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발표들에서는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시민참여의 문제의식과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소개하고 각각이 지니는 장단점과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앞선 발표들과는 약간 다른 맥락에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쟁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논쟁, 즉 과학기술 논쟁이 시민참여의 측면에서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조명해 보려 한다. 아울러 과학기술 논쟁을 일종의 '비공식적 시민참여 방법'으로 파악할 때 그것이 내포할 수 있는 '사회적 학습'의 함의를 극대화시킬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과학기술 논쟁은 서구 사회에서 1960년대 후반 이후 핵, 환경, 보건, 노동, 인권 등의 영역들에서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간 '논쟁의 불모지'로 여겨져 왔던 우리 나라에서도 19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핵폐기물처리장, 쓰레기소각장 등 각종 위해시설의 입지, 노동현장에서의 유해화학물질, 정보통신기술의 사회적 함의 등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고, 최근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전자주민카드, 유전자조작식품과 생명복제, 수돗물 불소화, 동강댐, 새만금 간척지에 관한 논쟁이 사회적 주목을 끌기도 했다.
 

왜 과학기술 논쟁에 주목하는가?
 

과학기술 논쟁은 몇 가지 측면에서 앞서의 발표들에서 제기한 제도적 모델(교섭규제, 시민배심원, 시나리오 워크샵, 포커스 그룹)과 상이하다. 우선 과학기술 논쟁은 정해진 틀이나 절차, 주관기구, 참여 주체 등이 사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우연적인 계기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고 특정한 형태의 성과를 기대하기도 힘들다는 점에서 다른 모델과 다르다. 또한 논쟁 과정에서 참여 집단들은 토론회나 청문회, 공청회와 같은 법적, 제도적 장치뿐 아니라 언론보도, 성명서 발표, 대중 시위 등의 다양한 '전략'들을 동원하는 것이 보통이며, 여러 가지 정치·경제적 배경상황이 논쟁의 종결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논쟁의 전개양상에는 상당한 정도의 불확실성과 의외성이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 논쟁은 시민참여의 요소를 분명 내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책적인 의도로 '활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논쟁에 주목해야 한다면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각종의 과학기술 관련 쟁점들을 둘러싼 논쟁이 이미 '지금-여기서' 전개되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피해 살아갈 수는 없다는 점이다. 과거와는 달리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이 고양되고 또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상대적으로 개방화된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반대 움직임이 언제든지 가시화될 수 있고 이는 곧 사회적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논쟁을 일상생활의 당연한 일부로 받아들이고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과학기술 영역 역시 예외는 될 수 없다. 이어 두번째로, 과학기술 논쟁이 많은 경우 이의제기를 위해 불가피한, 심지어 유일한 선택지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특히 시민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존재하더라도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러하다. 또한 쟁점이 첨예한 이해관계나 가치상의 대립을 포함하고 있을 경우에는 제도적인 형태의 조정 노력이 작동하지 않아 대중적인 논쟁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맘먹은 대로 다루기는 힘들지만 불가피하고 심지어 바람직하기도 한' 과학기술 논쟁을 시민참여의 측면에서 조망했을 때 우리가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에 맞추어질 것이다.
 

비공식적인 참여적 기술영향평가로서의 과학기술 논쟁
 

과학기술 논쟁은 흔히 과학기술자들이나 정책수립자들에 의해 "(정상적인 정책수립 과정으로부터의) 탈선"이라거나, "무시하거나 제거하거나 피해야 할 바람직하지 않은 혼란"으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다. 과학기술 논쟁이 일반적으로 수반하는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고려해 본다면 이런 관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기술 논쟁은 과학기술정책 수립과정에서 단순한 '천덕꾸러기'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 그간 여러 논자들에 의해 설득력있게 주장되어 왔다.

과학기술 논쟁이 지니는 의미는 그것이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시민참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 여러 논자들은 과학기술 논쟁과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와의 관계에 주목해 왔다. 주지하다시피, 기술영향평가는 기술의 도입과 활용이 가져오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그 중 긍정적인 측면은 극대화시키고 부정적인 측면은 극소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마련된 것으로, 미국의 경우에는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정책결정에 도움이 되는 중립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 기술영향평가는 전문가들 사이의 합의의 어려움 때문에 애초에 의도되었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정보의 제공' 역할을 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잠재적인 문제 영역을 파악하는 데도 효과적이지 못함이 곧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1980년대 이후 일반시민이 기술영향평가 과정에 참여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참여적 기술영향평가의 문제의식이 널리 확산되었고 앞선 발표들에서 소개되었듯 그 문제의식에 걸맞는 여러 제도적 장치들이 등장하였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몇몇 논자들은 과학기술 논쟁이 공식적 기술영향평가의 한계를 보완하는 "비공식적" 기술영향평가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왔다. 과학기술 논쟁의 대표적 연구자 중 하나인 마주르(Allan Mazur)는 논쟁의 양측 당사자들이 갖은 증거와 수단들을 동원해 서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기술에 내포된 위험과 혜택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며 이를 통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하는 중요한 쟁점이 걸러져 남는 여과(filtering)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또한 립(Arie Rip)은 과학기술 논쟁이 새로운 기술이나 계획중인 과학기술 프로젝트에 대해 서로 상충되는 평가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를 일종의 "조기경보(early warning)" 구실을 하는 비공식적 기술영향평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과학기술 논쟁에서는 전문가들과 각종 이해집단들의 입장뿐 아니라 일반시민(혹은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공익단체)의 관점 역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기술 논쟁은 바로 이런 점에서 참여적 기술영향평가의 제도화되지 않은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과학기술 논쟁의 함의 극대화를 위해
 

앞에서 보았듯, 과학기술 논쟁에 주목하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시민참여의 측면 모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다. 이제 규명되어야 하는 문제는, 참여적 기술영향평가의 비제도적, 비공식적 형태인 과학기술 논쟁과 그것의 제도적, 공식적 형태인 여러 시민참여 메커니즘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일 것이다.

이 각각의 형태들은 나름의 한계를 모두 갖고 있다. 마주르가 이미 지적했듯, 과학기술 논쟁은 많은 경우 구체적인 쟁점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매우 '혼란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충분한 숙의 과정을 거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마땅히 얻어야 할 교훈을 끄집어내지 못한 채 종결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논쟁을 시작하거나 이미 진행중인 논쟁에 끼여들어 새로운 대립구도를 제시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일반시민들은 종종 기존 논쟁의 이분법적 대립구도에 편승하거나 이를 무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반면, 시민참여를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들은 정해진 절차에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되는 만능의 해결사가 아니라, 주어진 사회의 정치적 의사결정 기제, 사안의 성격, 진행중인 논쟁의 상태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구조적인 제약을 받는다. 바꿔말해 시민참여의 공식적 메커니즘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미치는 파급력은 다양한 요인들, 특히 과학기술 논쟁의 진행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립이 제안했듯, 과학기술 논쟁을 좀더 유효한 시민참여의 '비공식적'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논쟁을 처음에 제기하는 "조기경보자(early-warner)" 혹은 "내부고발자(whistle-blower)"를 보호하는 법적·문화적 환경을 만들어 논쟁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규제기구의 개입과 절차적 규칙의 제정을 통해 논쟁의 초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회적 학습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참여의 제도적 장치들을 좀더 유효한 '공식적' 수단으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의 배경이자 제한요인인 과학기술 논쟁의 진행 상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것의 성과물을 되먹임하여 사회적 논쟁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야말로 과학기술 논쟁이 지닐 수 있는 시민참여의 함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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