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백년간의 영화매체의 역사는 곧 지난 백년간의 과학기술의 발전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이는 영화매체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토키, 컬러, SFX...)을 갖추게 되는 과정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전적으로 힘입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영화매체가 그 속에 과학기술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반영'해 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기서 전자가 기술사의 영역에 가깝다면, 후자는 사회사나 문화사의 영역에 가까울 터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영역은 이 중 후자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영화 속에 나타나는 과학기술의 이미지로부터 동시대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단초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내가 믿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는 '대중영화(popular film)'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과학기술의 이미지들은 다음 세 가지 정도의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과학기술 그 자체(즉, 과학기술의 산물들)의 이미지, 2) 과학기술의 발전을 담당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이미지, 3) 과학기술의 발전 결과로 나타나는 미래사회의 이미지. 이 이미지 유형들은 서로 연관되어 전체적인 하나의 상을 구축한다.

먼저 영화 속에서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그다지 쓸모가 없거나 인간의 복지 증진에는 그다지 도움이 못되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데몰리션 맨>의 사이버섹스나 통제 기구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거대병기들, <월러스와 그로밋>에 나오는 월러스의 발명품들). 혹은,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내부에 치명적인 결함이나 제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어 위기를 불러오는 근원이 되는 것으로 설정되기도 한다(<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아폴로 13>, <브라질>, <쥬라기 공원>, <신세기 에반게리온>).

한편, 과학기술자들은 '가치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집단'이라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는 대체로 냉정하고 도덕적 가치기준이 결여되어 있으며, 특정한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비합리적인 집단으로 묘사된다(<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하는 과학자, <모스키토 코스트>의 천재발명가, <킹덤>의 의료인집단). 이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의 산물들이 어떤 사회적·환경적 결과를 가져올지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것이 재앙을 불러온 후에야 문제를 깨닫고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파멸이 닥친다(<플라이>, <터미네이터 2>). 그리고 종종 과학자들은 영화 속에서 배신하는 역할이나 궁극적인 악역으로 남는다(<에일리언> 시리즈, 007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닥터 노>).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의 모습이 이러하니, 미래사회라고 밝은 모습일 리가 없다. 미래사회는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외양으로 설정된다. 컴퓨터기술의 발달로 감시사회가 더욱 공고화되거나(<브라질>, <1984>, <트론>), 환경오염이 극단적으로 심화되며(<블레이드 러너>, <워터월드>, <토탈 리콜>, <핸드메이즈 테일>), 심지어는 기계에 의해 인간이 지배되기도 한다(<알파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터미네이터 1&2>). 핵전쟁이나 환경재해로 말미암아 인류가 거의 모두 멸망하고 난 후의 세계를 다룬 '재앙 이후(post-catastrophe)' 장르의 영화들은 하나의 극단적인 예가 되겠다(<자도즈>, <아끼라>, <매드 맥스>, <탱크 걸>).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 그리고 미래사회의 모습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낙관적 신화들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이런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함의들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그것은 현대사회 전반을 규정짓다시피 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과연 우리에게 진정으로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해, 바꿔말해 현대 과학기술의 본질에 대해 성찰해 볼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것은 과학기술(과 그것이 구현될 미래)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결코 단순하게 파악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은 널리 선전되는 '테크노피아'의 신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던지는 영화들 역시 무리없이 수용한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해 한편으로 긍정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이미 나타나고 있는 병폐들이 심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대중영화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의 이미지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우려를 담은 하나의 경고장이자,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출전: 『한국방송대학보』 1998년 6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