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개인적인 얘기로 글을 시작하자면, 난 유나바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울러 아래에서 밝혀지겠지만 그의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올 초 '유나바머'로 알려진 테어도르 카진스키가 잡히면서 국내외에 화제가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난 크게 관심이 없었고, ('불온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세븐>에 등장하는 사이코 살인자와 유나바머가 서로 연결되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다.

0-2.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유나바머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읽게 된 후 내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으로부터 많은 함의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적어도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했고 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이끌어낸 것은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문제제기 중 부적절한 점들을 추려내어 문제를 좀더 구체화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 하는 것이 얼핏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하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과학기술 영역으로 좁혀 생각하자.
 

1-1. 유나바머는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을 상정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절대적인 선으로 파악하는 전통적 과학기술관 - 고전맑스주의자들 역시 동의했던 - 을 공격하며, 과학기술의 발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기술결정론적 낙관 역시 거부한다. 여기서 그는 과학기술이 이미 체제(system)의 이해관계를 그 속에 담고 있다는 '과학기술의 사회결정성' 테제를 주장하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이 주장과 동시에 기술적 필요가 사회체제를 이끌어 간다는, 또다른 기술결정론적 테제를 내놓고 있다는 데 있다.

1-2.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내포하는 모순은 유나바머의 언술체계 속에서는 손쉽게 해결된다. 이는 그가 마치 유기체처럼 자기진화하는 산업-기술 체제(industrial-technology system)라는 것을 상정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에게 있어 '과학기술'이라는 것과 '체제'라는 것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실체'이며,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스스로를 공고화함과 동시에 이에 대한 개입 및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산업-기술 체제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뭐든지 충족시킴과 동시에, 스스로의 요구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모두 거부하는, 그런 자율적(autonomous)인 존재다.

1-3. 따라서 유나바머가 그토록 절망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구조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그에게 있어 체제는 모든 것이며 전부이고, 영향을 주되 받지는 않는다. 그는 부분적인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 내부의 균열의 가능성이나 구성에 있어서의 불균질성 역시 인정하지 않거나 그 의미를 무시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가 폭탄 테러라는 '실천방식'을 택한 것은 자신이 갖고 있었던 생각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한마디로 말해 유나바머는 과학기술에 흔히 덮어씌워지는 신비주의적 낙관을 제거하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산업-기술 체제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부비트랩을 제거하는 방법은...?
 

2-1. 내 생각은 이렇다. 우선 '체제'라는 용어를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로 바꾸어 파악해야 한다. 솔직히 과학기술과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지나치게 거시적으로, 일반적으로 파악하면 절망감 - "이 거대한 체제와 싸워서 우리가 과연 '이길' 수 있단 말인가?" - 밖에 남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특정한 과학기술의 생성과 사회 속으로의 도입과정이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관계들은 결코 단순한 한 가지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체제의 규정성을 논하기보다는, 실제로 작업장이나 실험실 내에, 나아가 특정한 기술적 프로젝트 내에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사회적 관계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정보기술의 등장배경이나 그것이 생산되어 나온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정보화사회론을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2-2. 아울러 대안적인 과학기술의 생산을 위해서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대안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소규모적으로나마 창출해 낼 필요가 있다. 60-70년대 서구에서 행해진 일련의 '실험'들은 이러한 대안적인 사회관계의 창출을 실제로 고민하지 않았던가? 이 시기의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적정기술운동(appropriate technology movement)이나 70년대 루카스 항공 회사(Lucas Aerospace)에서의 협동계획 실험은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유나바머가 냉소적으로 언급한 것 - "혁명이 개혁보다 쉽다" - 보다는 분명히 많은 교훈을 남겼다. 심지어 유나바머가 주장하는 '소규모 기술'에 기반한 사회조차도 대안적인 사회관계의 창출에 대한 노력 없이는 무용지물이지 않은가? (유나바머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해서 대안적인 사회관계가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3-0. 아마 여기까지 끌어온 구질구질한 내 얘기보다 유나바머의 주장이 '때깔이 더 좋아' 보일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대안적인 사회적 관계를 소규모로 창출함으로써 이에 기반한 대안적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쓸모없는 일이라고 누군가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 제안이 완벽하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으며, 이 제안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허점투성이임을 자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한계와는 무관하게 분명한 것은, 현실이 유나바머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과정 역시 유나바머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대단히 힘든 과정이 될 것이다. 아마 이 정도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인 듯 싶다.
 

출전: 『스키조』2호(199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