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적인, 너무나 60년대적인
― <A.I.>
 
 
 

SF영화들 중에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기계가 발전하면서 독자적인 사고와 의지를 갖게 되어 원래의 '주인'인 인간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는 설정을 가진 작품들이 많이 있다. 1960년대의 <알파빌>과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시작된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이후 상투적인 장르적 경향으로 굳어졌고, 오늘날에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에서 보듯 핵전쟁이나 가상현실 등과 연관되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있다. 이런 영화들의 근저에는 컴퓨터를 인간적인 것에 대한 '타자'나 '궁극의 기술적 괴물'로 파악하는 기술공포론(technophobism)적 시각이 깔려 있다.(주1) 1980년대 초에 스탠리 큐브릭이 처음 구상했다가 큐브릭 사후 스티븐 스필버그가 각본을 쓰고 감독해 만들어진 <A.I.>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 착안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영화이다.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해안가의 대도시들은 물 속에 잠기고, 재난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메카'라 불리는 로봇의 봉사에 의존하는 그리 머지 않은 미래. 로봇 생산회사인 사이버트로닉스의 하비 박사(윌리엄 허트)는 감정을 느끼고 부모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아이 로봇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을 개발한다. 데이빗은 불치병에 걸린 아이를 둔 부부의 집에 입양되지만, 죽었다고 생각한 아이가 살아 돌아온 후 부부에 의해 버려진다. 피노키오 동화가 진짜라고 굳게 믿게 된 데이빗은 메카 혐오주의자들에게 붙잡혔다가 파괴되는 것을 용케 모면한 후, 섹스 로봇인 지골로 조(주드 로)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진짜 아이'로 만들어 줄 푸른 요정을 찾아 '세상의 끝'으로 떠난다.

스필버그는 <A.I.>를 통해 다분히 거창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기계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계를 사랑할 수 있을까?" <A.I.>는 인간의 사랑을 얻으려 발버둥치는 기계와 매몰차고 이해타산적이며 잔인하기까지 한 인간의 모습을 줄곧 대비시키는 구성을 통해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다(특히 러닝타임의 초반 1/3은 대단히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도발'을 통해 이 영화는 사람들이 기계에 대해 품고 있는 뿌리깊은 거부감을 문제삼고, 이를 넘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감동적'이라고 생각한 관객이라면 이런 주장에 이미 절반쯤은 동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질문과 주장은 온당한 것일까? <A.I.>가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우선 그 전제부터가 너무나 낡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조금 거슬러올라가 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영국의 SF작가인 브라이언 앨디스가 1969년에 쓴 단편SF 「슈퍼장난감은 여름 내내 지속된다 Super-Toys Last All Summer Long」를 근간으로 삼고 있는데,(주2) 이 작품은 AI의 발전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1960년대식 낙관의 산물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군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초기 형태의 인공지능 기계들이 속속 개발되었고, 이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인간과 기계,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상당부분 흐릿하게 만들었다.(주3) 당시 일부 성급한 논자들은 이 둘이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앨디스 역시 <A.I.>의 개봉에 맞춰 쓴 칼럼에서, 자신도 한때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와 같이 작동하는 것이며, 꿈이란 아마도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일어나는 컴퓨터 다운로딩"일 거라고 생각했음을 고백하고 있다.(주4) 이런 맥락에 비추어 보면 1960년대에 독자적인 의지를 갖게 된 컴퓨터의 이미지가 대중문화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별반 놀라울 것이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사고와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의 출현이 머지않아 닥칠 거라는 일반대중의 기대 내지 우려와는 달리, 오늘날 AI 전문가들 중 그런 낙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감정을 지니고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으며 꿈을 꿀 수도 있는 기계? 사랑이나 꿈꾸기를 기계에 프로그램해 넣으려면 우선 그 현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일련의 규칙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지만, 과학자들은 아직 사랑이나 무의식의 실체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현재 AI 과학자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학습하고 문제를 푸는 능력,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의 구현과 같은 좀더 소박하고 실용적인 과제이다.(주5) 따라서 30년 전에 유행했던 생각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는 <A.I.>의 설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A.I.>가 던지는 질문 자체가 전혀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성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시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사람들이 기계에 대해 보이는 반감은 적어도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대단히 뿌리깊은 문제이다. 매즐리시는 기계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이 기계보다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는 사고방식, 즉 '네번째 불연속'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일찍이 역설한 바 있으며, 이는 <A.I.>의 문제의식과 서로 통한다.(주6) 그러나 (역시 1960년대식 낙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매즐리시의 생각은 다분히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SF적 미래상을 예견해 '존재론적 비약'을 과감하게 단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 사회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인간이 막을 수 없는 내적인 발전 논리를 갖는다는 '기술의 물신화'를 타파하는 것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주7) 결국 <A.I.>가 지닌 의미는 도발적인 주제의식("기계를 사랑하자")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된 맥락("왜 인간은 기계에 대해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는가?")을 성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endnote...
 

1. Anton Karl Kozlovic, "Technophobic Themes in Pre-1990 Computer Films," Science as Culture, 12 (2003): 341-373.

2. 앨디스의 단편소설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해 부부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누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는 매주 추첨으로 결정된다). 주인공 부부는 '대체물'로 로봇 아이를 '입양'해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지만 부인과 아이는 계속해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후 운좋게 '부모 로또'에 당첨된 부부가 자기 아이를 갖기로 하면서 로봇 아이를 어떻게 처분할지를 놓고 고심한다는 내용이다.

3. 홍성욱, 「1960년대 인간과 기계」, 이중원 외 엮음, 『인문학으로 과학읽기』(실천문학사, 2004), pp. 211-239.

4. Brian Aldiss, "Like Human, Life Machine," New Scientist, no. 2308 (15 September 2001).

5. Farhad Manjoo, "The Truth behind A.I." Wired News (2 July 2001).

6. 브루스 매즐리시, 『네번째 불연속』(사이언스북스, 2001). 이 책의 원저는 1993년에 출간되었으나 핵심 주장은 그보다 26년 전에 발표된 동명의 짧은 논문에서 제시된 바 있다. Bruce Mazlish, "The Fourth Discontinuity," Technology and Culture, 8 (1967): 1-15.

7. 김명진, 「흥미로운 문제제기, 빗나간 대안」, ≪서평문화≫ 43집 (2001년 가을호).
 
 
 
 

출전: 『시민과학』 59호 (2006.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