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대중화'가 아닌, 일반인과 전문가의
상호작용에 기반한 의사소통이 문제해결의 출발점
 

70-80년대 이후 등장한 과학지식사회학과 '새로운' 기술사회학은 '합리적인 과학자사회'라는 신화를 넘어 과학지식이 구성되는 사회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기술이 형성되어 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과학과 기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개척하였다. 아울러 과학기술에 대한 페미니즘적 시각은 그동안 빠져 있었던 중요한 한 요소인 '성별(gender)'을 과학기술사회학의 영역 속에 새롭게 도입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과학기술에 대한 다양한 사회학적 접근들이 가져다 준 '새로움'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소 제한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근들은 대체로 과학(지식)과 기술이 형성되는 과정, 즉 과학기술의 '공급' 측면에만 여전히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개별 과학기술의 '수요'나 '소비'의 측면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었거나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고, 이에 따라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직접 관여하는 과학자, 엔지니어, 정치가 등의 과학기술 엘리트들이 아닌 일반인(layman)들은 과학기술사회학의 연구영역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짙었다.
 

일반인-전문가 관계에 대한 전통적 이해
 

물론 일반인들이 전적으로 무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과학사·기술사나 과학기술사회학의 연구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인이 과학지식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술적 산물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초부터 존재했고, 이는 특히 좌파적 성향을 지닌 과학자들이나 과학기술정책 수립자들의 경우에 그러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일반인'들이 과학기술 영역에 종사하는 자신들과 동등한 행위자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깨우치고 계도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대중'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지식 자체가 여타의 지식들에 비해 인식론적으로 우월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다 더 필요한 지식이며 또한 기술적 인공물들은 사회에 보편적인 혜택을 가져다 주는 중립적인 존재라고 간주했기에, 일반인들이 그 지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인공물들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과학기술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에게 각종의 과학기술 지식을 쉽게 풀어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즉 '과학기술 대중화(popularization)'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서 사회 속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요소가 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과학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에서 요약한 바, 일반인과 전문가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이 둘간의 관계가 수평적이고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위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즉, 엄격한 훈련을 거쳐 과학기술자로서의 자격을 획득한 전문가들은 그렇지 못한 일반인들에 비해 볼 때 더 많은 과학기술 지식을 소유하였으므로 판단능력에서 있어 '우월'하며, 따라서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지식이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이다.
 

PUS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러나 이러한 위계적이고 일방적인 관계에 대해 점차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과연 일반인은 무지하며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일 뿐인가? 과학기술자들이 산출해 낸 지식이나 인공물은 가치중립적인 것이고, 따라서 무매개적으로 '대중'들에게 공급되어야 마땅한 것인가? 60-70년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급진적 과학 비판의 움직임과, 새로운 학문 분야로 등장한 과학지식사회학·기술사회학의 여러 조류들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 문제제기할 수 있는 실질적 근거들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에 기반하여 80년대 후반에는 '일반인의 과학기술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PUS로 흔히 줄여 쓴다)'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문분야가 성립하게 되었다.

새로운 PUS 프로그램에서는 일반인과 전문가 사이의 관계를 위계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의 주창자들은 전문가들의 시각으로 일반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 '수준'을 재단하였던 기존의 논의 틀을 비판하고, '테이블을 돌려'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전문가들이 가지고 있는 '제대로 된' 지식이 대중화 과정을 거치면서 '엷어진' 형태로 일반인들에게 전달된다는 모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전문가 대 일반인이라는 이항대립 대신, 새로운 PUS의 주창자들은 모든 일반인들이 특수한 형태의 전문가이며, 전문가들 역시 자신의 전문분야 바깥에서는 일반인에 불과하다는 구도를 제시한다. 이런 시각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이고 모든 곳에서 유용한' 지식 혹은 인공물로서의 과학기술의 개념이 해체되고 '맥락의존적이며 특수한 환경 속에서만 유용한' 지식 내지는 인공물의 관념이 도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전문가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그들이 개발한 인공물이 문제해결에 실패하고 일반인들의 지식이나 실천의 유용성이 도리어 증명되는 사회학적 사례연구들을 통해 자신들의 논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PUS의 영향과 TA의 변모
 

일반인-전문가 관계와 일반인 지식의 유용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이제 과학기술에 내포된 문제점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려는 실천들에 대해 중요한 함의를 지니게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우회로를 지나 보도록 하자.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드러난 것을 필두로 해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내포된 여러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우려를 자아내기 시작한 60년대 말 이래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나타났는데,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 TA로 흔히 줄여 쓴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TA는 새로 개발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사전에 평가하여 부정적 측면을 극소화시키고 긍정적 측면을 극대화하여 과학기술의 바람직한 발전을 도모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지칭한다. TA는 60년대 말 미국에서 처음으로 제도화되었으며 70년대 이후 영국, 네덜란드 등의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나갔다.

TA를 수행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이 중 전통적인 방식은 주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예상되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을 예측하여 이를 정부 기구 등의 정책을 통해 반영하는 것으로 미국의 기술영향평가국(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에서 행해졌던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과학적 합리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평가 과정에서 과학자나 관료 등의 전문가들에게 지배적인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반인-전문가 관계를 파악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방식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80년대 덴마크나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나타났는데, 새로운 TA의 방식은 과학기술사회학과 새로운 PUS 프로그램의 발전 결과 도출된 여러 시사점들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을 예측하고 이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일반인들과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역할을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으며, '과학적' 해결책의 제시가 아닌 사회적 논쟁을 장려함으로써 일반인 지식이 과학기술적 문제의 해결, 나아가 과학기술의 개발과정 자체에 있어서도 대단히 유용한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여러 나라들에서 각광받고 있는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함의
 

지금까지의 얘기는 아직까지 '과학기술 대중화'라는 말이 좀더 귀에 친숙하게 들리고 TA의 제도화가 아직은 요원하게 보이는 우리나라 상황에 당장은 걸맞지 않는,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올해 11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유전자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에 대한 합의회의'가 열리는 등, 일반인과 전문가의 매개를 기반으로 해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점차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상황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출전: 『연세춘추』 1998년 1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