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책,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을, 그것도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문제설정의 차원에서 비판하기 위해서는 대체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나가야 할까? 글의 시작부터 약간은 머리가 복잡해진다. 글의 말미에 가서 보이겠지만,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과학기술정책이 내포하는 문제점들이 사실상 형식적인 '정책 내용'의 틀 속으로 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에서 비롯한다. 왜 그럴까? 다음의 순서로 문제를 풀어나가 보자.

먼저 그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가장 많이 가해졌던 비판이 무엇이었던지를 떠올려 보자. 그건 과학기술처가 정부부처 내에서 지니는 위상이 낮아서 힘있는 정책 결정과 집행이 어렵다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오락가락해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예산배분에서 형평성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정부부처 간의 이해관계 마찰을 종합조정해 줄 수 있는 기구가 부재하다거나 하는 등속의 것이었다. 이 모든 문제들을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정책목표(=경제성장을 위한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전)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절차와 정책적 수단이 대단히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으로 요약 가능할 것이다. 즉, 이 단계에서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이 근대적인 도구적 합리성마저도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사실 본질적인 지점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 제기된 비판들은 주류 과학기술정책이 목표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의 효율성만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지적하며 등장한 새로운 비판자들은 주류 과학기술정책이 내포하고 있었던 암묵적인 전제들 - 과학의 객관성과 기술의 자율성 및 중립성이라는 신화, 과학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사회 전체에 대해 평균적인 혜택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 - 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수의 과학기술 전문가나 정책수립자가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정책의 입안을 좌지우지하는 비민주적 과정을 문제삼았고, 과학기술정책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과학기술의 맹목적인 발전'이 아닌, '사회구성원들의 실질적이고도 균등한 삶의 질 향상'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간단하게 말해, 이들은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고, 엘리트 중심주의와 맹목적인 효율지상주의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런 식으로 주류 과학기술정책을 도매금으로 마구 비판해 넘기기 이전에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지금의 상황에서' 주류적인 과학기술정책 패러다임 내에서 작업하는 정책수립자들은 스스로의 작업이 내포하고 있었던 철학적·사회학적 전제들을 모르고 있는가? 그들은 경제성장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조차 모르고 있는가? 만일 그들을 '앞뒤 재보지도 않고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대책없는 바보들'로 규정해 버린다면 속은 후련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 역시 경제성장과 노동문제와 환경문제와 지역간의 균등한 발전 등의 상이한 가치들이 과학기술정책 내에서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는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기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드러내놓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이 지점에서, 이제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비판은 이미 인식론적 지반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럼 문제는 대체 어디서 발생하는가? 내가 생각컨대, 그것은 '정책'이라는 것 그 자체가 갖는 자체 논리의 한계로부터 비롯된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하나, 정책의 '주체'는 국가이거나 지방정부이고, 이들은 서로 충돌하는 요구들과 가치들을 '조정'하여 하나의 방향성을 만들어야만 한다. 둘, '조정'은 필연적으로 '비교'를 요구하고, 현 체제 하에서 소위 '객관적'인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척도는 화폐단위이다. 여기서 당위적으로는 옳으나 '(단기)비용이 비싸게 먹히는' 노동문제, 환경문제, 시민참여와 같은 항목들은 순위가 뒤로 밀린다. 셋, 하나의 국가는 그 단위 속에서는 조정의 주체이지만, 세계체제 속에서는 그 자체로 경쟁의 주체이다. 이러한 현실적 강제 속에서 정책수립자들은 국가경쟁력이 삶의 질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잠시 접어놓은 채 경쟁력 강화 이데올로기 속으로 매몰된다. 넷, 그러나 그럼에도 '조정'이라는 것을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는 딜레마 속에서 정책수립자들은 이제 '종합선물상자'를 만드는 데 몰두한다. 즉, 서로 분명히 상충되는 과제들이 평면적·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정책보고서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물론 예산의 제약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 과제들 중에서 실제로 중점을 두어 실행되는 것들은 그 중에 일부에 불과하고, 결국 입으로는 삶의 질을 논하면서도 실제로는 '국가경쟁력 강화'의 범주에 속하는 활동들만을 재생산하는 형태의 정책 수립과 시행이 반복된다.

어떤가? 결국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문제는 정책 영역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과학기술정책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정책수립자들이 뭘 몰라서도 아니고,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풀어나가는 주체를 정부 영역 속에 가두는 '정책'이라는 말이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는 함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만약에 그 비판이 정책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논의의 구조 속으로 매몰된다면 - 바꿔말해, 정부가 (이미 안고 있는 한계 속에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한 논의로 얘기를 스스로 국한시킨다면 - 그것은 결국 주어진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히려 정책의 영역 외부에 있는 대중운동·시민운동의 세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게임의 법칙을 결국 벗어나기 힘든 '정책' 영역에서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상이한 이론과 가치체계에 근거한 여러 운동집단의 활동으로부터 도출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것은 과학기술정책을 문제삼는 논의가 '논리적으로' 이를 수밖에 없는 하나의 결론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출전: 부산대 『과학과사회』 199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