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8월 8일(금)∼8월 17일(일)까지 매일 오후 3시-5시
장소: 대전 엑스포공원 입체상영관 내 휴게실
주최: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상·영·일·정

8/8(금) <가타카 Gattaca>
감독: 앤드루 니콜, 상영시간: 106분, 15세 관람가

8/9(토) <브라질에서 온 소년 The Boys from Brazil>
감독: 프랭클린 J. 샤프너, 상영시간: 123분, 15세 관람가

8/10(일) <정글 속의 고릴라 Gorillas in the Mist>
감독: 마이클 앱티드, 상영시간: 129분, 12세 관람가

8/11(월) <미믹 Mimic>
감독: 길레르모 델 토로, 상영시간: 105분, 15세 관람가

8/12(화) <모스키토 코스트 The Mosquito Coast>
감독: 피터 위어, 상영시간: 117분, 전체 관람가

8/13(수) <프레데릭 백 작품선>(애니메이션)
감독: 프레데릭 백, 상영시간: 약 100분, 전체 관람가

8/14(목) <페일 세이프 Fail Safe>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 흑백, 상영시간: 86분, 12세 관람가

8/15(금) <차이나 신드롬 The China Syndrome>
감독: 제임스 브리지스, 상영시간: 122분, 12세 관람가

8/16(토) <시빌 액션 A Civil Action> (1998)
감독: 스티븐 자일리언, 상영시간: 112분, 12세 관람가

8/17(일) <패스워드 Antitrust>
감독: 피터 호윗, 상영시간: 108분, 12세 관람가

기·획·의·변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영향력은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제 냉장고, 인터넷, 핸드폰 등과 같은 과학기술의 산물이 없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한 우리의 사고는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세계관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커진 물질적 혜택과 정신적 풍요를 가져다 준 것은 부인할 길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혜택과 함께 다양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윤리적·법적 문제를 새로 야기시켰습니다. 핵군비 경쟁에 의한 인류 절멸의 위협, 핵발전소 사고, 유해폐기물 방출에 의한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 유전자조작식품과 인간복제로 대표되는 생명공학의 여러 문제들, 정보기술의 독점 등이 바로 그런 문제들입니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혜택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이러한 문제들에 주목하고 그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대전사이언스페스티발 행사의 일환으로 준비된 '영화 속의 과학기술' 상영회는 이러한 소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번에 상영될 10편의 영화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을 다각도로 짚어보고 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도로 선정되었습니다. 영화 선정은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SF, 스릴러, 호러, 실제 일어난 사건에 기반한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영화들을 아우르되, 대중적으로 너무 많이 알려진 영화는 가급적 제외한다는 원칙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행사가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과학기술의 사회적 측면들에 대해 고민해 보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관객 여러분께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행사 준비를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타카 Gattaca

감독: 앤드루 니콜
출연: 에단 호크, 주드 로, 우마 써먼, 앨런 아킨
제작연도: 1997년
상영시간: 106분
 

인간의 DNA를 구성하는 네 개의 염기를 나타내는 문자 A, G, C, T로만 구성된 제목을 가진 영화 <가타카>는 인간 게놈에 대한 분석이 종료되어 개인의 미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내다볼 수 있게 된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유전자 검사를 받아 미래에 어떤 질병에 걸릴 것이며 몇 살까지 살 수 있는지를 미리 통고받는다. 아울러 이 사회에서는 유전공학의 발달에 힘입어 산전진단과 배아에 대한 우생학적 조작이 가능하며 또한 보편화되어 있다. 이에 따라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 수정으로 태어난 사람은 사회에서 '유전적으로 열등한' 하층계급을 구성하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 빈센트 안톤 프리먼(에단 호크)의 말마따나, "이제 사회적 지위나 피부색이 아니라 과학에 근거한 차별이 일어나는" 그런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빈센트는 인공적 조작을 거치지 않고 태어난 '신의 아이'로, 출생하자마자 심장질환 확률 99%에 예상 수명은 30세에 불과하다는 선고를 받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우주비행을 꿈꾸며 성장한다. 그러나 우주탐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회사 '가타카'에 유전적으로 우수한 엘리트들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이른바 '빌린 사다리' ― 다른 사람의 신원을 빌어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려 시도하는 사람 ― 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우수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제롬 모로우(주드 로)의 이름으로 가타카에 입사하고 그의 신체물질을 가지고 회사의 유전자 감시망을 속인다. 결국 빈센트는 유전적으로 '결정된' 자신의 미래를 넘어서 타이탄 탐사 길에 오른다.

<가타카>에 묘사되고 있는 미래사회를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과연 앞으로 이런 세상이 진정 도래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기도 하고 '아니다'이기도 하다. 먼저 유전자에 근거한 차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몇몇 질병들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이미 규명되어 있는 현재 시점에서 그러한 차별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예를 보면, 특정 질병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해당 유전자를 가졌다거나 유전자 검사를 기피한다는 이유만으로 보험이나 고용에서 차별을 받은 사례들이 수십 건 이상 보고되고 있다. 또한 범죄 수사나 군대에서의 신원 확인을 위해 유전자 검사를 강요받거나 유전자 정보은행에 신체물질을 의무적으로 저장하도록 함으로써 유전자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 주목한다면 <가타카>의 미래사회는 이미 도래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유전자 차별과 프라이버시 침해를 막을 수 있는 적절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를 통해 어떤 사람의 미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이를 고칠 수 있는 사회가 조만간 도래할 것인가, 하는 쪽으로 질문을 바꿔 보면 이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이다. 물론 앞으로 게놈 염기서열의 정확도를 높이고 유전자들의 기능을 규명해 낸다면 특정 질병에 관여하는 유전적 요인에 대해서는 분명 과거보다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에 병에 걸릴 정확한 확률을 계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질병은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으며 다양한 사회적·환경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질병이 아닌 다른 형질들의 경우에도 이를 유전자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리처드 르원틴은 생물 개체들간에 나타나는 차이가 유전자, 발생 환경, 그리고 발생 과정에서의 우연, 이 3가지 요소가 서로 뒤얽혀 빚어내는 현상('삼중 나선')이라고 보았다. 유전자와의 연관 여부 자체가 의심받고 있는 동성애나 알콜중독, 폭력 성향과 같은 사회적 특성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피 한 방울, 머리카락 한 가닥만으로 어떤 사람의 미래를 점치는 세상이 도래한다는 <가타카>의 설정은 과장된 측면이 다분하다 하겠다.

결국 <가타카>가 그려내고 있는 미래사회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라기보다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잘못된 믿음(유전자 결정론)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어떤 경향을 극대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이에 대한 사전 경고를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그런 세계, 그것이 바로 <가타카>의 미래사회인 셈이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김동광, 「DNA 독트린 ―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이데올로기」, 『DNA 독트린』(궁리, 2001), pp. 227-249

브라질에서 온 소년 The Boys from Brazil

감독: 프랭클린 J. 샤프너
출연: 그레고리 펙, 로렌스 올리비에, 제임스 메이슨
제작연도: 1978년
상영시간: 123분
 

<브라질에서 온 소년>은 베스트셀러 작가 아이라 레빈이 1976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을 그로부터 2년 후에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는 아직 체세포 복제 기술이 완성되기 훨씬 전이었지만, 1960년대를 통해 유전과 생식 과정을 조작하는 초기 실험들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에 대한 유전공학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고 ≪타임≫지 기자인 데이빗 로빅의 가짜 논픽션인 『복제인간』이 막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던 시점이었다. 원작 소설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태동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유명한 나찌 사냥꾼인 에즈라 리버만(로렌스 올리비에)으로, 그는 남미의 한 제보자로부터 과거 나찌의 핵심인물이었던 멩겔레 박사(그레고리 펙)가 북미와 유럽에 흩어져 있는 65세 남자 94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계획을 전해듣는다. 이 제보내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94명의 남자들이 모두 14살난 아들을 입양해 키우고 있으며 그 아들이 모두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겼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94명의 14살 소년들은 멩겔레 박사가 히틀러의 신체조직으로부터 복제해 대리모의 자궁에서 키워낸 복제인간으로, 히틀러의 성장환경과 유사한 조건에서 자라나도록 입양된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나찌 조직들은 심지어 히틀러가 14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죽었던 것까지도 그대로 재현해 주려 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설정은 '공장'에서 복제인간을 불과 수 시간(심지어는 수십 분)만에 찍어내는 것으로 나오는 <져지 드레드>나 <6번째 날> 같은 'SF적' 설정에 비해 훨씬 더 사실적이다(<6번째 날>을 보면 'DNA가 없는'(!) 빈껍데기 몸만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여기에 유전자를 '주입'해 기억까지도 동일한 완전한 인간을 불과 30분만에 복제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한편으로 유전자 본질주의적 전제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심지어 히틀러를 '되살려' 제3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나찌 잔당들조차도 ― 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영화 말미에서 음모의 주인공 멩겔레 박사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후 유태인 자위단원과 리버만이 94명의 소년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토론할 때, 이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자위단원의 주장에 반대해 리버만이 소년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종이를 없애버리는 장면이다. 이는 유전적 형질보다는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맥락에 더 무게를 실어주는 결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설정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서 이 영화가 돌리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인간복제를 둘러싼 토론에 구체적 함의를 던져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몸담고 있는 곳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신화'의 영역이며, 따라서 인간배아복제와 개체복제를 나누고 이 중 배아복제와 배아연구의 윤리적·법적 허용 여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공간의 규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고, 미토콘드리아 DNA 때문에 체세포복제가 '원본'과 100% 동일한 복제가 아닐 수 있다는 등의 과학적 견해와도 하등 인연이 없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이 보여준 인간복제의 대중적 이미지가 갖는 의미는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일반대중이 유전학과 유전자조작, 좀더 넓게는 과학과 그 응용 일반에 대해 갖고 있는 불안과 우려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대중, 그리고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대중매체들은 어떤 하나의 과학 실험을 그 자체의 가치에만 주목해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지 않으며, 이를 더 큰 맥락 안에서 조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인간복제의 문제는 종교나 신화, 우화를 포함한 다양한 상징적 연관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인종, 여성, 과학적 기만행위 등을 포함하는 당대 사회의 쟁점들과 결부되어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보면 복제기술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응용을 (비록 신화의 영역 속에서이긴 하지만) 20세기 사회를 뒤흔들었던 파시즘이라는 사회적 현상과 서로 연결시킨 이 영화의 설정을 현실과는 동떨어진, 황당무계한 것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김동광, 「생명소외로서의 복제」, 『DNA 독트린』(궁리, 2001), pp. 250-258

정글 속의 고릴라 Gorillas in the Mist

감독: 마이클 앱티드
출연: 시고니 위버, 브라이언 브라운, 줄리 해리스
제작연도: 1988년
상영시간: 129분
 

이 영화는 세계 3대 여성 영장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다이앤 포시의 일대기를 다룬 일종의 전기영화이다. 다이앤 포시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85년에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의 비룬가 화산 분화구 근처에서 마운틴고릴라를 연구하면서 이를 멸종 위기에서 보호하기 위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다른 두 사람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침팬지를 연구하고 있는 제인 구달과 보르네오 열대 우림에서 오랑우탄을 연구하고 있는 비루테 갈디카스이다.

비서학교만 나온 후 아프리카로 건너갔던 구달도 그랬지만, 포시 역시 정통적인 과학도로서의 길을 걸었던 인물은 아니었다. 동물을 사랑한 나머지 수의사가 되려고 대학에 입학했던 그녀는 이후 전공을 바꿔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의 소개로 1963년 아프리카로 처음 건너가기 전까지 10여년 동안을 장애아동을 돌보는 물리치료사로 일했다. 처음 자리잡은 콩고에서 내전으로 쫓겨난 그녀는 이웃한 르완다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얼마 안있어 그 이전까지 고릴라에 대해 알려져 있던 지식들을 완전히 뒤엎는 획기적인 연구성과들을 이끌어내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고릴라가 결코 포악하지 않고 온순한 초식동물로서, 등에 회색 털이 난 대장 수컷('은백색등')을 중심으로 엄격하게 짜여지고 분명하게 규정된 '가족'을 유지하며, 코의 생김새를 보고 고릴라를 서로 구분할 수 있다는 등의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가 이전과 진정으로 달랐던 점은 새로 발견한 사실들보다는 그녀가 취한 연구방법론에 있었다. 그녀는 연구대상에 직접 접촉하지 않고 일정정도 이상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는 이전까지의 영장류학의 불문율을 넘어서 고릴라와 '친구'가 되었고 그들과 서로 교감을 나누었다. 포시와 고릴라의 관계는 적대적인 관계도, 일방적인 보살핌의 관계도 아닌, 특별한 '신뢰'에 기반한 관계였다. 이러한 그녀의 방법론은 구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1970년대 초반에 영장류 연구에 합류한 갈디카스 역시 이러한 방법론을 공유했다.

그러나 연구대상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포시의 방법론에는 위험도 따랐다. 그녀는 숱한 고릴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고 이 중 '디지트'라는 이름을 붙인 은백색등과 특히 큰 친밀감을 느꼈다. 이러한 친밀감과 그녀의 독특한 성격 탓에 그녀는 생계 확보를 위해 야생동물을 밀렵하는 지역 부족들과 적대적 관계가 되었고, 1978년에 디지트가 밀렵꾼들에 의해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 이후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녀는 비룬가 지역에서 자신이 곧 법인 양 행동했으며, 밀렵꾼들을 구타하고 그들의 소유물에 불을 지르는 등 사적인 응징을 가했다. 심지어 그녀는 마녀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한 후 마법을 쓰는 흉내를 내어 밀렵꾼들을 겁주는 고도의 심리전술을 쓰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릴라 밀렵에 맞서는 사실상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적극적인 자연보호'라고 불렀던 이러한 전술은 결국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1985년 12월에 포시는 자신의 막사 안에서 살해당했고, 그녀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정글 속의 고릴라>를 보면서 고민해 봄직한 문제 중 하나는 여성과학자와 과학을 하는 '여성적' 방법을 둘러싼 논란이다. 1960년대 초 과학계에서의 성평등 문제가 제기된 이후 여성과학교육과 여성과학자를 지원하기 위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새로 생겨났고, 그 결과 많은 수의 여성과학자들이 새로 과학계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남성 중심인 기존 과학계의 흐름에 균열을 일으키기보다는 단순히 그 일원으로 편입되는 데 그쳤는데, 여기서 유일하다시피 한 예외가 바로 포시가 속한 영장류학이었다. 영장류학에서는 여성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학문의 방향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구달, 포시, 갈디카스는 연구대상인 동물에 대한 통제를 중단하고 이들과 장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정서적 몰입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연구대상에 대한 거리 설정과 통제를 중요시하는 서양과학의 주류 흐름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그들이 여성의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졌던, 특별히 '여성적'인 어떤 것이었을까? 과연 과학을 하는 '여성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는 지난 20여년 동안 페미니스트 과학학자들을 사로잡았던 질문들이었고,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정재승, 「안개 속의 고릴라」,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동아시아, 개정증보판, 2002), pp. 246-253

미믹 Mimic

감독: 길레르모 델 토로
출연: 미라 소비노, 제레미 노담, 찰스 듀튼, F. 머레이 에이브러햄
제작연도: 1997년
상영시간: 105분
 

미국의 저명한 사회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1998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바이오테크 시대』에서 다가올 21세기를 '생명공학의 세기'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작용 기반을 구성하는 일곱 가지 요소를 열거한 바 있다. 그는 이 중 세 번째 요소로, 종(種)간의 벽을 뛰어넘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실험실에서 새로이 만들어낸 '제2의 창조물'들을 지구 생물권에 방출하는 것을 꼽았다. 그는 유전자 조작된 생물체를 자연 환경에 방출하는 것이 생태계에 잠재적인 위협이 될 것이며, 이러한 '유전자 오염'은 과거 석유화학 물질에 의해 저질러진 오염보다 훨씬 더 파괴적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이런 판단의 근거로 ▲ 유전자 조작된 유기체는 석유 화학 물질과 달리 살아 있으므로 환경 속에서 다른 생물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예측하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 ▲ 유전자 조작된 유기체는 번식하고 성장 과정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때문에 일단 방출하고 나면 사실상 실험실 안으로 다시 회수해들일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미믹>은 바로 이러한 경고에 착안해 만들어진 호러영화이다.

뉴욕에 심각한 아동 전염병이 발생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다. 곤충 생태학자인 수전 타일러(미라 소비노)는 전염병의 매개체인 바퀴벌레를 제거하기 위해 흰개미와 사마귀의 유전자를 결합해 '유다스'라는 새로운 천적을 창조한다. 유다스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바퀴벌레를 죽이는 독소를 분비하면서 수명이 6개월을 넘기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이러한 타일러의 방법은 성공을 거두어 전염병의 기세는 수그러들고, 그녀는 아이들을 구해낸 일등공신으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3년 후 그녀는 동네 아이들이 잡아 온 곤충 샘플을 보고 유다스가 뉴욕의 오래된 지하철 선로 속에 아직 살아 있으며 스스로 진화를 거듭해 마치 인간과도 같은 외양을 가진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줄거리 전개나 비주얼의 측면에서 보면 <미믹>은 과거의 선례들을 답습한, 진부한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괴물'을 만들어내고 그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는 기본 설정은 『프랑켄슈타인』의 변형으로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다. 또한 괴물에 대한 시각적 묘사에 있어서도 <에일리언>이나 <스타쉽 트루퍼스> 등의 영화와 비교해 특별히 달라진 점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학적 세부묘사의 측면에서 보아도 <미믹>의 설정에는 상당한 비약이 존재한다.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의 벌레였던 것이 진화를 통해 3년만에(!) 사람만한 크기로 커졌고 동시에 기관 호흡에서 폐 호흡을 발전시켰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세부묘사의 맹점을 들어 <미믹>을 비판하는 것은 아마도 온당치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이를 생물체에 대한 유전자조작과 그것의 환경 방출이 내포하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강조한 일종의 '과학적 우화'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타일러는 극중에서 "중요한 것은 (3년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세대수"라며, "유인원에서 인간이 되기까지는 4만 세대가 걸렸는데, 유다스의 경우에는 유전자가 변형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세대가 지나갔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타일러의 은사인 게이츠 박사(F. 머레이 에이브러햄)는 실험실과 외부 생태환경이 서로 다른 수준의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제자에게 상기시킨다. 여기에 <미믹>은 '곤충이 때로 진화하면서 천적을 닮는다'는 설정을 재치있게 끼워넣고 있다. 유다스는 자신의 가장 큰 천적인 사람을 닮아 인간사회 속에서 섞여 살아갈 수 있도록(물론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나 가능한 얘기겠지만)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제 SF적 상상력의 세계를 벗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 와보자. 여기에는 물론 진화한 유다스와 같은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곳에는 실험용 유전자 조작 쥐, 유전자 조작 농작물, 유전자 조작 양식 어종 등이 존재하고, 이 중 일부는 이미 자연환경 속으로 방출된 상태이다. 이에 대해 그간 실험실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이러한 변종들이 새로운 병원성 바이러스를 만들어내거나, 꽃가루 이동을 통해 토종 종자를 '오염'시키고 유전적 다양성을 해치거나, 인근 환경 속으로 달아나 과거 외래종들이 그랬듯 토착 생태계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과연 그런 위험은 무시해도 좋은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 현실 속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미믹>의 허무맹랑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일 터이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제레미 리프킨, 「제2의 창세기」, 『바이오테크 시대』(민음사, 1999), pp. 131-148

모스키토 코스트 The Mosquito Coast

감독: 피터 위어
출연: 해리슨 포드, 헬렌 미렌, 리버 피닉스, 안드레 그레고리
제작연도: 1986년
상영시간: 117분
 

영화 ― 좀더 넓게는 소설, 희곡, 연극 등 대중문화 텍스트 일반 ―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자의 이미지를 분석해 온 여러 학자들은 여기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 이른바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의 전형임을 지적해 왔다. 그러한 이미지에 따르면, 많은 경우 과학자들은 남성이며, 안경을 썼고, 흰 가운을 입었으며, 손에 시험관을 들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으며, 백발이거나 대머리인, 다소 특이한 인상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일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사악하고 신비스런 힘이나 금기시되는 지식을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와 실험을 통해 그는 보통 사람이 보기에 기적과도 같이 여겨지는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초래해 자신과 공동체의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걷고 만다. <모스키토 코스트>는 이와 같은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를 다소 변형된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극의 중심에는 독선적인 성격의 천재 발명가 앨리 폭스(해리슨 포드)가 있다. 그는 미국 사회가 쇠락을 거듭해 자신이 지닌 개척 정신과 변화를 향한 열망을 받아줄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생각하고(그는 또한 전면 핵전쟁으로 인한 절멸이 임박했다고 믿는다), 가족과 함께 중부 아메리카의 모스키토 해안으로 이주한다. 그는 그곳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낙후된 제로니모라는 마을을 얻어 문명을 무(無)로부터 새로 일으키려 한다. 그의 가장 야심찬 계획은 그곳에 거대한 냉장 시스템('Fat Boy')을 만들어 현대 문명이 누리는 주요한 혜택 가운데 하나를 그곳 사람들에게도 제공해 주려는 것이었다(그는 "얼음은 문명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기술을 통한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폭스의 꿈은 그 지역의 선교사인 스펠굿 목사(안드레 그레고리)와 '영토 분쟁'을 빚게 되고, 무장 게릴라와의 불운한 조우에 이은 일련의 사건은 그가 건설한 공동체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바꿔 놓는다. 제로니모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에서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미쳐' 가고, 결국 선교사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모스키토 코스트>는 '유토피아'에 대한 맹목적 추구, 완벽성과 기술적 진보에 대한 맹신이 곧 '디스토피아(dystopia)' 사회를 불러오는 원인이라는 낯익은 주제를 변주한다(이 점에서 이 영화는 조지 오웰의 『1984년』, 올더스 헉술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이 분야의 고전들과 궤를 같이한다). 여기서 폭스는 신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세상을 교정하고자 하는 완벽주의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굽어 있는 자연'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그가 건설한 'Fat Boy'는 그것이 가진 시스템적 속성으로 인해 불운하게도 마을 전체를 파괴하고 인근 지역을 오염시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만다. 이는 주인공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배반'당하는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우리에게 『프랑켄슈타인』을 상기시킨다.

<모스키토 코스트>의 주제의식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 나오는 발명가의 아들 찰리(리버 피닉스)의 나레이션에 집약되어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 전체가 아버지에게 속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자랐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모스키토 해안에서 일련의 '모험'을 겪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를 믿었던 예전에는 세상이 작고 낡은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는 가고 없고, 세상은 내게 무한하게만 느껴진다." 그가 겪은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기술의 능력이 가진 한계를 깨달은 결과로서, 기술 진보에 대한 맹신이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김명진, 「대중영화 속의 과학기술 이미지」, 『대중과 과학기술』(잉걸, 2001), pp. 103-119

프레데릭 백 작품선

<일루전 Illusion?>(1975), 12분
<투 리앙 Tout Rien>(1978), 11분
<크랙! Crac!>(1981), 15분
<나무를 심은 사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1987), 30분
<위대한 강 Le Fleuve aux Grandes Eaux>(1993), 24분

애니메이션 감독: 프레데릭 백
상영시간: 약 100분
 

이미 국내에도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잘 알려진 프레데릭 백을 새삼스럽게 소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터이다. 1924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했고 1948년에 캐나다로 이주해 1970년 이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애니메이터. 그는 혼자(혹은 조수 1명과 함께) 모든 그림을 그려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무를 심은 사람>을 5년 반에 걸쳐 작업할 때에는 20,000장에 달하는 그림 대부분을 직접 그렸으며, <위대한 강>을 만들 때도 시나리오와 함께 17,000장의 작화를 도맡았다. 통상적인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을 벗어난 그의 이러한 '장인적' 작업 방식은 그가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환경보호라는 주제의식과 어울려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백의 애니메이션은 자연 파괴를 가져오는 근대 산업사회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자연과 조화되는 생태중심적 윤리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근본생태론(deep ecology)적 색채를 짙게 깔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와 현대 산업사회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이 중 전자를 찬양하는 구성을 많이 취한다. 그의 작품들에서 농촌공동체는 친밀한 인간관계, 공동체의 전통문화, 자연과의 조화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곳인 반면, 산업사회는 삭막한 개인주의 문화, 무절제한 소비·향락, 극심한 대기·수질오염 등이 만연한 곳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고성 메시지로 읽힐 수도 있지만, 사회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한다는 점, 전통으로의 회귀가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비판을 받을 만한 소지도 다분히 갖고 있다.

아래에서는 각각의 단편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일루전>: 아이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평화로운 산골 마을에 신기한 '마술'을 부리는 광대가 나타난다. 그는 자연의 산물들을 각종의 인공품으로 바꾸어 아이들의 환심을 사고 이들을 산업화된 도시로 끌어들인다. 알고보니 그는 '기술'이라는 마법을 통해 전통적 농촌공동체를 산업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전쟁을 선포한 광대에 맞서 싸우고 자연과 함께하는 원래의 마을을 되찾는다. 자연과 인공, 농촌공동체와 산업화의 대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초기작.

<투 리앙>: 기독교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빌어 인간의 환경 파괴를 비판한 작품. 신이 만물을 창조한 후 인간(아담과 이브)을 만들어내지만 인간은 신이 내리는 그 어떤 삶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자연을 약탈하고 마침내 신에게 도전한다. 그러나 기술의 힘을 빌어 엄청난 능력을 갖추게 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던 과거의 삶을 상실했다는 허탈감뿐이다(끝부분의 장면 전환이 보여주는 극적 대비). 이 작품을 경계로 백의 화풍이 현재와 유사한 형태로 바뀌게 된다.

<크랙!>: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퀘벡 지방의 백여 년 역사를 흔들의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독특한 작품. 백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환경보호라는 문제의식은 간접적으로만 드러나지만 전통사회와 산업화된 현대사회간의 극적 대비는 여전하다. 내용의 대부분은 19세기에 살았던 한 가족의 일대기에 할애되고 있는데, 특히 어린 자녀들이 성장해 각자 독립해 나가는 수십 년간의 시간 흐름을 단 하나의 컷으로 묘사한 장면은 감동을 자아낸다. 시간이 흘러 도시의 미술관에서 '부활한' 흔들의자가 과거 전통사회의 기억을 불러내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음을 웅변해 주는 듯하다.

<나무를 심은 사람>: 프랑스의 소설가 장 지오노가 실제로 겪었던 일에 기반해 쓴 책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의심의 여지없는 백의 대표작. 30년이 넘게 아무도 찾지도 않는 황무지에서 매일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어 이를 비옥한 땅으로 바꿔놓은 시골 농부 엘지아르 부피에의 얘기는 이제 너무도 유명해져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캐나다에서는 이 작품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전국적인 나무심기 운동을 추진해 2억 5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백은 부피에만큼이나 고집스럽게 이 작품에 매달렸고, 결국 계속된 채색 과정에서 시력이 나빠져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위대한 강>: 캐나다 동부의 퀘벡 지방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대하(大河) 세인트로렌스 강의 환경 파괴 문제에 대해 다큐멘터리적으로 접근한 (현재로서는) 백의 마지막 작품. 단순히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태고부터 현재까지 세인트로렌스 강의 지난 역사(특히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상륙한 이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면서 그 속에 토착민과 유럽인의 갈등, 환경 파괴로 인한 멸종, 현대 물질문명 비판 등을 녹여넣고 있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김준양, 「프레드릭 백의 <위대한 강>」, ≪키노≫ 1995년 8월호, pp. 226-229

페일 세이프 Fail Safe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
출연: 조지 클루니, 하비 케이틀, 리처드 드레이퓨스
제작연도: 2000년
상영시간: 86분
 

1945년 7월 미국에서는 최초의 원자폭탄 폭발실험이 성공했고, 그 해 8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미국은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비밀'을 유지해 이 무기를 자기만 독점하고자 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1949년에 소련이 원자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이런 희망은 깨어졌다. 이에 미국은 소련을 앞지르기 위해 1952년에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소련 역시 이에 지지 않고 1955년에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이로써 냉전 시기 미·소 두 강대국이 치열하게 전개한 핵무기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미·소 두 나라는 상대국에 대한 미사일 격차(missile gap)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핵무기를 경쟁적으로 양산해냈고, 그 결과 1960년대 초가 되면 이미 양국은 인류를 멸망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핵에 대한 대중의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제 핵전쟁은 잘못 발생한 경보나 기계의 오작동, 인간의 실수 같은 사소한 요인들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고,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이는 곧 인류의 절멸을 의미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세계의 운명이 우연과 판단 착오,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64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페일 세이프>는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해 만들어졌다. 이 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빌어 핵무기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것에 가깝다면, <페일 세이프>는 훨씬 더 심각하고 직설적인 스타일로 밀어붙이는 쪽이었다. 여기 소개할 영화는 1964년작 <페일 세이프>를 TV용 영화로 리메이크한 것인데, 이 영화는 사전 녹화나 편집 없이 미국 CBS 방송사에서 2000년 4월 9일에 '실황으로' 방송되었다.

영화의 설정은 1964년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인간에 의존하지 않도록 고안된 시스템을 개발한다. 그러나 기계 오작동으로 인해 핵폭탄을 장착한 공군 편대에 모스크바로 출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를 전해들은 미국 대통령(리처드 드레이퓨스)은 공군 편대에 직접 연락해 명령을 취소하려 하지만, 정해진 명령 전달 방식만을 받아들이도록 훈련된 편대장(조지 클루니)은 이를 무시한다. 이들을 격추하려는 시도까지 했다가 실패해 다급해진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 서기장에게 전화를 걸어 협력을 요청한다. 전면 핵전쟁을 피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만약 러시아에서 편대 격추에 실패해 모스크바에 핵탄두가 떨어지면 그 즉시 뉴욕에도 핵탄두를 투하하겠다고 약속한다. 불행히도 이 약속은 그대로 이행(!)되고 만다.

핵무기를 둘러싼 냉전 시기의 편집증적 집착을 다룬 이 영화는 냉전이 끝난 현재의 시점에서는 그 시효가 만료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실제로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군비 증강으로 인해 1990년대 초 6만 발까지 증가했던 미·소 양국의 핵무기 수는 냉전 종식 이후 군비 축소에 힘입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보유국의 수는 1990년대 들어 오히려 증가하고 있으며, 아직 해체되지 않은 수만 발의 핵무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쉽게 안심하지 못하게 만든다. 미국 본토를 '불량국가'들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미국의 MD 계획이 핵을 둘러싼 긴장관계를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고조시키고 있음이 지금의 현실이 아닌가. 핵을 둘러싼 긴장감과 위기가 극에 달했던 냉전 치하의 1960년대 초를 돌아보게 하는 <페일 세이프>의 현재적 의의는 아마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폴 보이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 2』(소나무, 1998), pp. 160-165

차이나 신드롬 The China Syndrome

감독: 제임스 브리지스
출연: 제인 폰다, 마이클 더글라스, 잭 레먼
제작연도: 1979년
상영시간: 122분
 

<차이나 신드롬>은 핵발전소에서의 사고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흔치않은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인 '차이나 신드롬'은 바로 핵발전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인 멜트다운(meltdown)이 일어났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멜트다운은 원자로 노심('코어')이 드러나 그 속에 채워져 있는 연료봉이 녹아내리는 사고를 말하는데, 이것의 녹는점(2,800℃)은 노심을 둘러싸고 있는 강철용기와 콘크리트의 녹는점보다 더 높기 때문에 이를 녹이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이 때 이론적으로는 이것이 지구 중심을 통과해 반대쪽에 위치한 중국까지 다다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원전 역사상 가장 큰 사고 중 하나로 불리는 미국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2주 전에 개봉해 더욱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는 TV 리포터인 킴벌리 웰즈(제인 폰다)가 카메라맨 리처드 애덤스(마이클 더글라스)와 함께 핵발전소 홍보 취재를 떠나는 데서 시작한다. 취재도중 그들은 기기 오작동과 판단착오로 인해 거의 멜트다운에 이를 뻔한 사고 정황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광경을 몰래 촬영한 애덤스는 이를 무기로 사고를 은폐하려는 발전소측과 맞선다. 한편 발전소의 수석 엔지니어인 잭 고델(잭 레먼)은 사고 발생시의 비정상적인 진동에 의문을 품고 이를 조사하다가 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델은 발전소 운전에 위험이 따를 수 있음을 알고 발전소측에 운전 중단과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지만 막대한 비용과 운영 적자를 이유로 거절당한다. 이에 분개한 고델은 발전소의 중앙 통제실을 점거하고 TV 리포터를 불러 이 사실을 폭로하려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다소 낡은 듯 보이기는 하지만, <차이나 신드롬>은 핵발전소에 내재한 사고 가능성을 개연성 있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과학기술자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잭 고델은 원전에 평생을 바친 인물로, 핵발전소가 사고에 대비해 철저한 주의를 기울여 설계되었으며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로 보호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발전소 인근 바에 찾아온 미인 여성 캐스터에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고, "전등을 켤 때면 10%만 나를 생각해달라"고 부탁하는 등, 우리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엔지니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한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해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로서의 길을 택하고 극의 말미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는다.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이와 같은 과학기술자의 모습은 1970년대 이후 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통제권을 잃고 무력해진 과학기술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영화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분석한 학자들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는 영화에 등장한 과학기술자들이 대체로 공동체로부터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그려진 반면, 1970년대부터는 과학기술자들이 대기업, 정부 연구소, 군부 등에 고용되어 주어진 일만 하면서 자율성에 제약을 받는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흔해졌다. 과학기술자가 자신이 일으킨(혹은 자신과 연관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려 시도하다가 자신에게 권한이 없음을 새삼 깨닫고 좌절하는 내용을 담은 최근의 여러 영화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봐둘 만한 점은, 전문가 언어와 일반대중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 사이의 괴리이다. 영화 속에서 핵발전소 종사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약어와 기술용어들로 가득차 있고, 이는 영화 속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그리고 관객에게도) 생경함과 거리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영화 끝부분에서 잭 고델이 발전소가 안고 있는 문제를 TV 시청자들에게 폭로할 때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요령부득인 설명을 늘어놓는 장면을 보면, 그러한 의사소통의 괴리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일반대중만은 아닌 듯싶다. 평소에 일반대중과의 의사소통 노력을 게을리하고 연구개발과 일상 작업에만 몰두하는 것은 '결정적인' 시기에 이르면 과학기술자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이필렬, 「원자력발전소 사고」,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창작과비평사, 1999), pp. 94-122

시빌 액션 A Civil Action

감독: 스티븐 자일리언
출연: 존 트라볼타, 로버트 듀발, 윌리엄 H. 메이시, 존 리쓰고우, 캐스린 퀸란
제작연도: 1998년
상영시간: 112분
 

<시빌 액션>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번(Woburn)에서 실제 일어났던 환경소송 사건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우번은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인구 37,000명의 작은 도시인데, 이곳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15년간에 걸쳐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28명의 소아백혈병 환자가 발생했다. 주민들은 이것이 인근의 공장 부지에서 흘러나온 독성폐기물로 인해 수돗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했고, 도시에 식수를 공급하는 우물에 인접한 대기업인 W. R. 그레이스 사와 비어트리스 식품을 오염원으로 지목해 소송을 제기했다. 영화는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장장 10년을 끌었던 소송 과정을 우번 주민들의 소송담당 변호사였던 잰 슐릭만(존 트라볼타)의 관점에서 풀어가고 있다.

<시빌 액션>은 기본적으로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법정드라마 장르의 외양을 띠고 있다. 그러나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신출내기 변호사가 등장해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불의와 음모에 맞서 결국에는 정의가 승리'함을 보여주는 존 그리샴 류의 통상적인 법정드라마와는 달리, 이 영화는 현실 속에서 법적 절차와 정의가 종종 불화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본래부터 '정의'를 금지옥엽처럼 떠받들었던 인물도 아니며, 마지막에 '승리'를 얻어내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번 소송은 상해사건 분쟁 소송을 주로 맡아 왔던 슐릭만의 소규모 법률회사(변호사가 고작 3명에 불과한)와 미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있는 두 개의 법률회사(각각 수백 명의 변호사를 거느린)가 서로 맞붙은,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할 만한 법정투쟁이었다. 이 대결에서 슐릭만의 법률회사는 파산 직전에 이를 때까지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몇 곱절의 돈을 퍼부은 그레이스와 비어트리스 사를 법정에서 단죄하는 데 실패했고, 그레이스 사로부터만 8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후 추가적인 증거를 확보한 슐릭만은 비어트리스 식품에 대한 1심 재판에서의 무혐의 판결에 항의해 항소법원, 대법원에까지 상고해 보았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미 환경보호청(EPA)이 그레이스와 비어트리스 양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여 해당 공장을 폐쇄하고 향후 50년간 우번 지역의 오염을 정화하는 비용으로 6,940만 달러를 분담하는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수십 년간에 걸친 우번 주민들의 노력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 되었다.

이 영화는 논픽션 작가 조나단 하가 1995년에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의 작품에 기반해 만들어졌다(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작가는 『시빌 액션』의 집필을 위해 무려 8년간의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법정소송 과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번 사건의 당사자인 지역 주민들의 활동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었고, 이러한 약점은 영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는 상당히 아쉬운 점인데, 왜냐하면 우번 사건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점 가운데 하나가 문제제기부터 대중적 홍보, 연구 수행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은 당국이 대수롭지 않게 다루던 수돗물의 나쁜 맛과 악취 문제가 소아백혈병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가설을 1973년에 처음 생각해냈고, 1979년부터는 FACE(For a Clean Environment)라는 조직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신문 광고를 내어 백혈병 환자의 사례를 조사했으며, 이를 근거로 지역 보건당국과 질병통제센터의 공식 조사를 요구했다. 공식 조사에서 자신들의 가설이 기각되자 그들은 하버드대 공중보건대학원의 몇몇 과학자들과 협력해 우번 지역에 대한 광범한 역학(疫學)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유해폐기물과 다양한 질병간의 관계를 밝혀내기도 했다. 영화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법정소송의 배경에는 이미 이러한 성과들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독성폐기물 지역운동에 대해 연구한 필 브라운이라는 학자는 지역 주민들이 전문가들과 함께 직접 참여해 역학연구를 수행한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대중 역학(popular epidemiology)'이라고 불렀다. 또한 과학사회학자 대니얼 리 클레인맨은 우번 주민들의 활동이 '과학기술 민주화'의 일부를 구성하는 지식생산의 민주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김명진, 「'과학기술 민주화'의 개념정립을 위한 시론」, 『대중과 과학기술』(잉걸, 2001), pp. 257-271

패스워드 Antitrust

감독: 피터 호윗
출연: 라이언 필립, 팀 로빈스, 클레어 폴라니
제작연도: 2001년
상영시간: 108분
 

1998년에 미 법무부와 20개 주 정부가 마이크로소프트(MS) 사를 셔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면서 시작된 MS 반(反)독점 소송은 세간에 엄청난 화제를 몰고온 일대 사건이었다. 반독점 소송의 핵심 사안은 MS가 윈도우즈 OS에 웹브라우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를 끼워팔아 독점력을 부당하게 행사했으며 이를 통해 시장경쟁을 저해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초기 웹브라우저 시장을 거의 장악했던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는 1998년 출시된 윈도우즈 98에 익스플로러가 기본 장착되면서 급속도로 시장에서 퇴출되었고, 현재는 5%에도 못미치는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독점 소송의 하이라이트는 2000년 6월에 미 연방지법이 MS가 반독점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하면서 회사를 OS와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을 각각 담당하는 두 개의 회사로 분할할 것을 명령했을 때 찾아왔다. 원제가 'Antitrust', 즉 '반독점'인 영화 <패스워드>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스탠퍼드대학을 나온 컴퓨터 천재 마일로 호프만(라이언 필립)은 오픈소스 운동의 문제의식을 가진 인물로 친구들과 함께 차고에서 창업을 준비중이다. 그에게 업계의 거두인 너브 사 회장 게리 윈스턴(팀 로빈스)이 접근해 파격적인 조건의 스카웃 제의를 한다. 너브 사는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법무부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는 회사인데, 전지구를 연결하는 새로운 위성 네트워크 시스템 '시냅스'의 출범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있다. 너브 사에 취업한 마일로는 오픈소스 정신을 고수해 자신과 결별한 친구 테디의 죽음에 의해 충격을 받는다. 그는 테디를 포함한 연이은 프로그래머들의 죽음의 배후에 윈스턴과 너브 사가 있다는 정황 증거를 포착하고 회사의 프로그램 개발에 얽힌 음모를 밝혀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결국 그와 친구들은 완성된 시냅스 네트워크를 통해 윈스턴의 비열한 책략을 전세계에 폭로하는 데 성공하고, 다시 차고 시절로 돌아가 정보는 '공유되어야 하는 것'임을 선언한다.

간단히 요약한 줄거리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이 영화의 배경설정은 자연스럽게 MS의 반독점 소송 사건을 연상시킨다. 물론 영화 제작진은 관객들이 게리 윈스턴을 빌 게이츠로, 너브 사를 MS로 직접 대입하지 않도록 몇 가지 장치를 해 놓았다(예컨대 마일로와 윈스턴의 대화에서 빌 게이츠의 이름이 언급된다거나, 너브 사가 포틀랜드에 위치한 것으로 설정해 시애틀에 있는 MS와 구분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시장 독점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정보통신 회사', '법무부의 반독점 조사' 같은 설정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MS의 OS 독점의 폐해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 1990년대 초에 MS-DOS가 경쟁 제품인 노벨 사의 DR-DOS와 IBM의 OS/2를 시장에서 배제한 얘기라든지, DOS 시절에 스프레드시트와 워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로터스 1-2-3와 워드퍼펙이 윈도우즈 95 등장 이후 엑셀과 MS 워드에 시장을 넘겨주었던 얘기 등은 MS가 OS 시장에서의 독점력을 부당하게 행사해 시장을 확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악명이 높다. MS 워드에 대항하는 한글의 힘겨운 싸움을 지켜보아 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MS의 독점 문제는 딴나라 얘기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패스워드>는 사실 그 구성이 치밀하다거나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심오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현안에 발빠르게 대응한 '기획 영화'에 가깝다는 인상을 더 많이 준다. 이 영화의 선악구분은 너무나 명료해서 영화가 중반만 넘어가면 윈스턴이 구제할 길 없는 악인이라는 점이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사실로 드러나며, 반대로 독점이라는 '악'에 대항하는 오픈소스의 승리는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약에 의해 어찌보면 너무나도 쉽게 얻어진다. 이러한 '동화적'인 결말은 MS를 '악의 제국'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잠시 동안의 대리만족 효과를 제공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실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MS를 두 개의 회사로 분할하라는 연방지법의 판결은 2001년 초에 연방 항소법원에서 바로 뒤집어졌고, 친기업적인 공화당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난 이후 MS와 미 국무부간에 '회사를 분할하지 않는 대신 3개항의 제약조건을 5년간 이행하라'는 솜방망이 규제안이 통과되었으니 말이다. 이는 우리에게 <패스워드>가 내걸고 있는 기본 설정(독점의 해악 + 오픈소스의 의의)은 받아들이되 그것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손쉬운 결말은 쉽게 꿀꺽 삼키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추가적인 읽을거리
홍성욱, 「첨단 기술 시대의 독점과 경쟁 ― MS 소송과 새로운 경제학의 패러다임」,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문학과지성사, 1999), pp. 363-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