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과학기술에 문제의식을 느낀 일군의 사람들이 '과학기술운동'(이하 과기운)이라는 부문운동을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궤도에 올려놓은 이래 지금까지, 우리나라 과학기술운동의 주류는 크게 두 가지의 테제, 즉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과 '과학기술노동(자)운동'(이하 과기노운)에 입각해서 활동을 벌여 왔다. 특히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급격한 성장에 고무되고, 88년 정부출연연구소 노동조합의 잇따른 설립에 의해 현실적인 전망을 제시받은 과기노운 지향은 이후 90년대 초의 학내 과기운 조류를 대표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이공계 과학기술학회연합으로 대표되었던 학내 과기운의 담당자들은, 과학기술자들이 현장에서 처한 물질적 조건이 점차 하향평준화 - 노동강도의 증가, 노동의 세분화·파편화 - 되고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에 근거해서 과학기술자들은 결국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책임' 테제에 입각한 사회적 실천은 노동운동의 형태로 나타나야 함을 주장하였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향설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 그리고 그 방향설정은 적절한 것이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기노운이라는 당시의 문제설정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즉, 과기노운을 상정했던 사람들은 (예비)과학기술자들의 객관적 존재조건의 변화에 '부분적으로만' 주목하였을 뿐, 그들의 주관적 의식의 형성, 즉 문화적 측면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은 과학기술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자와는 다른, 어떤 '독자적' 계층으로 상정하는 것이 스스로가 처한 객관적 존재조건을 꿰뚫어보지 못한 일종의 허위의식(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과학기술자 집단이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기만적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스스로의 존재조건을 자각함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믿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야만 연구·작업환경의 개선이나 연구의 자율성 회복, 나아가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 해결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내 생각은 다르다. 과학기술자들이 이데올로기(=허위의식)를 벗어던짐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과학기술자(=과학기술'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통념과는 달리, 나는 과학기술자들이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전문인, 소위 '프로'로서의 과학기술자의 정체성을 확보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단순히 파악되어서는 안되며, 구체적인 물적 기제(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여기에는 학교도 포함된다)에 의해 행해지는 물질적인 실천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알튀세의 지적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예비)과학기술자들은 학교체계 속에서 과학기술자 집단의 전문성·사회적 중요성·소명의식을 자명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당장의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시야를 항상 미래에 두도록(바꿔 말해, 기술적인 '꿈'과 '현실'을 항상 혼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도록) 사회화되며, 이러한 가치를 보다 용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뛰어난' 과학기술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임을 학부·대학원의 '교육'과정을 통해 몸으로 습득하지 않는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과학기술자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이나 이에 대한 자각의 결여가 '진정한' 과학기술자가 되는 길을 봉쇄한다거나, 과학기술자들의 '후진적인' 사회의식 때문에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 문제가 방기된다는 식의 기존의 주장들은 대책없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왜 과학기술자들은 스스로가 처한 (노동자로서의) 객관적인 조건을 깨닫지 못하는가, 왜 과학기술노동운동은 보다 넓은 사회적 문제까지를 포괄하도록 급진화되지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자들로 만들어지는 메커니즘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기 때문에 당장 공허한 메아리로 울릴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과학기술자들의 저항이라는 것은 어떻게 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전망이 너무나 암울하지 않은가, 라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또 나의 주장이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테제의 중요성을 축소시킴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무책임함을 방조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박해올 수도 있다. 반론의 유의미성을 충분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항은 '이미'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과거에 상정했던 것과 같은 집단적·체제저항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은밀한 태업이나 시민단체에 대한 개인적·전문적인 조력과 같은 보다 소극적이고 일상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넘어서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저항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과학기술자 집단 내부로부터 자생적으로 출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자 집단이 스스로 갖고 있는 '프로'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대안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며 좀더 폭넓은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급진적인 사회운동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과학기술자 집단 내부에서의 자기반성도 필수적이지만 집단 외부로부터의 지속적인 압력이 주어져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출전: 『공대저널』 1997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