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정말 역동적인 곳인 것 같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작년 겨울에 잠시 귀국했던 선배가 불쑥 내뱉은 말이다. "형,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나의 어리둥절한 물음. "버스카드제가 도입된 것만 봐도..." "그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나가 있었던 기간이 채 1년도 안되는데, 그새 서울시내의 거의 모든 버스에 버스카드 판독기가 생겼더라. 그런데 그걸 영국 같은 데서 하려고 했다고 생각해 보니까... 만약에 런던의 시내버스에 버스카드기를 도입하려고 했다고 가정해 보자. 맨 먼저 버스노조에서 버스 기사들의 노동강도가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반발하고 나섰을 거고, 시민단체에서는 그것에 신경을 쓰다가 탑승객들의 안전에 소홀하게 된다는 둥 어쩌고 하면서 반대했을 거고, 시 의회에서도 로비를 받은 일부 의원들이 저지하려 나섰을 테고, 버스카드 판매나 회수를 어디서 맡아서 할 거냐를 둘러싸고도 한참동안 격론을 벌여야 할 거니까... 아마 런던 시내버스 중에서 아주 일부 노선을 대상으로 해서 시범적으로 몇 년쯤 운영을 하다가 또 타당성 조사를 거치고, 사회집단들간의 복잡한 타협과정도 거치고, 그래서 한 10년쯤 지나면 혹시 시행이 될려나...?" "..."
이왕 글을 이런 식으로 시작했으니 하나의 에피소드만 더 들어보자.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어떤 분으로부터 들은 얘기. "미국에서 87년쯤에 매킨토시 초기기종을 구입해서 잘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재작년에 귀국할 때 컴퓨터를 화물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 갑자기 컴퓨터가 돌아가지를 않더군요. 그걸 고치려고 물어물어 용산 컴퓨터 상가까지 찾아갔는데, 글쎄 부품이 없어서 못고친다면서 그냥 새걸 하나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거예요." "아니, 그럼 미국에는 그걸 고칠 수 있는 부품이 아직도 있나요?" 약간은 황당해진 나의 물음. "그럼요, 80년대 초반에 나온 애플 컴퓨터를 고쳐서 쓰는 사람들도 있고 하다못해 57년형 스탠다드 타이프라이터를 아직 쓰는 사람들도 많아요." "..."
나의 말문을 두 번이나 막아버린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를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그건 소위 '선진국'에 사는 인간들이 가진 '여유'에 대한 부러움은 분명 아니었다. 그건 '이 땅의 기술문화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어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바라볼 때 그것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둔감하거나 별다른 생각없이 받아들인다. 새로운 기술은 옛 것에 비해 보았을 때 어련히 좋은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들을 하고, 그것의 좋은 점들(만)을 선전·홍보하는 목소리에도 기꺼이 귀를 기울이며, 그것이 낳는 폐해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곧잘 이를 감수한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단일하면서도 필연적인 궤적을 거친다는 사고를 암암리에 인정하고, 그것을 가로막거나 방향을 돌리려는 노력을 부질없는 것으로 폄하하며, 오히려 그것이 갖는 '긍정적'인 가능성들을 더 잘 발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일 것이라고 한계짓는다. '과학기술입국'이라는 구호에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결국 현실로서 인정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적정기술'과 같은 구호는 배부르고 등따슨 자들의 철딱서니없는 짓거리일 뿐이라고 일소에 붙인다. 그렇다. 그것이 우리의 기술문화이다. 이러한 기술문화 하에서는 그 기술체계에 제기되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도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전자주민카드반대나 생명공학 규제, 그리고 반핵운동이 진정 넘어서야 할 벽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시한번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이 빚어졌을까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아마 분명 역사적인 이유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36년간의 식민지 상황 속에서 좌절을 맛보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객관적'인 해방과 계몽의 힘으로 과학기술을 사고했던 식민지 치하 지식인들의 경험이 그 근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화'와 '중진국 진입'의 기치 하에 서구 과학기술을 단시간내에 '이식'한 해방 이후의 경험들이 그 위에 쌓여 있겠다.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처럼 숙련공들이 자신을 일자리에서 내모는 기계를 부순 기억 - 러다이트 운동(Luddism) - 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구 소련에서처럼 원전에서의 방사능 대량누출이나 우주선의 고장·폭발과 같은 대형 기술사고를 딱히 겪은 적도 없었으니 기술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인지도 거의 없다는 점 역시 고려에 넣어야겠다. 80년대 이후에 수입되었던 소비에트 맑시즘 역시 근본적인 해방의 힘으로서의 과학기술만을 누누히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을 오히려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아직까지 과학기술이라는 것을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의심하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셈이다.
임마, 너도 과학기술의 혜택을 입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냐,
하고 반박할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편하다. 그냥 이대로 문제를 떠안고 살면 된다. 자연과학은 합리적인 것이고,
그것을 응용한 첨단기술 역시 합리적이며 단일한 발전궤적은 취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이란 없다. 혹 누군가가 목욕물 버리려다가 애까지 버릴
생각이냐, 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당신이야말로 애가 떨어져
나갈까 겁이 나서 목욕물조차도 못버리는 것 아니냐고. 당신이야말로 번개불에라도
콩을 구워먹고야 말겠다는 식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출전: 『공대저널』 1997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