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현재까지에 걸치는, 다음의 몇 가지 현상들에 주목해 보자: ① 중고등학교 때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학습과학백과』 류의 책들을 적어도 몇 권씩은 본 적이 있었다. 그 중에는 항상 '미래의 과학'이라는 부분이 있고, 우리의 앞으로의 생활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② 지금은 약간 한물간 분위기가 되었지만, 80년대 말-90년대 초에 유행하였던 앨빈 토플러 식의 소위 '정보화사회론'은 과학기술 - 특히 정보통신기술 - 의 발전으로 우리의 미래사회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될 것인지에 대해 설파하였다. ③ 수학능력시험 대비용인지 논술시험 대비용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최근 『21세기와 자연과학』, 『21세기와 첨단기술』 류의 책들이 서점가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④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과학과기술』은 올해 '50년 후의 과학기술'이라는 2회 특집기사를 실었다. 여기서는 자연과학·공학 분야별로 향후 50년 동안 어떤 기술의 발전이 가능해질 것인가에 대한 예측을 싣고 있다.
이 현상들이 공통적으로 내포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 이들 모두는 미래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학자·공학자들의 에측에 따른 일련의 '타임 테이블'에 의거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이천 몇 년까지는 무슨무슨 기술이 실용화된다", "또 이천 몇 년까지는 이런이런 기술이 상용화된다"라는 식의 나열이 시시콜콜히 계속되는 서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이들 모두는 과학기술의 '특정한 방향'으로의 '발전'에 의해 미래의 삶이 훨씬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바꿔 말해, 이들은 현재의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이 앞으로도 관철될 것이며, 그 결과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예측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만스럽고 의심이 간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심을 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미래사회를 다룬 SF영화들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dystopia)적 미래상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SF영화 장르는 엄청난 환경적 재난(해수면의 상승, 대기오염으로 인한 산성비, 전지구의 사막화 등등), 첨단기술을 매개로 한 감시사회의 모티브,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의 소외 등을 설득력있게 시각화해 왔다. 이런 이미지들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 사이의 연결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각이 일면적이고 편협한 것임을 분명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아울러 이러한 이미지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불확실성과 그 부정적 효과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와 공포를 그 속에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SF영화가 보여주는 미래상 역시 불만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물론 SF영화가 주류적인 미래상과는 다른, '어떤' 가능한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주입받고 있는 '타임 테이블'에 대해 반성적 고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즉, 미래는 그 '타임 테이블'을 따라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는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SF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SF영화의 미래상은 '아침에 일어나면 로보트가 계란프라이를 받쳐들고 오는 세상'과 '이마에 바코드가 그려진 인간들이 빅 브라더의 감시하에 몽유병자처럼 돌아다니는 세상' 사이의 이항대립을 탈피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과학기술의 '특정한' 발전을 이미 전제한 상황에서 주류에 대한 반정립을 제시하는, 소극적인 것에 그친다.
그래서 관심은 자연스럽게 남은 한 가지 가능성에 쏠린다.
그것은 생태사회주의가 제시하는 미래상이다. 프랑스의 생태주의 운동가인 앙드레
고르는 자신의 글 「에콜로지스트 선언」(조홍섭 편,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한길사,
1984)에 수록)의 말미에서 역시 '하나의' 가능한 미래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다 때려치우고 시골가서 유기농업이나 하자는 식의
'삐리한' 것도 아니며, 현존하는 과학기술을 모두 말살해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것도 아니다. 그의 주장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멈추거나 현재의 경제성장이
멈추는 것이 결코 역사가 멈추어 서는 것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진정한 삶의
질 향상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아닌,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의 변화로부터 나온다는,
어찌보면 지극히 자명한 것이다 (자세한 상술은 어려우니 이 글을 직접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는 우리에게 아마도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향하고 있는 곳, 당신이 당연시하고 있는 삶, 그대는 그것이 좋은가!" 이거야말로
주어진 '타임 테이블'에 익숙해진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런 물음이 아닐까?
출전: 『공대저널』 199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