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인류 절멸에 대한 강력한 경고
― <핵전략 사령부>
 
 

1945년 7월 미국에서는 최초의 원자폭탄 폭발실험이 성공했고, 그 해 8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미국은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비밀'을 유지해 이 무기를 자기만 독점하고자 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1949년에 소련이 원자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이런 희망은 깨어졌다. 이에 미국은 소련을 앞지르기 위해 1952년에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소련 역시 이에 지지 않고 1955년에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이로써 냉전 시기 미·소 두 강대국이 치열하게 전개한 핵무기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미·소 두 나라는 상대국에 대한 "미사일 격차(missile gap)"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핵무기를 경쟁적으로 양산해냈고, 그 결과 1960년대 초가 되면 이미 양국은 인류를 여러 번 멸망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주1)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핵에 대한 대중의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제 핵전쟁은 잘못 발생한 경보나 기계의 오작동, 인간의 실수 같은 사소한 요인들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고,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이는 곧 인류의 절멸을 의미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세계의 운명이 우연과 판단 착오,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64년에 개봉한 두 편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핵전략 사령부>는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해 만들어졌다.(주2) 이 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빌어 핵무기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것에 가깝다면, 유진 버딕과 하비 휠러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핵전략 사령부>는 훨씬 더 심각하고 직설적인 스타일로 정면돌파하는 쪽이었다.

미 공군은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인간에 의존하지 않도록 고안된 지휘통제 시스템을 개발해 실전 배치한다. 그러나 우연적인 사건들과 기기 오작동이 겹치면서 핵폭탄을 탑재한 공군 편대에 모스크바로 출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를 전해들은 미국 대통령(헨리 폰다)은 편대에 직접 연락해 명령을 취소하려 하지만, 정해진 명령 전달 방식만을 받아들이도록 훈련된 편대장(에드워드 빈스)은 이를 무시한다. 이들을 격추하려는 시도까지 했다가 실패해 다급해진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 서기장에게 전화를 걸어 협력을 요청한다. 전면 핵전쟁을 피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만약 러시아에서 자국 영토 방어에 실패해 모스크바에 핵탄두가 떨어지면 그 즉시 뉴욕에도 동일한 핵탄두를 투하하겠다고 약속한다. 불행히도 이 약속은 그대로 이행(!)되고 만다.

<핵전략 사령부>의 개봉 당시 미 공군에서는 영화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사건 ― 특히 공격 명령이 취소될 수 없다는 부분 ― 은 엄격한 안전 시스템 때문에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며 강하게 항의했다(영화의 맨 끝에 보면 미 국방부와 공군측의 이러한 해명 내용을 알리는 자막이 나온다).(주3) 그러나 특정한 장비나 구체적인 군사적 대응 절차를 정확하게 묘사했는가 여부를 기준으로 이 영화를 평가한다면 이는 핵심을 놓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지닌 설득력은 미-소간의 군비경쟁과 극한 대치상태가 불가피하게 내포한 핵전쟁의 불확실성과 위험을 '은유적인' 차원에서 보여준 데 있기 때문이다.(주4)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핵전략을 둘러싼 블랙 장군(댄 오헐리)과 그로테첼 교수(월터 매튜)간의 대립구도이다. 블랙은 인류 전체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핵전쟁에서 승자란 있을 수 없다며, 자동화된 무기 시스템에 의존하는 군사적 대치 상태의 완화와 군비경쟁의 중단을 주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1950년대의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이나 물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에서 옹호했던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반면 그로테첼은 전쟁이 여전히 사회적·정치적 분쟁의 유효한 해결책이며, 설사 핵전쟁이라 해도 '승자'와 '패자'는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냉정한 인물이다(그는 6천만명의 미국인이 사망하는 것이 '용인가능한' 최대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그는 핵전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핵무기를 비축함으로써 충분한 보복 능력을 갖춰 전쟁에 '대비'해야 하며 군비경쟁도 오히려 더욱 가속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마도 요즘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로테첼 같은 '정신나간' 사람이 설마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로테첼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존인물인 허먼 칸(Herman Kahn)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등장인물이다. 1960년대 초 랜드 연구소의 전략분석가였던 칸은 퍼그워시 회의의 군비경쟁 중단 호소를 "문외한의 견해"라고 일축하면서, '시스템 분석의 시각'에 입각해 핵전쟁의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제시했다. 그는 설사 미-소간 핵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단지' 4천만에서 8천만의 미국인이 사망할 뿐이며, 전쟁 후에 문명과 경제가 생존자들에 의해 빠르게 재건될 거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입장에 근거해 그는 미국이 적을 선제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역으로 소련측이 선제공격을 해올 경우 이에 보복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수소폭탄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는 이와 같은 전쟁 '대비'야말로 바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 ― 미친 짓이 아니라 ― 이었다.(주5) 이러한 논의는 냉전기에 핵무기의 존재로 인해 빚어진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사이의 전도(顚倒) 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핵전략 사령부>는 냉전이 끝난 현재의 시점에서 그 시효가 만료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실제로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군비 증강으로 인해 1990년대 초 6만 기까지 증가했던 미·소 양국의 핵탄두 수는 냉전 종식 이후 군비 축소에 힘입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보유국의 수는 1990년대 들어 오히려 증가하고 있으며, 아직 해체되지 않은 1만 기 이상의 핵무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쉽게 안심하지 못하게 만든다. 미국 본토를 이른바 '불량국가'들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미사일 방어(MD) 계획이 핵을 둘러싼 긴장관계를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고조시키고 있음이 지금의 현실이 아닌가.(주6) 핵을 둘러싼 긴장감과 위기가 극에 달했던 냉전 치하의 1960년대 초를 돌아보게 하는 <핵전략 사령부>의 현재적 의의는 아마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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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필렬, 「핵분열 발견과 원자폭탄 개발」,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창작과비평사, 1999), pp. 221-234.

2. 폴 보이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마크 C. 칸즈 외 지음, 『영화로 보는 새로운 역사 II』(소나무, 1998), pp. 160-165.

3.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기기 결함과 우연적 요소가 겹친 사건이 1960년 10월에 탄도미사일 조기경보 시스템(BMEWS)에서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다. 전송되어 온 레이더 신호를 분석한 컴퓨터 시스템이 북극을 넘어 미국으로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고 판독한 것이었다. 이에 전략 공군 사령부에서 레이더 기지에 확인을 요청했으나, 기지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첫 번째 메시지가 보내어진 직후에 해저 케이블이 때마침 끊어져 메시지 정정이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미 방공 사령관은 미사일 공격이 실제로 가해졌을 가능성이 너무 낮다고 생각했고, 대응 조치에 들어가기 전에 레이더 기지와 연락해 볼 것을 고집했다. 결국 그는 전화로 기지 사령관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위기는 해소되었다. BMEWS 컴퓨터는 달과 미사일을 혼동해 그런 판독 결과를 내놓았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Patricia S. Warrick, The Cybernetic Imagination in Science Fiction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1980), p. 122.

4. Paul Brians, Nuclear Holocausts: Atomic War in Fiction, 1895-1984 (Kent: Kent State University Press, 1987), pp. 27-28.

5. 홍성욱, 「1960년대 인간과 기계」, 이중원 외 엮음, 『인문학으로 과학읽기』(실천문학사, 2004), pp. 211-239.

6. 정욱식, 『미사일 방어체제 MD』(살림출판사, 2003).
 
 
 
 

출전: 『시민과학』 52호 (2004.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