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와 그로밋> 시리즈는 서로 독립된 3개의 에피소드 - <화려한 외출>, <전자바지 소동>, <양털 도둑> - 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첫번째 작품인 <화려한 외출>은 상상력의 면에서는 가장 기발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소 모호해서,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파악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반면, 장르적 관습을 많이 차용한 뒤의 두 편은 전달하려는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함과 동시에 기술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식별가능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술의 '이중적 속성'에 대한 인식이다. 즉, 기술은 인간에게 각종의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악용'되었을 때에는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마치 '양날의 칼'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상식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인식은 <월러스와 그로밋> 시리즈의 각 편을 이끌고 나가는 주요한 동인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극중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가장 주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여가시간을 늘여 주기 위해 고안되었지만(<전자바지 소동>에서 '전자바지(techno-trousers)'는 월러스를 대신해 그로밋을 산책시켜 줌으로써 '귀찮은' 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 원래의 목적과는 무관한 부차적인 기능을 갖고 있을 수 있고(전자바지는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악인의 손에 넘어가면 재앙을 불러온다(펭귄은 전자바지를 이용해 다이아몬드를 훔치려 하고, 그로 인해 월러스와 그로밋의 일상은 엉망이 된다). 혹은, 기계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졌지만(<양털 도둑>에서 로봇 개 프레스턴은 주인인 웬들린을 도와 털실 가게를 운영하도록 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기계는 도구적 합리성과 목적적 합리성을 구분하지 못한다(털실이 부족하자 프레스턴은 웬들린을 위협해 양들을 도둑질하도록 시키고 나중에는 주인의 명령도 거부한다). 또한 기술은 특정한 맥락에서는 유용하지만(<전자바지 소동>의 도입부에서 기계는 월러스에게 자동으로 옷을 입혀주고 쨈발린 토스트까지 만들어 준다), 그 맥락을 벗어나면 아무런 쓸모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화를 가져온다(침대에서 반대 방향으로 떨어진 그로밋은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난 다음 얼굴에 쨈을 뒤집어쓴다). 이러한 대비들로부터 기술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내지는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기 나름이다, 라는 식의 소박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월러스와 그로밋> 시리즈가 보여주는 기술의 이미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선 그것은 '일상 속에서' 제어불능 상태에 빠진 기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양털 도둑>에서 월러스는 오트밀 죽(porridge) 발사기가 맛이 가서 미친 듯이 죽을 쏘아대는 바람에 온통 그것을 뒤집어쓴다. 또 월러스가 발명한 털깎기 기계는 '세척(wash)'에서 '털깎기(a shallow shave)'로 스위치가 저절로 전환되는 오동작을 범하여 미처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양의 털을 깎아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레스턴은 털깎기 기계 속에 갇히자 기계를 부수고 나와 '터미네이터'로서의 본색을 드러낸다.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이유 없이 광포해지고 인간을 골탕먹이는 일상 속의 기계들의 이미지, 이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기계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어떤 무엇'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려 드는 그 무엇'일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기계의 이미지는 SF영화에서와 같이 일상에서 벗어나 '신화적으로 직조된' 공간 속으로 가게 되면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가지면서 인간을 지배하려 드는 기계의 이미지로 극단적으로 형상화된다(예컨대 <알파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터미네이터 1&2>). 흔히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로 불리는, 기술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거부감이나 공포감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일상적 경험들과 이미지들에 '정당하게'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월러스와 그로밋> 시리즈는 극중에서 제시된 이러한 문제상황들에 대해 어떤 해답을 준비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한 답은 다소 의외일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하다. 그것은 놀라운 기술적 수준을 지닌 발명품들 - 달까지 가는 로켓에서 벽을 걸어올라가는 전자바지, 토스터기와 쨈 발사기의 절묘한 조합을 거쳐 양의 세척·털깎기·실잣기·직물짜기까지를 모두 수행하는 자동기계에 이르기까지 - 을 척척 만들어내는 월러스가 자신의 발명품들이 빚어낸 구체적인 위기상황에서는 도리어 무기력해지는 반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것은 언제나 그로밋(과 양들)의 인간적인(?) 재치와 기지라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의미있는 대비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지점들: 하나, 월러스의 발명품들이 높은 기술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쓸모는 거의 없어 보인다는 것(비디오를 같이 봤던 한 친구는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이 "인간이 저렇게 게으를 수가...!"라는 것뿐이라고 투덜거렸는데, 난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둘, <전자바지 소동>과 <양털 도둑>의 마지막 장면들이 보여 주는 의미심장함. <전자바지 소동>의 에필로그에서 월러스와 그로밋의 집은 평온을 되찾고, 전자바지는 석양이 빨갛게 물든 거리를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게 홀로 터벅터벅 걸어간다(극장 상영시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짜증나게도 국내 출시 비디오에는 이 장면이 잘려나가고 없다). 그리고 <양털 도둑>의 에필로그에서, 난동을 부렸던 로봇 개 프레스턴은 월러스에 의해 순종형의 개로 개조되어 있다. 이러한 지점들은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또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뭔가'를 암시해 주는 것이 아닐까?
 

출전: 『연세과학』 1998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