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라는 화두가 너무나 낡은, 혹은 적어도 모호한 것처럼 보이는 지금에 와서 '진보적인 영화읽기'의 가능성과 한계, 전망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시대착오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어차피 역사 속에서의 '진보'라는 화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할 것이기에 구태의연한 서두는 달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은 80년대와 90년대 초를 거치면서 운동에서의 영화의 역할, 약간 좁힌다면 대학 내에서의 영화운동에 대해 고민해 온 사람들에게 유용하기를 바라면서 쓰여졌다.

학내에서의 영화운동이 소형·단편영화의 제작/상영에서 대중영화들의 비판적 수용/독해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지는 꽤나 오래 되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의 기간 동안 이러한 소위 영화'읽기'를 주된 임무로 자처하고 나섰던 학내의 소모임·소집단들은 부진과 침체를 면치 못했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기존의 영화읽기 소모임들은 어떠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무엇을 넘어서고자 했는지, 그들이 활동을 전개하면서 부딪친 문제는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문제들의 배경에는 어떠한 통념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하는 것들이 내가 이 글에서 묻고 답하려는 문제들이다. 나는 이러한 불완전한 모색이 점차 그 정체성과 스스로의 임무를 망각해 가는 것처럼 보이는 학내의 소모임들에게 토론을 위한 기폭제가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크게 3개의 테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에 대해 상술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테제에서는 진보적 영화읽기가 제기된 초기의 문제의식과 함께 원칙과 방향성을 재확인하며, 두번째 테제에서는 그것이 처한 현실적 조건을 탐구하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테제에서는 앞으로의 구체적인 실천방향을 제안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여기서 각각의 테제들은 원래 온라인상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글로 존재했으며 서로 다른 시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서로간에 미묘한 관점상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해 두고자 한다. 원래의 글을 수정·보완하는 과정에서 덧붙이고자 한 내용들은 각주로 처리하였다. 자, 그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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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영화읽기를 위한 명제 (1)

'진보적 영화읽기'의 문제의식은 '진보적인 영화' 만들기
/보기/읽기의 문제의식과는 차별된다. '진보적 영화읽기'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모든 영화들을 대상으로 하여 수행될 수
있으며, 또 수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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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하나의 말장난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보적인 영화읽기'와 '진보적인 영화' 읽기의 차이는 단순히 따옴표를 어디에 찍는가의 차이만은 아니다. 이로부터 얘기를 풀어나가자.

먼저 우리가 흔히 '진보적인 영화'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80년대의 영화운동의 움직임 속에서 영화란 하나의 선전·선동매체로 이해되었다. 영화는 당시에 금기시되던 노동운동·학생운동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하였고 카메라는 주류영화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용감하게 전진해 들어갔으며, 영화운동은 일종의 문화 차원의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운동으로 정의되었다. 당시 영화운동의 모델은 60∼70년대에 남미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제 3영화'였으며, 영화운동의 담당자들은 노동운동·학생운동 등의 기층운동조직에 결합하면서 그것의 목표에 자신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방향을 취했다.

하지만 90년대가 도래하면서 '선전·선동의 매개로서의 영화'란 그다지 튼튼한 고리도, 영화운동의 당연한 전제도 되지 못함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90년 <파업전야>의 제작, 상영을 정점으로 하여 소형영화 제작·상영을 주된 임무로 삼고 있던 당시까지의 영화운동 단체들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사실은 간단한 이야기이다. 한편으론 선전선동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한편으론 역으로 그것에 힘을 얹어 주어야 할 '의식있는 대중'을 '무차별적인 대중'이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선전선동의 매체'라는 영화의 지위를 뒷받침했던 과거의 단순했던 인식론적 모델 역시 공격받기 시작했다. 즉, 선전선동의 주체가 기층운동의 현안과 목표를 반영하는 '내용(=알맹이)'을 영화라는 효과적인 '형식(=껍데기)'에 담아 내놓으면 선전선동의 대상인 기층민중이 이를 이론적으로 흡수하고 정서적으로 고양된다는 식의 단순한 모델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곧 폐기되었다(현재에 있어서 어떠한 영화운동단체도 이러한 가정에 입각해 있지 않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80년대 말∼90년대 초 민중운동의 열기 속에서 '은폐되어' 있었던 이러한 문제는 91∼92년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상대적으로 대중문화의 영역이 좁았던 80년대의 대부분에 비해 볼 때 엄청나게 확장된 90년대의 무차별적 대중문화의 홍수―영화 쪽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속에서 더욱 더 눈에 띄게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

이제 아까의 얘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을 사로잡고 있는 영화운동에 대한 사고는 80년대의 그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진보적인' 영화라고 할 때 대부분 일정한 틀을 갖고 있다. 예컨대, <파업전야>나 <메이트원>,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칠레 전투> 등 노동운동을 다룬 영화나 제 3세계의 실상을 다룬 영화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진보적인' 영화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영화읽기운동이란 이런 영화들을 꼼꼼히, 진지하게 보는 것, 그리고 이런 영화들을 가급적이면 널리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과 등치된다.(주2) 그 다음, 그들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대부분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넓은 개인적 선택의 영역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나머지 모든 영화들은 개인적인 영역으로 돌려버린다는 말이다. 그러한 영화들은 대체로 '좋다/나쁘다' 정도로 평가되어도 충분하거나 그 이상의 평가가 불가능한 것이며, 잘해야 그 내용/형식 중에서 자신의 주된 관심과 관련된 측면을 언급하는 정도에 그친다 (예컨대, 컴퓨터 그래픽에 관심있는 친구가 <코드명 J>를 보고 그래픽의 뛰어남을 언급하는 경우). 심지어 이 영역에 속하는 영화를 요모조모 '뜯어보려는' 시도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물론 이런 사적인 영역을 깡그리 없애 버려야 영화운동이 가능해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일기처럼 쓰여지는, 아주 '사적인' 성격의 영화도 있다. 그리고 영화보기에 있어서도 사적인 영역은 분명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것과 같은 이분법만으로는 이 복잡한 영화세상을 헤쳐나가는 데 너무도 역부족이다. 그리고 만약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있는 발언을 하고자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제 '영화읽기' 속에서의 '진보'의 위치에 대해 나의 제안을 언급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한 준비단계로 일단 나는 영화들을 '분류하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도식(주3)을 도입하려 한다.
 
 

이 도식을 도입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달아 두어야겠다. 먼저 이 도식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영화의 제작 메커니즘(자본의 개입)이나 관객과의 상호작용(인식적인 차원)을 고려하지 않은 불완전한 것으로, 순전히 이미 완성된 텍스트로서의 '영화 그 자체'―물론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에만 촛점을 맞춘 것이다(관객과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질 두번째의 테제에서 언급한다). 하지만 이 도식은 여전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도식은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되며 하나의 수단이자 디딤돌로 간주되어야 한다. 종종 특정한 영화가 내용/형식 양면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두고 모호함이 끼어드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경우에는 앞서 사상했던 요소들을 모두 고려에 넣어야 한다.(주4)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얘기를 시작해 보자. 나는 일단 모든 영화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세계관의 측면에서 주류영화와 대항영화로 나누었다. 하지만 항상 주류영화와 대항영화는 상대적으로만 구분 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영화가 정말 '대항적인가'에 대해서는 무엇을 변혁적인 전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에 대한' 대항인가―즉, 다루어지는 문제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 노동문제인가, 환경문제인가, 여성문제인가, 인종문제인가, 아니면…―를 고려에 넣는다면 주류영화와 대항영화는 다각도로 정의될 수 있다는 점에도 주의해야 한다(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반드시 직설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종종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암암리에 암시되기도 한다).

이 두 영역의 구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역방향으로 행해진다. 즉, 주류영화가 이미 존재해서 대항영화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특정영역의 대항영화로 인지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우리가 주류영화로 인지하는 영역이 생겨난다는 것이다(극단적으로 말해 영화를 주로 '보기만 하는' 관객의 입장에 서게 되면, 대항영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가 주류영화인지 아닌지조차도 알 수가 없는 셈이다). 예를 들어 보자. <델마와 루이스>는 주류영화인가? 그것은 그 영화 한 편만 놓고는 간단히 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숱한 남성 짝패영화(buddy movie)들을 고려에 넣는다면 그러한 주류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적어도 비주류적임을, 나아가 대항적임을 말할 수 있다(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비주류적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흑인비평가는 이 영화가 인종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주류적이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하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거의 다 백인들이며 두 명의 여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델마와 루이스>라는 한 편의 영화는 여러 각도에서 위 <1>, <2>의 구분선상을 넘나들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전태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특정한 한 편의 영화가 모든 영역에서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영화를 적어도 메시지의 측면에서 대항적이냐, 아니냐를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음은 자명할 것이다.(주5)

이제 형식과 스타일의 얘기로 넘어가자. 이 역시도 굉장히 모호한 구분이 될 터이지만 거칠게나마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나에게 있어 관습적인 형식이란 대체로 40∼50년대의 헐리우드에서 확립된 고전적 영화형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영화교과서가 다루는 미장센이니 편집이니 하는 것의 원칙들이 대부분 관습적인 형식의 예라고 보면 된다. 반면에 대안적인 형식이란 하나의 정제된 양식도 아니며, 특정하게 정의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예를 들 수 있을 터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상업적 극영화들의 평균적인 쇼트 지속 시간은 10초 내외인데, 어떤 영화가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1∼2분 정도 길이의 쇼트를 일관되게 사용한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대안적 형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본다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대안적인 형식을 채용한 영화이다). 마찬가지로 통상의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쇼트/대응쇼트의 반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그 역시 대안적인 형식이라 부를 수 있다. 관객의 감정몰입을 차단하는 브레히트적 서사극 양식을 의도적으로 구사한 영화가 있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하나의' 대안적 형식/스타일이란 없다. 다만 하나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채용하는 영화작가가 있다면 그러한 스타일의 특징을 변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주6)

이제 이 두 가지의 틀을 동시에 적용시켜 보자. 그러면 앞서의 표와 같은 4가지의 경우가 도출된다. 즉, 주류적인 세계관을 관습적인 형식에 담아낸 경우 <1>과 대항적인 세계관을 관습적인 형식에 담아낸 경우 <2>, 주류적인 세계관을 대안적인 형식에 담아낸 경우 <3>, 대항적인 세계관을 대안적인 형식에 담아낸 경우 <4>가 그것이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대체로 <1>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진보적'이라고 알고 있었던 영화들―예컨대 <장산곶매>의 영화들―은 대체로 보아 <2>의 범주에 속한다(물론 <노동자뉴스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항영화 속에 형식적인 고민을 실으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상당수 존재한다).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대부분의 '진보적'인 영화들은 <1>과 <2>의 사이를 반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과 <4>는 거의 구분하기 힘든데, 예컨대 나는 타르코프스키 같은 감독의 영화들은 <3>과 <4>사이의 묘한 영역에 속한다고 이해한다. 고다르의 영화들은 대부분 <3>과 <4>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고다르는 초기에서부터 일관되게 형식적인 실험을 추구해 왔으며 중기 이후에는 급진적인 세계관을 거기에 실어 내놓는 대항영화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 속의 여성의 묘사에 있어서는 대체로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이는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주7)(하지만 이 모든 구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영화 한편한편은 이 틀을 벗어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영화는 위 표의 선상에, 혹은 점 위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영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도식은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구질구질한 사설을 늘어놓음으로써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제 독자는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우선 우리가 '진보적인 영화'라는 레테르를 붙여 왔던 영화들은 보다 다차원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속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배제해 왔던 영화들 역시 동일한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과연 '진보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나는 내용적으로 대항적인 영화와 형식적으로 대안적인 영화 양자 모두를 '진보적'이라는 틀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대항적인 영화의 '진보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인정할 터이므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하지만 대안적 형식의 영화에 왜 '진보적'이라는 레테르를 붙여야 하는가? 혹 대안적인 형식의 영화란 잘난 체하는 지식인들의 자기유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또는 몇몇 영화감독들의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는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을 고려에 넣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관객들은 익숙하지 못한 형식의 영화를 볼 때 당혹감을 느끼며, 대체로 이런 영화가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기존에 확립된 형식이 부르주아적인 세계관의 직접적인 반영이라는 제 3영화의 급진적인 주장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이러한 형식적인 '반란'이 기존의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자명성'에 문제제기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기존가치에 대한 전복적인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의문은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에 갖는 생각과도 비슷할 수 있다. 왜 영화는 이렇게 생겼고 저렇게 생기지 않았지? 영화는 왜 여기 있고 저기에 있지 않지? 등등.

따라서 진보적 영화읽기란 앞서의 네 가지 틀을 하나의 기본축으로 하면서 개별 영화 하나하나가 갖는 다양한 세계관적/형식적 측면의 의미를 밝혀내는 작업이 될 터이다. 대부분의 개별 영화들은 진보적이다, 아니다라고 간단히 얘기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며 때로는 상호 충돌하는 생각의 덩어리일 뿐 아니라, 다양한 형식의 격전장이 되기도 한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 모든 영화들은 '진보적 영화읽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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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영화읽기를 위한 명제 (2)

한 편의 영화가 갖는 의미는 텍스트와 개별 관객 사이의
'어딘가'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진보적 영화읽기'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이 다각도로
연구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보적 영화읽기' 그 자체는 텍스트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을 완전히 규명할 수 없다.
그 결과 '진보적 영화읽기'는 그 목적과 대상을 설정하는데
있어 하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는 어떤 잠정적인
해결책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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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글은 텍스트의 범주를 넘어서서 텍스트와 관객 사이의 관계의 탐구를 시도한다.

앞서 (1)의 말미에서 내가 주장했던 것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나가자. 나는 대안적인 '형식'(혹은 스타일)의 영화가 진보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관객집단과의 관계를 들었다. 즉, 그러한 영화들은 관객들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영화보기의 주류적인 관습에 반기를 들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저항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마리로 해서 얘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영화텍스트와 관객들은 그 둘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일단 전제로 하자. 그럼 논의는 영화텍스트가 관객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와 관객이 영화텍스트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의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될 수 있다.

(i) 먼저 영화텍스트가 관객에게 취하는 입장. 영화텍스트 내에 영화작가(혹은 시스템)의 의식적/무의식적, 물질적/이데올로기적 요구가 녹아들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화텍스트가 담고 있는 이 요구는 그것이 관객에게 취하는 입장과 불가분의 연관을 갖는다. 이 입장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①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관객과 가능한 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유형과, ②관객과 최대한 밀착하여 텍스트와 관객간의 거리를 무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유형. 주류영화 관습에 저항하며 어떻게 해서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영화들, 즉 '스스로가 영화임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나서는' 영화들은 ①의 영역에 속하며, 스스로가 영화임을 감추고 그것을 의사-현실로 드러내려 노력함으로써 '매체'로서의 영화 개념을 무화시키는 영화들은 ②의 영역에 속한다.

나는 이 두 가지 유형 중에서 ①에 강조점을 두려 한다. 물론 지난번에도 지적했듯 ①유형의 영화들은 그 난해함과 차가움으로 말미암아 관객집단으로부터 유리되어 단순히 지적인 유희로 전락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현 시기에 있어서 ②의 영화는 분명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왜냐하면 텍스트와 관객과의 거리를 무화시키고 관객과의 직접적인 정서적 동일시를 시도하는 이런 영화들은, 동시에 텍스트가 반영한 현실과 텍스트 그 자체 사이의 거리마저 무화시켜 버리기 때문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카메라의 존재, 나아가 특정한 세계관/이데올로기를 갖고 작업하는 영화작가/시스템의 존재를 망각하게 하여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차단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주8) 현시기에 있어서 관객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진정으로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나는 영화운동에서 변화하는 사회적 양상에 따라 시기별로 부과되는 과제가 다르며 따라서 영화읽기에서 강조점이 주어지는 영화들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셈이다. 결국 내 생각에 따르자면, 뭔가를 주장하기는 쉬우나 그에 대해 동의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운 지금의 시기에 있어서는 앞의 ①의 유형의 영화들이 더 중요하다. 이 영화들은 영화의 파급력이나 그 몰입의 메커니즘이 갖는 힘에서는 떨어지지만, '적어도' 관객들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며 매체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ii) 하지만 여기서 관객이 영화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끼어들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관객은 영화를 볼 때 단순히 스크린/TV화면에 시선만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관객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각종의 지식/사고습관/이해의 능력/욕망/세계관 등을 모두 스크린에 투사한다. 따라서 앞서 크게 ①과 ②로 나누었던 영화의 관객에 대한 태도는 그대로 관객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 관객에게 이르러 다시 한번 굴절된다. 그 결과 관객을 몰입시키려는, 혹은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텍스트 창조자들의 노력은 반드시 의도된 바대로 현실화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 하나하나는 모두 독특하고 상이한 존재이며,(주9) 따라서 동일한 영화텍스트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가장 최근에 영화 <전태일>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이 가장 대표적인 보기이다). 물론, 지금까지 특정한 사회구조 속에 사는 '관객집단 일반'에 대한 숱한 사회학적/정신분석학적 연구들이 행해져 왔고, 이들 중 상당수가 설득력을 얻고 있음을 부인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 속을 사는 대중들은 비슷한 꿈을 꾸며 살고 있다(그러니 대중문화라는 구조가 성립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추상수준의 논의가 텍스트와 관객 사이의 상호관계를 단순명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관객 하나하나는 결코 집단적 의식/무의식의 담지자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원공식에 입각해서는(적어도 현상황에서는) 유의미한 영화운동의 전개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관객이 영화에 대해 취하는 태도의 다양성, 그리고 관객이 스크린 위로 투사하는 상이한 가치들―분명 과거의 그것에 비해 다양해지고 폭이 넓어진―은 현상황에 있어 영화운동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관객들이 영화관람에서 보여주는 자발성이 영화운동의 가능성이라면, 바로 그 자발성이 보여주는 무차별성(네 멋대로 해라!)은 그것을 더이상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한계이다. 이제 이 둘간의 딜레마는 이제 다음의 세번째 테제(아마도 가장 터무니없는 주장이 될지도 모르는)에서 잠정적으로 해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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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영화읽기를 위한 명제 (3)

한마디로 말해 '진보적 영화읽기' 운동은 결코 대중운동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현상황에서 '진보적 영화읽기'를 위한
시도들은 최소한의 동질성을 내부적으로 갖춘 소규모의 모임,
조직 활동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이러한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특정한 입장을 공유한 일종의 (아마추어) 평론가집단의
형성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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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글이 필연적으로 이르러야 할 지점, 즉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로 들어간다.

먼저 한 가지 전제를 달고 시작해야겠다. 나는 첫번째와 두번째의 테제에서 상당히 암울한 전망을 얘기한 바 있다. 즉, 민중운동의 위세를 등에 업은 80년대적 의미에서의 영화운동은 현실적합성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영화운동이 고민되어야 하지만, 이는 무차별적 대중의 다양한 가치지향 속에서 목적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영화보기 내지는 읽기/비평작업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선언하고, 직접 어떤 형태로든지(비디오영화건, 16mm건, 아니면 충무로행이건) 영화제작에 뛰어든다. 나는 이러한 움직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앞서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대안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영화감독이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소규모의 영화들을 만드는 것이 지금 영화계를 지배하는 소위 '메이저' 영화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기능을 수행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읽기/평론 작업의 제한적인 의미와 그것의 차가운 형식에 좌절하고 결국 영화제작으로 향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지만 이것은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못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영화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대안"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이 긴 글을 끌어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만약 이러한 나의 주장을 긍정한다면 이제 우리는 앞 단락에서 내가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들과 대결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영화(읽기)운동이 대중운동일 수 있으며, 나아가 대중운동이어야 한다는 환상을 버리는 것만이 현상황에서의 유일한 '잠정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술해 보겠다.

생각해 보자. 80년대에 영화운동의 문제의식을 처음 가진 사람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던가를. 그들은 우선 영화매체가 갖고 있는 막강한 전파력과 대중들을 휘어잡는 힘에 주목했고, 이들의 이러한 생각은 '영화는 1초에 24발 발사되는 기관총'이라는 유명한 말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영화운동의 양태는 속보 스타일의 영화제작과 대규모 집회에서의 상영이 결합된 형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식의 '대규모 동원에 의존하고' '기동전적'인 사고가 90년대로 들어와서 영화운동의 방향이 분명히 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낳았다.

90년대 초부터 영화읽기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난점에 부딪쳤다.(주10) 그들(여기에는 물론 나도 포함된다)은 근본적으로 영화운동이 대중운동으로서의 위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중적'인 매체로서의 영화에 대해 신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영화를 통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그들이 개최한 행사의 진행상황이 부진할 때 종종 좌절감으로 이어졌으며("왜 이렇게 좋은 영화를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지?"), 강박관념이 지나치면 나쁜 의미에서의 대중추수주의로 이어졌다(이런저런 이유로 '유명해진'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영화제나 혹은 저명한 영화평론가 내지는 문화평론가의 강연회 같은 것을 마련하는 식의, 소위 '이벤트 사업'의 추진에서 잘 나타나듯이).(주11) 반면 각 모임에서의 내실있는 내부사업들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80년대적 전통을 이어받은 모임의 운영자들은 공적인 영역을 지극히 좁은 영역에만 한정했고(첫번째 테제를 보라), 따라서 하나의 이론적 실천적 공감대를 형성하려 노력하기보다는 각자의 '취향'을 인정하는 데서 그쳤다. 이 모든 문제들이 어디서 비롯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누구나 인정해 온 전제, 즉 '영화운동=대중운동'의 도식으로부터 나온 것임이 자명하다. 영화는 '대중적'인 매체이어야함으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내부적인 사업은 희생해도 좋다는 식의 발상이 영화모임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편, 이 도식으로부터 자연히 도출된 또 하나의 폐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의 도식을 당연시해온 사람들은 영화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찬가지로 영화에 대한 담론들도 역시 쉽게 씌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어려운' 영화들은 배척하였으며(예컨대 "고다르의 영화는 지식인적인 사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이론비평을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영화평만을 옹호하였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영화나 영화에 관련된 현실이 그렇게 단순한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영화와 관련된 현실은 화려한 스타들의 외양과 가십거리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뿐, 실은 엄청나게 복잡하며 한두 마디로 간단히 그 문제를 짚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그냥 보기에는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대단히 다양한 각종의 요인이 개입하며, '심오한' 사고들이 포함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 현실을 묘사하고 그것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글만 '쉬워야'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물론 내가 대책없이 어렵고 복잡하기만 한 글을 선호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야겠다(나 역시 영화를 내적으로 분석하는 지긋지긋한 글들은 대단히 싫어하며, 쓸데없이 영화전문용어들을 섞어 쓰는 『키노』 스타일의 글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잡한 현실을 드러내려면 복잡한 영화, 복잡한 이론이 때로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들은 정치이론이 어렵고 복잡함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으면서도 종종 영화이론의 복잡함에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식의 딱지를 붙이곤 한다. 이는 영화운동을 죽이는 일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그 도식은 한시바삐 폐기되어야 한다. 영화운동은 지금까지의 '당연했던' 전제와는 달리 모든 사람이 그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단일한 지향을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영역이 아니며(영화와 관련된 현실은 대단히 복잡하다!), 영화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 지향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영화운동의 근거는 분명히 구분되어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은 듯하다. 나는 현재의 상황에서 소모임·소집단 활동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에는 지금까지의 영화소모임들이 가졌던 폐해들―한두 명의 매니아와 영화에 관심있는 일반(?) 학우들 몇 명으로 주로 구성되고 모임을 주재하던 한두 사람이 빠져버리면 자동적으로 와해되는 식의―을 일정정도 뛰어넘은 모임을 상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는 궁극에 있어서는 일정한 정치적 입장을 전제한 하나의 평론가집단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영화현실을 언급할 때 반복해서 지적되는 바이지만, 한국 영화계의 최대의 문제점 중 하나는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활동하는 평론가집단이 없다는 점이다. 생각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개약진을 고집하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서로 반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극복되어야 한다. 나는 영화잡지 『키노』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분명히 어느 정도 동질적인 담론들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평론가집단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키노』의 입장에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의 조직방식에는 무조건 동의한다. 많은 사람들은 『키노』가 정성일식의 똑같은 문체를 확대재생산해 내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키노』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의 분명한 입장을 지니고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 밖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다.

그렇다면 당장 구성되고 활동해야 할 소모임은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아직까지는 고민이 부족한 관계로 길게 상술하기는 어려울 듯하고 간략하게 몇 가지 정도를 언급하는 정도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이 모임이 수행해야 할 일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진보적' 데이타베이스의 구축(잡다한 자료의 축적이 아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글들의 모음. 하나의 입장을 전제로 한 글들의 모음), ② 분과별로 전문성 구축 및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개발(예컨대 SF영화들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와 새로운 영화들의 발굴, 그리고 그 함의의 소개), ③ 지속적인 비평작업(뚜렷한 입장이나 전제 없는 퍼즐풀기나 장단점을 골고루 언급하는 저널리즘 비평식의 사후약방문을 지양한, 동일한 입장이 전제된 비평작업. 여기서 과거의 <서울영상집단>의 비평작업이 안고 있었던 성과와 한계를 잘 따져 볼 필요가 있겠다. 즉, 『프리즘에 비친 영상}』에서 드러나는 분석틀의 조악함과 한계, 폭이 좁음 등등).(주12)

나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제안이 사람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의미로 다가가길 바란다. 이 토론 제안문은 기존의 입장을 깨끗하게 정리해 버리기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유의미한 실천적 활동을 예비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활발한 토론을 기대하며 이제 정리되지 않은 글을 끝맺는다.
 
 

< 각   주 >

주1) 이 글은 참세상 BBS 내에 존재하는 '(진보적) 영화읽기모임'의 15번 주제토론 게시판에 토론제안용으로 올려졌던 3개의 글을 하나로 묶고 약간의 수정·보완을 거친 것이다. 원래의 글과 그 글에 대해 제기된 비판·반론을 보고 싶다면 01410/01411/01432로 접속하여 '참세상'이라고 입력(LAN 상에서는 'telnet jinbo.net')한 후 go film 15를 치면 된다.

주2) 사실 이런 지적 자체가 이미 효용을 다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러한 지적은 92∼93년 경에나 유효했을 터이다. 대학 내 영화제들에서 주도적인 흐름을 이루었던 제 3세계 영화의 물결이 사라지고 그것이 색다른 영화들, 소위 '컬트영화'로 넘어간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물론 '컬트'가 갖는 긍정적인 성과를 완전히 무시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결정적으로 92년 대선을 경과한 후에 사람들이 '사회'에 대해 갖고 있던 직접적인 관심(특히 정치적인 관심)이 점차 엷어지면서 그나마 상대적인 진보성을 담지하고 있던 앞서의 이분법적 구분마저 와해되었고(요새 누가 '정치'영화를 보는가?), 반면에 영화운동의 직접적 담지자들은 이제 영화'매체' 자체에만 파묻혀 그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려 애쓰기 시작했다(소위 '새로운 영화'로서의 컬트영화 붐이나 정치적 입장의 전제가 생략된, 난해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 분석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이들은 영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고 만 셈이다. 나는 최근 『키노』가 표방하고 있는 소위 '영화주의'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3) '지금의 상황에서 이러한 도식을 끄집어내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이 분명히 제기되리라고 본다. 여기서 새삼스레 '롱테이크'니 '연속편집'이니 하는 얘기들을 꺼내기 위해 내가 '형식/스타일'이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은 아니었다. 난 단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낯선' 형식/스타일의 영화가 현단계의 영화운동에서 일정한 정도의 진보성을 담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대중들의 '탈정치화'(적어도 정치판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이란 의미에서,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한 관련성이란 의미에서)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의 시기에서 이러한 강조가 중요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난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형식/스타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특히 진보진영 내에서)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심지어 '형식/스타일'이 무엇인지조차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헐리웃 주류영화들이 관객과의 편안한 동일화 유지를 만들어 내고 영화를 어디까지나 '영화답게' 하기 위해 고안한 각종의 장치들(영화교과서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촬영·편집의 180도 규칙이니, 쇼트－리버스 쇼트의 반복이니, 쇼트의 평균지속시간이니 하는 것들)이 결코 영화형식/스타일의 전부가 아니다. 개론서 한두 권 정도 들친 후에 어지간한 용어들을 한번씩 접해보고 일정한 정도의 '교양'을 쌓았다 싶으면 영화형식/스타일에 대한 고민은 그 시점에서 끝내 버리는 식의 학습방식은 즉각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지금부터라도 대안적인 형식의 다큐멘터리들―국내에서도 <노동자뉴스단>이나 <푸른영상> 같은 집단에서 꾸준히 고민해 온―을 보면서 유효적절한 형식/스타일의 문제를 새로이 고민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주4) 이 문제에 있어 가장 전형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영화감독이 올리버 스톤이다. 소위 베트남전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플래툰>, <7월4일생>, <하늘과 땅>을 포함해 그의 모든 영화들은 미국 관객과의 정서적 교감(혹은 기만적인 자기충족감 부여)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맥락을 떠나게 되면 거의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한국에서 그의 영화들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하늘과 땅>의 경우에는 누가 어떠한 의도로 제작했는가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예인데, 만일 베트남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여겨졌을 이러한 에피소드가 미국인에 의해 만들어짐으로써 한마디로 '어이없는 영화'로 평가받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주5) 최근 <꽃잎>을 둘러싼 여성비평가들의 일사불란한 비판은 내가 제기한 문제와 관련하여 대단히 시사적이다. 그 영화는 '광주'를 다룸으로써 소위 정치적인 '진보성'을 획득하였지만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는 여전히 '관습적'인 영화이며, 여성비평가들의 공격은 주로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비판은 분명 그 궤를 잘못 잡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 이는 <꽃잎>이 무엇을 원작으로, 어떤 목표를 지니고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자명할 것이다. 결국 그 어떤 영화도 모든 측면에서 '진보적'인 시각을 견지하기는 어렵다.

주6)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형식에 대한 고민이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즉, 대안적인 형식의 영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분명한 구사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파격을 위한 파격, 형식을 위한 형식, 한마디로 '영화꼬마'들의 장난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화형식/스타일에 대한 분석도 분석을 위한 분석이 아니라 영화의 특정한 목적과 관련되어 특정한 스타일이 구사되었는지를 분석하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세계관이 '진보적'인 것은 결코 아님에도, 그의 형식/스타일은 분명 그의 세계관을 담아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왕가위와 타란티노의 영화가 '새로운 영화'일 수 있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스타일이 의미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영화'매체' 그 자체를 탐구할 필요성은 느끼지만 소위 '영화주의'는 반대한다. 나는 영화가 앞으로 어떤 내재적 발전양상을 거쳐갈 것이며, 그리하여 어떤 모습을 띠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난 영화가 사회와 관계맺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매체 그 자체를 탐구할 필요성을 느낄 뿐이다.

주7) 사실 이는 미묘한 측면이 있다. 초기 고다르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매춘'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페미니즘적인 진보성을 담보하고 있는 반면, 그의 영화들에서 여성캐릭터들이 항상 '배신'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은 여성캐릭터에 대한 장르적·관습적 재현('femme fatale'의 이미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8) 여기서 한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방법론적/세계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의 주류영화들과 상당수의 대항적 성격의 다큐멘터리/극영화들이 ②의 영역의 특성을 상당부분 공유한다는 점이다. 즉, 이 둘은 똑같이 얘기의 진정성/진짜같음(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진정성'이라는 말이 종종 '그럴듯함'과 구분되지 않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객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한다. 바로 이것이 오랫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들을 괴롭혀 왔던 문제였음을 기억한다면 나의 지적의 자명함이 드러날 것이다.

주9) 이러한 지적은 '영화운동'이라는 화두를 머리속에 넣고 있어야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컨대 <다이 하드 3>를 보는 100만의 관객들 사이에는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이 더 많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나 <브라질>을 보는 수천 내지 수만 명의 관객들을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동질성이라기보다는 이질성이다. 지금까지 영화운동이 이들 중에서 어떤 관객층을 대상으로 해 왔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나의 지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주10) 내가 파악하는 바의, 영화읽기소모임이 맞부딪친 구체적인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공대저널』 22호(1995/11/14) 8면에 실린 나의 글 「영화를 진보적으로 보기(혹은 읽기)란 가능한가」에 구체적으로 상술되어 있다.

주11) 학내 영화운동단체들의 관성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공대저널』22호 8면에 실린 송진오 기자의 글 「아마추어리즘, 그 한계를 넘어」를 참고하라.

주12) 학내의 영화소모임들이 어떤 작업들을 담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학회평론』 95년 겨울호에 실린 김명준씨와의 인터뷰에 많은 시사점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제언은 나의 그것과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출전: 『학회평론』12호(1996년 봄/여름), pp. 234-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