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제목처럼 한번 물어보자. 20세기의 끝자락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기술'이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퍼뜩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면, 기술이란 가정에서는 TV, CD 플레이어, 냉장고, 세탁기, 수도 시설, 에어컨, 전자레인지이며, 학교나 직장에서는 노트북 컴퓨터, FAX, 복사기, 마그네틱 카드, 근거리통신망(LAN), 인터넷이며, 이 두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을 때는 자동차, 버스카드 판독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비행기 등속을 의미할 터이다. 이러한 인상을 한마디로 종합하자면, 기술은 인공물(artifact)과 등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물어보자. 그러한 기술들은 어떻게 변화·발전하는가? 여기서도 얼른 생각나는 답은, 특정한 기술은 항상 그 이전의 유사한 기술을 개량하여 더 좋은 것이 차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굴곡진 화면의 TV를 대신해서 평면사각 TV가, 아날로그 기록매체들을 대신해서 CD 플레이어가, 빨래판이나 수동 세탁기를 대신해서 전자동 공기방울 세탁기가, 무겁고 부피가 큰 데스크탑 PC를 대신해서 노트북 PC가, 느려터진 우편을 대신해서 FAX가, 마그네틱 카드를 대신해서 IC 카드를 이용한 버스카드가 각각 나타나는 식으로 기술은 변화하고 발전한다. 말하자면, 기술은 마치 유기체처럼 더 나은 길을 찾아 진화(evolution)하는 존재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그러한 기술의 변화·발전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물어보면 어떨까? 이에 대한 답 역시 간단할지 모른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준다는 것. 앞서 언급했던 기술들이 있는 세상과 그것이 없는 세상을 비교해 보면 어느 편이 더 나은가, 라는 물음은 사실 너무나 답이 뻔한 퀴즈가 아니겠는가. 물론 기술의 발전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낳을 수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 진화하는 존재인 기술에 우리의 도덕이나 윤리를 맞추어 해결해야 할 문제이거나 기술의 장점에 비추어 감수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결국 기술은 약간의 부산물을 지니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도구'이며 기껏해야 '야누스의 얼굴'일 뿐이다.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는 위에서 설명한 기술에 대한 통념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다. 기술에 대한 이러한 통념들은 뭉뚱그려 흔히 '기술결정론'이라고 불리는데, 이 책에 실린 12편의 논문들은 기술, 기술의 발전,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일면적이고 단선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기술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공유한다. 예컨대 이 책에 실린 「미국의 전기화」라는 논문에서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는 기술이 곧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공물과 같은 것이라는 통념에 대해 반박하면서, 기술은 테크니컬한 요소들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요소까지를 그 속에 포괄하는 하나의 "시스템(system)"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항상 최적의 기술적 성능을 향해 발전한다는 통념에 대해서는 루쓰 코완(Ruth Schwartz Cowan)의 「어떻게 해서 냉장고는 윙윙하는 소리를 내게 되었는가」라는 논문이 적절한 비판을 제기하는데, 그에 따르면 구조가 간단하고 소음이 훨씬 적은 가스흡수식 냉장고를 대신해서 오늘날과 같은 전기압축식 냉장고가 시장을 장악하게 된 것은 전기 회사들의 우수한 자본력과 광고 기교의 탓이지, 기술적인 우수함 때문은 아니다. 아울러 기술의 도입에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선택'의 과정이 개입하며 그 결과는 사회성원 모두에게 동등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데이비드 노블(David F. Noble)이 수행한 사례연구인 「기계 설계에 있어서 사회적 선택」이 잘 보여주고 있다.

기술이 최적의 길을 찾아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이 사회성원 모두에게 균등한 혜택을 자동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술의 발전이 약속하는 이른바 '테크노피아'의 미래는 다분히 허구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사고틀은 기존의 통념에 대한 단순한 부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관계나 사회적 제도 하에서는 대안적인 기술발전의 길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컨대 이영희의 「과학기술정책과 기술영향평가」와 같은 논문은 기술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평가하여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을 극소화시키는 것을 추구하는 기술영향평가 제도의 의미를 소개하고 있으며, 마이크 쿨리의 「루카스항공에서의 협동 계획」은 주류 시장질서를 벗어나 '사회적으로 진정 필요한' 생산을 추구하였던 영국 루카스 항공에서의 실험을 감동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대안적인 기술발전의 상을 그리는 데 밑거름이 될 이러한 시도들은 다가올 21세기가 낙관이나 비관으로만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꼴을 특정한 방향으로 형성하려는 사회적 노력들에 의해 틀지워질 것이라는 함의를 남기고 있다고 하겠다.
 

출전: 월간 『우리교육』 199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