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를 바라보는 '어두운' 시선
-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과 기계의 관계
 
 

인간과 그가 만든 인공물, 그 중에서도 특히 '기계'가 서로 맺어 온 관계는 역사적으로 흥미를 자아낸 주제 중 하나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기계는 인간이 물질적 필요나 정서적 만족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바꾸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다시 기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역사적 시기들이 어떤 특정한 기계의 이미지에 의해 크게 지배를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르네상스기부터 과학혁명기, 계몽사조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기계' 하면 떠올랐던 이미지는 기계 시계의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14세기 이후가 되면 유럽의 웬만한 도시에는 교회와 함께 거대한 시계탑이 들어서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고, 과학혁명기에는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clockwork universe)'라는 관념이 자연을 바라보는 유력한 틀로 자리잡았다. 산업혁명이 도래한 이후에는 증기기관이 대표적인 기계의 이미지로 새롭게 부상하게 되는데,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를 일종의 열기관으로 바라보는 관념이 득세한 것도, '끊임없이 힘차게 움직이는 엔진'이 진보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도 19세기의 일이었다. 그리고 20세기, 특히 1950년대 이후가 되면 컴퓨터가 중요한 기계의 이미지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2차대전 말기에 최초의 전자 디지털 컴퓨터인 ENIAC이 만들어진 이래, 컴퓨터는 20세기의 후반으로 오면서 점점 더 사람들의 일상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 왔고 오늘날 이른바 '정보통신혁명'의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컴퓨터가 이른바 '생각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인간처럼 사고하는' 기계를 과연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는 컴퓨터 과학자들의 오랜 논쟁거리였고 이는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기계들,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대중매체 속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려졌을까? 19세기 이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기계의 발전이 인간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이 줄곧 존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계의 발전이 인간을 압도할 것이고 심지어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식의 어두운 전망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윈의 영향을 받은 새뮤얼 버틀러의 소설 『에레혼』(1872)은 기계의 '진화'가 인간보다 빨리 일어나 결국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선구적 작품이었고, 20세기 초 미국의 극작가 카렐 차펙이 쓴 희곡 <R.U.R.>(1922)은 '로봇'이 반란을 일으켜 모든 인간을 살육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디지털 컴퓨터의 등장과 '사고하는 기계'의 실현가능 여부에 대한 1950년대 이후의 논쟁은 이와 같은 어두운 전망에 새로운 차원을 보태었는데,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1965)과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자신의 의사를 가지게 되어 인간의 명령과 통제를 거부하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등장'인물'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이후 다양한 형태로 대중매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컴퓨터가 인간 여자의 몸을 빌어 자신의 후손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악령의 종자>(1977),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인격화된 컴퓨터의 모습을 선보인 <트론>(1982), 실제와 게임을 구분하지 못한 컴퓨터가 제3차 세계대전 시나리오를 진행시키는 <위험한 게임>(1983), 진화의 속도가 임계점을 돌파한 컴퓨터가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배경 설정을 가진 <터미네이터 1, 2>(1984/1991) 등이 그런 예들이다.

역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시는, 인간이 기계보다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는 '잘못된' 사고가 인간이 만든 기계라는 '괴물'을 인간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이를 터부시하는 태도 ― 앞서의 이미지들에서 잘 드러난 ― 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하는 '네번째 불연속'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매즐리시의 제언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를 그 속에 은폐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본말이 전도된 존재론적 비약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은, 기계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미쳐 온 영향 ― 노동 리듬의 변화, 실업의 양산 등 ― 을 다시금 돌아봄과 동시에, 기계가 인간 사회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인간이 막을 수 없는) 내적인 발전 논리를 갖는다는 기계의 '물신화(reification)'를 타파하는 것일 터이다.
 

■ 참고문헌 △ 홍성욱, 「몸과 기술」,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문학과지성사, 1999) △ 브루스 매즐리시, 『네번째 불연속 ―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사이언스북스, 2001) △ Fred Glass, "Signs of the Times: The Computer as Character in TRON, War Games, and Superman III," Film Quarterly, 38:2 (1984-5) △ Ian Barns, "Monstrous Nature or Technology?: Cinematic Resolutions of the 'Frankenstein Problem'," Science as Culture, 9(1990)
 
 

출전: 『이공대저널』 200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