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14일, 부안군수의 독단적인 핵폐기장 부지유치 신청으로 촉발된 위도 핵폐기장 논쟁은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을 한 축으로, 그리고 핵폐기장백지화 부안군민대책위와 반핵국민행동 등 환경단체를 다른 한 축으로 해서 근 반 년 이상 격렬한 대립 양상을 보였다. 산자부는 이미 정해진 사안이므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여러 차례 강행 의사를 밝혔지만, 부안군민대책위는 군민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핵폐기장 부지선정 자체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고속도로 점거, 자녀 등교거부 등 투쟁의 수위를 높였고, 정부의 문제해결 의지에 대한 불신은 급기야 작년 11월 '부안민란' 발발로 이어졌다. 결국 12월 10일 정부는 부지선정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 데 대해 공식사과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도 부지 유치신청을 받겠다고 밝힘으로써 한 발 후퇴했고, 올 2월에 부안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반대 의사가 확인됨으로써 부안 핵폐기장은 (정부의 공식 발표는 아직 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백지화 수순을 밟게 되었다.

위도 핵폐기장 논쟁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과거에 수 차례 있었던 핵폐기장 투쟁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을 놓고 보면 2003년의 부안은 1990년의 안면도나 1995년의 굴업도 때와 별반 달라진 점이 없다. 양성자가속기 사업 연계를 포함해 지원·투자액을 2조원으로 끌어올리고 지자체의 '자율적' 신청이라는 명분까지 보태었지만 부지선정은 여전히 지역 주민들에 의해 완강하게 거부되었고, 산자부와 한수원의 강경한 입장 천명에도 불구하고 위도 역시 안면도와 굴업도의 뒤를 이은 또한번의 '실패'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핵폐기장 부지선정과 관련해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 글에서는 기술민주주의와 기술시민권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모색해 보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1절에서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 기술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대두된 배경과 그 핵심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 2절에서는 그러한 기술민주주의의 원칙들에 비추어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노정되었는지를 따져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절에서는 외국에서의 사례에 비추어 앞으로의 핵폐기장 부지선정, 더 넓게는 국가 에너지정책 결정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기술민주주의와 기술시민권의 대두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일반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다양한 측면에서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이 다양한 인공물과 기술시스템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위험과 사회적·환경적·윤리적 문제를 던져놓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사회'에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정책결정은 과학기술자·정책전문가·기업 고위층 등을 포함하는 이른바 '정책엘리트'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맡겨져 있으며, 일반시민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과학기술에 대해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수동적인 수용자로서의 역할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그간 정당화되어 왔던 이유는 널리 퍼져 있는 전문가주의적 사고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들은 사회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복잡성과 난해함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그 분야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만이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내릴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이영희 2002).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간 당연시되어 왔던 이러한 가정에 점차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1960년대 이후 핵, 환경오염, 정보감시 등 과학기술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적 논쟁을 통해 점차 부각되면서 과학기술의 진보가 자동적으로 인간의 복지를 보편적으로 증진시킨다는 식의 낙관이 깨어졌고, 이것이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일반시민들의 각성과 개입을 불러왔다는 점이 중요했다. 또한 과학기술학(STS)에서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를 다룬 새로운 연구성과들은 전문성(expertise)의 의미를 상대화시키고 시민지식(lay knowledge)의 중요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전문가-일반시민의 관계를 위계적인 것에서 좀더 대칭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참여민주주의 논의는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기본적인 환경을 형성하는 데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과학기술 영역 또한 민주주의의 적용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김명진 2001).

이런 배경 하에서 1980년대 이후 '시민참여를 통한 과학기술의 민주적 재구성', 즉 '과학기술 민주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다(김환석, 1999). 기술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기술관련 정책결정 과정을 소수의 기술관료와 전문가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일반시민들이 참여해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논리는 최근들어 '기술시민권(technological citizenship)' 사상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기술시민권은 크게 ① 지식 혹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리 ② 기술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참여의 권리 ③ 의사결정이 합의에 기초해야 함을 주장할 권리 ④ 집단이나 개인들을 위험에 빠지게 할 가능성을 제한시킬 권리 등으로 구성되는데, 일반적으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국가에 의해 통치되는 일정한 영역 내에서 개인의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격요건, 참여기회, 지위 등의 공평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기술시민권이라는 개념도 '기술사회'에서 기술정책 결정과 관련해 사회 구성원들이 향유해야 하는 참여의 권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이영희 2002).
 

2.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의 문제점
 

그렇다면 지금까지 설명한 기술민주주의와 기술시민권의 관점에서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의 문제들을 짚어보도록 하자. 이는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정보제공과 여론수렴 절차의 실종

부지선정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이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민주적 절차가 완전히 실종되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얼핏 생각하면 이는 약간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과거 안면도나 굴업도 때와는 달리, 부안군 위도의 경우에는 위도 주민 과반수가 일단 유치에 찬성했고 기초단체장(군수)의 '자율적' 신청이 부지선정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안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자부나 한수원에서 위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러 달을 버틴 데는 이런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견상 충족된 것처럼 보이는 '민주적 절차'의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속에 숱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이내 확인할 수 있다.

'부안사태'의 빌미를 제공한 요인을 구체적으로 짚어보려면 핵폐기장 부지선정에서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일종의 준거점이 필요할 터이다. 여기서 2001년 4월에 미국 국가연구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 NRC) 산하의 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Board on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BRWM)가 발간한 정책보고서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BRWM 2001). 이 보고서는 핵폐기장 부지선정 문제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축에 기반해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하나는 일반 시민들과 모든 것을 완전히 터놓고 논의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과학자들에 의한 동료심사(peer review)를 활용하라는 것이다. 이 중 전자에는 일반시민, 특히 부지선정 예상지역의 주민들에게 핵폐기장에 관해 충분하고 균형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해당 기관의 의사결정 구조를 독립적이고 투명하게 하며, 정책결정 과정에 일반시민의 자문과 직접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포함된다. 특히 핵폐기장에 대한 일반대중의 거부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가능한 선택지들을 반드시 복수로 제공한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하며, 이미 결정된 내용이라도 나중에 다시 되돌릴 수 있도록 정책과정을 단계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 절차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보고서에서 제안한 내용 중에서 이번에 지켜진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충분하고 균형잡힌 정보 제공'의 측면에서 보면 한수원과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유치 홍보활동은 단연 낙제감이었다. 이들이 홈페이지와 TV광고 등을 통해 내보낸 자료들은 부지선정 과정에 있는 핵폐기장이 마치 중·저준위 폐기물만을 저장하기 위한 것인 양 오도할 우려가 매우 높았고, 외국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선전되는 핵폐기장들이 중·저준위와 고준위 폐기물 중 어느 것을 보관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밝히고 있지 않았다. 또한 2016년부터는 해당 핵폐기장 부지에 고준위 폐기물에 해당하는 사용후 핵연료(spent nuclear fuel, SNF)의 '중간'저장을 예정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잦은 육로·해로 수송이 불가피함을 감안한다면, SNF를 (발전소 부지가 아닌) 별도의 장소에 모아 관리하는 국가에는 어디어디가 있고 그곳에서는 SNF의 수송을 어떤 방식으로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를 소상하게 알려주어 지역주민들의 판단에 참고하도록 했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얘기는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핵폐기물을 장기적으로 보관할 때 어떤 변화가 생길지에 관한 연구에서 외국의 정책보고서들이 하나같이 과학기술의 불확실성과 현존 지식의 한계, 추가 연구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홍보자료들에는 '전혀 위험하지 않고 100% 안전'하다는 식의 호언장담만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순한 '정보 제공'의 측면이 이럴진대, 의사결정 구조의 독립성·투명성 확보나 일반시민의 정책참여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길게 말할 것도 없을 터이다. 산자부와 한수원은 애초 작년 2월에 발표되었던 예비 후보지 4곳(영덕, 울진, 영광, 고창)에서 빠져 있었던 부안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데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고, 선정 발표 직후에는 자문에 응한 '각계 전문가'의 명단 공개조차 거부함으로써 불신을 증폭시켰다. 또한 일반시민의 직접참여는 차치하더라도 요식행위에 불과한 공청회조차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고 '대화'와 '설득'을 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주민들의 위험인식 공유 실패

선정 과정 그 자체도 문제였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더욱 키운 것은 선정 과정 이후 산자부와 한수원의 행보였다. 산자부는 핵폐기장 부지의 적합성 여부를 따져묻는 반대 진영에 답해 핵폐기장의 기술적 안전성을 강조함으로써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기술적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바꿔말해, 과정이야 어쨌건 결국 안전하니 별 문제 없지 않으냐 하는 식으로 논의를 몰아가려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자부의 노력은 핵폐기장의 위험에 대한 지역 주민의 우려를 불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증폭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왜 이런 역설이 생겨났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산자부 및 원전 산업계의 핵공학 전문가들과 부안의 지역 주민들 사이에 '위험'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랐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핵공학 전문가들은 위험이 어떤 정량적 수치로 환산될 수 있으며 그 수치의 높고 낮음이 곧 위험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나타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정량적 수치는 많은 경우 확률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면 이 확률값은 어떻게 구할까? 교통사고처럼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지난 시기의 통계를 통해 앞으로의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대략 예측해볼 수 있지만, 핵발전이나 핵폐기물 처분처럼 사고가 드물게 일어나지만 결과는 치명적인(low probability/high consequence) 경우에는 그런 방법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해당 시스템을 분석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체계적으로 따져보는 사고결과예상계통도(fault tree)를 그려 확률값을 구한다(Royal Society 1992). 핵공학자들의 관점에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 값이 매우 낮다는 의미다(핵폐기물 유출로 인해 죽을 가능성은 번개나 별똥별에 맞아죽을 가능성보다 낮다느니 하는 홍보도 이런 값들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다).

반면 지역 주민들이 가진 위험에 대한 생각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험을 정량적으로 나타낸 수치(즉, 전문가들이 산정한 '물리적 위험'의 크기)는 단지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지닐 뿐이다. 지역주민들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위험 관리를 담당한 기관이나 제도(이 경우에는 산자부나 한수원)가 얼마만큼 믿을 만한 존재인가 하는 신뢰성 여부이며, 바로 이러한 신뢰의 정도가 곧 위험의 수준을 판단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Wynne 1995). 이해를 위해 한 가지 쉬운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TV에 나와 건강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의사나 대학교수의 얘기를 비교적 쉽게 믿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건강 전문가들이 '옳은' 얘기를 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별다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보고 이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의료사고를 경험했거나 의사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오히려 병을 키운 적이 있는 사람의 경우라면 TV에 나오는 건강 전문가들의 말도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험 인식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원전 산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 이번 부지선정 과정에서도 예외없이 나타난 ― 비밀주의, 정보의 왜곡 및 은폐, 비민주적 절차, 여론조작, 금품을 통한 회유 등이 해당 기관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급격히 떨어뜨린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지역주민들이 핵폐기장의 위험을 매우 크게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뢰가 추락한 상황에서는 핵폐기장의 기술적 안전성을 '대화'를 통해 '설득'하려 드는 행위 그 자체가 지역 주민들의 위험 인식을 무시하고 전문가들의 위험 인식만을 강요하는 행위가 되며, 이는 전문가들이 속한 기관에 대한 신뢰를 더욱 침식해 지역 주민들의 위험 인식을 오히려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보면 정부에서 주민들에 대한 '대화'와 '설득'의 노력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사태가 더 악화되었던 역설적 상황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할 수 있다.
 

3) 주민참여 과정의 자의적 이용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둘러싼 대립구도에서 갈등해결 수단으로 부각되었던 '주민투표'에 관한 것이다. 주민투표가 처음 제안된 것은 부지확정 발표가 있은 지 1주일이 지난 작년 7월 말 MBC TV토론에서였다. 이 자리에 나온 부안군수가 핵폐기장 문제에 관한 주민 찬반투표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김두관 당시 행자부 장관이 이를 수용할 뜻이 있음을 밝힌 것이 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부안군민대책위는 절차를 무시한 유치신청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므로 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이에 반대했고, 산자부 장관도 주민투표의 법률적 근거가 미비하고 국책사업을 지역주민의 투표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들어 역시 수용불가 의사를 밝힘으로써 논의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다.

주민투표가 다시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부상한 것은 정부와 주민간의 공동협의회에 중립인사로 참여했던 최병모 민변 회장이 11월 초 '연내 주민투표 실시'를 중재안으로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이 안에 대해 군민대책위는 부지선정 원천무효라는 기존의 입장을 양보해 주민투표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이번에는 정부에서 연내실시 불가 입장을 밝혀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빚어진 '부안민란'에서 정부의 문제해결 의지에 대한 불신이 커다란 요소로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민투표의 연내실시를 위한 정부와의 협상이 무산되자 부안 주민들은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는 대신 자체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올 2월 14일 실시된 투표를 통해 72%의 투표율에 92%의 반대라는 주민들의 압도적 의사를 확인했다. 자체적인 주민투표 실시에 대해 '자발적 주민참여, 참여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만, 산자부와 부안군은 법적 효력이 없는 '여론조사'에 불과하다고 애써 의미를 폄하하면서 결과의 수용을 거부했다.

주민투표를 둘러싼 이러한 일련의 공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약 우리가 주민투표라는 제도적 틀을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이는 지역주민 모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두말할 나위없이 바람직하며 시급히 도입되어야 마땅한 제도일 것이다. 그러나 부안 핵폐기장 논쟁에서 주민투표는 쌍방이 동의할 수 있는 갈등해결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갈등을 더욱 증폭시킨 면도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주민투표가 제안된 시점이 적절치 못했으며 제안 주체가 이미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주민투표는 핵폐기장 유치신청 이전에 거쳐야 할 민주적 절차의 일부로 의당 고려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 순서가 뒤바뀌어 이미 유치신청이 이루어지고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빚어진 후에 주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임시변통으로 주민투표가 제시됨으로써 그것이 가진 의견수렴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크게 퇴색하고 말았다. 또한 제안 주체가 이미 주민들의 신뢰를 잃은 부안군수와 행자부 장관이었다는 점 역시 주민들이 그 배후에 숨은 의도를 의심케 하고 초기에 이를 거부하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주민투표를 둘러싼 청와대, 행자부, 산자부, 한수원간의 엇박자와 전략적 태도 역시 주민들이 품은 회의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결국 지역 주민들은 정부가 제안한 주민투표를 민의를 수렴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진지한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투표의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찬성쪽 주민들을 압박해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계속 추진하려는 속셈을 담고 있는 시도로 보게 된 것이다(한재각·김명진, 2003).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혁신적 시민참여 제도를 도입하는가에 못지않게, 그것을 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제안하고 실천에 옮기는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앞으로의 정책방향
 

지금까지 기술민주주의의 여러 원칙들에 비추어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부지선정에 앞서 충분하고 균형잡힌 정보제공과 여론수렴을 위한 민주적 절차가 전혀 가동되지 않았고, 선정 발표 이후에도 위험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인식이 철저히 무시되면서 주민들을 '대화'와 '설득'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으며, 주민투표와 같은 시민참여의 제도적 틀이 일관된 원칙 없이 상황에 따라 제안되거나 거부되거나 함으로써 주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것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이는 우리보다 이런 갈등을 앞서 겪은 서구 국가들의 사례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김명진 2003). 이들은 최근 고준위폐기장과 중저준위폐기장에서 공히 실패를 경험하면서 이에 대응해 핵폐기장 부지선정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의 부지선정 방식이 과학적·공학적 기준에 근거해 일단 부지를 선정한 후 이에 수반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사후적인(reactive) 대응을 하는 식이었다면, 최근 국제기구나 정책자문기구들에서 적극 권고하고 있는 것은 부지선정 초기부터 과학적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까지를 사전에(proactive) 고려하며 변화하는 상황을 그때그때 과정에 반영하는 단계적 진행(Adaptive Staging) 방식이다. 미국 국가연구위원회 산하의 방사능폐기물관리위원회가 2003년에 발간한 보고서에서는 이러한 단계적 진행 방식의 필수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BRWM 2003: 159-166). 이는 주로 고준위폐기물의 처분을 위해 작성된 것이지만, 중저준위폐기물 처분장의 부지선정 과정에도 충분한 함의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 체계적 학습 추구

기술적 학습뿐 아니라 사회적 학습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부지선정 이전에 시범 단계를 두어 정보를 수집하고, 모든 단계에서 이해당사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사회적 학습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 번복가능성, 회수가능성, 유연성

부지선정과 핵폐기장 건설 과정의 각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선정 자체를 취소하거나 이전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단계적 진행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핵폐기물 처분 사업자가 미리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기 쉬우며, 이는 지역 주민의 신뢰를 얻는 데 있어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계획을 장기적으로 유연하게 세우고 조급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 한 가지의 선택지나 대안이 아닌 다양한 선택지들을 미리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 감사가능성, 투명성, 무결성

원전산업계는 비밀주의 전통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선정 기준이나 중간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최종 결과만 공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중의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독립적인 검토기구를 설립하고 정보를 공개하며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처음 단계부터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상당수의 국가들에서는 이러한 참여가 법 조항에 의무로 명시되어 있다.

- 대응성

장기적인 스케줄을 미리 짜지 말고, 충분한 학습 경험을 축적하고 앞 단계의 학습 경험이 이후에 반영될 수 있도록 시간을 넉넉히 확보해 두어야 한다.

물론 국가마다 정책문화, 규제방식, 원전 현황, 핵폐기물 처분의 역사 등이 상이하기 때문에 이 원칙의 적용이 무조건적 '성공'을 보장한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이미 수 차례의 실패를 통해 핵폐기물 처분을 담당한 사업자와 정부 당국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즉각적인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권한의 이양, 정보공개, 주민참여 등은 핵폐기장 부지선정과 같이 지역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에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생략할 수 없는 최소한의 절차일 것이다. 그리고 일단 단계적 진행 방식을 도입하고 나면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원칙들을 지켜 나가겠다는 정부 당국의 의지가 중요하다. 예컨대 주민참여를 위한 여러 절차를 일단 진행한 후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식의 기회주의적인 대처는 상황을 오히려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마지막으로 핵폐기장 부지선정과 같은 과학기술 관련 대형 국책사업에 착수하기 전에 사회영향평가(social impact assessment)를 그 속에 포함하는 포괄적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를 의무적으로 수행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기술영향평가란 새로 도입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사전에 평가해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제도로, 2001년 제정된 과학기술기본법에 관련 조항이 포함되어 우리나라에도 이미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 물론 기술영향평가의 과정에서도 앞서 언급했던 정보의 공개, 다양한 분야와 입장의 전문가 포괄, 일반시민의 참여 보장 등의 원칙들이 지켜져야 그 과정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기술영향평가의 실시는 기술적 위험의 수준에 대한 판단뿐 아니라 해당 기술이 인근 지역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사전 평가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예상되는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 참 고 문 헌 >

김명진. 2001. 『대중과 과학기술』, 잉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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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한국환경보고서 2004』(녹색연합,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