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의 역사를 보면 '기계가 인간에게 반항하고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려 한다'라는 모티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거대한 기계가 작업장에 도입되면서 노동자들의 소외를 야기했던 산업혁명기까지 그 기원을 소급해갈 수 있는 낯익은 발상이다. 이 오랜 모티브는 디지털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1960년대 들어 인공지능(AI)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풍미하면서 '진화를 거듭해 독자적인 사고능력을 갖추게 된 컴퓨터가 인간을 위협한다'는 새로운 설정으로 변모하게 된다. 1968년에 개봉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자신의 의지를 갖고 인간의 뜻에 반항하는 AI의 모습을 보여준 선구적 영화였고, 이런 이미지는 이후에도 <악마의 씨>(1977), <트론>(1982), <슈퍼맨 III>(1983), <터미네이터>(1984) 등에서 면면하게 이어져 왔다.

한편 1990년대부터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 사이의 흐려진 경계'라는 모티브가 반복해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발전과 PC통신 같은 사이버공동체의 등장과 함께 보편화된 주제로, <토탈 리콜>(1990), <론머맨>(1991), <오픈 유어 아이즈>(1997), <엑지스텐즈>(1999) 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모티브의 한 가지 극단은 현실공간 혹은 '진짜' 세계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보니 모두 '가짜'였다는 식의 설정인데, <다크 시티>(1997)나 <13층>(1999) 같은 영화들에서 엿볼 수 있는 이런 발상은 필립 K. 딕 같은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인간의 정체성 혼란'이라는 주제와 서로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는 바로 이 두 가지 모티브를 영리하게 결합해 나름의 독창성을 갖추었던 보기드문 SF영화였다. <매트릭스>는 AI의 비약적 발전이 인간과 기계간의 대립과 경쟁, 나아가 전면전으로 귀결되고, 그 결과 인간이 기계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200년 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이러한 배경은 <매트릭스>에서는 간접적으로만 언급되며 일종의 외전 격인 <애니매트릭스>의 "제2의 르네상스" 편을 보면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사실 그다지 새로운 얘기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1999년의 현실공간이 실은 컴퓨터에 의해 관리되는 ― 그럼으로써 우리가 기계에게 에너지를 제공해 주기 위해 사육되는 노예라는 '진실'을 잊게 만드는 ― 가상공간, 즉 '매트릭스'라는 복합적 설정을 들이밀었다. 이와 함께 <매트릭스>는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구세주'가 재림할 거라는 설정을 또다른 큰 줄기로 삼음으로써 얘기를 끌어가는 축으로 성서적 세계관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설정은 다분히 흥미로운 질문들을 여럿 던져놓았다. 예컨대 <매트릭스>의 등장인물들은 '진짜' 세상을 정의하는 요소가 과연 무엇인지를 놓고 설전을 벌이고, 매트릭스로 돌아가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는 한 등장인물은 "자신이 사는 세상이 '가짜'인 것을 알고서도 진정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골치아픈 질문을 제기하며, 주인공 네오는 "과연 구세주는 어떻게 자신이 구세주인 것을 아는가"라는 다분히 실존적인 차원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03년에 선을 보인 2편 <매트릭스 리로디드>와 3편 <매트릭스 레볼루션>은 그것이 완성되기 훨씬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한몸에 받았다. 과연 '성공'한 전편의 참신함과 흥미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통상적인 헐리웃 대작 영화의 속편들처럼 강화된 액션과 빈약해진 스토리라인이라는 악순환을 이어갈 것인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난 현재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이런 기대와 우려의 내용들은 절반씩만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리로디드>는 전편의 설정을 변형하고 확장하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기대를 불러모았지만 최종편인 <...레볼루션>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리로디드>를 보자. <...리로디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자유의지와 필연의 상관관계라는, 새롭게 끼어든 다분히 현학적인 주제이다.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선택이 실제로는 기나긴 인과의 연쇄 속에 놓인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는 숙명론적 견해를 지닌 프로그램들과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는 인간들로 나뉘어 언쟁을 벌인다. 이런 대립구도는 인간의 결단과 선택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던 '매트릭스'에 대한 저항운동과 '구세주'의 존재마저도 이미 프로그램 속에 감안된 요인이었음이 '설계자'와의 대화에서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진행된다. 이런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면 <...리로디드>는 <매트릭스>를 지탱했던 원래의 모티브들에서 크게 빗나간, 새로운 영화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리로디드>는 <매트릭스>가 의존하고 있던 두 개의 모티브 각각을 좀더 심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먼저 기계의 인간 지배라는 모티브는 '지능을 가진 기계의 각성과 인간과의 대립'이라는 신화적 세계를 넘어 '기계에 대한 인간의 불가피한 의존'이라는 일상적 주제로 확장되었다. 이는 극중 등장인물인 평의회 원로가 시온의 지하로 내려가 네오와 나누는 대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기계에 맞서 투쟁하는 인간들의 삶이 또다른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역설을 언급하면서, 과연 기술에 대한 '통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네오에게 묻는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기술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자끄 엘륄(Jacques Ellul) 같은 철학자의 비관적 기술관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현실과 가상 사이의 모호한 경계'라는 모티브는 사람들이 사는 현실공간이 알고보니 가상공간이었다는 식의 설정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복잡하게 얽힌다. 매트릭스에만 존재하는 '프로그램'인 스미스가 현실공간에 있는 인간의 정신 속으로 침투하고, '설계자'를 만난 후 현실공간으로 돌아온 네오가 알 수 없는 힘으로 '센티넬'(기계 파수꾼)들을 제압하는 장면을 보면, 이제 매트릭스의 안과 밖이 서로 분명히 구분되지 않은 채 뒤섞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확장된 설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과 기계, 현실과 가상의 궁극적인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인간과 기계는 서로를 완전히 '박멸'하지 않은 채 공존할 것인지, 그리고 과연 시온이 위치한 현실공간은 진짜 세계인지(바꿔말해 2199년의 디스토피아적 '현실'공간 역시 또다른 가상공간, 즉 '매트릭스'인 것은 아닌지) 같은 질문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최종편인 <...레볼루션>은 <...리로디드>가 던져놓은 화두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황망하게 막을 내렸다. 가장 큰 궁금증이었던 현실과 가상의 관계는, 결과적으로 '현실은 현실이고 가상은 가상'이었다는 식의 싱거운 결론으로 끝나고 말았다. 현실공간 속에서의 네오의 힘의 정체는 전혀 설명되지 않았고, 단지 그가 원래부터 '구세주'였기 때문에 가진 힘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구세주의 존재나 그가 가진 힘이 프로그램상의 불규칙성이나 돌발변수로 인해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그래서 그의 힘 역시 매트릭스 내로 한정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리로디드>의 전개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유의지와 필연의 상관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주인공 네오는 웬일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기계 도시로 향한다. 그리고는 기계들의 왕(?)과 담판을 벌이고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폭주하는 스미스와 대결을 펼친다. 여기서의 결론 역시 '선택은 선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결론 속에는 인간의 선택이 필연적 귀결, 즉 운명의 소산인지, 아니면 자유의지의 결과물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 있지 않다. <...레볼루션>은 이러한 전개과정상의 약점과 얕아진 깊이를 훨씬 규모가 커지고 시간도 길어진 액션 장면들로 메꾸려 시도한다. 불행히도 종국에 가서는 헐리웃 대작 영화들의 전철을 되밟고 만 셈이다.

<...레볼루션>에서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결론이다. 대결을 통한 네오의 자기희생의 결과, 시온에서의 살육전은 중단되고 인간과 (자의식을 가진) 기계는 평화로운 공존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는 소외시키는 힘, 지배의 주체로서의 기계의 전형적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한 가지 노력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2편까지의 전개를 돌이켜볼 때, 어찌보면 이는 가장 안전하고 손쉬운 결론일 수도 있다. 이런 결론에서는 <...리로디드>에서 암시되었던 '기계에 대한 인간의 불가피한 의존'이라는,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질 만한 일상적 주제에 대해 깊이있는 통찰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매트릭스> 3부작 전체는 신화의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마무리지어지고 만 것이다.
 
 
 

출전: 웹진 ≪IT≫ 2004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