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대단히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특히 20세기 들어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엄청난 성공은 과거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와 더불어 과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윤리적·법적 문제들도 함께 가져왔다. 정보통신기술의 양면적 성격, 생명공학이 내포하는 치명적 위험과 반윤리성, 보건의료의 지역적·계층적 편중, 환경오염의 심각함, 핵발전이 안고 있는 위험 등으로부터 빚어지는 문제들은 그 중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몇몇 사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기술의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 of technology)'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은 발전하면 할수록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발전이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단순히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라는 식의 당위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오늘날의 과학기술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며 과학기술이 사회와 맺는 상호작용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엄밀한 이해를 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기술을 하나의 자명한 실체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서, 과학기술에 흔히 덮어씌워지는 '신화'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최근 성과에 바탕하여 과학기술에 얽힌 '통념'들을 수정하고 그 속에 내포된 오류와 단순화를 지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과학기술에 대한 통념들을 몇 가지 명제로 정식화하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 각각을 반박하는 형태로 글을 전개해 나갈 생각이다.
 

통념 1 - "과학은 '과학적'이다."
 

먼저 필자는 "과학은 과학적인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한다. 얼핏 보면 이 명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적'이라는 형용사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과학'의 성질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는 말이니, "과학이 과학적"이라는 말은 일종의 동어반복이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필자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과학'들'과 '과학적'은 서로 구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왜 그럴까?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과학'이 단일하고 자명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통상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는 지극히 이질적인 실체들이 뒤섞여 있다. 예컨대 그 속에는 고체물리학이나 유기화학처럼 생산으로의 응용과 대단히 가까이 있는 영역들도 있고, 우생학이나 사회생물학처럼 이데올로기적인 함의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영역들도 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수학이나 이론물리학의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확실한 연역적 증명(혹은 비교적 과정이 단순한 실험적 증명)이 가능한 영역이 있는가 하면, 고생물학과 같이 엄밀한 증명이나 실험이라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여 고도의 추측에 의거해야 하는 영역도 있다. 분자생물학이나 입자물리학의 경우에서처럼 엄청난 고가의 장비(슈퍼컴퓨터나 입자가속기 등)와 수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있는 반면, (다소 과장하자면)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는 영역도 있다. 그리고 종종 특정한 학문영역이 과학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는 사실 역시 과학이 하나의 자명한 실체라는 통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과학적'이라는 형용사가 과연 이 모든 영역들이 내포하는 특성들을 아우를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말은 사실상 거의 아무런 함의를 갖기 못하는 빈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과학적'이라는 용어 속에 내포된 이미지들 - 객관성, 가치중립성, 엄정함, 복잡한 수식과 정교한 실험 등 - 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개개 과학'들'이 갖는 특성으로부터 추상해 낸 것이 아니다. 그 이미지의 근원은 역사적인 사건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그것은 17세기 말 뉴튼과학의 성공을 '객관적이고 엄정하며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과학의 이미지와 동일시하고, 미신과 무지·독단에 빠진 당시의 사회를 과학적 성공의 모델에 따라 개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혹은 '오해'하였던) 18세기의 계몽철학자들이 오늘날에 남긴 하나의 규범적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과학'과 '과학적' 사이의 부적합성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과학적'이라는 용어에 덧씌워진 의미들을 경계함과 동시에, 그것이 내포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문제삼지 않으면 안된다.
 

통념 2 - "과학지식은 자연세계를 (마치 거울처럼) 반영한다."
 

과학적 활동은 자연세계 속에 숨겨져 있는 법칙을 '발견'해 내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과학지식은 자연세계를 명징하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사고 역시 대단히 뿌리깊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 틀 속에서 과학자의 역할은 자연세계가 '보여주는' 것을 편견없이, 끈기있게 관찰하고 그 속에서 법칙성을 발견해 내는 것으로 한정된다. 또 과학적 방법론은 '과학적 사실의 발견→가설의 수립→실험의 수행→가설의 확증(혹은 반증)과 이론의 수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학적' 절차로 이해된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과학철학의 성과에 의하면 이렇게 단순한 모형은 더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선 과학이론은 자연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적인 모형'이자 '구조적 전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특정한 과학이론은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유일하고 특권화된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며, 자신만의 방식 - 그 이론에 고유한 개념이나 법칙들 - 에 따라 오히려 자연세계를 재구성한다. 즉, 자연을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은 자연세계로부터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가 자연 속으로 끌고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과학활동은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은 일련의 절차를 따라 진행되는 것 역시 아니다. 특정한 과학이론은 항상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구조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과학이론의 검증 및 반증 과정이 더욱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70년대 이후 과학지식사회학의 주창자들은 과학지식이 자연세계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과학지식이 자연세계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한 과학적 발견의 의미를 둘러싸고 과학자사회 내에서 논쟁이 벌어지며, 이러한 논쟁이 '사회적으로' 해결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과학지식이 도출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이들의 주장을 모든 과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시키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과학지식사회학의 성과가 자연세계와 과학지식간의 단순한 반영론에 강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과학을 진행중인 하나의 과정(process)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 즉, '지금' '이곳'에서의 과학은 어떤 완결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곳'에서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시각과 특정한 방법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이 어떤 완결된 실체를 향해 나아간다는(혹은 나아가야 한다는) 목적론적인 시각을 내포하지 않으며, 과학이 전적으로 비객관적인 지식체계라는 식의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함축하지도 않는다.
 

통념 3 - "과학자사회는 '합리적'인 원칙에 의거해서 운영된다."
 

과학자사회라는 전문가집단은 흔히 다른 전문가집단들 - 예컨대 법조계, 의료계, 사회과학계 등 - 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공정성을 잃고 종종 이익집단화하는 다른 전문가집단에 비해 보았을 때, 과학자사회는 좀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보다 덜 권위적이고 덜 위계적인, 결국 '합리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른 전문가집단이 '변덕스러운' 인간사회를 그 분석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 과학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연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기 때문으로 돌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과학자집단은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전문가집단으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통념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이 과학과 과학자사회에 대한 단순화된(혹은 왜곡된) 시각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이기는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앞서의 통념 1과 2에 대한 공격을 되새겨 보자). 우선 과학자사회 내에서도 권위와 위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먼저 지적해야겠다. 권위와 위계는 과학활동의 창조성을 가로막는 '비과학적'인 요인들로 흔히들 생각하곤 하지만,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권위의 존재가 오히려 생산적인 결과물을 낳은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식적인 수준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자가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한 실험 결과를 어떤 대학원생이 재연(再演)해 보고 다른 데이터가 나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대학원생은 원래의 실험 결과를 반증했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실험 결과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실험'오차'의 이유를 찾는 것에 골몰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일 것이다. 이와 같은 가상적 사례는 과학자사회 역시 다른 전문가집단이나 여타의 사회집단과 마찬가지로 '전통'과 '권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님을 - 그리고 그 '자유롭지 못함'이 반드시 과학의 성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지 않음을 - 잘 보여 준다.

한편, '둘 이상의 과학자집단이 경쟁하면서 특정한 문제를 둘러싸고 과학적 논쟁을 벌일 때 이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는 여러 사례연구들 역시 앞서의 통념에 대한 유용한 반박을 제공한다. 과학사와 과학사회학의 최근 성과들은 과학자집단이 논쟁에서 '페어 플레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바꿔 말하자면, 과학자집단은 '과학적'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누가 더 과학적인 '증거'들을 더 많이 내놓는가를 가지고 논쟁의 승패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갖은 수사(修辭)를 동원하여 자기편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사회적인 세력을 키움으로써 논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도출되는 결론은, 결국 과학자집단 역시 권위나 위계에 의존하며 사회적 이해관계에도 얽혀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집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통념 4 -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실체이다."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이 둘이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20세기 들어 과학이 기술에 직접적으로 응용된 이후로는 이 둘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실체, 즉 '과학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물어보자. 과연 과학과 기술은 역사적으로, 또 분석적으로 구분'가능'한 실체일까? 그리고 이렇게도 한번 물어보자. 과연 과학과 기술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앞서의 통념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먼저 앞의 물음부터 답해 보자. 과연 과학과 기술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과학과 기술은 근대에 들어서기까지 서로 상호교류가 거의 없는 독자적인 활동이었으며,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서 서로 다른 사회계층에 의해 활동이 수행되었다. 17-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임이 조금씩 인지되기 시작하였으나, 당시까지 이는 여전히 가능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정도였다. 결국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지금과 같이 밀접해진 것은 앞당겨 잡아도 전자기학이 전기공학에 '응용'되고 유기화학이 화학공업에 '응용'된 19세기 말경은 되어야 하며, 본격적인 이들간의 상호관계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상호관계가 몇몇 접점들 - 에컨대 고체물리학과 반도체기술,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핵물리학과 핵공학, 사이버네틱스 이론과 정보·통신기술 등 - 을 중심으로 해서 전면화되었다고 흔히들 생각되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과학과 기술은 여전히 교육제도에서 분리되어 있으며, 상이한 목적을 가지고 추구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정도는 구체적인 분야에 따라 불균등하며, 따라서 이들간의 관계는 여전히 '상이한 두 실체간의 상호작용'으로 생각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어서 두번째 물음으로 넘어가자. 과학과 기술을 굳이 구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역사적·분석적으로 구분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현장의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이 하는 작업이 과학에 속하는지 기술에 속하는지에 대해 별다른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고 작업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기술이 구분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리는 것이 이미 과학 일반에 부여되어 있는 '과학적'이라는 이미지를 기술에까지 부여하게 된다는 문제점 때문이다. 이는 기술이 과학과는 구분되는, '훨씬 더' 가치의존적인 실체라는 점을 은폐한다. 이는 이어지는 통념 5의 문제의식과 이어진다.
 

통념 5 - "기술은 사회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갖는다."
 

우리는 종종 기술이 그 내부에 그것의 발전경로를 이미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특정한 기술(혹은 인공물)이 출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통념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술의 발전경로는 이전의 인공물(artifact)보다 '기술적으로 보다 우수한' 인공물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 인공물들의 연쇄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술의 발전경로가 '단일한' 것으로 보고, 따라서 어떤 특정한 기능을 갖는 인공물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유일하게 가장 좋은' 설계방식이나 생산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와 같은 생각들을 종합한다면, 기술의 발전은 결코 사회적인 어떤 힘이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단일한 경로를 따르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기술의 발전경로를 열심히 추적해 가는 것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흔히 '기술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social constructivist approach to technology)'이라고 불리는 이론체계는 이러한 통념에 대한 효과적인 반박을 제공한다. 8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다양한 기술사와 기술사회학 영역의 사례연구들은 어떤 특정한 기술이나 인공물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어서 그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여러 '행위자(actor)'들 - 엔지니어들뿐만 아니라 자본을 댄 투자가들이나 정부 부처 등등 - 의 이해관계나 가치체계가 기술이 특정한 형태로 틀지워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사회적 형성과정의 결과로 도출된 기술은 이미 그 속에 사회적인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수의 기술이 서로 경쟁하여 그 중 하나가 사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분석해 본 결과, 이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종종 기술적 우수성이나 사회적 유용성이 아닌, 관련된 사회집단들의 정치적·경제적 힘인 것으로 드러났다. 기술의 발전경로는 더이상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회학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맥락을 제거한, 기술발전에 있어서의 단일한 경로를 인정하지 않고, 기술적 우수성이나 우위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그것이 사용되는 특정 사회의 가치체계를 고려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특정한 인공물의 설계에서 '유일하게 가장 좋은'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상이한 가치체계를 내포한 다양한 인공물의 설계와 이들 상호간의 경쟁,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인공물의 존속이 있을 뿐이다.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함의는 현재에 이르는 기술발전의 궤적이 결코 필연적이고 단일한 것이 아니었으며, "다르게 될 수도 있었다"라는 인식이다.
 

통념 6 - "기술의 발전은 사회의 발전방향을 결정한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통념은 기술이 사회에 단순히 영향을 미친다는 정도를 뛰어넘어 기술이 사회의 형태와 변화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장에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고는 미래학자들의 예측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과거의 역사서술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예컨대 등자(stirrup)가 봉건제를 낳았다는 주장이나 기계기술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주장, 그리고 새로운 정보기술이 과거의 산업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보사회를 낳는다는 주장 등이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상당히 그럴듯하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 -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의해 사회적 관계와 사회성원들의 행동양식이 바뀌어 나가는 것 - 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간다.

그러나 기술이 사회적인 영향을 갖는다는 주장과 기술이 사회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술이 사회를 결정한다'라는 주장의 근저에는 기술을 자기진화하는 하나의 자율적(autonomous)인 실체로 간주하는 사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 기술은 결코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실체가 아니며 '사회적인 영향력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기술이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 기술 역시 사회로부터 영향받는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특정한 기술의 발전궤적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기보다는 사회에 거의 결정론적인 영향을 주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들이 있다. 예컨대 IBM PC가 286에서 386, 486을 거쳐 펜티엄으로 '진화'해 나가는 것은 사회로부터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PC의 업그레이드는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지 않는가? 또한 이미 우리 사회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핵발전 기술은 이미 사회성원들의 통제를 벗어난, 하나의 '자율적'인 실체로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으로 옳다. 사회 속에 자리잡은 거대 기술시스템들은 사회로부터 영향을 좀체로 받지는 않는 반면 사회에는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소위 '기술적 모멘텀(technological momentum)'을 획득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러한 경우에도, 기술이 사회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율적인 실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재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 기술시스템을 지탱하는 요소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인 이해관계들의 총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관계들의 연합이 붕괴할 때 거대 기술시스템 역시 붕괴할 수 있다. 서유럽 일부 국가들에서 핵발전이 퇴조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에 대한 6가지의 '통념'들을 살펴보고 이들 각각을 비판해 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 우리는 과학이 '과학적'이라는 이미지와 동일시될 수 없는 다양한 영역들의 집합이라는 것, 과학지식은 자연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과학자들은 결코 특권적인 전문가집단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과학과 기술은 서로 구분되는 실체라는 것, 기술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지도 않으며 사회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등을 하나의 잠정적 결론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글의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통제'가 실천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는 이론적 전초작업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인식적인 작업들로부터 실천적인 함의들을 이끌어 내는 일일 것이다.

출전: 『공동선』 1997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