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민주화
 

리처드 스클로브
 
 

150여년 전,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정치적으로 활기에 가득찬 당시 미국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막 도입된 증기기관차조차도 정치와 지역사회의 생활에 대한 시민들의 끊임없는 참여(involvement)를 억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떤 나라들을 보면 그곳의 주민들은 법이 그들에게 부여한 정치적 특권들을 이용하는 데 대단히 인색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시간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위해 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편협한 이기주의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러나 만약 미국인이 그의 행위반경을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로 제한하도록 선고를 받는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의 절반을 강탈당한 격이 될 것이다; 그는 일상적으로 영위했던 생활 속에서 엄청난 공허함을 느낄 것이고, 그의 비참함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과반수를 간신히 넘는 수의 유권자들이 대통령선거에 참여하고, (통신수단의 환상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역정치에 대한 참여는 이보다 훨씬 더 저조한 오늘날의 미국에는 분명 적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치적 참여가 줄어든 것에는 분명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터이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 특히 기술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복잡미묘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대서양 건너편에서 있었던 사례를 한 가지 드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스페인 북동부의 작은 마을인 이비에카(Ibieca)에서는 1970년대 초반을 통해 집집마다 수도물이 공급되었다. 수도관이 각 가정에 설치되자 이비에카인들은 더 이상 마을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각 가정은 점차적으로 세탁기를 구입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을의 부녀자들이 빨래를 손으로 비벼 빨기 위해 공공 빨래터에 모이는 일은 드물어졌다. 기술도입의 결과 이제 힘든 작업들을 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의 사회생활은 예기치 못했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한때 활발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소였던 마을의 공공 우물과 빨래터는 이제 거의 버려졌다. 남자들은 예전에 물을 운반하는 것을 도와 주었던 아이들이나 당나귀들과 가졌던 편안한 친숙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빨래터에 모이는 것을 그만두었고, 이에 따라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힘을 부여해 주었던, 남자들이나 마을 생활에 대한 가십(gossip)도 나누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이비에카인들이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주었던 강한 유대감 - 사람들 서로서로간에, 동물들에 대해, 그리고 대지에 대해 갖고 있었던 - 을 버리게 되는 더 폭넓은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계에 해당했다 (Harding 1984). 그러한 공동체의 상실은 그 자체로도 뼈아픈 것이지만, 이와 함께 특정한 정치적 위험까지도 같이 가져왔다: 사회적 결속력이 약해짐에 따라 정치적 행동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마저도 약화되었던 것이다 (Bowles and Gintis 1986).

이비에카인들처럼, 우리도 겉보기에는 무해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기술적 변화들을 묵인하고 있다. 이비에카인들은 편리함과 생산성, 경제적 성장을 약속해 주는 기술혁신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뒤에 숨겨진 대가를 미처 예측하지는 못했다: 바로 그 기술혁신은 불평등의 심화, 사회적 소외, 공동체의 해체와 정치적 무력화를 동시에 가져왔던 것이다.
 

경제적 성취 對 민주주의
 

최근 미국의 진보주의자들(American progressives)은 기술정책을 통상적인 경제적 목적들 - 생산성, 성장, 그리고 국제경쟁력 - 을 향해 방향지운다는 점에 있어 보수주의자들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를 표해 왔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구사하는 수사(修辭)에서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자유방임적 수단들을 선호하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이 제안한 기술정책은 정부개입을 지지하고 있다. 여기서의 정부개입은 예컨대, 기술발전을 오도된 군국주의로부터 보건, 환경보호, 하부구조의 향상(infrastructural improvements), 소비재의 경쟁적 생산과 같은 기본적인 사회적 필요 쪽으로 인도하기 위한 새로운 민간기구를 설립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대담한 제안자들은 명백한 인민주의적(populist) 경향을 보여 주면서, 과학기술관련 의사결정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grass-roots empowerment) 분권화된 조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주의자들이 기술정책을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목적을 향해 방향지운다는 점에 동의하는 한, 그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의견대립은 목적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수단에 관한 것일 뿐이다. 지금까지 제안되었던 진보주의자들의 전략은, 기술이 사회적·정치적 관계들을 형성하는 잠재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그들이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에 대처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목표를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기술들은 다양한 사회적 병폐들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미묘한 방식으로 참여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을 심대하게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기술의 사회적·정치적 잠재성들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기껏해야 이비에카가 맞은 운명의 한 변종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즉, 생산성이나 기본적인 사회적 필요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의 향상은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향상이 정치적 참여의 예기치 못한 감소, 공동체 결속력의 약화, 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의 감소, 개인의 목적상실, 부의 불평등의 확산 등의 결과들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꿈꾸고 또 그 실현을 위해 땀흘려 왔던 것이란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필수적인 경제적·사회적 필요를 여전히 충족시키면서도 민주적 공동체와 시민참여와 사회정의를 유지하는 데 역시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안적 기술전략과 기술설계를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요점은 모든 기술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이는 분명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제안일 것이다 - 우리가 기술을 어떻게 설계하고, 선택하고, 또 사용할 것인가에 있어서 좀더 분별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진보주의자들의 기술적 의제들을 보다 확장시켜 완전히 민주적인 기술정치(politics of democracy), 즉 발달하고 있는 민주적 기술을 담당할 민주적 조직을 구성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방향으로의 움직임은 단기적인 경제적 목표를 성취하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진척시키는 것에 동등하거나 더 큰 우선권을 공공연하게 부여하는 정치적 위험을 안게 되기도 한다.

비록 내가 후자의 정치적 도박(단기적인 경제적 목표보다 민주주의에 우선권을 부여할 때 안을 수 있는 정치적 위험의 감수 - 역주)이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판단을 존중할 수 있다 - 그들의 선택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informed) 것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경제적 생산성의 향상과 성장에 강조점을 둠과 동시에,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인도되는 기술정책을 옹호하려 하는 그들의 결정은 정치적으로 안전하며, 아마도 그러한 근거에서 정당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전략의 주창자들이 앞서의 정당성을 상쇄하는 위험 - 이러한 전략이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불평등과 수동성과 소외가 심화된 세계를 넘겨줄 수 있다는 - 를 고려하고 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민주적인 기술정치를 지지하는 결정은 단기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장애에 직면하겠지만, 그럼에도 다음에서 묘사된 세상으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즉, 개인과 집단에 대한 권한부여가 확장된 세상, 그리고 "새롭고 향상된(new and improved!)" 방취제나 유명 브랜드에서 높은 기술수준을 동원해 만들어낸 운동화나 컴퓨터 칩이 들어있는 전자제품 등속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것이 더 이상 민주주의를 되살리려는 오랜 추구를 배제하지 않는 세상, 진정한 사회적 필요에 대처하며 인간의 다른 고차원적 염원을 충족시켜 주는 세상.

이러한 주장은 기술이 반드시 정치생활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단일요인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술이 충분히 중요하며, 또한 다른 요인들 - 법률, 부의 분배, 인종과 성별 관계, 국제 문제 등 - 과 뗄래야 뗄 수 없이 서로 뒤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에 대해서도 그러한 다른 요인들에 대해 행해지는 것과 같은 엄격한 정치적 조사(scrutiny)와 참여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과연 내가 경제적 논리보다 민주주의에 대해 우선적으로 주목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결국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경제가 비민주적이기 때문에 나쁠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해서 부정(injustice), 생태적 약탈(ecological spoliation), 엄청난 경제적 비능률을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지 않은가? 혹은, 미국의 창건자들이 당시 제안되었던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의 각 조항들에 경제적인 비용-수익 시험(cost-benefit test)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번 가정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만약 그들이, 명백한 경제적 비용에 비해 볼 때 예측되는 수익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근거를 들어 시민적 자유의 보호를 거부했다면 현재의 우리는 과연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있을까?

기술은 소비자에게 단지 이런저런 잡다한 이익이나 잡다한 해악과 짜증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사회의 중추적인 정치적 하부구조(political infrastructure)의 일부를 구성한다. 기술이 수행하는 이러한 역할은, 구조의 결과로 나타나는(structurally consequential) 사회적 영향, 기회, 제한, 유인(誘引)들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연결망을 기술이 창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비록 우리가 잊고 있긴 하지만 이 연결망은 말하자면, 근대사회에서 법이나 세제(稅制)에 의해 창출되고 그 시행 기제(enforcement mechanism)에 의해 강제되는, 보다 명시적인(explcit) 기회, 제한, 유인의 연결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시각에 입각하여 행동하지 않는다면, 기술발전은 그것이 기존의 시장과 정부 정책에 의해 인도되건, 그렇지 않고 일반적으로 지지되는 진보주의적 대안에 의해 인도되건 간에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강고한 민주주의가 추구할 여타의 사회적 목적들조차도 좌절시키고 말 것이다.

따라서, 기술의 민주화(technological democratization) - 보다 민주적인 기술적 질서(technological order)를 산출하는 일련의 민주적 과정 - 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근본적 이유에서 대단히 중대한 것이다: 먼저, 이는 사회적 민주화 일반을 전진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그러나 지금껏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던 필요조건이다. 둘째로, 이는 대면접촉에 기반한 공동체의 쇠퇴나 노동의 본질의 격하 등과 같이, 통상적으로 인지된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다. 세째로, 기술의 민주화는 전반적인 사회민주화에 기여함으로써 폭넓은 근거를 지닌 공명정대함(fairness)과 권한 부여(empowerment)에도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공명정대함과 권한 부여는 기술의 다른 사회적 결과들(즉, 정치적 성격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결과들)뿐만 아니라, 통상 기술에 그 책임이 돌려지지는 않는 고질적인 사회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구조로서의 기술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볼 때, 민주적인 기술정치의 필요성을 파악함에 있어 결정적인 단계는 기술을 협소하게 정의된 목표를 달성하는 단순한 수단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즉, 기술은 사회구조(social structure)의 중요한 한 가지 유형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구조"라는 말을, '사회생활을 정의하고 규제하는 데 기여하는 배경적 특징들(background features)'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흔한 예로는, 법이나 지배적인(dominant) 정치·경제적 기관들(예컨대 입법부, 법원, 대기업들 등), 그리고 문화적 신념체계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모든 것들은 - 기술과 마찬가지로 - 서로서로의 발전과정뿐만 아니라 역사적 추이나 일상생활의 짜임새(texture)에 심대하게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사회구조가 되기 위한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구조들은 한 사회의 근본적인 정치적 관계나 과정들을 형성하고, 또 그것의 구성부분으로 기여한다. 여기서, 기술이 [그것을 통해] 구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묘한 수단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비에카의 예를 다시 보도록 하자.

먼저 이비에카에서 전통적으로 물을 사용하던 방식을 뒤흔들어 놓은 결과, 그 마을이 스스로를 자의식적인 공동체로서 유지시켜 오던 중요한 수단이 손상을 입었다. 즉, 기술이 사회적 관계를 구조화하는 것에 일조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술이 명목상으로 의도된(혹은 "주요한(focal)") 목적과는 독립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우리는 보통 우물이나 수도관(혹은 비근한 예로 전자 레인지, 피하 주사기, 정원의 호스, 혹은 수치제어 공작기계 등)을 인간관계의 유형을 형성하는 장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 유형의 형성은 그러한 기술들이 지니고 있는 광범한 잠재적(혹은 "부차적인(nonfocal)") 경향 가운데 하나이다.

두번째로, 명목상의 의도에 있어서 서로 무관한 기술들의 묶음(clusters of focally unrelated technologies)은 종종 상호작용을 통해 그 중 어느 한 기술이 독자적으로는 산출해 내지 못했을 구조적 결과를 낳곤 한다. 이비에카의 경우, 수도관을 도입한 것은 밭일에서 당나귀를 트랙터로 대체하는 것에도 역시 유인을 제공했다. (당나귀가 해야 하는 일이 적어질수록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덜 경제적이기 마련이다.) 그 결과 그나마 남아있던 당나귀의 유용성이 사라져 버렸고, 다른 한편으로 마을 사람들은 새로 도입된 트랙터와 세탁기를 구입하고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점점 더 외지의 직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번에 단지 한 가지 종류의 기술(수도관)만을 고려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사회 전체의 기술적 질서를 공동으로 구성하는, 모든 다른 인공물들과 실행들과 시스템들(상호의존적인 시스템들로서의 수도관, 세탁기, 트랙터)을 분석해야만 한다.

앞에서 보았듯, 어떤 주어진 기술은 그것이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있어서 종종 간접적으로, 또 표면적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다른 기술들과 제휴하여 사회적 영향을 산출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오로지 사회적 필요의 충족에만 초점을 맞춘 기술전략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시도를 해야만 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도를 함에 있어, 다양한 기술이 가져오는 주요한(focal) 결과와 부차적인(nonfocal) 결과의 복합체가 일반 대중들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강화하고 우리가 앞당기고자 하는 다른 사회적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기술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이비에카인들이 물 사용을 관리하고 밭을 가는 새로운 방식을 원했다면, 공동체 생활의 다른 바람직한 측면들을 간접적으로 희생시키지 않는 수단을 고안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예컨대 개별 가정마다 세탁기를 들여놓는 대신, 마을 중앙에 세탁업 협동조합(laundry cooperative)을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혹은, 만약 미국인들이 군사무기의 발달에 대한 자기파괴적인 탐닉을 더 나은 보건이나 공공교통에 대한 관심으로 대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부지불식중에 국가적인 차원의 사회악(social malignancies) - 예컨대 도시 중심부의 상황이 악화되고, 이에 따라 개인주의적인 교외 지역(atomistic suburbs)이 부상하는 것 - 을 강화할 접근들을 채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있지 않을까?

또한 이와 같은 기술적 통찰로부터 우리는, 생명공학이나 "정보초고속도로"와 같은 '섹시한' 최첨단의 기술이나 전자 투표, 공영 TV방송, 무기류와 같이 명백하게 정치적인(focally political) 기술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시각 역시 부적절하다는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Richard Sclove and Jeffery Scheuer, "The Ghost in the Modem," the Washington Post, May 29, 1994를 참고하라). 그런 기술들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지만, 보다 일상적이고 표면적으로는 무해한(focally innocuous) 기술들 - 수도관, 세탁기, 에어컨, 전력 공급망 등등 - 을 무시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기술들 역시 서로 결합되었을 때 앞서의 최첨단이고 정치적인 기술들만큼이나 중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과 민주주의
 

지금까지의 통찰에 맞추어 기술전략을 고안함에 있어서 나의 접근방법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기본적인 사회적 환경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곧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참여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평등주의적인 분권화와 이들간의 연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러한 전망을 두고 벤자민 바버(Benjamin Barber)는 "강한 민주주의(strong democracy)"라 이름한 바 있다 (Barber 1984). 이러한 이상의 면면들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로는 뉴 잉글랜드(New England)의 마을 모임, 스위스의 자치촌락이나 자치주(州)들의 연합, 그리고 배심원에 의한 재판의 전통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강한 민주주의는 19세기 말 미국농민동맹(American Farmers Alliance), 1960년대 미국의 시민권 운동, 1980년대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방법론이나 운동목표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각각의 경우들에 있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나서서 기본적인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행동하는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소리높여 외쳤다.

강한 민주주의의 이러한 절차적 기준은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substantive) 기준에 의해 보완된다: 즉,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참여에 있어서 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을 강한 민주주의로 영속시키는 데 우선적인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질적 의무만 제외한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다른 다양한 개인적 관심사나 공통된 관심사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다소 개략적인 형태로 제시되긴 했지만, 이러한 민주주의의 모델은 민주주의와 기술의 관계에 관한 간단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이론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충분한 내용을 제공한다: 즉, 만약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데 참여할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기술이 중요한 사회구조 중 하나라면, 이로부터 기술적 설계와 실행은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강한 민주주의의 상호보완적인 두 가지 기준 - 실질적 기준과 절차적 기준 - 으로부터 우리는 기술의 민주화가 두 가지 요소들을 포괄함을 알 수 있다: 먼저 실질적 측면에 있어, 기술은 강한 민주주의 그 자체를 지키려는 우리의 관심사와 양립가능해야만 한다. 그리고 절차상의 측면에서, 우리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기술적 질서를 형성하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의 확장을 요구해야만 한다.
 

민주적 기술의 설계 기준
 

아래의 개요에서는 민주주의와의 구조적 양립가능성에 기반해서 기술들을 구분하는 몇 가지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아래 기준들의 목록이 완결된 것도 아니고 최종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이 기준들을 "잠정적"인 것이라고 해 두겠다. 나는 이 기준들의 제시를 통해 [기준들에 대한] 정치적 토론이 촉발되기를 희망하며, 토론을 통해 점차적으로 보다 확장되고 향상된 기준들의 집합이 도출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래의 [잠정적] 기준들이 어떻게 이끌어내어졌으며, 어떤 근거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길포드 출판사에서 출판된 나의 책 <민주주의와 기술 Democracy and Technology>에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민주적 기술을 위한 설계기준의 잠정적 체계

·민주적 공동체를 위하여 ―
A. 공동체적/협동적 기술과 개인화된(individualized) 기술, 그리고 공동체간(intercommunity) 기술 상호간의 균형을 추구한다. 권위주의적 사회관계를 세우는 기술을 피한다.

·민주적 노동을 향하여 ―
B. 작업일정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으며,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실천들을 다양하게 배치하는 것을 추구한다. 무의미하고, 심신을 쇠약하게 하며, 또 여타의 다른 방식으로 자율성을 침해하는 기술적 실행들을 피한다.

·민주적 정치를 향하여 ―
C. 사회경제적으로 혜택받지 못한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사회·정치생활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기술을 추구한다.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집단간, 조직간, 정체(政體)간의 위계적 권력관계를 부추기는 기술을 피한다.

·민주적 자치(self-governance)의 확립에 기여하기 위하여 ―
D. 잠재된 부정적 결과들(예컨대, 환경적 위해나 사회적 해악)의 배분을 지역적인 정치체의 관할 경계 내부로 한정한다.
E. 지역의 상대적인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다. 대외의존을 심화시키고 지역적 자율성의 상실을 초래하는 기술을 피한다.
F. 전지구적 의식을 지님(globally aware)과 동시에 평등주의적인 정치적 분권화 및 연합과 양립가능한 기술(공공적 공간에 대한 건축까지를 포함해서)을 추구한다.

·민주적인 사회구조의 영속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
G.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추구한다. 생태적 견지에서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파괴하고 민주적 제도의 영속화를 가로막는 기술을 피한다.
H. 지역적으로는 기술적 유연성을 추구하고, 전지구적으로는 기술적 다원주의를 추구한다.

개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위에서 제시된 기준들 각각은 강한 민주주의의 세 가지 일반적인 제도적 요구조건 - 민주적 공동체, 민주적 노동, 민주적 정치 - 중 어느 하나에 대해 다소간 직접적이고 중요한 관계를 가지도록 의도된 것이다 (이 기준들이 갖는 실질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들은 Sclove 1993을 보라). 물론 기술적 결정들을 내림에 있어서 우리가 고려했으면 하는 다른 많은 이슈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특별히 민주주의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어떤 다른 사항들을 우리의 기술적(그리고 비기술적) 의사결정과정에서 고려에 넣을 것인지를 우리가 자유롭게, 그리고 공정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우선적으로 주목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기술은 다른 사회적 목적들의 달성을 계속해서 가로막을 것이다.
 

민주적인 설계기준 對 진보주의적 제안들
 

앞서의 논의를 통해서, "붕괴하고 있는 미국의 기술적 하부구조(technological infrastructure)를 재건"하자는, 귀에 익은 진보주의자들의 요청에는 중요한 결함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기술적 하부구조를 복구하거나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면, 지역의 민주적 자치에 보다 적합한 형태로 하부구조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산업쓰레기나 도시쓰레기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들, 혹은 에너지를 보존하거나 생산하는 방법들 중에는 광범한 지역적 참여에 의해 전개되고 운영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하나의 예로, 가정이나 건물의 난방을 위해 태양에너지를 소지역 규모에서(neighborhood-scale) 특정한 계절에만 저장해 사용하는 방식이 지금 스칸디나비아에서 개척되고 있다. 강조하건대, 만약 지역(locality)들이 그들 자신의 지탱가능한 하부구조에 대해 더 많은 통제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강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풀뿌리 정치참여에 대한 유인(誘引)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지역들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의 대다수가 여전히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지역적 규모의 정치참여에 적극성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앞서 제시된 기준들이 가진 또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이 기준들이 하나의 기술이 아닌, 기술적 질서 전체에 대해 적용되는 것이며, 또한 기준들 각각이 상호보완적인 체계를 이루어 함께 작동하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 역시, 진보주의적 기술정책에 널리 퍼져 있는 약점을 교정하는 데 유용하다. 예컨대 작업장 민주주의의 주창자들은 기준 A와 B(협동과 창조성)를 훌륭하게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그 결과 나타난 상품이나 서비스가 사회적으로 무해한(benign) 것인지를 따져묻는 일을 대체로 소홀히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민주적으로 의심스러운(democratically dubious) 기술들 - 예컨대 화학무기나, 사회적 상호작용과 연대를 침식할 수 있는 특정한 가전제품들(워크맨 같은) - 을 경쟁적으로, 또 민주적으로 생산해 낸다면, 우리의 성취가 갖는 의미는 애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산성비나 성층권의 오존층 고갈, 전지구적 온실효과 등에 대해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이 나타나고 있는 현 시기에 있어, 그 누구도 생태적으로 보다 지속가능한 기술적 행위들을 고안할 필요성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기준 G). 그러나 환경운동가(environmentalist)들은 종종, 기술설계의 사회적 기초로서 지속가능성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고가 내포한 불완전성은, 예컨대 하수처리 시스템의 특정한 배치[보다 중앙집중적이고 거대화된 형태의 배치]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건강을 보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의 민주적 자치를 파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혹은, 상대적으로 엄격한 환경정책이 가혹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결합되어 있는 싱가폴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좋겠다 (Susan Sesser, "A Reporter at Large: A Nation of Contradictions," The New Yorker, January 13, 1992). 기술을 평가함에 있어 우리는 모든 기술들을 고려에 넣어야 하며, 그것들의 주요한(focal) 효과와 부차적인(nonfocal) 효과들을 생각해야 하고, 기술이 정치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측면의 관련들 역시 고려해야만 한다.
 

민주적 기술정치를 향하여
 

민주적인 설계기준들은 민주적 기술정치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민주적인 설계기준들이 기술적 의사결정의 모든 영역에서 대중들의 더 많은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들과 결합되었을 때만 그러할 것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함의가 도출된다: 즉, 민주적인 설계기준들에 대해 (공동체, 작업장, 그리고 모든 다른 사회영역들에서) 논쟁하고 이를 적용하며, 연구개발(R&D)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기술시스템들을 통제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 대중들의 참여를 위한 광범한 기회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기술정책과] 관련있는 정부기관들을 개방하고, 민주화하고, 부분적으로 권한을 분산시키는 것, 기업의 R&D와 전략적 계획(strategic planning)에 노동자들과 지역공동체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창출하는 것, 그리고 기술들이 가져오는 누적적인 정치적·사회적 결과들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경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을 일반적으로 강화시키는 것 등이 될 것이다 (구체적 제안들에 대해서는 Sclove 1994를 보라).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적절한 정치적 전략들과 구체적인 목표가 될 정책들(target policies) 역시 필요로 한다. 정치적 실용성의 견지에서 볼 때, 아마도 시작은 이미 존재하는 대중운동들과 기술적 자원(technological initiative)들을 바탕으로 하게 될 것이고, 이로부터 외부로 [운동을] 건설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냉전의 종식으로 말미암아 현재 그러한 노력이 기울여질 수 있는 시기가 무르익고 있다.

기술관련 의사결정에서 더 많은 대중적 참여를 뒷받침해 줄 제도나 과정들을 마련해 나감에 있어서, 과거에 있었던 많은 원형(prototype)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지역공동체의 보건에 관련한 의사결정(Community Health Decisions, CHD)' 운동은 공공보건정책과 의료기술을 좌우하는 윤리적 원칙들에 대한 대중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대중들에 기반한 과정(grass-roots process)을 개발해 왔다. 이 운동의 성과들 가운데 하나는, 오레건 주 전역에 걸쳐 수십 개의 공동체 모임을 조직하여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사회적 가치들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이에 대해 논쟁하고, 그 각각에 대해 우선순위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만들었으며, 그 결과 주 차원의 보건체계를 과감하게 개혁하는 과정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Jennings et al. 1990). CHD 운동은 앞으로 시민들이 보다 일반적인 민주적 설계기준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토론의 장을 마련함에 있어 하나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몇몇 주에서는 반전활동가들(peace activists), 노동조합들, 기업 대표들, 지역운동 단체들, 정부 관리들 등이 연합해서, 군사무기의 생산에서 민간적 필요의 영역으로 지역경제를 다양화시키려는 광범한 민주적 과정을 성공리에 발족시켰다. 예를 들어 워싱턴 주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하여 광범한 대표성을 지닌 시민자문모임(citizen advisory group)을 두기로 했다. 이 모임은 주의 군사경제(military economy)를 감시하고, 탈냉전 시대의 경제적 조정(economic adjustment) 문제를 평가하고, 비(非)군사적인 경제적 필요와 기회, 능력들을 파악하고, 방위산업과 관련된 일자리들의 축소가 일어나기 전에 군사의존적인 지역공동체들이 다양화될 수 있도록 행동 계획을 공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Cassidy 1992). 이러한 시도는 무엇보다도, 기존의 기술적 질서 전체를 평가하고 다시 방향짓는 데 있어 사회적 기준을 이용한 탁월한 사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네덜란드에서는 공공적인 "과학상점(science shops)"의 네트워크가 발전해 왔다. 이 과학상점들은 인접한 대학의 교직원들과 학생들에 의해 지원을 받는데, 여기서 시민단체들은 기술적 요소를 내포한 사회적 이슈들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무료로 조력을 받을 수 있다. 한 과학상점은 지역의 환경운동단체가 채소의 중금속오염 실태를 자세하게 알려내는 것을 도와 주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정부는 중금속을 제거하는 대규모의 정화(clean-up) 작업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오염에 책임이 있는 금속가공 공장의 시설개선 작업도 진행시켰다. 네덜란드의 과학상점은 기술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시민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대단히 성공적임이 드러났고, 이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유사한 노력을 하도록 추동하고 있다 (Shulman 1988).

기술적으로 단순하거나 낙후된 것으로 종종 잘못 인지되어 왔던, 전통적인 애미쉬(Amish) 공동체들은 [그들이 도입하고자 하는] 기술들을 그 누적적인 사회적 효과들에 근거해서 [사전에] 검사하는 대중적 숙고 과정 - 결과적으로 위에서 개요가 제시된 기준들 중 많은 것들을 만족시키는 - 을 개척해 왔다. 분명히 모방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 가지 방법은, 어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때 그것이 갖는 사회적 효과들이 어떤 것일지를 경험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1년간의 유예(probation) 기간을 두는 것이다. 예컨대 일리노이 주 중동부에 위치한 애미쉬 낙농공동체들은 디젤로 가동되는 대용적 우유탱크(bulk milk tank)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인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1년간의 시험 기간을 두었다. 또 다른 애미쉬 공동체들은 가정의 전화나 개인용 컴퓨터를 금지하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와 유사한 자발적인 사회적 시험 결과를 활용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대부분의 기술적 선택들을 결정하는 전문가의 판단이나 관료적 협잡, 혹은 규제되지 않은 시장에서의 상호작용이라는 관례(norm)들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러한 사례들은 만약 적절한 제도적 환경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일반 시민들이 민주적인 우선순위 - 앞서의 관례적 결정에서는 고려되지 않을 - 를 반영하여 합리적인 기술적 결정들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참여적 연구, 개발, 그리고 설계
 

기술적 선택과 통제를 위한 민주적 과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참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광범한 영역의 대안적 기술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노력은 여전히 헛된 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술혁신의 기본구조를 이루는 연구개발과 설계(research, development, and design, RD&D) 과정에 민주주의를 짜넣는 일이 필수적이다. 아래에서 몇 가지 예를 보도록 하자:
 

작업장 기술의 민주적 설계

스칸디나비아에서는 1980년대 초에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신문 그래픽 노동자들이, 취지에 공감하는 대학의 공학연구자들과 스웨덴 정부의 연구소, 국영 출판회사 등과 협력하여 당시로서는 유일무이했던 특정한 형태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신문의 지면배정(layout)이 규격화되고 기계화되어 가던 당시의 경향에 따르지 않고, 나중에 탁상 출판 프로그램에서 구현되는 몇몇 기능들을 선구적으로 고안해서 인쇄공들과 그래픽 담당자들이 페이지 디자인을 할 때 계속해서 상당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Martin 1987). UTOPIA라는 약자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RD&D 과정에 대한 확장된 참여의 경우를 예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참여는 민주주의의 조건 중 하나인 창조적 노동(기준 B)을 뒷받침하는 설계상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

UTOPIA는 그 전망에 있어서 작업장 내에서의 참여설계를 추진한 몇몇 다른 사례들보다 덜 야심적이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영국 루카스 항공사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노동과정을 민주화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다 유용한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추구하였다 (Wainwright and Elliot 1982)). 그러나 UTOPIA는 시제품을 개발하는 수준을 넘어 성공적으로 시장에 진출한 설계상의 혁신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좀더 나아갔다. 노동자들과 기술전문가들이 서로 협력한 이러한 사례 - 최초에는 하나의 산업 내에서 하나의 기술만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 는 사회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조건들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스웨덴의 노동자들 중 85%가 노조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친화적인 사회민주당이 지난 반 세기에 걸쳐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이런 협력을 지원하는 법률적 맥락을 제공했다.
 

참여적 건축

기계류나 가전제품, 기술적 하부구조 등에 대해 지금껏 시도된 참여설계의 실천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건축설계 영역에 대한 시민참여의 경우에는 많은 전례들이 있다. 사례들의 유형은 극히 다양해서, 그 중에는 참여를 이끌어내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 입증된 경우들, 또 참여를 통해 도출된 설계결과가 건축가 혼자서 고안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경우들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는 참여의 결과 대단히 새로운 설계들이 도출되었고, 이는 종종 권력을 가진 사회적 이해집단이나 기관들로부터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하나의 예로, 브뤼셀의 뤼뱅 의과대학 내의 카톨릭 대학(Catholic University of Louvain Medical School) 구내에 설치되었던 "사회적 구역(Zone Sociale)"을 들 수 있겠다. 1969년 이곳에서 학생들은 인근의 거대한 병원 건물들이 환자들에게 주는 소외의 경험을 지적하면서 새로 지을 대학 건물들은 이런 경험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축가인 뤼시앵 크롤(Lucien Kroll)은 이를 위해 개방적인(open-ended) 참여설계 과정을 만들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복잡하고 유기적인 형태(complex organic form)와 대단히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상호작용 - 예컨대 간호대학을 행정실(administrative office)과 술집(bar) 근처에 위치시키는 식으로 - 을 이끌어내고, 보행자 길과 정원, 공공장소들로 구성된 복잡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려 하였다. 건물들의 벽과 바닥은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공간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설노동자들에게는 최종설계도 대신 설계의 원칙과 제약조건만을 주고, 이들이 나름대로 조각의 형태를 만들어보도록 장려하였다. 건설노동자들은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이들 중 몇몇은 일요일에 가족과 함께 건설현장을 방문해 가족들에게 자신의 솜씨를 보여주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건축 엔지니어들은 처음에 자발성과 장난스러움(playfulness)의 정도에 당혹감을 나타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유능한 참여자로 스스로를 재교육했다. 이 모든 과정은 몇 년 동안 훌륭하게 진행된 듯이 보였다 - 적어도 대학당국이 건설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방학 때 학생들이 학교를 비운 틈을 타서, 학교당국은 크롤을 해고하고 더 이상의 건설을 막았다 (Kroll 1984).
 

페미니즘적 설계

만일 여성이 RD&D에서 현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암시는, 여성들의 사회적 고립감을 가중시키고 힘든 무급(無給)의 가사노동을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주택의 설계와 도시 계획(urban layout)을 그 동안 줄기차게 비판해 왔던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Hayden 1984). 점점 더 많은 가정들이 '직장을 가진 남편에 의해 재정적으로 부양받는 아내와 아이들'이라는 통상의 규범에서 벗어남에 따라 이러한 비판은 더욱 날카로와져 왔다.

역사적으로 주어져 온 하나의 답변은, 만약 여성들이 설계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면 공용의 지역시설(탁아소, 빨래방, 취사장 같은)을 확충하고 가정과 직장, 상가, 공공시설 등을 서로 가까이 한자리에 모아 놓는 등의 결과를 일구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런던, 스톡홀름,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Providence, Rhode Island) 등의 지역에서 실제로 이러한 노력이 현실화되었다.

또다른 접근은 미술가이자 한때 혹사당해 온 어머니(former overworked-mother)였던 프랜시스 게이브(Frances GABe)에 의해 개척되었다. 그녀는 수십년간에 걸쳐 저절로 청소되는 주택(self-cleaning house)을 발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가베의 집에서는 접시가 찬장 속에서 세척되고, 옷은 옷장 속에서 세탁되며, 집의 다른 부분은 습기를 뿜은 후 더운 공기로 말림으로써 깨끗하게 청소된다!" (Zimmerman 1986).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컴퓨터 네트워크를 설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화된 여성들의 사무노동과 여성들의 필요에 둔감한 도시교통 네트워크, 그리고 여성들로부터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앗아가는 새로운 생식기술(reproductive technology)에 대해 대안적 접근을 추구해 왔다. 현재의 생식기술 - 다양한 불임 처치들과 대리모(surrogate mother), 자궁 척출, 유산 등 - 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요한 불만은 여성들이 의학적 R&D의 의제결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R&D의 결과로 말미암아, 피할 수 있었거나 다른 식으로 구조화될 수도 있었을 골치아픈 도덕적 딜레마들이 (남성들보다는 주로) 여성들에게 덮어씌워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정보초고속도로에 대한 장벽없는(barrier-free) 설계

지난 20년 동안,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고려하여 "장벽없는" 설비나 건물, 공공 공간을 설계하는 데 있어 상당한 혁신이 있었다. 이런 변화를 추동한 동력의 상당부분은 신체장애를 지닌 시민들 그 자체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재정의하고 주장하기 위해 힘을 결집하는 것에서부터, 설계상의 해법을 발명하고 또 평가하는 데 참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인쇄된 텍스트를 컴퓨터 합성된 목소리로 크게 읽어 주는 쿠르쯔바일 독서기(Kurzweil Reading Machine)는 150명이 넘는 시각장애자들에 의해 테스트를 받았다. 18개월에 걸친 시험 기간 동안 이 시험사용자들은 100개 이상의 제안을 내놓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만들어진 이 기기의 개량형 속에 통합되었다. 이는 국가정보기반(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NII)에 관련된 기술들이 어떻게 연구되고 설계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이다 - 주문형 비디오(video-on-demand)나 홈 쇼핑의 시장을 창출하기 위한 기술을 설계하는 최근의 노력들과는 안타깝게도 현저한 간격이 있긴 하지만.

물론 NII의 기술적 구조에 관해서 대규모의 설계 결정들(large-scale design decisions)도 내려져야만 한다; 이러한 결정들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기술적" 고려들은 미디어복합 거대기업들을 한 축으로, 그리고 공공기관들과 개인들을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이용자들 중에서 어느 쪽에 통신네트워크의 이용가능성이 더 많이 열리는가의 문제에 영향을 주는 편향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NII에 대한 계획이 이용자뿐 아니라 비이용자들의 필요 역시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주와 주 사이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시스템이 생긴 것이 모든 이들의 생활에 심대한 결과 - 상업과 도시 지리를 재조직하고, 오래된 이웃의 파괴에 일조하였으며, 공공 교통수단을 몰락시키고, 교외의 성장을 부추기는 등 - 를 가져은 것처럼, 미국 전역을 통신망으로 새로 조직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모든 이들의 생활을 바꾸어놓을 것인데, 그 속에는 환경 때문이건, 선택에 의해서건 간에 결코 컴퓨터를 쓰지 않을 수많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시된 몇몇을 포함한 많은 참여설계의 사례들은, 훨씬 더 넓은 범위의 대중들이 기술적 연구개발과 설계에 참여하도록 계획하는 것이 실현가능하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참여의 결과로 도출된 설계들은 이후의 기술적 선택에 있어서도 더 폭이 넓고 실질적으로 더 민주적인 가능성들을 제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투쟁 없이는 결코 민주적 기술정치에 다다를 수 없음을 인지해야만 할 것이다: 많은 참여설계의 실천들은 권력을 가진 기관들로부터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해 왔다 - 이 반발은 참여설계의 실천들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참여적 RD&D의 몇몇 주창자들은 종종 비참가자들의 물질적 이해관계라는 관점[즉,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인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하는 것]에만 의존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해 왔다. 또한 그들은 참여가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더 만족스러운 설계 결과를 얻어내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합리적인 것일 수 있으며, 종종 [참여를 유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RD&D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일종의 도덕적 권리의 문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 이 도덕적 권리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민주적인 자치, 그리고 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한 기술들의 창출 등의 과제들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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