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있어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요소를 들라고 하면 아마도 과학기술이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20세기 들어 새로이 비약적인 성공을 이룬 특정 영역의 기술시스템들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를 상상하기 힘든 상황을 빚어냈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체현물들은 상호간에 복잡한 연관을 맺으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있다.

예컨대 서구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기간 동안 급격히 성장한 전력 공급 시스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력 공급 시스템은 전기를 만들어 자체적인 전력망을 통해 공급하는 설비 회사(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전력과 같은 회사), 공급된 전기를 다양한 형태로 소비할 수 있도록 각종의 전기기구들을 생산해 내는 회사들(예컨대 ××전자 같은 회사들), 발전소에 필요한 화석연료를 공급하는 운송체계(유조선, 선박 회사),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시추선과 이를 정제하는 정유 공장들 등 각종의 기술적 시스템들을 그 속에 포괄하면서 다른 기술시스템들과 상호 연관을 맺는 거대시스템이다. 다른 시스템들과의 상호 연관을 통해서 사회 속에 강하게 뿌리내린 이 시스템은, 사람들의 생활 리듬을 바꾸고 가정에서의 삶의 양식을 바꾸며, 노동 방식의 변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생활을 과거와는 다른 특정한 방식으로 틀지우는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의 정보통신기술이나 생명공학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대형기술사고의 가능성이다. 대형 기술시스템의 대사회적 영향력 확대와 과학기술의 일상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기술사회에서는, 기술시스템에 포괄된 특정 구성요소의 '사소한' 문제가 기술시스템 전체의 순간적인 붕괴로 이어지는 대형기술사고를 종종 목도할 수 있다. 울리히 벡 같은 이들은 현대사회의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이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하기도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는 최근 괌에서의 KAL기 추락 사고를 비롯하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의 붕괴, 구포역 열차 탈선,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폭발 등의 사례들을 통해 잘 드러난 바 있다.

이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함의는 이렇다: 즉,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와 달리 과학기술이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 속의 모든 일반인들과도 여러 가지로 관계를 강하게 맺는 것이라는 점. 이는 이미 등장한 과학기술이 사회성원들 모두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바로 그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지출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학기술자들이나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다. 비록 지금의 상황에서 과학기술을 실제로 생산하는 일은 과학기술자들과 각종의 정책수립기관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이러한 과학기술의 생산물들이 사회 속에 도입되었을 때 직접적으로 맞부딪치면서 직접 그것을 겪어야 하는 이들은 사회 속의 일반인들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서 서구,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라고 명명된 분야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이러한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제 이 글에서는 영국의 논의를 중심으로 해서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에 대한 주요 논의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에 대한 관심의 제고, 그리고 통념들
 

사회 속의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고 있는 이해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는 이미 1930년대부터 영미권의 좌파 과학자들과 운동집단 - 예컨대 홀데인(J.B.S. Haldane)같은 학자나 영국의 과학노동자연합(Association of Scientific Workers) - 들로부터 나온 바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 이후에도 계속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영국의 왕립학회(Royal Society)가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내놓은 이후 다시 관심이 진작되었다.

비록 위에 언급한 이들이 문제제기를 내놓은 시기와 상황이 서로 다르긴 했지만, 이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 - 왕립학회의 1985년 보고서에서 잘 드러난 - 을 공유하고 있었다: 첫째, 일반인들은 과학기술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으며, 그 결과 과학기술적인 지식이 대단히 부족하다. 둘째, 핵발전소나 유전공학의 경우와 같이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들은 대부분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적인 지식을 '잘못' 이해한 결과 빚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째, 과학기술은 적절히 이해되고 또 사용되면 사회 전반에 대해 균등하고 보편적인 혜택을 가져올 것이다, 넷째, 일반인들에게 충분한 과학기술 지식을 공급하는 것은 과학기술정책 수립과정을 향상시키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이러한 문제의식이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를 한탄하는' 식의, 다분히 과학기술자들의 자기변명에서 도출된 엘리트적 관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긴 했지만, 일반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과학기술 - 즉, '과학적'인 것이라고 주장되는 특정한 방법이나 지식, 그리고 그러한 방법이나 지식의 체현자로 흔히 인정되는 전문가로서의 과학기술자들 - 과 조우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탐구하고 이러한 상황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그 자체로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1988년에 영국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된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에 대한 의식조사는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의 중요성을 내세운 초기 주창자들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줌과 동시에 이들이 갖고 있는 사고 틀의 한계 역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영국인들 중 계층별로 안배하여 무작위로 추출한 2000여 명을 대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와 지식정도를 측정하는 면접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 먼저 전문가들(과학기술자들과 정책수립자들)이 갖고 있는 통념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과학기술에 대해 '대단히 높은' 관심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신문에 다음의 주제로 기사가 실릴 경우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보겠는가"라는 설문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치(16.2%), 스포츠(27.9%), 새 영화(17.2%)에 비해 새로운 의학적 발견(49.0%), 새로운 과학적 발견(38.2%), 새로운 발명과 기술(39.4%)에 대해 훨씬 더 큰 관심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관심은 이들 스스로가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 과학기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는 못하다'라고 답변한 것과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예컨대 정치 영역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16.2%)과 정치 영역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16.8%)은 대체로 그 비율이 일치하는 것에 반해, 새로운 의학적 발견에 대해서는 관심도(49.0%)와 스스로가 판단한 이해도(9.9%)가 크게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일반적인 과학지식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를 측정한 퀴즈풀기에서도 대단히 낮은 '정답율'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를 어느 정도 '입증'하고 있다. 예컨대 설문에 응한 사람들 중에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1년을 주기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34%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항생제가 바이러스는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28%, 전자가 원자보다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30%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비록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의외로) 높은 관심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과학자들의 '우려', 즉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와 '오해'를 어느 정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조사를 담당했던 이들은 현대물리학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양자역학)뿐만 아니라 과학혁명기의 대표적인 사건(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의 대립)에조차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거나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을 문제삼으면서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한 '과학기술의 대중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에 대한 새로운 접근
 

그러나 앞서의 조사를 담당한 사람들이, 또 그 조사 결과를 보면서 '대중들의 무지'에 대해 소리높여 외친 사람들이 소홀하게 다룬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와 스스로 측정한 이해도의 분명한 차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 영역에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일반인) 사이의 사회적 '격리'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는 과학기술 영역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파급효과를 낳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지식이나 권위는 대단히 편중·독점되는 현상이 널리 퍼져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 대다수 성원들에게 있어 과학기술적인 권위로부터의 소외가 만연해 있는 것이다. "'과학'이란 마치 과학 영역에서 일하는 전문가들만이 갖고 있는(또 가질 수 있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그 정의상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또 알 수 있는) 지식은 과학 축에 낄 수도 없다"라고 말한 한 과학사회학자의 말이 여기에 적절한 언급이 되겠다.

1990년대 들어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의 문제에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을 시도한 일군의 학자들은 전문가와 일반인들 사이의 이러한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관계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들은 전문가들의 시각으로 일반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 '수준'을 재단하였던 기존의 논의틀을 비판하면서, '테이블을 돌려'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들은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를 다룸에 있어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지식이 부족하다'라는 식으로 진단하는 소위 "인식적 결여(cognitive deficit)" 모델을 비판하면서, 일반인들이 특정하고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연구를 집중하였다.

이들은 과학기술이 사회 속으로 도입되는 과정에 대한 수많은 구체적인 사례연구들 - 생명공학 관련 입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광우병을 둘러싼 논쟁, 새로운 의료기술에 대한 태도,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립을 둘러싼 논쟁 등 - 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상호관련된 함의들을 이끌어냈다.

첫째, '과학'이라는 개념은 단일한 것이 아니다. '과학'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 속의 일반인들 역시 단일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혹은 동일한 지식을 공급받아야 하는) 균질적인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퀴즈풀기식의 일반적인 과학지식의 이해도를 조사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으며, 결국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중요함이 이로부터 드러난다.

둘째, 공식적 지식(formal knowledge)의 인지도가 낮다는 것 자체가 곧 비합리성을 의미한다는 식의 통상적 사고는 대단히 그릇된 것이다. 예컨대 과학기술 영역의 전문가들은 전자가 원자보다 작은지 큰지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일반인들은 당연히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으로 단정짓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핵발전소가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문제를 두고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그러한 공식적 지식의 인지 여부가 수행하는 역할은 지극히 미미하다. 아직까지 공식적 과학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경우들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결정의 순간에 과학은 오히려 논의의 중심으로부터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일반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종종 (과학)언어적인 형태로는 좀체로 표현되지 않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의 형태를 지니는 경우가 많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세째, 과거에 과학기술자들이나 정책수립자들과 같은 사회의 엘리트들이 가정했던 바와는 달리, 과학기술은 사회 속에서 그 인식적인 권위(소위 과학의 '객관성')에 힘입어 자동적으로 신뢰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도출된 지식에 의존하여 서로 다른 근거에서 과학기술에 신뢰(혹은 불신)를 보낸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과학기술과 이를 다루는 전문가로서의 과학기술자들을 얼마만큼 신뢰하는가의 문제는 과거의 유사한 경험들에 대단히 크게 의존한다. 예컨대 과학기술자들이 계속해서 '안전하다'라는 진단을 내놓았던 핵발전소가 한번 사고를 일으켰다고 할 때, 이러한 상황 이후에 전문가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네째,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적인 지식을 잘 알지 못하며, 대체로 그러한 지식의 습득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문제상황 - 예컨대 주위에 핵폐기물 처리장이나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공해시설이 들어서는 경우 - 에 처하게 된 이후에 일반인들이 기울이는 자구적인 해결 노력은 오히려 전문가들을 무색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들은 실험실과 같은 통제된 상황에서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만 잘 알고 있기 일쑤인 과학기술자들에 비해 볼 때,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위치지워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잘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생명공학의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면서 앞서의 함의들이 갖는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985년에 EC 각료 이사회의 집행기관인 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동물 성장 호르몬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작업을 수의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소위원회에 위임하였다. 이 호르몬은 가축류의 소화관에서 자연 상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위원회는 실험대상 동물에 대해 다양한 처치를 가해 본 후에 시간대별로 잔류 호르몬의 수준을 측정하여 그 수준이 일정한 정도 이하이면 합리적인 안전 기준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소위원회는 이 호르몬이 특정하게 지정된 조건 - 생화합물을 수의사 감독 하에 투여해야 하며, 먹을 수 없는 부위에 주입해야 하고, 호르몬 투여 이후 도살하기 이전에 충분한 시간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등의 - 하에서 사용될 경우 아마도 안전할 것이며, 상업적으로 시판해도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유럽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최종의결권을 가진 EC의 각료 이사회는 호르몬의 전면 생산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대중적 캠페인에 직면하여 전문가들의 의견을 재검토할 것을 유럽위원회에 지시하였다.

과학기술자들이나 정책수립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생명공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는 대중들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에 전문가가 내놓은 '합리적인' 의견이 짓밟힌" 경우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틀은 지나치게 협소할 뿐만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이들은 앞서 소위원회에 의해 제안된 '조건'들이 실험실 속에서가 아니라 그 호르몬을 사용하는 유럽 전역의 모든 농장에서 준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험적으로', 오히려 '근거없이' 가정하고 있다. 반면 통상적인 사회적 '관행'에 보다 익숙한 일반인들과 시민운동단체들은 그러한 조건의 준수를 과학기술자들이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점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어도 법안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합리성 대 비합리성의 문제로 인지될 성격의 것이 아니며, 이 문제의 해결에 있어 과학지식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결국 소위원회에 속한 전문가집단이 내린 결론은 과학적 결정이라는 외피를 쓴 사회적 가치판단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수 있듯, 많은 경우에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는 과학기술이 사회 속에 도입되는 과정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시해 준다고 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가 갖는 사회적 의미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의 중요한 한 차원이자 이 문제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과학기술 영역에서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불균등한 권력을 배분받으며 그 간극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과학기술 영역의 특수성(즉 '전문적인' 지식의 필요) 때문인 것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그러나 전문적인 과학지식이 과학기술의 문제 해결에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며, 전문가들만이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 역시 아님을 위에서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내놓은 주장의 객관성, 투명성, 문제 해결에 있어서의 중심성과 같은 의제들이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기술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1988년의 과학기술 의식조사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은 과학이 모든 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알 필요가 있으며, 정책결정이 민주적인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논쟁이 선행될 필요가 있고, 과학기술의 개발이 사회적인 비용지출에 의해 후원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최소한의 인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들었다. 맞는 말이다. 여기서 '과학기술의 대중적 이해'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은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시혜적 수준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강력한 '실질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그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반드시 과학기술의 세부사항들을 잘 알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지적이 내포하는 함의는 얼핏 보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실천활동의 근거로 전화되었을 때는 대단히 위력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전: 『공동선』 1997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