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아마 이 글은 지금껏 내가 써왔던 글들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사적인 형식을 띨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문제의 특수한 양상에 대한 기술이 될 수도 있지만, 내가 한 개인으로서 관찰하고 겪은 일들에 대한 편견섞인 기록에 그칠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내가 이런 식으로 미리 조심하는 이유는, 이것이 다분히 민감한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일찌기 C.P. 스노우라는 사람이 '두 문화(the two cultures)'라고 명명했던, 인문-사회계와 자연-공학계 사이의 갈등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내가 첨예하게 느끼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공대 학부를 나와서 '과학사'라는 어중간한 분야를 대학원에서 전공하게 된 나의 개인적인 배경과 무관할 수 없지 싶다. 학부를 나와서 이전과는 다른 환경 속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놀라울 정도의 편견과 냉소와 상호무시, 적대감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상황이, 딴에는 과학기술자운동이랍시고 고민해 왔던 나에게는 분명 어느 정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흥분해서 써갈겨 놓은 것임에 분명한 노트조각이 아직도 내 책상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인문-사회계 → 자연-공학계. (1) 시각: 혜택받는 집단, 포항제철의 노랑병아리, 비놀리아공법과 22동 앞 공학관의 선명한 대비, 배부른 투정, 어려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상당하는 충분한 보수(파우스트와 악마와의 계약), '개기면' 학위 나오고 어느 정도의 지위·신분이 보장되는 곳. ∴ 개량적이기 쉬우며 문제의식이 펼쳐지기보다는 은폐되기 쉽다. '사회적 책임'이라는 문제에 대체로 둔감하며 개인적 안위를 위주로 삼는다. '재야'가 결코 설 수 없는 곳. (2) 자기진단: '과학기술'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첨퓨터 등의 첨단기기에 약함(무식함 인정 + 무시), 다소의 우월함('교양'이라는 무기)과 현실의 논리에 대한 스스로의 왜소함의 자각의 결합, 비실용성에 대한 자부심?, 막다른 골목.

자연-공학계 → 인문-사회계. (1) 시각: 게으르고 공리공론을 일삼는 집단, 놀고먹기 좋음. 공대교수는 시시각각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속도에 스스로를 참여시켜야 하는 반면, 인·사대 교수는 강의노트 한번 만들어놓으면 일생동안 써먹을 수 있음! 공학은 물질적인 결과물들을 생산! 그러나 인문사회과학은 대체 뭘 하는 거야, 농담따먹기? 남이 힘든 건 속도 모르면서 당위적 얘기만 일삼음. 극단적으로 보아 비전도 없으며, 마치 옛날의 과거보는 선비들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2) 자기진단: 스스로가 일한만큼 받지 못한다는(물론 사실일 수 있겠지만) 피해의식. 인문사회과학적인 말발, 소위 '교양'에 대한 열등감(인문사회대에는 컴퓨터모임이 없는데 공대에는 왜그리 문학회가 많나?),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혹은 맹신).

결론: 이 두 집단이 서로 만나면 아주 피곤해짐. ∵ ① 자연-공학계 친구들은 훈계 듣기를 아주 싫어함(설사 그것이 맞는 얘기더라도). ② 인문-사회대 친구들은 대체로 공격적임 (경제적 열등감→언어적 우월함). 말이 안통한다고 느끼는 경우 부지기수. ∴ 왜곡된 대립구도. 이항구도의 평행선.

너무 과장되었다고? 현실의 일면만을 왜곡시킨 것이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만일 정말 그렇게 생각된다면 글쓴이의 편향된 시각에서 빚어진 '테러'로 생각하고 넘어가 줬으면 한다. 하지만 왜 내가 이 문제를 끄집어내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넘어가야 할 듯 싶다. 만일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 - 이 속에는 대단히 다양한 문제들이 포괄된다 - 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의 결집체를 '과학기술운동'이라고 정의내린다면, 나는 그것의 주류가 '과학기술자의 건강한 삶'에 방점을 두는 과학기술'자'운동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에 근거해서 인문-사회계와 자연-공학계를 아우르는 '대중적 과학기술운동'으로 옮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서로의 문제에 대한 상호무관심과 (안좋은 의미에서의 소극적) 인정, 배타적 전문가주의, 나아가 적대감의 표출과 의도적 무시를 대책없이 양산하는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완전히 무로 돌리고 만다. 내가 주목하려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역사적으로 긴 연원을 지니고 있는 이 거대한, '근거있는' 편견 속에서 나는 그만 빠져나갈 길을 잃고 말았다. '이제 우리 오해를 풀고 잘해보자'라는 상투적인 어구로 글을 끝내는 것이 무의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갑자기 떠오르는 한 가지 섬뜩한 상상: 소위 '무식한(?) 열석꾼'과 '유식한(?) 한석꾼' 사이의 왜곡된 대립구도 속에서 덕을 보는 것은 대체 누구일까, 라는. 결국 마지막으로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각자에게 이러한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게끔 할 수 있는 '자기성찰성' 뿐이다.
 

출전: 『공대저널』 199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