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운동이나 정보운동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홍성욱이라는 이름은 아마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문화과학』, 『과학사상』 등의 지면에서 그가 이런저런 주제에 관해 쓴 논문이나 발표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을 뿐더러, 비교적 최근에 그가 쓴 에세이집인 『잡종 - 새로운 문화읽기』(창작과비평사, 1998)와 그가 공동으로 편집한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창작과비평사, 1999)가 출판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문학과지성사, 1999)은 그가 지난 10여 년에 걸쳐 썼던 글들 중 일부와 함께 영어로 원래 썼던 몇몇 논문들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함께 묶은 것이다.
이 책은 우선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요긴하다. 이 책에는 저자의 '잡종적'인 관심사가 다시한번 유감없이 발휘된 열한 개의 논문들이 실려 있는데, 이들 각각은 그동안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주제들에 대한 개설을 담고 있거나 이미 소개되었더라도 다소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던 주제들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며, 최신의 영어문헌들을 열심히 뒤져야 얻을 수 있음직한 정보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이쪽 주제들을 '소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세미나를 할 때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컨대 (사회)구성주의적 과학사회학의 최근 연구경향을 리뷰한 1장은 그동안 과학사회학을 국내에 소개했던 어떤 문헌보다도 자세한 논의를 담고 있으며, 특히 과학사 쪽에서 나온 많은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가장 아카데믹하고 세부적인 논의 전개를 하고 있는 4장과 5장은 토머스 쿤(Thomas S. Kuhn)과 (사회)구성주의적 과학사회학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한편으로, (사회)구성주의적 과학사회학 내부에 존재하는 분파간의 입장차이가 오늘날의 과학을 바라봄에 있어 어떤 실천적 차이를 낳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는 특히 국내 일각에서 (사회)구성주의적 과학사회학을 두고 '한마디로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식으로 분파들간의 공통점만을 강조하여 다소 앙상하게 받아들여 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의미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9, 10, 11장은 최근의 중요한 화두인 생명공학과 정보기술 분야에 대해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많은 정보들을 압축적으로 정리하면서 기존의 관점들을 '뒤트는'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실용성'에 더해, 이 책이 이론과 실천, 즉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과학기술운동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직접 관련된 부분은 서구의 급진과학운동의 흐름을 개괄하고 한국 과학기술운동의 역사를 약술한 이 책의 3장이다. 여기서 저자는 서구 뉴 레프트의 자양분을 흡수해 1980년대 초에 본격적으로 태동한 한국의 과학기술운동이 종속이론에의 경도를 거쳐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정통 맑스주의에 입각한 과학기술노동운동의 흐름과 뉴 레프트적 경향을 유지한 반핵평화운동·환경운동·(급진적) 보건의료운동의 흐름으로 크게 나뉘었으며, 90년대 들어 이 중 전자가 급격히 쇠퇴하면서 과학기술 시민운동 세력이 새로이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기술을 보편적인 '생산력'으로, 그리고 과학기술(노동)자를 이의 담지자이자 변혁의 주체로 파악했던 80년대의 이념과, 과학기술을 여타의 사회제도나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문화'로 보는, 90년대 한국사회에 뒤늦게 소개된 관점 사이의 간극을 반영하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으며, 이는 책의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과학기술에 대한 '신화화'를 해체하고 과학기술의
'올바른' 사용을 모색하는 과학기술운동의 제반 과제들을 위해 논의의 밑거름이
되고 토론을 촉발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미 선보인
바 있는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녹두, 1995), 『과학기술과 사회』(한울,
1998), 『과학기술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새물결, 1999)와 같은
책들에 뒤이어 나온 이 책이 과학기술운동에 관심을 지닌 이들이 단지 '의미있게
여기는' 또한권의 책이 되지 않으려면 세부적인 이론지점들에 대한 좀더 치열한
고민과 그에 걸맞는 실천활동의 모색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90년대
초에 비해 이론적인 자원은 상대적으로 풍부해졌지만 실천적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만 가는 듯한 대학 내 과학기술운동의 흐름을 보면서 문득 드는 우려다.
출전: 『그날에서 책읽기』 199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