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모두 26화에 이르는 TV판과 이를 압축·요약한 1시간짜리 극장판('Death'), 그리고 TV판의 25, 26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엔딩을 담은 100분짜리 새로운 극장판('에반게리온의 종말')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그에 대한 여러 갈래의 접근을 가능하게끔 하는 다면적·다층적인 '텍스트'이다. 이미 <에반게리온>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제출된 바 있다. 예컨대 그것이 인용한 방대한 참고문헌과 영화들의 목록을 추적하는 계보학적 접근, 안노 히데야키와 가이낙스(GAINAX)가 어떤 비전을 갖고 있었는지를 중시하는 작가주의적 접근, 일본 애니메이션史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주목하는 장르론적 접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을 둘러싼 여러 가지 '컨텍스트', 즉 그것이 위치지워질 수 있는 맥락들 역시 텍스트 그 자체만큼이나 흥미로우며 이에 대한 해석들 역시 다양할 수 있다. 일본에서, 그리고 다소의 시차는 있지만 한국에서도, 가히 '에반게리온 현상'이라고 불러도 무방함직한 열광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고, 또한 그것이 동시대의 '시대정신'에 내포하는 의미를 분석하려는 징후적 독해의 시도 역시 있었다.

나는 이 글에서 이 모두를 다루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분석들에서 빠뜨리고 넘어갔거나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몇 가지 지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를 해볼까 한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에반게리온>이라는 텍스트 '그 자체'보다는 (특히 수용의 맥락에서) 그 텍스트가 위치지워지는 상황들에 좀더 관심이 있다. 나는 <에반게리온>의 충격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계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보다는 그것을 봄으로써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혹은 그렇지 못할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으며, <에반게리온>을 만든 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영화 속에 투영되었는가보다는 한국에서 화질도 안좋은 불법복사 테이프로 <에반게리온>을 보는 이들의 생각이나 욕망, 세계관 등이 어떻게 스크린과 상호작용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관심을 지닌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풀어볼 생각이고, 이를 통해 <에반게리온>을 이미 보았을 사람들과 교감 내지는 대화를 나누었으면 한다.
 

Ⅱ.

본격적인 얘기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워밍업격으로 TV판 총 26화의 내용을 복습해 보자. 이 중에서 25-26화는 나중에 대안적인 엔딩이 될 만한 극장판('에반게리온의 종말')이 새로 나왔고, 또 이전까지의 극의 흐름과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라고 생각되기에 일단 제외하고 1-24화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리뷰해 보겠다.

나는 전체를 1-4/5-6(7)/8-13/14-20/21-24의 다섯 부분으로 임의로 나누었다. 첫번째 부분(1-4화)에서는 주로 사도의 등장과 이에 맞서는 1호기의 조종사인 신지의 내면적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두번째 부분(5-6화)에서는 0호기의 조종사인 레이가 신지와 함께 극의 전면으로 부상함과 동시에 극적인 전투씬으로 전반부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세번째 부분에서는 2호기의 조종사인 아스카가 처음 등장하며, 이에 따라 극의 분위기는 일순 가벼워지면서 학원명랑만화의 컨벤션을 일부 빌려 진행된다. 이 부분은 매 편이 각각 독립된 에피소드로 되어 있으며, 다소 구태의연한(?) 사도들의 등장으로 전반부에서 충일했던 긴장감은 다소 이완된다. 네번째 부 분의 시작인 14화에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수수께끼를 제시함으로써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이어지는 16화부터 20화까지는 다시금 긴장감의 수위가 증가하면서 18-19화에서 두번째의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등장인물들의 내면갈등이 점점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것도 여기쯤에서부터이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부분에서는 수수께끼의 일부분이 해결되면서, 분위기는 이제 긴장감보다는 종말을 암시하는 암울함으로 치닫는다. 주요 등장인물들 중 상당수의 운명이 (완전하게까지는 아니지만) 결정되고, 24화를 마지막으로 극을 이끌어 왔던 대사도 전투는 끝을 맺는다.

이상의 짧은 리뷰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에반게리온> TV판은 하나의 리듬을 타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그런 초지일관한 텍스트는 아니다. 그 속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으며, 오르막과 내리막, 긴장과 이완이 번갈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에반게리온>은 수수께끼에 대한 몇 가지 단서나 언급들을 곳곳에 삽입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테마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Ⅲ.

이제 본론으로 슬슬 들어가도 될 듯하다. 나는 '에반게리온 현상'에서 출발하여 <에반게리온>이라는 '텍스트'와 이를 둘러싼 '컨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을 따져묻는 것으로 얘기를 풀어나가 보려 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이렇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에반게리온>에 열광하는가, 혹은, <에반게리온>은 어떤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속도 편하다. <에반게리온>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지금까지 일본 상업애니메이션의 집대성이자 최고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으며 사실 이것만으로도 <에반게리온>이 누리는 인기 중 상당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에반게리온>의 작화수준은 TV상영을 전제로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최고의 수준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공중파를 타는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드물게 실험성과 상업성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며(특히 25, 26화의 심난함이라니), 기술적 완결성에서도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내용면에서 보더라도, <에반게리온>이 차용, 병합한 장르(학원만화의 관습, 미소녀형 캐릭터의 등장, 로봇메카닉과 격렬한 전투씬들)나 작품(<기동전사 건담>, <강식장갑 가이버>...)의 수에서 볼 때 이는 하나의 종합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요소들은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에서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도록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Ⅳ.

그러나 이런 점은 이미 누차 지적되었던 것들이다.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뭐가 더 있을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에반게리온>이 내포하고 있는 '지적 퍼즐'로서의 요소이다. 매주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이 다음 편에 대한 궁금함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는 것이야 상식이겠지만, <에반게리온>은 그것을 교묘한 수수께끼의 형태로 매 편마다 조금씩 배치하고 의문을 점차 키워간다. 예컨대, 'AT 필드', '사해문서(死海文書)', '인류보완계획', '세컨드 임팩트', '롱기누스의 창', '아담', '릴리스' 등과 같이 심리학, 성서, 비교(秘敎)적 전통 등을 그 배경으로 하는 어휘들이 아무런 맥락 설명 없이 곳곳에서 돌출적으로 사용되며, 이에 대한 해명은 부분적·간접적으로만 조금씩 주어지거나 극이 끝날 때까지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극 전체에 대한 해석의 많은 부분은 시청자들의 몫으로 남겨지며, 이들 중 상당수는 마치 조각그림맞추기와 같은 퍼즐풀기에 몰입하게 된다.

또한, 이런 난해한 개념어들을 제외하더라도 극의 곳곳에 숨어 있는 시각적 상징들과 종종 아주 짧게 제시되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장면들(예컨대 20화를 보면 1/8초에 해당하는 3프레임짜리 인서트 장면이 있는데 이는 신지의 과거 기억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은 역시 궁금함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듯한 지적 만족감을 제공해 준다.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에반게리온>은 그냥 한 번 보는 것으로서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LD 플레이어에서 조그셔틀을 돌리며 수십 번을 꼼꼼이 뜯어볼 소위 매니아들을 위해서도 풍성한 만찬(!)을 곳곳에 숨겨 놓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에반게리온>의 열성적인 팬들의 존재와 인터넷상에 떠 있는 수백개의 웹사이트들의 존재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Ⅴ.

하지만 좀더 심층적인 이유는 그보다는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만약에 <에반게리온>의 '정교함'보다는 그것이 바탕에 깔고 있는 '분위기'나 '정서'에 깊이 공감하면서 그것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세계를 보는 하나의 관점'으로서의 <에반게리온>을 다루고 있는 셈이 된다. 이것이 '세계관'의 문제로 비화하는 이유는, 우리가 <에반게리온>의 정서에 깊이 공감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우리가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즉, 그들이 맞부딪치는 세상)이나 그들이 갖는 정서에 공감함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고, 나아가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있을 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대입해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에반게리온>이 바탕에 깔고 있는 세상에 대한 관점, 바꿔말해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들이 맞서 싸워야만 하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조리, 불가해, 억압으로 특징지워지는 모습이다. 등장인물들, 특히 에바의 조종사들(레이, 신지, 아스카)은 영문도 모른 채 에바에 탑승해서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인 채로 정체도 모를 적에 맞서 싸운다. 이들은 끊임없이 "내가 왜 여기 타고 있지?"라고 자문하지만 답을 찾지 못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마음 속의 상처(레이-'클론'으로서의 정체성의 위기, 신지-외디푸스 컴플렉스, 아스카-어머니의 정신이상·자살과 엘리트의식)를 각각 안고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이란 자신들이 아무리 발버둥쳐서 노력해 봐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것으로 주어진다. 여타의 등장인물들, 사령관 이카리, 작전담당 미사토, 컴퓨터 담당 리츠코와 마야, 3호기 조종사 토지 등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영화는 세련된 실존주의적 색채를 띠며, 그 정서에 공감하는 이들에게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Ⅵ.

그러면 그런 부조리함과 불가해함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한번 물어보자. 물론 실존주의 철학에서 이 물음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건 그냥 '존재하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는 무언가에 무슨 근원이 있겠는가. 또 설사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한들, 이미 어떤 상황 속에 내던져진 인간에게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공감의 차원을 잠시 유보하고 이 물음을 밀어붙여 볼 생각이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해 나름대로 답도 갖고 있고, 그것이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등장인물들을 극한적인 상황까지 몰아가는 부조리함과 불가해함이, 시스템화·거대화된 과학기술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불확실성·예측불가능성·통제불가능성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답은 못되겠지만 최소한 부분적으로 설득력있는 답은 된다고 나는 본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뿌리를 알 수 없는 공포감은 외부로부터의 적, 즉 사도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부로부터, 즉 그들 스스로가 건조해 낸 에반게리온 로보트들, 마기 컴퓨터, 제3신도쿄시 등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포감은 인간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믿음,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완전히 이해하고 이를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오만에 그 근원을 갖고 있고, 이러한 믿음이 붕괴하는 과정을 통해 격화된다. 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작동을 예측할 수도 없으며 이유없이 종종 미친 듯이 날뛰는 과학기술, 그것이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들에게 부조리한 상황을 가져오는 원인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내가 『연세과학』 최근호에 기고한 글을 참고해 주길).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은 대형기술사고가 예고없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사람들이 피조물로부터의 소외를 느끼며, 위험의 분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위험사회'에도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다.
 

Ⅶ.

대충 큰 얘기들은 끝난 것 같다. 지금까지 난 '에반게리온 현상'의 원인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높은 기술적 성취도, 장르복합성, 지적 퍼즐이 안겨주는 즐거움, (과학기술의 내재적 본질에서 부분적으로 비롯하는) 실존주의적 색채에 대한 공감 등을 그에 대한 답으로 제시했다. 어떤가? 이정도면 충분한(?) 답이 되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찜찜한 느낌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사실 처음에 하고싶었던 얘기를 끄집어내 볼까 싶다. 그건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에반게리온>에 관한 것이다.

사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에반게리온>을 왜 다들 보는지를 설명하는 것에는 앞서 들었던 것과 같은 거창한 이유들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한마디로 말해, <에반게리온>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빠져 있는 '뭔가'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충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빠져 있는 그 '무엇'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을 들라면,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엔터테인먼트', 즉 재미가 될 터이다. 쉽게말해, <에반게리온>은 뭐 이거저거 따져가면서 골치아프게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물론 '재미'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왜 그것이 재미있는지, 또 사람들이 왜 일상적으로 재미를 찾아 헤매는지를 말하려면 다시 다른 경로를 거쳐 와야겠지만.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다시금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왜 다들 <에반게리온>을 보는가?' 라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거시적인 차원의 답이자 가장 컨텍스트-의존적인 답은, '가상공간에서의 엔터테인먼트를 찾아 헤매게끔 현실공간 속에서의 사람들의 일상이 지겹고 팍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을 보는 이들이 현실공간 속에서의 자신의 무의식적인 기대와 욕망과 좌절을 스크린에 투사하면서 텍스트의 요소들과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제 <에반게리온>을 보고 나서, 또 그것에 숨겨진 요소들에 대한 해석들을 읽고 나서, 우리에게 남은 해야 할 일은 <에반게리온>과 그에 대한 비평글을 보는 자신마저도 대상화시키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에반게리온>을 '보고' 또 '읽으면서' 그 결과물을 통해 현실의 일부를 들여다보았다면, 그 다음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에반게리온>을 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볼 일이다. 왜 에반게리온은 재밌을까, 내지는 나는 왜 <에반게리온>을 보러 온 것일까, 라고 말이다. 그런 자기성찰적인 과정은 자신의 삶의 과정 속에 빠진 요소가 무엇인지, 또 그 빠진 요소를 메워주는 텍스트 속의 요소들은 무엇인지를 밝혀 줄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런 경험으로부터의 추상을 통해 '에반게리온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야말로 <에반게리온> 보기 및 읽기를 가장 적절하게 맺음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