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 전 영화가 처음 대중 앞에 공개된 이래로, 영화와 과학기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관계맺어 왔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등장과 그 변천과정이 20세기의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꿰뚫고 있다는 점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영화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 것에는 수많은 관련 기술의 발전이 그 가능성을 제공해 왔고, 반면에 영화는 그 속에 과학기술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반영해 왔다. 이 글에서는 이 중에서 '영화 속에 반영된 과학기술'의 측면에 촛점을 맞추어 영화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생각해 보려 한다.

실제로 많은 영화들을 살펴보면, 영화 속에 나타나는 과학기술의 모습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몇 가지 유형으로 분석할 수 있다. 여기서 다소 놀라운 것은 이러한 유형들 모두가 과학기술과 그것이 가져올 미래상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미래상
 

먼저 영화 속의 과학기술의 모습 중에서 지금껏 가장 많이 언급되어 온 것은 SF영화가 그려 온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의 측면이다. SF영화들에서 보여주는 암울한 미래상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궁극에 있어 정치적으로 反민주적인 가치들과 필연적으로 연결되거나 지구환경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기저에 깔고 있다. 미래사회에는 현재의 사회가 갖고 있는 각종의 모순들 -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련된 - 이 극대화된 형태로 보여진다.

주요한 SF영화들이 그리는 미래상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현재의 계급모순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심화되며, 심한 경우 극단에 위치한 두 계급으로 나뉜다(<메트로폴리스>, <블레이드 러너>). 사회의 관료적 지배와 정치적 억압은 더욱더 강화되어 극단적인 관료주의적 관리사회가 나타나고, 첨단과학기술의 구현물인 컴퓨터 등등이 관료적 지배의 매개가 된다(<THX 1138>, <1984>, <트론>, <브라질>). 이에 따라 대상(과학기술)에 의한 주체(인간)의 소외가 강하게 나타난다(거의 모든 SF영화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구조물과 왜소한 인간의 대비. 혹은 자동화된 무기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무기력함을 묘사한 영화들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위험한 게임>).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의 소외라는 테마는 미래사회를 극단적으로 폭력이 가득찬 사회로 묘사하는 것으로 변형되기도 하고(<시계장치 오렌지>, <아끼라>), '자기정체성을 찾아헤매는 인간의 이야기'와 연결되기도 한다(<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코드명 J>). 이 테마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주체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물화된 기계에 의해 인간이 지배되는 경우가 등장한다(<알파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터미네이터 1&2>). 과학기술은 일상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특정한 부문(예를 들어 군수산업)에 집중되어 발전하며, 핵전쟁이나 이와 유사한 파멸적인 전쟁으로 이어져 인류가 거의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일종의 가상적인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그날 이후>. 이 외에도 SF영화 속의 小장르로 존재하는 수많은 '재앙 이후(post-catastrophe)' 영화들 - <자도즈>, <매드 맥스 2&3>, <아끼라>, <터미네이터>, <탱크 걸>).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환경오염은 더욱 극단적으로 진행된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스모그 때문에 햇빛이 지구상에 거의 도달하지 못해 언제나 어둡고 산성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경우(<블레이드 러너>),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지구가 모두 물에 잠기는 경우(<워터월드>), 거꾸로 지구 전체에 물이 고갈되어 사막으로 변하는 경우(<탱크 걸>), 환경오염으로 말미암아 임신능력을 지닌 여성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가임능력을 지닌 여성들이 전체주의적인 국가체제의 통제하에 놓이는 경우(<핸드메이즈 테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을 책임지는 과학기술자들은 영화 속에서 '미친 과학자'로 스테레오타입화되어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는 중세 말∼근대 초의 연금술사와 마술사의 그것에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일상생활로부터 격리되어 실험실에 틀어박힌 채 사악하고 신비스런 힘이나 지식을 연구하는 인물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는 19세기 초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잘 드러나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오늘날의 과학자·엔지니어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다소 변형된 형태로 이어받고 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과학자들은 종종 냉정하고 무자비한 존재로 그려진다.('하얀 가운'이 바로 그 상징이다) 이들은 실험실 내에서의 과학적인 문제 그 자체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도덕적·정치적인 함의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며, 과학적인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복종하거나 대기업의 이해관계에 무조건 순응하여 프로젝트 유지를 위한 지원을 받아내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이 연구하던 과학적 프로젝트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야기하였을 때조차도 과오를 결코 반성하려 들지 않고 자신의 작업이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설사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기 마련이다.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먼저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하는 과학자는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의 대립 속에서 자본가쪽을 편들며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를 닮은 로보트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현혹시키고, 궁극에는 말썽많은 노동자들을 로보트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짠다. <시계장치 오렌지>에서는 스키너적(Skinnerian)인 행동공학 원리에 입각하여 비행을 저지른 사람을 사회에 순응적인 인간으로 개조시킨다. <모스키토 코스트>의 천재 발명가는 남아메리카의 오지에 열역학 원리만을 이용한 냉장고를 만들고 스스로가 '문명'의 전달자라고 자부하나 불의의 사고에 의해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와 <플라이>에 등장하는 과학자는 자신이 개발한 방법으로 인해 괴물로 변해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이미지는 종종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기도 한다. 예컨대 과학기술자는 많은 영화들에서 '배신하는' 역할을 맡거나(<에일리언 2>), 과학기술의 독점적 장악을 통해 세계 지배를 꿈꾸는 궁극적 악역으로 등장한다(007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Dr.No>). 그리고 코미디 장르의 영화에서 과학기술자의 이러한 이미지는 희화화되어 웃음을 자아내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스플래쉬>, <백 투 더 퓨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가 과학기술과 미래의 모습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던지는 영화들에서뿐만 아니라 대중영화 전반에 걸쳐서 광범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해피엔딩을 갖는 스필버그의 '흐뭇한' 영화에서조차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음을 상기하라. <미지와의 조우>, <E.T.>).
 

과학기술의 무용성과 그것의 치명적 결함
 

그러면 첨단과학기술(또는 그것이 담고 있는 가치)의 묘사에 있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의 문제로 넘어가자. 이것 역시 대단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많은 영화들이 과학기술의 산물을 긍정적으로 그리면서도 종종 이를 그다지 쓸모가 없거나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시각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미래 사회를 그리는 문학작품들에 비해 볼 때 훨씬 더 구체적인 형태로 과학기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게다가 최근 영화의 특수효과(SFX) 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말미암아,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가공적인 인공물의 이미지들은 실재와 유사한 정도를 뛰어넘어 실재보다도 더욱 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을 심어줄 수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환상적으로 보여진 과학기술이 사실은 별다른 쓸모가 없거나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드러나고, 반면 전통적인 가치나 방법이 훨씬 유용한 것으로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예컨대 <스타 워즈>에서는 첨단 전투장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믿을 수 없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제시되며 오히려 일종의 '감'("force")에 의존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으로 묘사된다. <데몰리션 맨>이 그려내는 미래세계에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능하게 된 새로운 현상이나 상황들 - 대표적인 예로 사이버섹스 - 이 전통적인 가치와 행동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된다. 나아가 일본의 애니메이션 작가인 미야지끼 하야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둣, 권위적인 거대과학기술을 거부하고 자연친화적인 가치에 방점을 두는 영화들도 상당수 있다(대표적인 예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하지만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예보다 과학기술을 더욱 치명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다. 복잡한 대규모의 과학기술체계는 종종 내부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어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예상치 못한 우주선의 폭발(<아폴로13>), 우연히 끼어든 '파리'라는 요인(<플라이>, <브라질>), 냉전체제 하에서 피해의식을 보이는 장군(<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원한을 품은 컴퓨터기술자(<쥬라기 공원>), 엉뚱하게 끼어든 해커 소년(<위험한 게임>) 등등 위험요인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부터,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나타나며, 체계 내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과학기술체계의 특성 때문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전체적인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수가 많다.
 

과학기술의 부정적 이미지의 근원
 

앞서 세 가지의 유형으로 정리한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과학기술자는 종종 도덕적·정치적 함의를 잊고 오로지 기술개발에만 '미친' 사람으로 그려지며, 대기업, 정부 등등의 거대조직에 속해 자율성을 잃고 있다. 이들이 개발한 과학기술은 언뜻 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인간의 실질적인 복지 증진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며, 대부분 내부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어 궁극적인 파멸로 치닫는다. 그 결과 미래사회는 암울한 전망으로 뒤덮인다. 무분별한 과학기술의 남용으로 환경은 오염되고, 과학기술자는 지배계급의 노예로 전락하며, 사회는 관료적 지배 하에 떨어지고 과학기술은 이 지배를 실질적으로 돕거나 최소한 방조한다. 다소 어두운 전망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보는 상당수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전망들을 합치면 이러한 결과가 나옴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중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압도적'인 미래상은 앞서도 지적했듯 상당히 놀랍다. 이는 우리 시대에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과학기술만능주의적인 주장들이나 '테크노피아'의 신화를 고려해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면 이제 '왜?'를 물을 차례이다. 20세기와 같이 과학기술의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고, 과학기술의 전망에 대한 낙관적인 해석들이 대중들 속에 널리 퍼져 있는 시기에, 왜 유독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는 대중영화 속에서는 이렇게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단 말인가?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대해, 그 이미지들의 기원을 영화의 장르적인 특성으로 돌려 버리는 것은 가장 손쉬운 답이 될 것이다. 즉, 미래를 어둡게 묘사하는 것은 SF영화 장르의 관례(convention)로,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는 호러영화 장르에서 주로 나타나는 관례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자면 과학기술체계에 내재한 치명적인 결함 역시 단순히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이 분명히 설득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앞서의 모든 이미지들을 설명해 내지는 못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오로지 사회와의 관련을 통해야만 찾을 수 있다.

나는 영화 속에 묘사된 과학기술의 모습, 과학기술자의 모습, 그것이 구현된 미래세계의 모습에는 20세기 들어 과학기술이 걸어온 길과 그것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우려와 공포 - "과연 새로운 과학기술은 진정으로 인간의 존재조건을 향상시킬 것인가"라는 - 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들에 묘사된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의 이미지들이 실제의 모습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미래의 모습 역시 지나치게 일면적으로만 그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나아가 내가 들었던 세 가지 유형들이 과학기술의 모습의 전부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과학기술 이미지들은 단순히 놀라운 예술적 상상력이나 과학기술에 대한 편협한 관점의 반영을 넘어선다. 이 이미지들 속에는 원자폭탄의 투하를 목도하고 핵전쟁의 위협이 상존하는 냉전치하를 살아갔으며, 드리마일 섬과 체르노빌 핵발전소, 챌린저호의 폭발 등으로 대표되는 거대과학기술체계의 실패를 겪은 20세기 사람들의 정서가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참 고 문 헌 >

Steven L. Goldman, "Images of Technology in Popular Films: Discussion and Filmography,"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14:3(1989), pp. 275-301.

Spencer Weart, "The Physicist as Mad Scientist," Physics Today, 41:6(June 1988), pp. 28-37.

Christopher P. Toumey, "The Moral Character of Mad Scientists: A Cultural Critique of Science,"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17:4(1992), pp. 411-437.

Annette Kuhn (ed.), Alien Zone: Cultural Theory and Contemporary Science Fiction Cinema (London: Verso, 1990), PART 1. Reflections.

출전: 『과학과문화』 창간호(199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