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윤리의 쟁점과 법제도적 현황

연구윤리의 쟁점과 법적·제도적 현황

1. 배경

오늘날 과학기술이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로 커짐에 따라 과학 연구의 윤리성에 대한 고려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 활동의 규모가 급격하게 커지고 과학이라는 사회적 제도의 작동방식이 복잡해지면서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새로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 활동의 결과물은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소유한 전략적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와 나란히 과학 활동의 상업화가 급격하게 진전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과학계 내부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구 내용을 조작하는 등의 행위를 일컫는 '연구 부정행위(research misconduct)'를 극소수의 '일탈적' 과학자의 소행으로 돌리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연구 부정행위의 증가 추세는 많은 국가들에서 과학 연구에 엄청난 국민 세금을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아울러 과학 연구가 산출해 낸 결과물들이 군사무기, 환경오염 같은 형태로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유전자 재조합이나 동물 연구, 인체 실험, 배아 연구와 같은 과학 연구의 기법들이 일반 시민들의 윤리적 우려를 부추기게 되면서 과학 연구의 윤리성은 전례없이 중요해졌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는 좁게는 연구 부정행위의 고발과 조사, 좀더 넓게는 윤리적 과학 연구의 촉진을 담당하는 제도적 장치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연구윤리(research integrity)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의 여러 국가들은 20여년 전부터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제도 마련에 힘을 쏟아 왔으며, 미국,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독일, 영국 등의 국가들은 상당히 잘 확립된 연구윤리 제도를 이미 갖추고 있다. 그러나 최근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 잘 드러났듯이, 한국의 경우에는 연구 부정행위의 고발과 조사를 담당하는 기구는 물론이고 정책과 지침마저도 존재하지 않으며, 연구윤리에 대한 교육과 훈련 등을 통해 윤리적 과학 연구를 장려하는 풍토 역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이번 논문조작 사건의 진행은 임시방편적인 대응의 연속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과학계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도 엄청난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제 황 교수 사건의 전개과정을 교훈삼아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대응과 윤리적 과학 연구의 촉진을 제도적으로 추진해 나갈 시점이 되었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먼저 2절에서 '연구윤리'라는 이름으로 포괄될 수 있는 다양한 쟁점들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눠 간단히 살펴보고, 연구 부정행위, 책임있는 연구 수행, 훌륭한 연구 실천 등의 용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본다. 이어 3절에서는 몇몇 서구 국가들에서 연구윤리 제도가 자리잡게 되는 역사적 배경과 제도적 현황에 대해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이러한 서구의 경험이 현재 한국의 상황에 어떠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연구윤리의 쟁점들

현재 한국에서 윤리적 과학 연구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 매우 부족하며, 그나마 다양한 쟁점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지 못하다(김명진, 2002). 이 때문에 '연구윤리'라는 말 속에 어떤 쟁점들이 포괄될 수 있는지에 대해 모종의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바, 이는 앞으로의 서술에 혼란을 빚을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되므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연구윤리의 주요 쟁점들에 관해 간략히 소개를 해보기로 한다. 외국의 관련 문헌을 참조해 정리해 보면, 연구윤리 문제는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Friedman, 1996; Resnik, 1998; Shamoo and Resnik, 2003).

1) 연구수행 과정

문제의 정의, 문헌조사, 가설 설정, 실험 설계, 데이터의 수집과 기록, 데이터의 분석, 결과 발표에 이르는 연구 수행의 전 과정에서 연구자는 객관성의 확보와 편향의 회피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실험에서 도출된 원 데이터(raw data)를 일정 기간 이상 충실히 보관해 두는 것과 데이터의 분석에서 통계기법을 오용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 과학 연구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연구 과정에서는 부주의나 자기기만(self-deception)으로 인해 오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는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서는 과학계 내부의 경쟁이 심해지고 과학의 상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논문발표에 대한 중압감(이른바 "publish or perish" 신드롬)과 이해관계 충돌(conflicts of interest)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이 때문에 논문 발표시에 연구자가 갖는 이해관계 충돌을 공개하는 것이 학술지들의 일반적인 요구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데이터(혹은 이론 틀)를 날조, 변조 내지 표절하는 것과 같은 연구 부정행위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주1) 2002년에 미국 벨 연구소에서 터진 얀 헨드릭 쇤(Jan Hendrik Sch?n)의 부정행위 사건은 그간 생의학(biomedicine) 분야의 문제로 치부되어 온 연구 부정행위가 물리학과 같은 이른바 '하드 사이언스(hard science)'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과학계에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2) 논문 발표

동료심사(peer review)를 거쳐 학술지에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과학 활동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이다. 논문을 발표할 때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저자 표시를 허용하고, 실질적인 기여 정도에 따라 저자의 순서를 정함으로써 공로(credit)를 합당하게 배분해야 한다. 특히 연구의 대부분을 수행한 대학원생이나 박사후 연구원(post-doc) 등 젊은 연구자들에게 저자 표시에서 우선권을 주어 정당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않은 원로 과학자나 연구소장 등을 저자로 기재하는 이른바 '명예 저자 표시(honorary authorship)'는 한때 당연시된 관행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단히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연구 부정행위에서 조작 당사자가 논문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편으로 많이 활용함으로써 문제점이 크게 부각된 바 있다.

동료심사 과정에서는 학술지 편집자나 심사자가 논문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한편, 과학자가 동료심사를 거치지 않은 연구성과를 논문이 아닌 기자회견 등을 통해 발표해 대중적 명성과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는 나쁜 관행이 최근들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3) 실험실 생활

과학 연구의 과정은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실험실 내지 연구소에서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는 것을 중요한 일부로 포함하게 되는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이 제기된다. 이 중에는 사회 일반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문제가 과학계에 단순히 투영된 것도 있고, 과학계에서 특히 첨예하게 부각되는 문제도 있다.

실험실에서 지도교수(mentor)는 학생(mentee)을 이용가능한 노동력으로만 보지 말고 적절한 지도(mentoring)를 해주어야 한다. 또한 여성을 비롯한 소수집단의 과학 참여를 가로막는 원인 중 하나인 실험실 내에서의 괴롭힘(harassment)을 근절해야 한다. 아울러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내부고발자(whistleblower)를 보호하는 조치를 강구해야 하고, 연구원의 채용 및 고용에 있어 형평성을 유지해야 하며, 자원(연구비 및 실험재료 등) 배분을 공평하게 해야 한다.

4) 생의학 분야: 인체실험, 동물실험, 생명공학

생물학, 의학, 심리학 등의 특정 분야에 주로 적용되는 문제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는 인체대상 실험과 동물실험의 윤리이다. 전자는 그것이 사회적·윤리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연구인지, 그리고 피실험자의 인지된 동의(informed consent)가 적절한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는지가 중요한 쟁점이며, 후자는 실험동물에 대한 주의와 배려가 충분히 기울여졌는지가 중요한 쟁점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해 다양한 윤리적 쟁점들(인간배아복제, 유전자치료, 인간유전자 특허, 인간유전정보 이용 및 프라이버시 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5) 사회적 책임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은 연구윤리라기보다는 전문직 윤리(professional ethics)에 더 가깝지만 이 두 영역은 경우에 따라 서로 겹치기도 한다. 몇 가지 쟁점들이 있는데 ▲ 공공자금을 이용한 연구에서 연구비를 애초 정해졌던 용도대로 적절히 이용했는지의 문제 ▲ 공공성과 생명존중에 반하는 산업연구나 군사연구에 종사하는 과학자의 윤리 문제 ▲ 과학자들이 사회 전체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에 관해 책임있는 발언을 하고 외부에 독립적인 조언을 제공할 책임에 관한 문제 등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 중 좁은 의미의 연구 부정행위는 1)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다음 절에서 밝힐 바와 같이 국가에 따라서는 2)나 3)까지도 부정행위의 범위에 집어넣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연구 부정행위의 고발 및 조사와 같은 소극적 활동에서 연구윤리 교육·훈련을 통한 부정행위의 예방과 윤리적 과학 연구의 장려라는 적극적 활동으로 각국의 연구윤리 기구들이 활동의 중심축을 옮기면서 위의 1)∼4)를 뭉뚱그려 책임있는 연구 수행(responsible conduct of research, RCR) 혹은 훌륭한 연구 실천(good research practice, GRP)이라고 부르며 지향점으로 삼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 중 RCR은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이고 GRP는 유럽 쪽에서 주로 쓰이는 표현이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상당히 유사하다.

3. 외국의 연구윤리 제도

서구의 여러 국가들은 1980년대부터 연구윤리의 여러 쟁점들을 다루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 절에서는 연구 부정행위를 다루고 책임있는 연구 수행(혹은 훌륭한 연구 실천)을 촉진하는 제도적 장치에 초점을 맞춰 서구 연구윤리 제도의 역사와 현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서구 국가들은 대체로 해당 국가에서 과학자들과 일반대중에게 큰 충격을 안긴 대형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연구윤리와 관련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나서게 되었다. 나라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초기에는 과학자들이 연구의 자유와 과학자사회의 자율규제를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제도 마련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태도는 연구윤리 관련 제도의 도입을 늦추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구 부정행위에 관한 인식이 극소수의 '정신나간' 과학자들이나 저지르는 병리적 행동이라는 것에서 과학 활동의 환경 변화가 수반한 일반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으로 점차 옮겨가면서 제도의 도입이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제도는 국가마다 ▲ 연구 부정행위의 정의 ▲ 부정행위 조사의 주체 ▲ 포괄적인 국가기구나 관련 지침의 존재 여부 등을 놓고 상당한 차별점을 보인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최근 들어서는 연구 부정행위의 고발 및 조사와 같은 사후적 활동보다는 연구윤리에 대한 교육 및 훈련과 같은 예방적 활동으로 방향이 전환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이제 몇몇 국가들의 연구윤리 제도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1) 미국

미국은 연구 부정행위를 문제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공식적 대응에 가장 먼저 나선 국가이며, 연구윤리 교육과 훈련의 제도적 정착에서 가장 앞서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러한 제도적 틀이 자리잡는 데는 상당한 진통과 시행착오가 수반되었고, 20여년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거친 끝에야 오늘날과 같은 연구윤리 제도가 확립되었다.

미국에서 연구 부정행위와 윤리적인 연구 실천이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저명한 연구자와 권위있는 학술지, 유수한 연구기관들이 다수 개입된 여러 건의 대형 부정행위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왔고, 이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뉴욕 타임즈> 기자 윌리엄 브로드와 니콜라스 웨이드가 1983년에 내놓은 『진리의 배신자들 Betrayers of the Truth』(국내에는 『배신의 과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었다)이라는 책은 연구 부정행위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그 심각성을 고발해 대중의 경각심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대응해 미 의회는 1981년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앨 고어(Al Gore)를 중심으로 의회 청문회를 주최해 연구 부정행위 고발에 대응하는 제도적 절차가 미흡함을 확인했고, 1985년 이후에는 하원의원인 존 딘젤(John Dingell)의 주관 하에 일련의 청문회를 열어 연구 부정행위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했다(Steneck, 1999; Lafollette, 1996).

대중과 의회의 움직임에 대해 연방 정부는 1985년 보건연구확대법(Health Research Extension Act)를 제정해 대응했다. 이 법은 보건복지부 산하 8개 기관을 포괄하는 공공보건처(Public Health Service, PHS)에 적용되는 것으로, 부정행위 사례를 다룰 때 보건복지부가 해야 하는 역할과 PHS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연구기관들이 해야 하는 역할을 규정했다. 연구기관들은 부정행위 고발을 조사하는 행정 절차를 마련하고, 그러한 고발이 근거있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 이를 보건복지부에 보고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PHS 산하 기관인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 원장은 연구기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그러한 부정행위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내리도록 했다. 이 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PHS의 부정행위 고발 조사의 기본 원칙을 제시해 주었다. 즉, 부정행위 고발에 대한 조사와 보고의 일차적인 책임은 해당 연구기관이 지고 연구비 지원기구는 그러한 보고내용을 검토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Pascal, 1999). 한편 보건복지부와는 별개로 미국 내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은 1987년 자체 규정을 제정해 NSF 산하에 있으면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감찰국(Office of Inspector General)이 부정행위에 대응하는 행정 절차를 만들어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Steneck, 1999).

1989년에는 보건연구확대법의 요구조건 이행을 위한 연방 규정(42 C.F.R. Part 50, Subpart A)이 제정되어 PHS 연구비를 받는 연구기관의 의무가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이 규정에 따라 부정행위 대응을 위한 두 개의 연방 기구가 생겼는데, 과학윤리국(Office of Scientific Integrity, OSI)은 NIH 산하에, 과학윤리검토국(Office of Scientific Integrity Review, OSIR)은 보건차관(Assistant Secretaty of Health)실 산하에 각각 만들어졌다. 또한 이 규정은 연구 부정행위를 "연구를 제안하고 수행하고 보고하는 과정에서의 날조, 변조, 표절, 그리고 과학자사회 내에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부터 심각하게 빗나가는 여타의 실행들"이라고 공식 정의했고, "여기에 정직한 오류나 데이터의 해석 내지 판단에 있어서의 정직한 차이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Shamoo and Resnik, 2003: pp. 98-99).

그러나 연구비 지원을 담당하는 NIH가 규제 업무까지 맡는 것은 이해관계 충돌을 낳는다는 비판이 이내 제기되었고, 과학자들로만 구성된 OSI가 일부 부정행위 조사에서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1992년에는 이 두 기관이 통합해 보건차관실 산하에 연구윤리국(Office of Research Integrity, ORI)이 새롭게 태어났다. ORI는 연구기관이 부정행위 고발과 관련해 적절한 정책과 지침을 갖추고 있는지를 감독하고, 연구기관에서 보내온 조사 보고서를 검토해 적절한 행정조치를 권고하며, 필요한 경우 자체적인 조사를 수행하기도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Shamoo and Resnik, 2003: p. 99). 이를 위해 ORI는 부정행위 조사와 관련된 다양한 표준 절차와 지침을 제정했다. ORI는 부정행위 의혹을 받은 과학자가 조사결과에 불만을 가진 경우 이를 보건복지부 항소위원회(Department Appeal Board, DAB)에 제기할 수 있게 함으로써 피고발자에게 "정당한 조사 절차(due process)"가 그간 보장되지 못했다는 과학계의 비판을 수용했다(Pascal, 1999).

ORI는 1999년부터 보건복지부 자문단의 권고에 따라, 조직의 주요 역할과 임무를 부정행위 고발을 조사하고 감독하는 것에서 연구윤리를 증진시키고 연구 부정행위를 예방하는 것으로 이전시켰다.(주2) 이에 따라 ORI는 책임있는 연구 수행(RCR)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장려하고, 부정행위의 빈도와 발생 원인, 예방책 등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ORI는 2000년에 PHS의 연구비를 받는 모든 연구기관이 연구 종사자들에게 RCR의 교육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하는 규칙안을 만들었으나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현재 보류된 상태이다. 그러나 ORI는 자체 홈페이지에 RCR 교육에 쓸 수 있는 학습자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2003년에는 『책임있는 연구 수행 입문서 Introduction to the Responsible Conduct of Research』라는 교육용 책자를 발간하는 등 지원 업무는 계속하고 있다.

한편 ORI의 조직개편과 함께 생겨난 연구윤리위원회(Commission on Research Integrity)는 1995년에 『연구에서의 윤리성과 부정행위 Integrity and Misconduct in Research』라는 보고서를 내어 새로운 부정행위의 정의와 내부고발자 권리장전을 포함한 33개항의 권고안을 제시했다. 이를 검토한 보건복지부 실무그룹은 1996년 보건복지부와 NSF를 포함한 연방기구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부정행위의 정의를 마련하라는 권고안을 제출했다(Pascal, 1999). 1999년에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은 기존의 규정에서 "여타의 실행들" 구절을 빼고 "날조, 변조, 표절"만을 연구 부정행위로 간주하는 새로운 정의를 제안하고, 연방정부 소속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모든 기구들이 연구 부정행위에 대응하는 자체 절차를 마련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그간 생의학 분야 위주이던 연구 부정행위 관련 제도가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모든 연구로 확대되었다. 보건복지부는 2005년 6월에 기존의 규정을 대체하는 새로운 연방 규정(42 C.F.R. Part 93)을 발표했고, NSF, 교통부(DOT), 노동부(DOL), 환경청(EPA), 항공우주국(NASA), 보훈부(VA), 에너지부(DOE) 등의 기구들이 관련 규정을 개정하거나 새로 마련했으며, 여타 부처들은 현재 초안에 대한 내부 검토를 거치고 있다.

2) 북유럽 국가들

미국에 이어 국가 차원의 연구윤리 관련 제도를 정비한 곳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 인근에 위치한 네 국가 ―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 이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제도화를 이룬 것은 덴마크이며, 다른 세 나라는 덴마크로부터 영향을 받아 차례로 제도 마련에 나섰다. 네 국가의 연구윤리 기구는 정기적으로 공동 학술회의를 갖고 경험을 교환하는 등 교류가 활발한 편이지만, 부정행위의 정의, 부정행위 조사의 주체, 조사대상 분야의 범위 등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미국에 비해 부정행위 ― 이들 국가는 부정행위(misconduct) 대신 부정직성(dishonesty)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 를 넓게 정의하고 있다. 조사대상 범위에 있어 처음에는 핀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의학 분야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1999년부터는 덴마크가 조사대상을 모든 연구분야로 확대하였고, 노르웨이도 유사한 제도 변화를 추진중이다(Nylenna et al., 1999; DCSD Annual Report 2001: pp. 10-11).(주3)

덴마크에서는 덴마크 의학연구재단이 1992년에 발간한 『과학 부정직성과 훌륭한 임상적 실천』이라는 보고서가 제도 마련에 있어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서 발생한 여덟 건의 널리 알려진 부정행위 사례들을 열거한 후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 잘 확립된 절차의 부재가 부정행위 사건의 발생에 일조했다고 썼다. 이어 이 보고서는 임상연구의 윤리와 이해관계 충돌을 다루는 새로운 지침의 마련과 함께 부정행위 고발을 조사할 국가위원회의 창설을 권고했다(Nature, 358, 446; 1992). 이러한 권고에 기반해 1992년 11월에 덴마크 과학 부정직성 위원회(Denmark Commttee(s) on Scientific Dishonesty, DCSD)가 만들어졌다. DCSD는 애초에 의학 분야의 부정직성 문제만을 다루는 기구로 설립되었지만, 1999년 1월부터 보건·의학, 자연과학·공학, 문화·사회과학을 다루는 3개의 소위원회가 생겨나 과학 연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게 되었다. DCSD는 연구비를 어디에서 받았건 상관없이 덴마크 내에서 발표되었거나 덴마크에서 고용된(혹은 덴마크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이 수행한 모든 연구를 대상으로 한다.(주4)

덴마크의 경험은 다른 세 나라의 연구윤리 제도 설립을 자극했다. 노르웨이에서는 덴마크의 1992년 보고서에 기반해 노르웨이 의학연구재단이 1994년 11월 보건연구에서의 부정직성에 관한 국가위원회를 만들었다. 핀란드는 1991년에 모든 과학 분야를 포괄하는 국가연구윤리자문위원회를 만들었으나 초기에는 부정직성 사건을 다루지 않다가 1994년부터 부정행위 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1996년에 의학연구재단 산하 연구윤리위원회가 의학 연구에서의 부정직성을 조사하는 국가 전문가그룹을 둘 것을 제안해 1997년 1월에 전문가위원회가 만들어졌다(Nylenna et al., 1999).(주5) 이들 중에서는 덴마크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며 다른 국가들을 선도하고 있다.

북유럽 국가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연구 부정행위를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상당히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가령 1999년에 개정된 DCSD의 부정직성 정의는 "과학적 메시지의 변조 내지 왜곡과 같은 연구에서의 작위 또는 부작위, 혹은 연구 내에서 특정인의 기여를 심대하게 오도하는 정보제공 혹은 행동"으로 상당히 넓은 편이며,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는 아예 "훌륭한 과학 실천의 위배"(핀란드)나 "통상적인 윤리적 과학 실천으로부터의 모든 심각한 일탈"(노르웨이)과 같이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는 정의를 택하고 있다(Nylenna, 2001; Nylenna et al., 1999).(주6) 이는 부정직성의 기준에 대해 미국과 같은 엄밀한 정의가 아니라 분별있는 판단이 중요하다는 이들 국가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 국가의 조사보고서는 부정직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유죄/무죄를 가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정직성의 영역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연구 실천에서는 벗어난 행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명시하고 있다(Nylenna, 2001). 이들 국가에서 제기되는 부정직성 고발 건수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통틀어서 1년에 10건 이내), 미국 등 다른 국가와는 달리 날조-변조-표절이 아닌 저자표시 분쟁이 가장 높은 비율을 점한다는 점이 특이하다(Nylenna et al., 1999).

각 나라의 위원회들은 과학계와 법조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생긴 DCSD는 고등법원 판사를 위원장으로 하고 각 소위원회마다 4명의 해당 분야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의 법적·관료적 기구와 절차에 비하면 이들 위원회는 규모나 예산이 상당히 작다(1년 예산이 DCSD는 6만 달러, 노르웨이 위원회는 1만 5천 달러 정도이다). 이들 위원회는 전적으로 자문 역할만 하는 기구로서, 이들에 제공하는 조언에 법적 구속력은 없으며 부정직성에 대한 제재는 해당 기관에 의해 결정된다. 이 때문에 이들 위원회는 미국의 경우와 달리 항소 절차를 두지 않고 있다(Brydensholt, 2000; Nylenna, 2001).

각 나라에서 과학 부정직성에 대한 조사의 주체는 서로 다르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중앙집중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부정직성 고발을 국가위원회가 직접 접수하고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해당 연구기관과의 계약을 통해 국가위원회가 조사를 담당한다. 조사 결과 부정직성이 입증되면 고발된 과학자가 속한 연구기관과 고발자, 피고발자 양측에 이 사실이 통보된다. 반면 핀란드는 부정직성 고발에 대한 조사를 해당 연구기관에서 담당하며, 피고발자가 조사결과에 불만이 있으면 국가연구윤리위원회에 재고를 요청하는 분산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 스웨덴은 중간 입장으로, 해당 연구기관이 예비조사를 담당하고 본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될 경우 전문가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하는 두 단계를 거친다(Nylenna et al., 1999).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자국에서 일어난 대형 부정행위 사건에 자극받아 연구윤리 제도가 마련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접하고 예방적 차원에서 만들었거나(덴마크) 이웃 나라의 문제의식을 도입해 유사한 제도를 만들었다(여타 3개국)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들 국가위원회들은 과학 부정직성에 대한 고발 조사뿐 아니라 연구윤리와 훌륭한 연구 실천(GRP)을 촉진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는데, 덴마크는 1998년에, 핀란드는 2002년에 각각 GRP에 관한 지침을 제정해 이를 장려하고 있다.(주7)

3) 독일

스칸디나비아 이외의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연구윤리 제도 마련에 나선 국가는 독일이다. 그러나 독일의 움직임은 어찌보면 상당히 뒤늦은 편이었다. 독일 과학계는 연구 부정행위가 경쟁이 치열한 미국 과학계가 직면한 '미국적인 재앙'이며 독일 과학은 "부정행위에 대해 문화적으로 면역이 되어 있다"며 줄곧 자족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만족은 1997년 독일에서 터진 전후 유럽 최대의 연구 부정행위 사건인 일명 '헤르만-브라흐 사건'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Abbott, 1999). 이 사건은 독일 과학계가 부정행위 문제에 대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극적으로 드러내었고, 이후 독일이 연구윤리 제도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헤르만-브라흐 사건 이전에 독일의 연구기관이나 연구비 지원기구 중 과학에서의 부정행위 고발 처리에 관한 공식 지침을 갖추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간혹 일어나는 소소한 부정행위들에 대해서는 임시방편적인(ad-hoc) 방식의 대응이 이루어졌고,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이런 상황에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후 독일 내 73개 기초연구기관을 관할하는 막스플랑크연구회(MPG)는 1997년 11월, 부정행위로 의심되는 사건이 생겼을 때의 조사 절차에 관한 내부 규칙을 승인했다(2000년 11월에 개정).(주8) 내부 규칙에서는 연구 부정행위를 "데이터의 날조 및 변조, 명시적인 언급 없는 데이터의 선별적 사용, 그래프와 그림 조작, 연구비나 직업 신청시의 허위 정보 제출, 타인의 연구 방해, 표절" 등으로 폭넓게 정의했으며, 1차자료의 파기나 조사에 대한 불응 역시 부정행위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간주했다.

조사 절차에 따르면 MPG 산하 연구기관에서 부정행위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을 때, 해당 기관의 소장은 내부고발자의 신원을 보호하면서 즉각 기관 내에서 비공식 조사를 실시하고 MPS의 연구담당 부총장에게 이 사실을 비밀리에 알려야 한다. 부정행위 고발을 당한 사람은 2주간 소명의 기회가 주어지며, 이로부터 다시 2주 내에 공식 조사가 발족될지 여부에 대해 전해듣게 된다. 공식 조사가 발족되는 경우 이는 새로운 상임 위원회가 담당하게 되며, MPG 이사회에서 선출되는 조사위원장은 MPG나 그 산하기관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조사위원회는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처벌에 대한 권고안을 낼 수 있다. 가능한 처벌 방법은 단순 경고, 연구비 환수, 파면,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검찰에 대한 고발 등이 포함된다. MPG의 총장은 이 중 어떤 처벌을 내릴 것인지 결정한다(Nature, 390, 430; 1997).

한편 대학연구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는 기구인 독일연구재단(DFG)은 1998년 1월 훌륭한 과학 실천을 위한 16개 항의 지침 권고안을 제시했다.(주9) 이 지침은 대학 등 연구기관이 훌륭한 과학 실천의 규칙들을 제정해 대학 성원들에게 교육해야 하고,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고발을 처리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하며, 옴부즈맨(민원조사관)을 두어 의심이 가는 과학 실천이 있을 때 젊은 과학자들이 상담할 수 있는 독립적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못박았다(지역 차원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위해 DFG 중앙에 세 명의 상임 옴부즈맨을 따로 두었다). 아울러 연구자들이 10년간 실험 자료를 접근가능한 형태로 보관해야 하고, 젊은 과학자들에게 적절한 지원과 감독을 제공해야 하며, 논문에서 명예 저자 표시를 불허한다고 규정했다. DFG는 2002년 6월까지 지침에 부합하는 규칙을 갖추지 못한 연구기관은 DFG의 지원대상에서 제외될 거라고 선언했고, 이는 각급 연구기관들이 연구윤리 제도 마련에 적극 나서게 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Science, 296, 1778; 2002). 2000년 11월에는 MPG도 유사한 규칙을 제정했고,(주10) 78개 산하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과학자들이 훌륭한 과학 실천을 위한 지침을 지키겠다는 동의서에 의무적으로 서명하도록 했다(Nature, 408, 762; 2000). 2003년 11월에 DFG는 부정행위 조사의 법률적 쟁점 검토와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한 더 나은 방안 강구를 위해 새로운 전문가 그룹을 조직하는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ScienceNOW, 18 November 2003).

아울러 MPG를 비롯한 연구기관들은 젊은 연구자들을 위한 연구윤리 교육 프로그램 마련에도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 프로그램은 부정행위를 저지른 소수의 과학자를 잡아내는 것보다 부정행위의 예방이 더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믿음을 반영하여, 실험 노트를 정리하는 올바른 방법, 논문의 저자를 결정하는 기준, 논문에 대한 기술적 기여를 인정하는 기준 등의 쟁점들과 연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의 내용을 교육하게 했다(Nature, 390, 430; 1997).

MPG와 DFG의 연구윤리 제도 구축은 이후 영국 등의 다른 유럽 국가들에 하나의 모범사례를 제공했다. 그러나 독일에는 미국과 같은 연방정부 차원의 연구윤리 기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국가 전체의 부정행위 실태 파악과 연구윤리 증진 노력에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4) 영국

영국은 최근 연구윤리 제도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부정행위에 대한 대처와 예방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뒤늦게 시작되었다. 영국 과학자들 역시 과학에서의 부정행위는 미국과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며 이 문제를 외면해 왔는데(Nature, 370, 10; 1994),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나타나는 이러한 태도를 놓고 비판자들은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는 정책"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영국은 연구비 지원기구가 극히 다양해 ― 독립된 연구재단들, 보건 및 농업 관련 부처들, 수많은 자선기관들 ―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통일된 정책 수립이 어렵다는 점도 작용했다(Science, 286, 2258-2259; 1999). 그러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10여 건의 부정행위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영국 과학자들의 자만심은 서서히 수그러들었고, 1990년대 후반 이후 제도적 대응이 분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연구 부정행위 대처와 관련된 문제의식은 비교적 일찍 제기되었다. 영국 왕립의사협회(Royal College of Physicians, RCP)가 1989년 1월부터 2년간의 준비 작업을 거쳐 1991년에 『의학 연구에서의 기만행위와 부정행위 Fraud and Misconduct in Medical Research』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한 것이 최초로 나타난 시도였다. 이 보고서는 연구기관들이 부정행위 고발이 제기되었을 때 따라야 할 엄격한 절차를 제정하고, 연구비 지원기구들은 부정행위 고발을 조사하는 기제를 갖추지 않은 연구기관에 연구비 지급을 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연구에서 지켜야 할 실천 규약을 교육하고 젊은 연구자의 원 데이터를 지도교수나 감독자가 수시로 검토하며 모든 데이터는 10년간 보관해 두어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Nature, 350, 365; 1991). 그러나 이 보고서에 담긴 선구적인 문제의식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고,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Science, 286, 2258-2259; 1999). 그 동안 영국 내에서 의사들의 면허를 관리하고 활동을 규제하는 독립 기구인 총의료심의회(General Medical Council, GMC)가 의사들이 저지른 연구 부정행위를 조사해 1990년대 중반까지 10여 명의 의사 면허를 정지시키거나 취소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었으나, GMC의 조사는 의사가 아닌 연구자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Chantler and Chantler, 1998).

느릿느릿 진전되고 있던 연구윤리 제도 구축은 1995년 6월에 밝혀진 '말콤 피어스 사건'을 통해 다소 가속도가 붙었다. 왕립의사협회는 연구 부정행위의 조사를 담당하는 독립된 중앙 기구의 설립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Nature, 375, 529; 1995). 1997년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는데, 먼저 국가연구비 배분을 담당하는 영국 내 8개 연구재단 중 하나인 의학연구재단(Medical Research Council, MRC)이 이 해 12월에 '과학 부정행위 고발 조사를 위한 정책과 절차'를 제정했다. 이 지침은 일차적으로 MRC 소속 연구소들에 적용되는 것이었으나, MRC 연구비를 받는 연구기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다.

지침에서는 부정행위의 정의로 "연구를 제안하고, 수행하고,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의 날조, 변조, 표절 혹은 속임수 행위, 그리고 연구 수행에 있어 통상적인 실천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위험하게, 혹은 부주의에 의해 일탈하는 행위"를 제시했다. 이에 더해 이미 잘 확립된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인간이나 다른 척추동물, 환경에 부당한 위험 내지 위해를 가하는 것, 그리고 타인의 부정행위에 공모 내지 이를 은폐해 연구 부정행위를 조장하는 것 역시 부정행위에 포함된다고 규정했다(반면 독일과는 달리, 기물을 파손하는 등 타인의 연구를 방해하는 행위는 통상의 부정행위이며 '연구 부정행위'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MRC는 조사 절차로 예비활동 → 평가(예비조사) → 공식조사 → 징계 부과 → 항소로 이어지는 단계를 밟게 하고, 각각의 단계마다 시간 제한을 두어 조사가 신속하게 이뤄지면서도 고발자, 피고발자 양측 모두를 보호할 수 있게 했다(Evans, 2000). 이어 MRC는 2000년에 훌륭한 연구 실천(GRP)을 위한 지침을 만들어 소속 연구자들에게 배포했다.(주11)

MRC의 이러한 활동은 다른 연구재단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8년 12월에 연구재단 사무총장과 이사회는 공동 성명을 내어 연구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고자 하는 기관은 GRP을 위한 규칙을 만들고 부정행위 고발에 대응하는 명확한 절차를 마련해 구성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고 못박았다.(주12) 이후 생명공학·과학연구재단(Biotechnology and Biological Sciences Research Council, BBSRC) 등 다른 연구재단들도 MRC의 선례를 따라 유사한 지침과 부정행위 조사 절차를 마련했다.(주13) 그러나 연구기관에 대한 이들 재단의 요구는 미국의 그것에 비해 구체성과 강제성의 측면에서 다소 미흡했다.

한편, 1997년에는 The Lancet, Gut, British Medical Journal 등 20여개의 저명한 의학 학술지 편집자들이 논문발표윤리위원회(Committee on Publication Ethics, COPE)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는 접수된 논문에서 부정행위가 의심될 때 편집자들이 겪게 되는 딜레마를 토론하고 경험을 서로 나누기 위한 일종의 "자조(self-helf)" 그룹으로 의도된 것이었고, 가입한 학회지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 현재는 300여개의 의학 학술지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COPE는 초기부터 부정행위에 대한 조사권을 갖고 있지 못한 학술지의 한계를 절감하고, 미국이나 스칸디나비아와 같이 부정행위 문제를 담당하는 중앙 기구의 설치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Farthing, 1998; 2003). 1999년에 COPE는 '훌륭한 논문발표 실천을 위한 지침'을 발표했고, 10월에는 왕립의사협회와 공동으로 '생의학 연구에서의 부정행위에 관한 합의회의'를 개최해 연구윤리 문제를 다루는 국가위원회 설치를 공식 제안했다. 이 위원회는 ▲ 훌륭한 연구 실천의 모델을 개발하고 ▲ 연구 부정행위 조사에 도움을 제공하고 ▲ 연구 부정행위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공표하는 등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주14)

국가위원회 설치를 위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2001년에는 영국 내 생의학 연구의 20%를 지원하는 최대 자선기관인 웰컴 재단(Wellcome Trust)이 GRP에 대한 자체 지침과 부정행위 조사 절차를 제정하고, 2002년 10월까지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기관에는 연구비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Nature, 412, 667; 2001). 웰컴 재담의 지침은 부정행위의 정의 등에서 MRC의 그것에 크게 의존해 만들어졌다(Science, 293, 1411-1412; 2001). 이는 영국 내의 연구윤리 제도를 일보전진시킨 민간 차원의 중요한 시도였다.(주15) 그리고 수 년간의 논의를 거친 후 2005년에 연구윤리 문제를 담당하는 독립 기구인 '보건 및 생의학 연구윤리를 위한 국가위원회(UK Panel for Health and Biomedical Research Integrity)'가 영국대학연합(Universities UK) 아래에 생겨났다(Nature, 434, 263; 2005). 이 기구는 부정행위에 대한 자체 조사는 하지 않고 GRP의 모델을 장려하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는 활동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알려졌다(BMJ, 330, 616; 2005).

4. 시사점

서구 여러 국가들의 연구윤리 관련 제도는 그것이 형성되어 온 역사적 배경에 따라 국가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고발 및 조사에서 RCR 내지 GRP로 이전하면서 점차 수렴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서구의 경험은 새롭게 연구윤리 관련 제도를 구축해야 하는 한국의 상황에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먼저 국가연구개발비를 받는 연구자와 소속 연구기관에 대해서는 연구 부정행위와 관련해 엄격한 관리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학술진흥재단이나 과학재단 등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거나 과기부, 정통부, 산자부 등의 대형 국책과제를 수행하는 대학 등의 연구기관은 자체적으로 부정행위 고발을 접수하고 조사를 진행하는 공식 절차(내부고발자 보호, 예비조사 절차, 본조사 절차, 피고발자의 항소 절차)를 갖추도록 하고, 이를 갖추지 않은 기관에 대해서는 일정한 유예기간을 둔 후 국가연구개발비 지급을 중단해야 한다. 연구기관에는 그러한 절차를 담당하는 기구를 연구처나 그에 상응하는 조직체계 아래 두어야 하며, 젊은 연구자들의 부정행위 고발을 도와줄 수 있는 조사관(옴부즈맨)의 임명도 필요하다. 또한 현재 연구회 체제로 묶여 있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에도 마찬가지의 조사절차와 공식 기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런 조사절차나 기구 구성시 어떤 사항을 준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부나 연구비 지원기구에서 분명한 지침을 내려보내야 기관별 차이에서 나타나는 혼선을 줄일 수 있다. 가령 연구 부정행위를 어디까지로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표적인 쟁점인데, 미국처럼 날조, 변조, 표절만 부정행위로 간주할지, 아니면 좀더 포괄적으로 정의할지의 문제에 대해 숙고를 거쳐 일정한 합의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연구개발비를 받는 기관들이 조사절차나 기구 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실사해(가령 100개 기관이 있다면 매년 무작위로 10%를 추려 정밀조사를 하는 식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 제재조치를 가하는 것도 연구윤리 제도의 유명무실화 방지를 위해 꼭 필요하다.

또한 서구의 정책 변화방향에 발맞춰 연구 부정행위를 예방하고 RCR 내지 GRP를 장려하는 교육 및 훈련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대학, 정출연 등 연구기관에서는 서구의 전례를 참고해 GRP를 위한 지침을 제정하고, 젊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윤리 강좌를 필수로 지정해 운영해야 한다. 강좌는 가급적 외국 대학의 모범 사례를 좇아 한 학기 동안 교과목으로 운영해 토론수업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당장은 단기강의나 인터넷강의로 이를 대체하는 방안이 가능할 것이다.

각종 전문학회나 이들의 연합체인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그리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공학한림원 등 과학자단체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이들 단체는 부정행위를 방지하고 GRP를 장려하는 내용을 담은 윤리강령을 자체적으로 제정하고, 이에 따른 상벌 수여나 쟁점이 되는 사안의 평가를 위해 윤리위원회를 상설적으로 구성, 운영해야 한다. 아울러 연구윤리 교육과 훈련을 지원하고 프로그램의 개발에 앞장서야 하며, 연구 부정행위에 관한 내부고발이 제기되었을 때 해당 연구기관과 협력해 내부고발자를 보호하고 쟁점에 대한 공정한 조사와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이한 기구와 부처간에 연구윤리 정책의 일관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연구윤리 기구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 연구윤리 중앙 기구는 개별 연구기관의 부정행위 조사결과 보고를 받고, 발생한 부정행위 사건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부정행위 조사나 GRP 장려를 위한 표준 절차나 각종 지침을 제정하고, 개별 연구기관의 제도 운영 실태를 정기적으로 실사하는 등의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별첨 1. 1970-80년대 미국의 대형 부정행위 사건들

1980년대 초에 미국이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정책적 대응을 시작한 데는 그 이전 10여년 동안 과학계와 대중을 경악시킨 일련의 부정행위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 대중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사건을 소개한다(Lock, 1996a; Lafollette, 1996).

▲ 1974년의 윌리엄 서머린(William Summerlin) 사건: 서머린은 뉴욕에 있는 슬로언-케터링 연구소에서 피부암 연구를 하던 면역학자였다. 그는 유전적으로 부적합인 피부 조직의 이식을 쉽게 하기 위한 조직 배양 기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연구소장과의 면담을 앞두고 흰쥐의 이식된 피부 조각을 펠트 펜으로 검게 칠해 검은쥐의 피부 조각을 흰쥐에 이식하는 획기적 실험에 성공한 것처럼 가장했다. 나중에 그는 조작 사실을 시인하면서 "정신적·육체적 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라"는 연구소측으로부터의 압력, 그리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임상과 실험의 부담"이 겹쳐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주장했다. 조사위원회는 그가 연구의 진척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했고 증거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를 해고했고, 이후 서머린의 상사이자 연구소장이었던 저명한 면역학자 로버트 굿(Robert Good)도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일명 "색칠한 쥐" 사건으로 불렸던 이 에피소드는 미국 내에서 대중적 주목을 끌었던 최초의 데이터 조작 사례였으며, 이후 1980년대까지 반복되는 부정행위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 주었다.

▲ 1981년의 존 다시(John Darsee) 사건: 하버드 의대의 심장병학 연구자였던 다시는 처음에 실험실 연구에서 데이터를 조작하다가 적발되었다. 학과장인 저명한 심장병학자 유진 브라운왈드(Eugene Braunwald)는 이것이 단 한 차례만 일어난 괴상한 행동이라고 보고 다시가 면밀한 감독 하에서 계속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6개월 후에 여러 센터가 공동으로 진행중이던 허혈 심근(ischaemic myocardium) 보호를 위한 치료 연구에서 다시의 데이터가 연구에 참여한 다른 세 곳에서 보유한 데이터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하버드 의대는 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 다시가 예전에 일했던 NIH와 에모리대학 역시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조사 결과 다시는 노트르담대학에 다니던 학부 시절부터 광범한 기만행위를 저질렀고, 이러한 기만행각이 에모리와 하버드에서도 계속되었음이 드러났다. 다시는 존재하지도 않는 환자나 공동 연구자를 꾸며내기도 했고 여러 센터가 참여한 공동연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데이터를 지어내기도 했다. 다시는 도합 100여편의 논문과 초록을 발표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철회가 불가피했다.

다시 사건은 '정신나간' 연구자가 고립되어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니라 저명한 연구기관, 공저자, 학술지가 여럿 개입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큰 대중적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데이터 날조에 초점이 맞춰진 사건이었지만, 이와 아울러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다시는 논문에 수많은 공저자들을 올려놓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연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이른바 "명예 저자"들이었다. 이들은 논문이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저자로 기재되는 것에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았으나, 문제가 제기된 후에는 논문 내용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고 나섰다. 이에 공저자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저자 표시 문제의 윤리성이 본격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별첨 2. 미국의 부정행위 조사 절차

ORI는 해당 연구기관을 부정행위 조사의 일차적인 주체로 상정하고, 자신은 이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를 위해 ORI는 1995년 과학 부정행위 고발에 대응하는 모범 정책과 절차(Model Policy and Procedures for Responding to Allegations of Scientific Misconduct)를 만들어 PHS 연구비를 받는 연구기관이 자체적인 지침을 제정할 때 이를 따르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각각의 연구기관에 마련된 지침은 약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많은 부분 유사하다. 아래에서는 볼티모어의 메릴랜드대학에서 이용되고 있는 부정행위 조사 절차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Shamoo and resnik, 2003: pp. 105-107).(주16)

부정행위에 대한 고발은 연구에 관여하고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고발은 해당 단과대학 학장이나 대학의 교무부총장에게 연결되고, 부총장은 고발자와의 면담과 자료 수집을 거쳐 고발로부터 10일 이내에 예비조사(inquiry) 절차를 시작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예비조사가 결정되면 부총장은 30일 이내에 예비조사 위원회를 선임한다. 예비조사 위원회는 고발자, 피고발자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 충돌이 없는 3인의 정교수로 구성된다. 위원회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정보, 기록, 전문가 견해 등을 요청할 수 있다. 피고발자는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 예비조사는 가능한 한 60일 이내에 마쳐야 한다. 위원회는 과연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는지, 그리고 본조사(investigation) 단계를 시작할 만큼 충분한 정당성이 있는지 판단을 내리고 이를 부총장에게 보고한다. 부총장은 법률자문을 얻어 15일 이내에 본조사로 들어갈지, 조사를 종결할지, 아니면 다른 조치(가령 논문의 수정)를 취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본조사가 결정되면 부총장은 30일 이내에 본조사 위원회를 선임한다. 본조사 위원회는 이해관계가 없는 3-5인의 정교수 혹은 명예교수로 구성되며, 그 중 적어도 한 명은 메릴랜드대학과 무관한 인물이어야 한다. 본조사는 엄격한 형식을 따르는데, 가령 모든 회의와 청문회는 최소 72시간 전에 공지되어야 하고, 모든 회의는 녹음되어 피고발자가 원하는 경우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피고발자에게 정당한 조사절차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본조사는 가능한 한 120일 내에 마쳐야 하며, 피고발자는 역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 본조사 기간 동안 위원회는 추가적인 자료를 요청할 수 있으며, 최초 고발의 범위를 넘어서 조사를 확대할 수 있다. 최종 판단을 위한 과정에서 위원회는 "증거 우위"의 기준을 적용한다. 위원회는 알아낸 사실과 권고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다는 결론을 내린 경우에는 제재내용에 대한 권고를 보고서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피고발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조치를 취할 의무를 갖는다. 본조사 위원회의 보고서는 부총장과 피고발자, 고발자에게 보내지며, 피고발자와 고발자는 15일 이내에 문서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최종 보고서는 관련 자료와 함께 ORI로 보내진다. 부총장은 보고서를 받은 후 30일 이내에 법률자문 등을 거쳐 부정행위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린다. 부총장은 총장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최종 판단과 사건 개요, 판단의 근거 등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한다. 기관 차원의 조사는 여기에서 끝난다.

ORI는 연구기관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해 조사과정이 철저하고 유능하게 이루어졌는지, 또 보고서의 결론이 충분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지 판단한다. ORI는 검토 결과 보고서를 작성한 후 이를 해당 기관에 보내고, 부정행위가 확인된 경우 적절한 행정적 제재(정부 위원회의 참여 제한, 연방 연구비 신청 제한 등)를 보건차관실에 건의한다. 보건차관은 ORI 보고서에 대해 판단을 내리며, 이는 PHS의 최종 판단이 된다. 만약 피고발자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30일 이내에 DAB에 항소할 수 있다. ORI는 조사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항소를 뺀 이 모든 절차를 480일 이내에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http://ori.dhhs.gov/misconduct).

별첨 3. 헤르만-브라흐 사건

헤르만-브라흐 사건은 2차대전 이후 독일(더 나아가 유럽) 과학계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연구 부정행위 사건으로, 유전자치료와 암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두 명의 분자생물학자 프리드헬름 헤르만(Friedhelm Herrmann)과 마리온 브라흐(Marion Brach)가 공저한 수십 편의 논문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했던 1990년대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헤르만은 브라흐보다 11살 연상으로, 브라흐에게 있어 헤르만은 오랜 기간을 서로 같이 해온 스승이자 공동 연구자였으며 연인이기도 했다(Nature, 398, 765-766; 1999). 헤르만은 독일 통일 후 동베를린에 세워진 국가 연구센터인 막스 델브뤽 분자의학 센터에 실험실 공간을 얻어 20여명의 과학자들로 연구팀을 조직했는데, 이 때 브라흐는 팀에서 네 명의 그룹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줄곧 공동 연구를 하다가 1996년 초에 헤르만이 울름대학, 브라흐가 뤼벡대학에 각각 정교수 자리를 얻어 베를린을 떠났다(Nature, 387, 442; 1997).

두 사람의 부정행위가 드러나게 된 것은 1997년 초, 그들의 연구 데이터 중 일부가 조작되었다는 의심을 품은 베를린 연구팀의 한 박사후 연구원이 이 사실을 멀리 뮌헨에 있던 자신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에게 상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Abbott, 1999). 지도교수는 이 사실을 막스 델브뤽 센터, 울름대학, 뤼벡대학에 각각 알렸고, 고발 내용을 추궁당한 브라흐는 자신이 헤르만과 공저한 4편의 논문에서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실토했다. 그녀는 서로 연관이 없는 방법론을 사용한 서로 무관한 실험들에서 나온 이미지 파일들을 "뒤섞고 잘라붙여" 새로운 실험 데이터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Nature, 387, 442; 1997). 그녀는 자신이 조작한 논문은 4편뿐이며, 그것도 헤르만으로부터 조작 압력을 받은 것으로 자신은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반면 헤르만은 베를린에 있을 당시 연구 프로젝트는 네 명의 그룹 책임자들에게 일임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조작의 모든 책임을 브라흐에게 돌렸다(Science, 277, 894; 1997).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막스 델브뤽 센터, 울름대학, 뤼벡대학은 각각 조사위원회를 꾸렸고, 각각의 대표들이 모이는 국가 차원의 조사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헤르만과 브라흐는 정직되고 그들의 실험실로 들어가던 연구비 지급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즉각 중단되었다(Nature, 387, 750; 1997). 이들 위원회는 헤르만과 브라흐가 쓴 다른 논문들의 조작 여부를 조사했고, 결국 두 사람이 공저한 37편의 논문들에서 데이터가 조작된 것이 확실하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most probably)"고 결론내렸다(Nature, 395, 533; 1998). 이에 따라 브라흐는 1997년 9월 뤼벡대학에서 파면되었고(Nature, 389, 432; 1997),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던 헤르만은 다음해 9월 스스로 교수직에서 물러났다(Nature, 395, 532-533; 1998). 1998년 4월 독일연구재단(DFG)은 이 사건의 파장을 좀더 완전하게 평가하기 위해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했다. 이 팀은 조사 대상을 넓혀 1985년부터 1996년 사이에 헤르만이 저자로 들어간 347편의 논문을 조사한 후, 2000년 6월에 이 중 94편의 논문(브라흐와 공저한 53편 포함)이 조작된 것이 확실하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을 발표했다(Nature, 405, 871; 2000).

이 사건은 독일 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미쳤다. 독일 과학자들은 부정행위의 엄청난 규모에 경악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러한 사실이 너무나 늦게 밝혀졌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이 사건에서 베를린 팀의 젊은 연구자들은 헤르만과 브라흐의 데이터 일부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상당기간 동안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앞날이 위협받을까 두려워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Nature, 390, 430; 1997). 결국 이 사건은 독일에서 부정행위와 연구윤리 문제를 다루는 제도적 장치가 정비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별첨 4. 말콤 피어스 사건

말콤 피어스(Malcolm Pearce)는 런던의 세인트 조지 병원(St Jeorge's Hospital)에 근무하던 선임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는 1994년에 <영국산부인과학회지 British Journal of Obstetrics and Gynaecology>에 두 편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첫 번째 논문에서 그는 자궁외 임신 상태인 5주 된 태아를 해당 여성의 자궁으로 이식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기의 출산에도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자궁외 임신 태아의 이식은 전세계적으로 처음 보고된 일이었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Nature, 375, 529; 1995). 그리고 두 번째 논문에서 그는 다낭 난소 질환(polycrytic ovary disease)이라는 희귀병으로 여러 차례 유산을 경험한 191명의 여성에 대해 복잡한 일련의 검사를 수행한 결과를 보고했다. 이 병을 앓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그런 환자를 191명이나 검사했다는 데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데이터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고(혹은 너무 완벽해 보였고) 피어스가 해당 사실을 확언했기 때문에 논문은 그대로 발표되었다(Lock, 1996a; 1996b).

피어스의 연구에 대한 의문 제기는 매우 우연한 행정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자궁외 임신 태아를 이식한 피어스의 수술을 도와 주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병원측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피어스는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정직 처분을 받았다(Nature, 372, 390; 1994). 8개월 후인 1995년 6월에 발표된 조사 결과는 두 논문이 완전히 날조되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식 수술은 행해진 적이 없었고, 191명의 여성은 가공의 인물로 데이터는 전부 날조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GMC는 피어스의 의사 면허를 박탈했다(Nature, 375, 529; 1995).

이 사건은 미국에서 일어난 다시 사건과 마찬가지로 명예 저자 표시에 내포된 문제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피어스의 첫 번째 논문은 세 사람이 저자로 올라가 있었는데, 이 중 세 번째 인물은 피어스의 상급자인 세인트 조지 병원의 산부인과장인 제프리 체임벌린으로, 그는 <영국산부인과학회지>의 책임 편집자이자 이 학술지를 발간하는 왕립산부인과의사협회(Royal College of Obstetricians and Gynarcologists)의 회장이기도 했다. 체임벌린은 조사 결과 발표가 나기 전에 사태의 책임을 지고 편집자와 협회장 직책을 모두 사임했으나, 자신은 피어스가 보고한 수술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단지 "예우 차원에서" 자신의 이름을 저자에 넣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Nature, 375, 522; 1995).

또한 이 사건은 학술지의 논문심사에 심각한 구멍이 있을 수 있음을 폭로했다. 피어스는 <영국산부인과학회지>의 부편집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이식 수술의 성공을 알린 첫 번째 논문은 이 학술지의 편집회의에서 처음 보고된 후 편집위원들의 종용에 따라 논문으로 발표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피어스는 신뢰받던 편집자였으므로 논문 초고는 동료심사도 거치지 않았고 심지어 저자 전원이 서명한 심사본 제출 과정도 생략되었다. 이 사례는 편집위원회 내부의 이해관계 충돌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음을 드러내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표준 절차가 생략되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Lock, 1996b).

< 각 주 >

1. 1999년 미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 OSTP)이 내놓은 정의에 따르면, 날조(fabrication)는 "데이터나 실험결과를 지어내어 이를 기록하거나 보고하는 행위"를 말하며, 변조(falsification)는 "연구의 원재료, 기구, 과정 등을 조작하거나 데이터나 실험결과를 변경하거나 생략함으로써 연구가 연구 기록에 정확하게 기술되지 못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표절(plasiarism)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과정, 실험결과, 내지 표현을 정당한 출처 표시 없이 갖다 쓰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모든 연구에 적용되는 이 정의를 뭉뚱그려 흔히 FF&P로 약칭한다.

2. 아래 나오는 1999년 이후 ORI의 활동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경우 해당 시기에 계간으로 발간된 ORI Newsletter를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http://ori.dhhs.gov/publications/newsletters.shtml

3.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연구윤리 제도의 기원과 현황에 대해서는 덴마크 과학 부정직성 위원회(DCSD)의 연례보고서를 많이 참고했다. 연례보고서는 아래 사이트에서 html이나 pdf 포맷으로 볼 수 있다. http://forsk.dk/portal/page?_pageid=407,940602&_dad=portal&_schema=PORTAL

4. Executive Order No. 668 of 28 June 2005 on the Danish Committees on Scientific Dishonesty. 이 문서는 http://forsk.dk/portal/page?_pageid=407,889143&_dad=portal&_schema=PORTAL&_calledfrom=2에서 pdf 포맷으로 볼 수 있다.

5.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연구윤리 제도의 초기 발전과정은 DCSD Annual Report 1993, chap 2; DCSD Annual Report 1994, chap 5; DCSD Annual Report 1995, chap 6 등을 추가로 참조할 수 있다.

6. 핀란드는 1998년에 지침을 개정하면서 '과학에서의 부정행위'와 이보다 좀더 심각한 '과학 연구의 기만행위'를 구분했으나, 이 둘의 구분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http://pro.tsv.fi/tenk/guidelines.htm

7. 덴마크의 지침은 http://forsk.dk/portal/page?_pageid=407,889357&_dad=portal&_schema=PORTAL에서, 핀란드의 지침은 http://pro.tsv.fi/tenk/htkoengl.pdf에서 각각 볼 수 있다.

8. MPG의 부정행위 처리 규칙은 http://www.mpg.de/pdf/procedScientMisconduct.pdf에서 볼 수 있으며, 부정행위로 간주되는 행위와 가능한 제재조치의 목록은 http://www.mpg.de/pdf/verfahren_anlagen_en.pdf에 나와 있다.

9. DFG의 지침은 http://www.dfg.de/aktuelles_presse/reden_stellungnahmen/download/self_regulation_98.pdf에서 볼 수 있다.

10. MPG 규칙은 http://www.mpg.de/pdf/rulesScientificPract.pdf에서 볼 수 있다.

11. MRC의 부정행위 조사 지침은 http://www.mrc.ac.uk/pdf-mis_con.pdf에서, GRP 지침은 http://www.mrc.ac.uk/pdf-good_research_practice.pdf에서 볼 수 있다.

12. 공동 성명은 http://www.ost.gov.uk/research/councils/safe.htm에서 볼 수 있다.

13. BBSRC의 부정행위 조사 절차는 http://www.bbsrc.ac.uk/foi/guidancenotes/sci_malpractice.pdf, GRP 지침은 http://www.bbsrc.ac.uk/funding/overview/good_practice.pdf에서 볼 수 있다.

14. COPE의 홈페이지 http://www.publicationethics.org.uk에서 COPE에 가입한 학술지 목록과 COPE의 연례보고서, 각종 지침 등을 볼 수 있다.

15. 웰컴 재단의 조사 절차와 지침은 http://www.wellcome.ac.uk/assets/wtd002754.pdf에서 볼 수 있다.

16.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미국 ORI의 대응절차는 이준석·김옥주(2006)에서 좀더 상세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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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 「한국의 과학윤리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 <과학사상> 43호(2002년 겨울호): 252-271.

이준석·김옥주, 「연구부정행위에 대한 규제 및 법정책 연구: 미 연구진실성관리국(ORI)의 사례를 중심으로」, 생명윤리학회 긴급토론회 "생명과학 연구의 윤리성과 진실성 담보를 위하여"(2006.1.23)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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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제2차 시민과학포럼 "연구진실성, 그 쟁점과 대책"(2006.2.23) 발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