 24조 수정조항이 되었다(Bonfadelli et al., 1998). 두번째는 "Gen-schultz(Gene-Production) Initiative"로, 앞선 시민발의의 결과에 불만족을 표시한 시민그룹에 의해 조직되어 1993년 발의되었다. 이 발의는 인간 이외의 생명공학 응용에 초점을 맞추어 ▲ GM 동물의 생산과 판매 ▲ GM 동식물의 환경방출 ▲ GM 동식물에 대한 특허허용의 3가지에 대한 금지를 제안했다. 이 발의는 국민투표를 불과 몇 달 앞둔 시점까지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았으나 생명공학 기업과 연구자들의 맹렬한 로비와 정치적 좌·우파간의 논쟁을 겪으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어 1998년 6월의 국민투표에서 66%의 반대로 부결되었다(Bonfadelli et al., 2002).
 

2) 숙의적 방식
 

숙의적 시민참여 방식은 선호취합적 방식과 달리 사람들의 선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숙의적 방식에서는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이 단순히 사람들의 선호를 취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선호가 충분한 정보가 기반하여 합리적으로 선택된 것('informed preference')이 아닐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의적 방식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일정 기간의 숙의 과정을 설정해 두고 그 과정에 사람들을 참여시킨 다음 그러한 숙의 과정을 통해 도출된 의견을 정책결정에 참고하는 방식을 취한다.

숙의적 방식이 갖는 또하나의 특징은 해당 사안에 대한 논의의 과정에 일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숙의적 방식은 중간 과정이 아닌 최종 정책결정 단계에서 주로 참여하게 되는 선호취합적 방식에 비해 시민의 의견이 반영될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

숙의적 방식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명공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는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시민조사단(citizen review board), 시민배심원(citizens' jury), 포커스 그룹(focus group) 등의 방식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합의회의
 

합의회의는 "선별된 일단의 보통 시민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논쟁적이거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적 혹은 기술적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질의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답을 청취한 다음 이 주제에 대한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여 최종적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는 하나의 포럼"이라고 정의된다. 1987년 덴마크에서 처음 도입된 이 모델은 1990년대 초 네덜란드와 영국에 도입된 것을 필두로 해서 최근 몇 년 동안 오스트리아, 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일본 등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주관으로 지난 1998년과 1999년에 합의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합의회의의 첫 번째 단계는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집단들을 대표할 수 있도록 선발된 15명 정도의 시민패널에게 관련 주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이들이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항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후 3일에 걸쳐 계속되는 본회의 단계에서는 시민패널이 다양한 전문가 의견들을 듣고 이를 취합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시민패널이 자신들이 청취하였던 다양한 전문가 의견을 평가한 기초 위에서 정부가 취해야 할 행동들을 권고 형태로 제출하게 된다. 이 권고는 특정 주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태도와 기대, 그리고 우려 등을 정치인들과 정책결정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주3)

1980년대 후반 이후 합의회의는 세계 각국에서 적어도 50차례 이상 개최되어 왔는데, 합의회의가 열렸던 주제들 중 절반 이상이 바로 생명공학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가치의 대립을 수반하는 중간 정도 범위의 과학기술 관련 주제'를 다루는 숙의에 적합한 합의회의의 성격에 GM식품, 인간게놈연구, 유전자치료, 생명복제와 같은 생명공학의 여러 쟁점들이 잘 부합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래는 생명공학을 주제로 열린 합의회의들을 국가별로 정리해본 것이다.
 
 

<표 1>을 보면 그간 개최된 생명공학 관련 합의회의들 중 GM식품을 주제로 한 것이 가장 많아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GM식품이 소비자에게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국제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1990년대 후반에 GM식품 관련 합의회의가 각국에서 집중적으로 열렸다. 그 다음으로 많이 개최된 주제는 인간유전자 연구로,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일본 등에서 개최되었다. 개최 주제의 변화 추이를 보면, 1998-2000년에 걸쳐 GM식품 관련 합의회의가 집중적으로 열리다가 2001년 이후에는 인간게놈프로젝트 초안 완성과 상업적 유전자검사의 광범한 도입과 시기를 같이해 독일, 덴마크 등에서 유전자검사에 관한 합의회의가 열리고 있다. 아래에서는 인간 유전자 연구에 관련된 몇몇 합의회의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인간 게놈의 염기서열을 분석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즉 인간게놈프로젝트(HGP)가 막 시작되려던 무렵인 1989년 11월, 덴마크에서 의회 산하의 덴마크 기술위원회(Danish Board of Technology, DBT)와 의회 연구위원회가 공동으로 '인간게놈 지도 작성에서 얻어진 지식의 응용'을 주제로 한 합의회의를 개최했다. 이 합의회의에서 시민패널은 "우리가 인간 유전자에 관해 증가한(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식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대해 시민패널은 질병 치료에 이용되는 지식을 대체로 긍정하면서도, 인구 전체에 대한 대규모 스크리닝에 대해서는 강한 유보 의사를 나타냈고 그러한 지식의 증가가 우생학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또한 시민패널은 유전자 분석을 고용, 보험, 은퇴 등에서 개인의 평가에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 마련을 권고했다. 마지막으로 시민패널은 인간 게놈 분석이 사람들의 윤리적·문화적 가치와의 조화 속에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관한 지식을 증진시키는 기초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합의회의의 결과는 이후 덴마크 의회가 고용 혹은 보험에서 유전자검사를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하고 수 차례의 검토 끝에 이를 통과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Mironesco, 1998).

1995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예측적 유전자 연구 ―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합의회의가 열렸다. 이 합의회의는 라테나우 연구소(Rathenau Institute)와 과학 및 윤리 기반(Platform for Science and Ethics)이라는 공공포럼이 공동으로 개최했다. 시민패널은 이 자리에서 예측적 유전자 연구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과도한 진단 및 의료 기술의 도입은 피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 건강한 것으로 인식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이런 기술들이 이용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민패널은 또한 윤리학과 윤리학자가 연구의 방향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덴마크의 경우와 달리 합의회의가 의회 내에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네덜란드에서, 이러한 시민패널의 의견은 그다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고 정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Mironesco, 1998; Mayer and Geurts. 1998).

최근 들어서는 독일과 덴마크에서 유전자검사를 주제로 한 합의회의가 잇따라 열려 주목을 받았다. 독일 합의회의는 드레스덴 독일위생박물관이 주관하고 독일 연방교육연구부(BMBF)가 후원해 준비되었으며, 2001년 9-10월에 걸쳐 시민패널 예비모임을 가졌고 11월 23-26일에 본회의가 열렸다(홈페이지: http://www.buergerkonferenz.de/pages/start_en2.htm, 이곳에서 합의회의의 과정과 시민패널이 작성한 최종보고서, 그리고 프라운호퍼연구회의 평가보고서를 볼 수 있다). 덴마크 합의회의는 덴마크 기술위원회의 주관 하에 2002년 5월 24-27일에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합의회의의 결과와 관련된 자료는 아직까지 덴마크어로만 존재하는 관계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홈페이지: http://www.tekno.dk/subpage.php3?article=496&survey=15&language=uk&front=2).
 

(2) 시민조사단
 

시민조사단은 특정 사안에 대한 정책결정과 관련하여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진 조사단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 사안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한 다음 (지방)정부에 지역민들의 의견을 모은 권고안을 제출하는 것을 가리킨다. 카슨과 마틴은 시민조사단을 시민법정(citizen court)의 일종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는데, 시민법정은 1970년대에 과학 논쟁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었던 전문가 중심의 과학법정(science court)에 대응해 만들어진 개념이다(Carson and Martin, 1999: 55).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시민조사단은 어떤 정형화된 시민참여 '모델'이라기보다는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적 사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70년대의 재조합 DNA 논쟁 과정에서 미국 케임브리지 시에 구성되어 활동한 시민조사단을 들 수 있다. 케임브리지 시는 하버드대와 MIT가 인근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논쟁의 발단은 1976년에 하버드대가 낡은 실험실 하나를 개조해서 P3 등급의 DNA 재조합 연구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 계획을 다룬 지역 신문들의 보도가 케임브리지 시장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그는 시 의회 차원의 청문회를 소집했다. 그 지역의 과학자들로부터 이틀간에 걸쳐 판단의 근거로 삼을 상반되는 증언들을 청취한 후, 시 의회는 투표를 통해 미 국립보건원이 상당한 위험이 있는 단계(P3)로 분류한 모든 연구를 일시중지할 것을 결정함과 동시에, 재조합 DNA 연구를 포함해 이후 이루어질 다른 종류의 연구의 안전성을 지속적으로 조사할 기구로 케임브리지실험심사위원회(Cambridge Experimentation Review Board, CERB)의 설치를 의결했다. 1976년 8월에 만들어진 CERB는 모두 8명의 일반 시민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숱한 자료를 섭렵하고 35명 이상의 전문가들로부터 상반되는 증언을 청취하며 무수한 토론을 갖는 등 일주일에 두 차례씩 총 1백시간 이상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1977년 1월 5일 CERB는 5개월간에 걸친 활동 끝에, 실험을 허가하기 전에 NIH 규제지침에 별도의 안전조치를 추가할 것을 권고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이 권고안은 같은 해 2월에 케임브리지 시 조례에 포함되어 통과되었다. 이것은 미국 최초의 재조합 DNA 입법이었다.

CERB의 활동은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시민참여의 담론이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던 당시의 논쟁 구도와 역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CERB는 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생명공학 분야에서의 시민참여에 숱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남아 있다(김동광, 2002).
 

(3) 시민배심원
 

시민배심원 모델은 네드 크로스비(Ned Crosby)가 설립한 미국의 제퍼슨 센터(Jefferson Center)에 의해 1970년대 중반경에 개발되고 확산된 시민참여 프로그램인데, 이미 독일에서도 피터 디에넬(Peter Dienel) 교수가 '플래닝 셀(plannungzelle, planning cell)'이라는 명칭으로 1969년부터 이와 유사한 모델을 적용해 왔다. 이후 시민배심원제는 1990년대에 영국으로 건너가 비영리기구인 공공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ublic Policy Research, IPPR)와 시장조사기구인 여론주도리서치(Opinion Leader Research, OLR)가 시민배심원 주최기관으로 나섰고 1996년 최초의 시험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Iredale and Longley, 1999).

시민배심원 모델은 공공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무작위로 선별된 시민들이 4-5일간 만나서 주의깊게 숙의하는 절차로 구성된다. 하나의 시민배심원단은 일반적으로 12명에서 24명으로 구성되고 보통 시민들을 대표해서 일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심원에 참여하는 대가로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부여된 과제에 대해 해당 전문가들과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해결책을 토론하고 숙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숙의 결과 나온 최종결과는 정책권고안의 형태로 정책결정자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시민배심원 모델은 앞서 다룬 합의회의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시민배심원에서는 다루어질 의제를 주관기관이 미리 몇 개의 핵심 질문으로 정하는 반면 합의회의는 조정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시민패널이 스스로 의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시민배심원은 최종보고서 작성 책임이 주관기관에 있는 반면, 합의회의는 시민패널이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제퍼슨 센터는 1974년 국가의료보건계획에 관한 시민배심원제를 실시한 이래, 지역 쓰레기처리장 설치, 농업문제에 있어 수질문제, 조세와 예산안 개혁 등에 관한 시민배심원 프로그램을 2001년 6월까지 모두 30여 차례 개최하였다. 영국의 경우에는 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한 1990년대 중반 이후에 IPPR의 주도로 지역 정부 차원에서 시민배심원제의 도입과 시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현재까지 200여 차례의 시민배심원이 열렸다. 시민배심원제는 다루는 주제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연방정부와 주 정부 차원의 문제에서부터 지역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간적 스펙트럼도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장경석, 2002).

합의회의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시민배심원 모델이 생명공학과 관련된 쟁점에 적용된 사례는 많지 않은 편이다. 대표적인 주관기관인 미국의 제퍼슨 센터와 영국의 IPPR에서 운영한 시민배심원 중에서는 생명공학과 직접 연관된 주제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시민배심원이 적용된 몇 가지 흥미있는 사례들이 영국과 캐나다에서 등장하고 있다.

먼저 1997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통상적 질병에 대한 유전자검사'를 주제로 한 시민배심원이 웨일즈 보건 및 사회보장 연구소(Welsh Institute for Health and Social Care, WIHSC)의 주관으로 열렸다. WIHSC는 이 프로젝트를 두 단계로 진행했는데, 먼저 1996년 11월에서 1997년 6월 사이에 7개의 포커스 그룹을 운영해 시민배심원에게 던질 질문을 선정했다. 포커스 그룹 토론 결과와 조정위원회의 내부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선정된 질문은 "통상적 질병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유전자검사가 국립보건제도(NHS) 하에서 제공되기 이전에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가?"였다. 이어 WIHSC는 독립적인 시장조사회사에 의뢰해 다단계 무작위 표집 방법에 의해 15명의 시민배심원을 선발했고 11월 8일과 10-12일, 나흘간에 걸쳐 시민배심원 본행사를 진행했다. 시민배심원은 주어진 질문에 답해 모두 8개 범주 28개 항목에 이르는 권고안을 제출했다. 이 권고안은 1997넌 12월 15일에 정부 산하의 인간유전학자문위원회(Human Genetics Advisory Commission, HGAC)에 제출되었으며, 이후 핵심 정책결정기관들에 회람되었다(Iredale and Longley, 1999).

최근 영국에서 GM작물에 관한 국가적 차원의 대중 논쟁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이 논쟁에서도 시민배심원 모델이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시민배심원은 논쟁 조직을 담당한 두 개의 기관 중 하나인 식품표준국의 주관 하에 "영국 내에서 GM식품의 구입이 가능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2003년 4월 4-7일까지 나흘간에 걸쳐 개최되었다. 모두 15명의 시민배심원은 주어진 질문에 대해 토론을 거친 끝에 표결을 통해 9:6으로 GM식품 구입이 가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홈페이지: http://www.food.gov.uk/gmdebate, 이 홈페이지에서는 시민배심원의 전 과정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시민배심원의 판결은 이후 GM작물/식품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

그리고 캐나다에서는 2001년 이종간 이식(xenotransplantation)에 관한 대중자문 절차의 일환으로 시민배심원에 근거한 숙의 과정을 진행했다. 이 대중자문 절차는 캐나다에서 인간에 대한 이종간 이식 임상시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정책결정에 일반시민의 견해를 반영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캐나다 보건부가 비정부기구인 캐나다공공보건연맹(Canadian Public Health Association, CPHA)에 자문 절차를 위탁해 이루어졌다. CPHA는 자문그룹과의 협의를 거쳐 핵심적인 정책 질문을 "캐나다는 이종간 이식에 대한 임상시험을 계속 진행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조건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로 정하고, 전화 설문조사, 시민배심원 개최, 토론 웹사이트 개설, 이해당사자 의견조사 등 다양한 채널의 참여 방법을 동시에 진행했다. 이 중 시민배심원은 캐나다 전역을 모두 6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 권역에 위치한 6개 대도시(Halifax, Quebec City, Toronto, Saskatoon, Vancouver, Yellowknife)에서 각각 하나씩의 시민배심원을 운영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시민배심원은 서로 날짜를 달리해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사흘간에 걸쳐 열렸고, 지역에 따라 15-18명의 시민들이 참여해 참여한 시민은 모두 107명에 달했다. 6개의 시민배심원에서 나온 의견을 모아 복지부 장관에게 제출된 최종 권고안은 "캐나다는 현재 시점에서 인간을 포함하는 이종간 이식 실험을 계속 진행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보다 앞서 해결되어야 할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였다. 그러나 이후 캐나다 총선 등 여러 정치적 상황이 겹치면서 이종간 이식 실험의 진행여부에 대한 정책결정이 계속 미루어졌고, 이 때문에 이러한 시민배심원의 권고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아직 미지수인 상황이다(Einsiedel, 2002).
 

(4) 포커스 그룹
 

원래 1920년대에 사회과학 분야의 집단면접 방법으로 개발되었던 포커스 그룹은 마케팅 분야에서 많이 쓰이고 있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정책결정자들이 특정한 공공적 의제에 대해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나 인식을 파악할 목적으로도 널리 활용하고 있다. 포커스 그룹은 일반 시민의 대표 6-12명으로 구성된 토론집단으로, 보통 한번 모이며 대략 2시간에 걸쳐 진행되지만 주제가 복잡한 경우 여러 번의 세션을 갖거나 여러 차례 모임을 갖기도 한다. 또 주제나 목적에 따라 적게는 6개에서 많게는 50개까지 병렬적으로 운영된다. 포커스 그룹은 사회자의 질문에 참여자들이 대답하는 집단면접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서로 질의응답을 하기도 하며 상대의 의견에 대해 비판을 할 수도 있다. 즉, 참여자들이 질문에 답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참여자간의 상호작용이 전제된 상태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커스 그룹은 안정적인 선호를 단순히 취합하는 방식도 아니며 일방적인 하향식 정보제공과 교육도 아닌, 학습과정을 통한 발견적 여론 수렴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포커스 그룹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환경 및 과학기술정책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예컨대 소각로 계획을 수립하거나 에너지정책을 평가하는 데, 또는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도모하기 위해 수립된 정책평가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견해 탐구를 위해 포커스 그룹이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포커스 그룹은 원래 마케팅 분야에서 개발되었지만, 그 후 보건, 환경, 기술, 지역계획, 에너지 정책 등 여러 분야에 확대 적용되면서 심층적인 여론 수렴과 시민참여 방법으로 발전하고 있다(윤미은·김두환, 2002).

포커스 그룹은 생명공학 분야에 대한 시민참여 방식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영국 경제사회과학연구재단(ESRC)의 후원을 받아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진행된 '새로운 유전학의 사회적 영향' 연구 프로젝트에서는 과학자·의사·기자들과의 인터뷰, 언론보도 분석과 함께 다양한 대중집단을 대상으로 20개의 포커스 그룹 토론을 진행했다. 여기서 포커스 그룹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시민대표를 뭉뚱그려 열리지 않고 좀더 분화된 형태로 운영되었다. 20개의 포커스 그룹 중 6개는 유전적 조건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는 사람(예컨대 유전병 환자와 그 가족), 4개는 유전학에 전문직업적 관심을 가진 사람(예컨대 간호사나 공공보건 전문가), 5개는 생활양식이나 조건 등에서 유전학과 간접적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예컨대 동성애자나 심장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후원그룹), 그리고 나머지 5개는 지역공동체 집단이나 친교 네트워크(예컨대 복지센터에 나온 노인들이나 중국인 학생 그룹)를 대상 집단으로 해서 각각 운영되었다. 이러한 포커스 그룹에서의 연구자-참여자간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유전학에 대해 일반시민이 갖는 심층적 사고의 일단을 알아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전문가와 일반시민간의 인식 차이에 대한 흥미로운 함의도 얻어낼 수 있었다(Cunningham-Burley et al., 1999).

포커스 그룹은 이처럼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앞서 소개된 다른 시민참여 방식들과 병행해 이용되는 경우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와 스위스 등에서는 유로바로미터의 생명공학 의견조사와 병행해 개별 심층 인터뷰를 실시하거나 다수의 포커스 그룹 토론을 조직했는데, 이러한 포커스 그룹 토론에서 얻은 정성적 자료는 의견조사에서 얻은 정량적 자료를 이해하고 재해석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de Cheveigne, 2002; Bonfadelli, 2002). 앞서 소개했던 영국에서의 GM작물 대중 논쟁 과정에서는 온라인 공청회와 시민배심원의 운영에 앞서 여러 개의 포커스 그룹을 운영해 해당 주제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쳤다(역시 http://www.food.gov.uk/gmdebate에서 관련 보고서를 볼 수 있다). 미국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의 전신인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National Bioethics Advisory Commission, NBAC)에서도 1998년에 유전자 프라이버시에 관한 숙의 과정의 일부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포커스 그룹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다(Garland, 1999). 영국 웨일즈 지방의 유전자검사 시민배심원에서 토론할 의제를 결정하는 데 포커스 그룹이 이용되었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다.

영국에서 1997-1999년에 걸쳐 진행된 '생명과학 발전에 관한 대중자문(Public Consultation on Developments in the Biosciences)' 과정은 여기서 별도의 주목을 요하는 사례이다. 이 자문 과정은 영국 정부의 과학동력산업부가 발주하고 영국의 대표적 시장조사회사인 MORI가 실무 책임을 맡아 그 결과를 생명공학 규제정책에 대한 검토에 반영하려는 의도로 진행된, 당시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대중자문 과정은 크게 대규모 의견조사와 토론그룹(워크샵) 운영이라는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여기서의 토론그룹은 변형된 형태의 포커스 그룹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는데, 1998년 12월에서 1999년 2월까지의 기간 동안 영국 곳곳에 위치한 6개 장소에서 모두 123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각각의 토론그룹은 두 번의 주말에 걸쳐 이틀 동안 모임을 가졌다. 첫째 날에는 각각의 토론그룹이 유인물과 카드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으면서 생명과학과 관련된 서로 다른 주제들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 다음 주말에 이어진 둘째 날에서는 규제를 위한 이상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정책제안에 초점을 맞추어 토론을 계속했다. 이러한 토론 결과는 정량적 의견조사 결과와 합쳐져 1999년 5월에 최종보고서로 발간되었다. 이 대중자문 과정은 의제가 정부에 의해 주어져 토론그룹의 자율성이 크게 제약되었고 준비 일정이 매우 촉박하게 짜여지는 등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정부의 규제정책 수립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투명하게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Irwin, 2001).

이와 아울러 주목할 만한 또하나의 사례는 미국 유전체연구사업의 ELSI 프로그램에서 지원한 미시간대와 미시간주립대의 대중자문 프로젝트이다(홈페이지: http://www.sph.umich.edu/genpolicy).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미시간 주에서 진행된 "게놈기술과 생식: 가치와 공공정책"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유전자기술에 대해 시민, 환자, 의사들이 갖고 있는 가치, 태도, 신념을 파악하고 이에 근거해 공공정책과 생식의 가능한 선택지들에 대한 조언/접근들을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를 위해 이 프로젝트는 포커스 그룹, 지역공동체 토론집단(community dialogue), 정책 회의(policy meeting), 전문가 포커스 그룹 등과 같은 서로 다른 참여형태를 조합해 4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포커스 그룹 단계'에서는 일반시민과 전문가를 서로 분리해 미시간 주의 여러 도시들에서 포커스 그룹을 운영함으로써 집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가치갈등과 우려를 파악하려 했다. 여기서 얻어진 정보는 두 번째의 '지역공동체 토론집단 단계'를 위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역시 미시간 주의 여러 도시들에서 각각 자원한 30-50명의 시민들이 1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만나서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이어 세 번째의 '정책 단계'는 처음 두 단계에서 얻어진 정보들을 모아 이를 1997년 3월 17일에 열린 정책 회의에서 정책결정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는 주 의회 의원, 보건 전문가, 보건서비스 산업 대표, 그리고 지역공동체 토론 참여자 대표가 참가했다. 마지막으로 '확산 단계'에서는 1998년 5월 15-16일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국 단위의 회의에서 그간의 프로젝트 결과물을 발표함으로써 성과의 확산을 꾀했다. 이 프로젝트는 여러 개의 시민참여 방식들을 일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연속적으로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 프로젝트에 이어 1999년부터는 비슷한 형태의 후속 프로젝트로 "유색인 공동체와 유전학 정책" 프로젝트가 2001년까지 진행되었다. 이는 ELSI 연구 내에서 시민참여 과정이 어떻게 운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의미있는 사례라고 판단된다.
 
 
 

< 각  주 >

1. 한국에서도 2000년 초에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주관한 대규모 의견조사가 있었고, 인간유전체연구사업 ELSI 연구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의 의견조사 연구가 시행된 바 있다.

2. 조사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국가별로 조금씩 달라서 특정 국가가 전체 연구결과에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스위스는 1997년에 처음으로 유로바로미터 생명공학 의견조사에 참여했고 이후 2000년에 한 번 더 참여했는데, 두 차례의 조사 모두 전체 조사 시점과는 6개월 가량의 시간 차이가 있었다.

3. 합의회의의 진행과정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과 합의회의 모델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김명진·이영희(2002)를 참조하라.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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