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이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실존 장소인 킹덤 병원은 이질적이고 상충하는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부조리한 공간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 사회의 축도(microcosm)이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킹덤 병원은 최첨단의 의료장비들과 현대적 시설들을 보유하고 숱한 뛰어난 의사들과 스탭들을 거느린 현대 의학의 정수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정체불명의 앰뷸런스, 엘리베이터 통로 속에서 흐느끼는 소녀 유령, 악령을 잉태한 여의사...)이 그 속에서 잇달아 발생하는 초자연적이고 불가해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킹덤>의 내용 전개도 킹덤 병원 내의 다양한 인간군상(의사들, 스탭들, 의대 학생들...)을 그려내는 하나의 축과, 드루쎄 부인을 중심으로 해서 불가사의한 사건의 실마리를 조금씩 풀어나가는 다른 하나의 축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 <킹덤>이 과학기술에 대해 취하는 입장을 좀더 잘 읽어낼 수 있는 것은 후자보다는 아무래도 전자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점점 오만해지고, 영혼도 부정한다"라는 영화 시작 부분의 (비판적) 나레이션에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겠지만, <킹덤>에서 과학자집단(즉, 킹덤 병원의 의료진들)의 모습은 가차없고 단정적이며, 조금의 연민도 담기지 않은 방식으로 냉정하게 묘사된다. 여기서 '토론을 통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는 합리적인 집단으로서의 과학자공동체'라는 신화는 그 근저에서부터 철저하게 붕괴한다. 의료진들은, 마치 육중하고 거대한 킹덤 병원의 외양에 짓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위계질서화된 관료적 체계 속에 짓눌려 있고 형식적 절차에 얽매여 있다 (CT 촬영의 결정권을 둘러싼 영화 초반부의 논쟁이 이에 대한 단적인 예이다). 또한, 상층부 의사들이 가입하는 "킹덤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의 비밀공제조합에서 희화화된 형태로 나타난 바와 같이, 의사공동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익집단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이들은 의료인, 좀더 넓게는 과학자으로서의 윤리에 충실하기보다는, 비교적(秘敎的)인 입회의식을 거친 조합의 일원으로서 의료사고(어린 소녀의 뇌수술 실패)의 은폐에 가담하고 어이없는 수술(멀쩡한 사람에게 병든 간을 이식하는)을 집도하는 등의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보다도 "킹덤의 아들들"의 입회절차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또 일부 의사들은 다른 이의 연구성과를 가로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발표하는 비윤리적인 행위까지 저지른다. 이로부터 드러나는 과학자집단의 모습은,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되어 있어 위아래 간의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한마디로 비합리성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다.

과학자집단 전체에 대한 이러한 일반화는 개별 과학자들에 대한 묘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스웨덴 출신의 의사 헬머는 비록 주차할 때마다 볼보 자동차의 휠캡을 빼내 끌어안고 다니는 속물이긴 하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자연치료"나 "약초치료" 등의 이른바 대안의료(alternative medicine)의 유효성을 부인하는, 현대 의료체계의 철저한 신봉자이자 합리성의 화신인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지는 의료사고 때문에 곤경에 빠진 후에는 아이티로 가서 인형에 바늘을 꽂고 주문을 외는 부두교의 흑마술에 의존하여 병원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해부학 전공의 본도 박사는 종양 연구를 위해 말기 간암 환자를 사후에 해부해 보려고 하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신의 몸에 병든 간을 이식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연구를 계속하려 하는데, 얼핏 여기까지는 본도 자신의 주장 - 자신은 개인적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을 위한 '휴머니티' 때문에 해부를 하려 한다는 - 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병든 간을 이식했다가 다시 자신의 간을 원래대로 이식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겨 병든 간을 그대로 몸 속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자, 그는 도리어 연구업적에 비정상적인 집착 - "일주일만 더 기다려서 종양을 '더 키운' 다음에 수술을 하자"는 식으로 - 을 보이며 건강한 간을 재이식하는 것을 거부한다. 한편,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후크도 역시 처음에는 형식적인 절차보다는 실질적인 치료결과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합리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나중에는 헬머와의 개인적인 마찰을 계기로 결정적인 서류를 빼내어 그를 협박함으로써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서, 과학자집단이 사회 일반으로부터는 분리되어 '다른' 가치나 행동규범에 의해 지배를 받는 '특수한' 공동체라는 뿌리깊은 통념은 심대하게 뒤흔들린다. 그들 역시 사회 일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면가치적이고, 종종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며, 개인적 이해관계를 대의명분보다 우선시하는, 한마디로 '평범한' 면모를 보인다. 바로 이런 점을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드러냈다는 것이 <킹덤>을 여타의 숱한 '메디컬 드라마(medical soap opera)'들과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킹덤>에서 나타나는 과학자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70년대 말 이후 발전해 온 과학(지식)사회학에서 파악한 '과학' 및 '과학자'의 상을 연상시키는 일면이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과학(지식)사회학 흐름의 주창자들에 따르면, 과학지식의 생성 과정은 과학자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영향받으며 과학적 논쟁의 종결은 과학자집단 사이의 협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활동과 그 결과물로서의 과학지식이 사회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으로 파악될 수는 없다. 결국 적어도 과학자집단에 대한 태도만 놓고 본다면, <킹덤>을 과학(지식)사회학적 연구성과들의 '문화화된 버전'으로 파악하는 것도 하나의 가능한 독해방법일 수 있겠다.
 

출전: 『연세과학』 1998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