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기술 속에 갇힌 과학기술자의 자화상
― <컨버세이션>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감시능력에 있어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다. 2차대전기에 발명된 전자식 컴퓨터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정부나 대기업의 업무에 도입되었고, 이는 정보의 저장과 검색 능력을 질적으로 바꿔놓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에는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이나 신용카드 결재를 통한 정보수집 같은 새로운 감시와 통제의 방법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추적 시스템(GPS)과 인터넷을 통한 감시가 일상화되었으며, DNA 지문 같은 생체정보를 이용한 감시 시스템도 확대일로에 있다.(주1) 이러한 감시 능력의 비약적 증대는 오늘날의 사회를 '감시사회(surveillance society)'로 특징짓는 사회과학 담론을 낳았고, 이와 함께 정보 프라이버시의 침해를 문제삼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태동시켰다.(주2)

감시사회와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근래에 만들어진 영화들 속에서도 곧잘 찾아볼 수 있다. <네트>(1995)나 <가타카>(1997),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인 예인데, 특히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CCTV와 위치추적 장치, 인공위성을 이용한 최첨단의 실시간 감시를 시각적으로 현란하게 재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오늘날의 감시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들은 감시기술을 극적 긴장을 위한 소재로 채용하고 있을 뿐, 오늘날의 감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고 있다. 음모의 거대함(?)과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야 장르영화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러나 감시에 쓰이는 첨단'기술'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상투적인 악당과 무기력하면서도 기지넘치는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도식 속에 지워 버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에 만들어진 <컨버세이션>이라는 영화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영화의 중심에는 일류 도청 전문가인 해리 콜(진 해크만)이 있다. 그는 '고객'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도청 업무를 수행한 후 테이프를 넘겨주고 돈을 받는 일종의 청부업자로서, 다양한 '첨단' 도청 장비를 직접 제작해 실제 상황에 응용하는 발명가 내지 엔지니어로서의 면모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는 특정한 회사나 (정부)기구 등과 거리를 두면서 '독립성'을 유지하려 애쓰며,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데 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콜이 맡은 일거리가 도청의 대상이 된 젊은 남녀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증거가 포착되고 이는 콜을 심각한 번민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사건을 막아보려는 콜의 무기력한 몸부림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그는 놀라운 반전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 콜은 자기 자신이 오히려 도청기술에 의해 감시를 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감시'기술'에 초점을 맞춰 <컨버세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도 십중팔구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1970년대 초는 정보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감시수단들이 이제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초창기였다.(주3) 따라서 여기 나오는 '첨단' 도청기술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색창연한 '골동품'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컨버세이션>은 바로 이 때문에, 마치 스스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란한 감시기술 그 자체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그것을 둘러싼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체 그러한 기술을 만들어내고 운용을 담당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왜 그런 일을 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는 어떤 사회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는가? <컨버세이션>은 도청 전문가의 내면 심리와 그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컨버세이션>은 도청 전문가를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도청 기술의 윤리와 그 속에 내재한 딜레마를 제기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해리 콜을 보자. 그는 자신이 개발한 도청 장비들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맡아 하는 일에 대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접근하려고 애쓴다. 도청 내용이나 도청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두거나 개입하려 하지 않고 '양질의' 녹음을 기술적으로 확보해 고객에게 제공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청 대상에 대해 '무관심'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일(대화 내용의 도청)과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결과(도청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한 살해 위협)을 서로 분리할 수 있으며, 따라서 후자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 본성상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기술 업무 ― 예컨대 군사 무기의 개발 같은 ― 에 종사하는 과학기술자의 자기정당화 논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학기술은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며, 과학기술자는 일정한 보수를 받고 (그것의 궁극적 용도와는 무관하게) 그 도구를 생산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주4) 그러나 불행히도 콜의 이러한 '직업 윤리'는 기술의 오용가능성에 대한 그의 죄의식을 덜어 주지 못한다. 그리고 편집증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콜의 노력은 그가 놀라운 기술적 전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 속에서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결국 <컨버세이션>의 플롯은 콜의 자기정당화 논리가 가진 허구성을 폭로하는 효과를 갖게 된다.

<컨버세이션>은 결말부의 상황 역전을 통해 콜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제 콜은 바로 자신이 종사하던 바로 그 전문직의 기술적 수단에 의해 도리어 감시를 당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숨겨져 있는 도청 장비를 찾아내려는 그의 편집증적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상투적인 격언을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장면에서 얻을 수 있는 더욱 중요한 교훈은 '기술적 정교함보다 그것을 둘러싼 권력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콜은 기술적 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조차도 권력의 감시를 피할 수는 없다. 15,000달러에 그의 전문성을 사들였던 바로 그 권력은, 다시 그를 감시하기 위한 또다른 전문성도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무기력하던 희생자가 기지를 발휘해 난공불락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새삼스런 깨달음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현실은 <네트>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가 아니라 <컨버세이션>에 더 가깝다는, 그런 깨달음 말이다.
 
 
 

endnote...
 

1. 홍성욱,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책세상, 2002).

2. David Lyon, Surveillance Society: Monitoring Everyday Life (Buckingham: Open University Press, 2001).

3. 영화에 잠시 나오는 '도청 박람회' 씬은 당시 막 개발된 CCTV를 비롯한 1970년대의 도청 장비들을 보여 주고 있다. 정보기술과 감시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흥미있는 볼거리가 될 듯.

4. 스티븐 골드만은 이 점에서 감독인 "코폴라가 엔지니어를 창녀에 빗대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Steven Goldman, "Images of Technology in Popular Films: Discussion and Filmography,"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14:3(1989): 275-301, 인용은 p. 280.
 
 
 
 

출전: 『시민과학』 53호 (20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