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지금, 20세기의 끝자락에 살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가 의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두고 지난 100년간을 돌아보게 된다면, 아마 그는 지난 한 세기를 '기적의 세기'라고 부르고 싶어질지 모른다. 다른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발전도 놀라왔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 현대의학의 틀을 만들어낸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의학의 발전상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선 지난 한 세기를 거치면서 생리학(生理學)과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생명 현상의 메커니즘이 규명되고 생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단위가 밝혀짐으로써 인체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19세기 말,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코흐(Robert Koch) 등의 세균학자들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균을 발견한 이후 근대적 질병관이 점차 확립되었고, 이는 '특정 원인-특정 질병-특정 치료법'을 서로 연관시키는 근대 의학 체계의 성립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소위 '기적의 약'이라고 불리워진 항생제가 20세기 들어 최초로 개발되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푸른곰팡이로부터 페니실린을 우연히 발견한 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숱한 항생제들이 발견 내지는 합성되어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 이전까지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많은 질병들의 치료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놀라운 의학의 발전을 목도하면서, 우리가 100년 전에 비해 볼 때 더 높아진 생활 수준과 더 길어진 평균수명을 현대의학의 혜택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기적의 약'인 항생제로 대표되는 현대의학은 100년 전만 해도 발병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여러 질병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았던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인간의 삶의 질의 실질적인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함정, 아니 현대의학에 대한 하나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현대의학의 성과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기 전에 다음의 질문들을 던져 보아야 한다: 과연 의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긍정적인 측면만을 가져다 주었는가? 우리는 현대의학이 가져다 준 현란한 업적들에 현혹된 나머지 그 속에 내재한 근본적인 한계를 간과하지는 않았는가? 의학의 놀라운 발전에 가려 다른 문제점들이 은폐되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현대의학의 본질에 대한 좀더 깊은 성찰이 가능해질 것이다.
 

질병은 '정복'되지 않았다
 

가장 상식적인 점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간단하게 말해, 현대의학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결코 '정복'되지 않았다. 여기서 이 문장을 상투적인 진술로 들으면 안된다. 이 말 속에는 지금까지 상당수의 질병들에 대해 완전한 '퇴치'가 이루어졌고 앞으로 의학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여타의 질병들도 결국에는 정복될 것이라는 소박한 낙관이 담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금껏 우리가 현대의학의 효능(efficacy)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해 왔으며, 또한 질병이 제거된 것으로 착각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 포함되어 있다.

'질병은 정복되지 않았다'라는 진술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동안 우리가 100% 치료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질병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병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 전자는 그동안 항생제로 치료해 왔던 세균성 감염질환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20세기에 처음 등장한 항생제는 인체에는 전혀, 혹은 거의 해를 주지 않으면서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만을 죽임으로써 결핵, 세균성 폐렴, 패혈증, 매독, 임질 등의 세균감염증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항생제 사용의 결과 그 항생제에 내성(耐性)을 가진 세균들이 광범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항생제는 세균의 세포벽을 파괴하고 단백질 생산 능력을 억제함으로써 세균을 죽이는데, 항생제에 내성을 가지게 된 세균은 항생제를 중화시키는 효소를 분비하거나 세포벽을 강화함으로써 항생제에 저항한다. 최근들어 점점 더 많은 세균들이 상당수의 항생제에 대해 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관찰되었고, 이는 60년대 이후 사람과 가축류에 대한 항생제의 사용이 급증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이미 정복된 것으로 생각되었던 평범한 세균성 질환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환자들의 수도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1992년 한 해 동안에만도 미국에서 항생제에 내성이 강한 세균성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1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결국 항생제는 질병을 일방적으로 정복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내성을 가지게 된 세균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해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고, 최근에는 새로운 항생제의 개발이 정체 상태에 빠짐에 따라서 항생제의 효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회의가 생겨나고 있다.

한편, 질병의 성격이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질병이 정복되었고 또 앞으로도 정복될 것이라는 낙관에 찬물을 끼얹는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질병의 대부분은 인플루엔자(독감)나 세균성 폐렴 같은 급성·전염성 질환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질병의 중심은 암이나 순환계 질환, 심장병, 당뇨병과 같은 만성질환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러한 만성질환들은 즉각적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하지는 않지만 세균감염성 질환들과는 달리 약물의 투여에 의해 급격한 증상의 호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이 중 일부는 수술과 같은 외과적인 조치에 의존하더라도 완치를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우리는 이제 질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나아가서는 그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이를 예방하는 것에 힘써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인간 평균수명의 증가는 현대의학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현대의학이 질병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더라도 질병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에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인간의 평균수명이 증가한 것은 그래도 역시 현대의학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사망률 감소는 의학의 발전에 크게 힘입었다는 의학사가(醫學史家)들의 전통적인 주장은 최근들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판자들은 의료의 효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의료개입이 과연 어느 정도 효율적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사회의학자인 맥퀀(T. McKeown)은 건강증진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생활조건의 향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방을 대상으로 인구학적 분석을 시도하여, 이곳에서의 사망률의 감소는 주로 영양, 출산양태, 위생상태의 개선에 기인하며 예방접종이나 치료 등 의료개입의 영향은 20세기 중엽까지도 극히 미미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또한 블레인(D. Blane)과 같은 학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기간 동안의 사망률의 감소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의 증가와 노동조건의 개선에 크게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비판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평균수명의 향상은 의료개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조건의 향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실증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예컨대 앙드레 고르(Andre Gorz)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개인당 약품 구매량은 1959년에서 1972년 사이의 13년 동안 2.7배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의료개입의 혜택이 더 커졌을 것임에 분명한 1960년대 이후에 선진산업국가들에서의 사망률은 도리어 증가하고 있다.

만약 비판자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평균수명의 증가가 의료개입의 결과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으며 그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의 변화에 힘입은 것이라면, 현대의학에 대한 '신화'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추측컨대, 그것은 몇몇의 사례들에서 항생제의 사용이 보여준 극적인 효과 때문일 것이다. 결핵성 뇌막염이나 패혈증 등의 세균감염성 질환으로 인해 거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가 막 개발된 항생제를 투여하여 죽기 직전에 살아난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이런 소수의 사례들이 마치 전체 인구를 대변하는 것인 양 인지되었기에 현대과학과 인간의 평균수명 증가에 얽힌 신화가 생겨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자율성의 상실과 불평등을 수반한다
 

지금껏 언급한 바로부터, 현대의학은 그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학에 내재한 문제점은 단순히 사회에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한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의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와 함께 상당히 심각한 문제점들을 같이 가져왔다. 비판자들은 그 문제점을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먼저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공식적인 의료에 점차로 더 크게 의존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병원이 병을 만든다 Limits to Medicine』라는 책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현대의학에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역설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가치료 혹은 가족, 친지를 직접 간호하는 것보다 보건의료 전문가에 의해 진료받는 것을 더욱 선호함으로써,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과 통제권을 잃어버리고 '전문가'에 대해 더 많이 의존하게 되는 폐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의사의 개입이 병을 낫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약의 부작용이나 잘못된 수술 후유증과 같은 병원성 질환(iatrogenic effects)을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도 지적했다. 요컨대 그의 주장은 현대의학이 전적으로 쓸모가 없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의료화(medicalization)가 과도하게 이루어져 그 결과 의료의 개입이 역효과를 불러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현대의학의 두번째 문제점은, 의학이 질병을 전적으로 생물학적인 변화로 파악함으로써 질병과 사회적·환경적 요인간의 역동적 관계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균을 알아내고 인체를 구성하는 단위인 기관(organ), 조직(tissue), 세포(cell)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얻어낸 것이야말로 현대의학의 개가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근간을 이루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질병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고려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왔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들은 인체와 질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몸에 생긴 '고장' 그 자체를 고치려 했을 뿐, 그러한 '고장'이 나타나는 것에 기여한 사회적 요인(예컨대 열악한 생활조건)이나 환경적 요인(예컨대 대기 및 수질오염)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를 개선하는 작업에도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따라서 현대의학의 발전은 질병의 원인을 오도(誤導)하고 주의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부수적인 효과를 낳았다고 비판자들은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앞의 두 가지와 관련된 것으로, 현대의학은 건강의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거나 이를 방조한다는 문제점을 갖는다. 사람들이 공식적인 의료에 점차로 더 많이 의존하게 됨과 동시에 의료행위가 점차로 더 고가의 장비나 첨단기술을 이용하게 됨에 따라서, 실제로 의료의 혜택은 줄어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료비용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 의료비용의 증가는 곧 계급이나 성, 인종에 따라서 의료에 대한 접근가능 정도가 차등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건강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자원들이 의료혜택의 평등화보다는 첨단 의료기술의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되기 때문에 불평등은 더욱 강화된다. 현대의학의 발전 그 자체가 곧 불평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발전이 간접적으로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방향을 향해 진행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결국 의학의 발전이 인간의 복지를 실질적·보편적으로 향상시켰고 또 앞으로도 향상시킬 것이라는 낙관은 여기서도 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함의
 

이제 글의 앞부분에서 제기했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잠정적으로나마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의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긍정적인 측면만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학의 '신화'는 파기되어야 한다. 의학의 발전은 그 속에 내재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또한 현대의학의 놀라운 발전 이면에는 현대의학이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거나 암암리에 방조하였거나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조장한 중요한 사회 문제들이 은폐되어 있다. 새삼스러운 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의학의 발전이 인간의 건강과 질병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현대의학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길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우선 '현대의학은 건강과 질병 문제에 대한 유일한 접근방법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먼저 인지되어야 한다. 마음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고, 이 중에서 몸을 수리가능한 기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며, 질병을 (사회적·환경적인 것이 아닌) 생물학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현대의학은 인체를 이해하는 유일한 이론체계가 아니다. 이는 현대의학이 쓸모가 없다거나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현대의학이 특권적인 지위를 지닌 유일한 지식체계가 아니라는 것이고, 이와 다른 인식체계에 기반한 다양한 대안적 의료(alternative medicine)들 역시 임상적 효과를 지니는, 유효한 의료체계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서구에는 동종요법(homeopathy)이나 정골요법(osteopathy), 약초치료 등의 다양한 대안적 의료방식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인 한의학(韓醫學) 체계가 오래 전부터 현대의학과 공존해 왔다. 현대의학은 인체를 이해하는 다양한 이론체계 중 하나일 뿐이며, 그에 기반한 임상적 시술방식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의학과 의료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지식체계이자 활동이라는 점이 인지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체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근거한 현대의학은 일종의 '과학'이라는 견해가 그동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에 의료와 사회와의 연관성이 적극적으로 사고되지 못했다. 질병의 기원이 되는 다양한 요인들을 알아내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사회적·환경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의학과 의료가 결국에는 사회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출전: 중앙교육 『블루논술 A+』 1998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