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의 과학기술 이해, 그리고 그것이 갖는 함의

일반인들의 과학기술 이해, 그리고 그것이 갖는 함의

0. 도입: 과학기술과 일상생활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요소를 들라고 하면 이전 시기에 비해 과학기술적 산물이 일반인(layman)들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20세기 들어 새로이 비약적인 성공을 거둔 기술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주1)들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를 상상하기 힘든 상황을 빚어냈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체현물들은 상호간에 복잡한 연관을 맺으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특정한 방향으로 구조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기간 동안 급격히 성장한 전기 시스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주2) 전기 시스템은 발전 설비를 갖추고 선로망을 통해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회사, 공급된 전기를 다양한 형태로 소비할 수 있도록 각종의 전기 기기들을 생산해 내는 가전업체들, 발전소에 필요한 화석연료를 공급하는 유조선과 선박 회사,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시추선과 이를 정제하는 정유공장들 등 소규모 시스템들을 그 속에 포괄하는 거대 시스템이다. 시스템들간의 상호연관을 통해서 사회 속에 깊게 뿌리내린 이 거대 시스템은, 사람들의 생활 리듬을 바꾸고 가정에서의 삶의 양식을 바꾸며 직장에서의 노동방식 변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틀지우는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이나 생명공학 역시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시스템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대형기술사고들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일상화'가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는, 기술시스템에 포괄된 특정 구성요소에 내재된 '사소한' 문제가 기술시스템 전체의 순간적인 붕괴로 이어지는 대형기술사고를 종종 목도할 수 있다. 울리히 벡(Ulrich Beck)(주3) 같은 이들이 이미 이러한 상황에 주목하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하기도 하였거니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는 최근 5-6년 동안의 일련의 대형사고들―작년 괌에서의 KAL기 추락 사고를 비롯하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의 붕괴, 구포역 열차 탈선, 대구 지하철 공사 현장 폭발 등―을 통해 잘 드러난 바 있다.(주4)

결국 '과학기술의 일상화'는 과학기술의 연구·개발을 직접 수행하거나 이에 관여하는 이들의 영역 밖으로 과학기술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과학기술이 사회성원들 모두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바로 그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지출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학기술자들이나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새삼 관심의 초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겠다. 비록 지금의 상황에서 과학기술을 실제로 생산하는 일은 과학기술자들과 각종의 정책수립기관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이러한 과학기술의 생산물들이 사회 속에 도입되었을 때 직접적으로 맞부딪치면서 직접 그것을 겪어야 하는 이들은 사회 속의 일반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발맞추어 1970년대 이후 점차적으로 일반인과 과학기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키는 저술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1980년대 말부터 서구,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일반인의 과학기술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아래에서는 PUS로 약칭)'라는 학문분야가 제도화되는 과정을 밟아 왔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하여, PUS 분야가 성립되는 과정과 그것의 주요 연구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이 정책적으로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를 간략하게 검토해 보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1절에서는 PUS 분야의 성립에 자극을 준 두 가지 이론적·실천적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이어 2절에서는 80년대 이전에 일반대중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탐색했던 선행 연구들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가해졌던 비판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본다. 3절에서는 8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새로운 PUS 프로그램의 핵심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몇몇 사례연구들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PUS 연구가 '과학기술 민주화'의 문제의식에 어떤 시사점을 남겨 주는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1. 배경: '논쟁 연구'와 과학지식사회학

20세기 들어 사회 속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과학사, 기술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기술사회학 등 과학의 여러 측면들을 다루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들 역시 그 형태를 갖추면서 빠르게 성장해 왔다.(주5)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런 분야들은 과학지식이 도출되는 과정이나 그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되는 과학자 사회의 성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 '외부'로는 탐구의 시선을 거의 돌리지 않았다. 즉, 과학기술의 역사적·철학적·사회학적 측면에서 일반대중의 역할은 아예 포함되지 않았거나 수동적이고 주변적인 존재로서만 고려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인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PUS 프로그램을 성립시킨 동인(動因)은 주류 과학기술학 내부가 아닌, 그 외부에서 출현하였다.

그 배경을 이루는 계기들 중 첫번째로는, 먼저 환경오염과 핵발전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이 60년대 초·중반 이후 점차 대중적 관심영역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60년대 말 이후 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여러 나라들에서 다양한 과학기술적 쟁점들을 둘러싸고 숱한 논쟁들이 벌어졌다. 그 중 몇 가지만 들어 보면: ▶ 핵발전소 건설에 의한 주위환경의 파괴 여부를 문제삼은 논쟁, ▶ 핵폐기물 처리장의 안전성을 둘러싼 논쟁, ▶ 새로운 공항 건설의 파급효과에 대해 지역주민들과 정부, 전문가들이 대립한 논쟁, ▶ CFC로 인한 오존층 파괴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 발암물질을 취급하는 작업장에서 어느 정도의 규제가 필요한가에 대해 이루어진 논쟁, ▶ 유전자 재조합(recombinant DNA)의 잠재적인 환경적 위험과 비윤리적 측면을 둘러싸고 나타난 논쟁, ▶ 수돗물 불소화의 안전성 여부를 놓고 벌어진 논쟁 등이 있었다.(주6) 이 논쟁들 중 일부는 전문가들간의 의견대립의 형태를 띠는 기술적(technical) 차원의 논쟁으로 그치기도 하였으나 많은 경우 이해당사자인 일반인들이 직접 참여하는 대중적 차원의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다양한 논쟁의 전개는 한편으로 사회과학자들에게 논쟁에 직접 참여하면서 이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 정책 담당자들에게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조사·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배경과는 다소 독립적으로, 70년대 이후에 과학지식사회학의 성과물들이 지속적으로 축적된 사실도 PUS 분야의 성립에 중요한 배경 구실을 했다. 토머스 쿤(Thomas Kuhn)의 저작에 영향을 받은 배리 반즈(Barry Barnes), 데이빗 블로어(David Bloor), 해리 콜린즈(Harry Collins) 등의 학자들은 70년대부터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과 바스 대학을 중심으로 과학지식 그 자체와 그것의 생성 과정을 사회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과학사회학을 제창하였다. 이들은 과학지식의 생성 과정이 과학자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영향받으며 과학적 논쟁의 종결은 과학자집단 사이의 협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과학자들의 활동과 그 결과물로서의 과학지식이 '사회'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라는 뿌리깊은 통념을 공격하였다.(주7) 이들의 주장은 앞서의 논쟁 연구의 경우와 함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실체로서 흔히 인지되어 오던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비록 일반인과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해 직접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대중적 논쟁의 영역에서 전문가 대 일반대중이라는 위계구도를 맥락의존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 간접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2. 선행연구들과 그에 대한 비판

1) '과학대중화' 모형

이제 본론, 즉 일반인과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한 얘기로 들어가자.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비록 PUS 분야가 제도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쯤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 일반인과 과학기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속의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고 있는 이해의 정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는 이미 1930년대부터 영미권의 좌파 과학자들과 운동집단―예컨대 홀데인(J.B.S. Haldane)같은 좌파 과학자나 영국의 과학노동자연합(Association of Scientific Workers)―으로부터 나온 바 있었다.(주8)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이 사실상 80년대 중반까지 PUS에 관한 주류적 견해로 이어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PUS 분야의 성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1985년 연구보고서(주9) 역시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 주류적 입장을 '과학대중화(popularization)' 모형이라 부르겠다.

과학대중화 모형은 과학자들이나 과학기술정책 담당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어 있던 생각으로, 1985년의 왕립학회 보고서에 잘 정리된 형태로 다시금 반복되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제의식의 출발은, 일반인들에게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素養)이 대체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과학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문화적 이해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과학 이론이나 지식을 적절히 이해하여 잘 사용하면 숱한 혜택을 가져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과학의 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거나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과학자가 되기 위한 전문적 훈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의 습득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일반인들이 부정확한 지식을 갖게 된 것에는 TV, 라디오, 신문 등과 같은 상업적 대중매체의 왜곡된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이상의 문제의식으로부터,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과학 이론이나 지식들을 일반인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만들고 쉽게 풀어서 일반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곧 '과학대중화'의 필요가 도출된다. 과학대중화 모형의 옹호자들은 과학지식과 과학적 방법의 폭넓은 보급, 즉 '대중화'를 통해서 사회 속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요소가 사라질 것이고 또한 과학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가 없어질 것라고 믿었다. 예컨대 핵발전소나 생명공학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회적 논쟁들은 그 문제들이 정말 심각한 것이어서라기보다는 일반인들이 과학적인 사실에 무지해서 빚어진 것이므로, 과학의 대중화를 이룩하면 그런 문제들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었다.

이러한 과학대중화 모형의 전제 하에서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는 폭넓은 설문조사 작업이 연구방법으로 대단히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그 이유는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그들이 과학적 내용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가 선행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나라들에서 계층별, 연령별, 직업별, 성별에 따라 과학지식과 과학적 방법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중적 조사사업이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영국의 경우에는 1988년, 경제 및 사회연구 자문회의(Economic and Social Research Council, ESRC)의 지원을 받아 런던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과 옥스포드 대학 평생교육학과에서 주관한 대규모 조사사업이 행해졌다.(주10)

이 조사사업은 성인 2000여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면접조사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크게 과학에 대한 관심의 정도와 과학적 내용의 이해 정도를 묻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조사의 결과는 간단히나마 언급해 둘 가치가 있을 듯하다. 먼저 과학자들이나 정책담당자들이 갖고 있는 통념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과학기술에 대해 대단히 높은 관심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신문에 다음의 주제로 기사가 실릴 경우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보겠는가"라는 설문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치(16.2%), 스포츠(27.9%), 새 영화(17.2%)에 비해 새로운 의학적 발견(49.0%), 새로운 과학적 발견(38.2%), 새로운 발명과 기술(39.4%)에 대해 훨씬 더 큰 관심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관심은 이들 자신이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는 못하다"라고 스스로 진단한 것과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예컨대 정치 영역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16.2%)과 정치 영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16.8%)은 대체로 그 비율이 일치하는 것에 반해, 새로운 의학적 발견에 대해서는 관심도(49.0%)와 자신이 판단한 이해도(9.9%)가 크게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어 실제로 일반적인 과학지식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를 측정한 설문에서는 문항에 따라 차이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상당히 낮은 정답율을 보였다. 예컨대 설문에 응한 사람들 중에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1년을 주기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34%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항생제가 바이러스는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28%, 전자가 원자보다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30% 정도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두 가지 결과를 종합해 보면, 비록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예상보다 높긴 하지만, 그럼에도 과학대중화 모형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우려―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와 '오해'―는 정당하다는 점이 입증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사사업을 담당했던 이들은 현대물리학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양자역학)뿐만 아니라 과학혁명기의 대표적인 사건(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의 대립)에조차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거나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을 문제삼으면서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한 과학대중화의 필요성을 다시금 역설하였다.(주11)

2) '과학대중화'에 대한 비판

1980년대 중반까지 과학대중화의 관념이 지배적이기는 하였으나 그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으며, 비판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분명해졌다. 가장 본격적인 비판은 1980년대 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PUS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며 이는 다음 절에서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대중화'라는 관념 자체의 비판에 치중한 예만을 짧게 언급하겠다.

'대중화'의 관념은 지식의 생산자(=과학자나 언론인, 과학저술가)와 지식의 취득자(=일반대중)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단순화된 구분에 근거하며, 따라서 다양한 층위의 행위자들과 청중들이 존재하는 현실 속의 상황을 왜곡시키는 것이라는 비판은 진작부터 존재했었다. 이와 아울러 과학대중화 작업을 본격적인 과학연구보다 '질이 떨어지는' 작업으로 보는 과학자들의 편견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주12) 그러나 과학대중화에 대한 보다 결정적인 비판은, 대중화 자체가 궁극적으로 과학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활동일 뿐이라는 스티븐 힐가르트너(Stephen Hilgartner)의 논문에서 제출되었다.(주13) 이 논문은 암이 발생하는 다양한 원인들과 그 각각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해 연구한 의학논문이 '대중적'인 영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논란을 사례로 분석한 것에 기반하고 있다.

힐가르트너 역시 '대중화'의 관념이 안고 있는 개념적 문제들을 지적한다. 즉, 주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중화란 잘해봐야 교육적인 목적만을 갖는 '적절한 단순화(appropriate simplification)'일 뿐이고 나쁘게 말하면 과학 내용의 '왜곡(distortion)' 내지는 외부로부터의 '오염(pollution)'에 불과한 것인데, 이런 관점은 무엇이 적절한 단순화이고 무엇이 적절치 못한 '왜곡'인지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화에 대한 그의 비판의 핵심은 대중화가 (일반인들의 과학적 교양(scientific literacy) 수준을 높여 정책 과정에 대한 참여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학자들의 발언권을 높이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될 뿐이라는 점에 있다. 과학자들은 대중화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과학지식(genuine scientific knowledge)'을 자기 자신들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으로 따로 떼어 둠으로써 일반대중에 대한 인식론적 권위를 강화하고, 또한 무엇이 적절한 단순화이고 무엇이 왜곡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지님으로써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바꿔말해, 과학자들은 특정한 쟁점에 대해 일반인들의 지지를 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과학지식의 단순화된 전달에 직접 관여하면서 이를 '적절한 단순화'로 옹호하는 반면, 유사한 쟁점에 대해 경쟁하는 주장을 비판하고자 할 때에는 이를 '왜곡' 혹은 '오염'으로 비판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과학기술 전문가-일반인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일반인들이 과학대중화를 통해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것은 상황의 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이란 마치 과학 영역에서 일하는 전문가들만이 갖고 있는(또 가질 수 있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 정의상,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또 알 수 있는) 지식은 과학 축에 낄 수도 없다"라는 램버트(Helen Lambert)와 로즈(Hilary Rose)의 진술이 아마도 여기에 가장 적절한 언급이 되겠다.(주14)

3. 새로운 PUS 프로그램: 맥락 모형

1) 문제의식

1980년대 후반부터 PUS 문제에 과거와는 다른 방향의 접근이 나타났다. 과학지식사회학의 연구성과를 흡수하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대중적 차원의 논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연구자들이 주도한 '새로운' 접근에서는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의 이러한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관계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들은 과학자들이나 엘리트의 관점으로 일반인들의 과학 이해 '수준'을 평가하였던 과학대중화 모형을 비판하면서, '테이블을 돌려'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 '그 자체'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내놓은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대부분 사회학을 전공한 과학사회학자들이나 과학정책학자들이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브라이언 윈(Brian Wynne)을 들 수 있다.

윈은 앞서 설명한 과학대중화 모형을 이름하여 '결핍 모형(deficit model)'이라고 불렀다. 그가 파악하기에 '결핍 모형'은 세 가지 전제에 기반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과학이 단일하고 보편적이면서도 자명한 것라는 전제이고, 두번째는 일반인들에게 바로 그 과학이 '결핍'되어 있다는 전제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일반인들에게 더 많은 과학지식이 공급되면 사람들이 더욱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전제이다. 윈은 이 세 가지 전제를 모두 비판하면서, 일반인들이 특정하고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연구를 집중하였다.(주15)

첫번째 전제에 대한 윈의 비판은 이렇다: 한마디로 말해 '과학'이라는 개념은 단일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이질적인 여러 실체들의 집합이다. '과학'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그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주16) 따라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곧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만 한다. 이는 특정한 과학지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과학 내적인 제도―예컨대 과학연구를 위한 자금이 배분되는 방식―나 과학이 사회 속에 자리잡은 형태―예컨대 과학적 설계에 근거한 거대구조물이 '실제로' 건설되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사실 과학기술이 일상생활과 맺는 관계에서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큰 중요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어 두번째 전제에 대해서 윈은 마치 과학이 단일한 실체가 아니듯이, 사회 속의 일반인들 역시 단일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혹은 동일한 지식을 공급받아야 하는) 동질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반인들 역시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일반인들에게 과학이 '결핍'되어 있다는 전통적 견해에 대해서, 과학적 언어로 표현된 '공식적 지식(formal knowledge)'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곧 비합리적이라는 식의 사고가 대단히 위험한 것임을 지적한다. 예컨대 과학자들은 전자가 원자보다 작은지 큰지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일반인들이 핵발전소가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으로 단정짓는 경향이 강하다.(주17) 그러나 핵발전소가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문제를 두고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그러한 공식적 지식의 인지 여부가 수행하는 역할은 지극히 미미하다. 아직까지 공식적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경우들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결정의 순간에 과학은 오히려 논의의 중심으로부터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일반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종종 (과학)언어적인 형태로는 좀체로 표현되지 않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윈은 일반인들이 더 많은 과학적 내용을 알게 됨으로써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들을 둘러싼 논쟁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세번째 전제를 공격했다. 과학지식과 과학적 방법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것이 곧 과학과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의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나 정책담당자들이 가정하는 바와는 달리, 과학은 사회에서 그 인식적인 권위―과학지식은 과학적이고 엄밀한 방법에 의해 도출되었으므로 '객관적'이라는―에 힘입어 자동적으로 신뢰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도출된 지식에 의존하여 서로 다른 근거에서 과학에 신뢰 혹은 불신을 보낸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과학과 이를 다루는 전문가로서의 과학자들을 얼마만큼 신뢰하는가의 문제는 과거의 유사한 경험들에 대단히 크게 의존한다. 예컨대 과학자들이 계속해서 '안전하다'라는 진단을 내놓았던 핵발전소가 한번 사고를 일으켰다고 할 때, 이러한 상황 이후에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새로운 PUS 프로그램을 특징짓는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실제로 이루어진 연구들은 과거와는 다른 방법론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과학'과 '대중'의 개념이 모두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앞서의 문제의식에 따르면 무차별적 대중을 대상으로 해서 퀴즈풀기 식으로 일반적인 과학지식의 이해도를 조사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작업이 된다. '맥락 모형(contextual model)'(주18)이라고 이름붙여진 새로운 PUS 프로그램은 대규모 설문조사·분석에 근거한 연구를 피하고, 참여관찰, 장기적인 패널 인터뷰, 구조화된 심층 인터뷰 등을 통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특정한 일반인 집단이 과학에 대해 어떤 식의 이해와 태도를 보이고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를 탐구하는 지역적(local) 사례연구의 방법론을 선호하였다.(주19) 아래에서는 그 중 브라이언 윈이 수행한 두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2) 사례연구 1: 컴브리아 지방의 목양농(牧羊農)

윈이 수행한 사례연구 중에서 가장 폭넓게 인용되는 것이 1986년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 영국 컴브리아 지방의 목양농들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분석한 것이다. 이 사례는 윈이 언급한 세 가지 비판을 모두 담고 있는 의미있는 사례이므로 조금 자세히 다루어 보겠다.(주20)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 직후 방출된 방사성 물질들은 바람에 실려 영국에까지 도달했고, 영국 서부 해안의 고원 지역인 컴브리아(Cumbrian) 지방에서는 방사성 세슘이 비에 섞여서 내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 지역의 농부들은 양을 방목하여 기른 후 저(低)지대로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목양농들이었는데, 방사성 비로 고원 지역의 풀이 오염되자 정부와 과학자들은 방사성 물질이 토양에서 사라질 때까지 일정 기간 동안 양을 저지대로 이동하거나 도살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과학자들은 토양 속에서 세슘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모형화에 근거해서 금지 기간을 3주로 설정했다. 그러나 정작 3주가 지난 이후에도 토양 속의 방사능 수준은 안전 수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고 금지 기간은 무기한 연장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일 년에 정해진 기간에만 양을 방목하여 기를 수 있는 목양농들은 생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애초에 과학자들이 설정한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의 예측이 어긋난 이유는 과학자들이 저지대에서의 토양 모형을 성질이 다른 고지대의 토양에 그대로 적용시켰기 때문이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나마 2년이 지난 후였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목양농들은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는 과학자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며, 고원 지역의 사정에 대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더 복잡한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고원 지역에서의 방사능 수준이 계속해서 줄어들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자 목양농들은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컴브리아 고원 지방은 영국 최대의 핵발전소 밀집지역인 셀라필드-윈드스케일(Sellafield-Windscale) 공업단지에 인접해 있는 곳인데, 목양농들은 체르노빌 사고 이전부터 이미 셀라필드에서 방사능이 지속적으로 누출되어 왔을 것이라는 의혹을 품었다. 이러한 의혹은 영국 전체를 놓고 볼 때, 유독 컴브리아 지역의 토양 방사능 수준만이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으로 미루어 상당히 근거있는 것이었다. 목양농들은 1957년에 있었던 셀라필드-윈드스케일 핵발전소 사고가 당시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음에도 그 사고의 정도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후에도 크고 작은 각종의 사고들이 제대로 규명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해를 계기로 그 생각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목양농들은 이러한 의심을 근거로 발전소측에 과거의 기록을 요구하였지만 발전소측에서는 기록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목양농들은 셀라필드-윈드스케일 핵발전소와 애증(愛憎)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목양농들의 친척이나 이웃들 중 많은 수가 셀라필드-윈드스케일 공업단지에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양농들은 여러 가지의 이해관계와 정체성(identity)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의혹을 쉽게 발설하거나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이상에서 요약한 구체적인 하나의 사례로부터 우리는 윈이 제기한 세 가지 비판의 내용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유용한 전문지식으로서의 '과학'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이 갖고 있었던 토양에 대한 지식은 고원 지역에서는 맞지 않을 뿐더러 쓸모가 없는 것임이 드러났고, 오히려 그 지역에서는 과학적 훈련을 받지 못한 목양농들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전문적인 지식들이 훨씬 더 유용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과학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목양농들의 지식을 무시하였지만, 정작 오류를 범한 것은 오히려 과학자들이었다. 목양농들은 일반적인 과학지식을 잘 이해한 것은 아니었으나 과학자들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그 오류가 종종 은폐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알고 있었다. 큰소리를 치던 과학자들이 일단 실수를 범하자 정부와 과학자들에 대한 목양농들의 신뢰는 급격히 허물어져 이들은 과거의 유사한 경우들에까지 의혹을 소급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일반인'으로서의 목양농들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으며 서로 상충되는 이해 관계와 여러 겹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이질적인 집단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로부터 윈이 언급한 바, 일반인과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 견해, 즉 '결핍 모형'이 지니는 결점들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3) 사례연구 2: 동물 성장 호르몬 논쟁

이제 생명공학에 관한 짧은 사례연구를 하나 보도록 하자.(주21) 1984년에 EC 각료 이사회의 집행 기관인 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동물 성장 호르몬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작업을 수의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소위원회에 위임하였다. 이 호르몬은 가축류의 소화관에서 자연 상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위원회는 실험대상 동물에 대해 다양한 처치를 가해 본 후에 시간대별로 잔류 호르몬의 수준을 측정하여 그 수준이 일정한 정도 이하이면 합리적인 안전 기준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소위원회는 이 호르몬이 특정하게 지정된 조건―생화합물을 수의사 감독 하에 투여해야 하며, 먹을 수 없는 부위에 주입해야 하고, 호르몬 투여 이후 도살하기 이전에 충분한 시간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등의―하에서 사용될 경우 아마도 안전할 것이며, 상업적으로 시판해도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유럽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최종의결권을 가진 EC의 각료 이사회가 미처 열리기 전에 호르몬의 전면 생산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대중적 캠페인이 전유럽적으로 나타났다. 1985년 말에 소집된 각료 이사회는 이러한 움직임에 접하여 소위원회의 결론에 대한 최종의결을 보류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재검토할 것을 유럽위원회에 지시하였다.

이에 대해 유럽위원회의 실무진들과 소위원회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은 "생명공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는 대중들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에 전문가가 내놓은 '합리적인' 의견이 무시되었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전통적인 과학대중화 모형의 문제의식에 입각한 이러한 사고틀은, 그러나 지나치게 협소할 뿐만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이들은 앞서 소위원회에 의해 제안된 '조건'들이 실험실 속에서가 아니라 그 호르몬을 사용하는 유럽 전역의 모든 농장에서 준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험적으로', 오히려 '근거없이' 가정하고 있었다. 반면 통상적인 사회적 '관행'에 보다 익숙한 일반인들과 시민운동단체들은 그러한 조건의 준수를 과학자들이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적어도 법안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합리성 대 비합리성과 같은 위계적인 구도로 파악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이 문제의 해결에 있어 과학지식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소위원회에 속한 전문가집단이 내린 결론은 과학적 결정이라는 외피를 쓴 사회적 가치판단이 되는 것이다. 결국 많은 경우에 새로운 PUS 프로그램은 과학기술이 사회 속에 도입되는 과정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전문가-일반인 관계의 대칭적인 성격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4. 정책적 함의: '과학기술 민주화'의 실천적 근거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의 중요한 한 차원이자 이 문제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과학기술 영역에서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불균등한 권력을 배분받으며 그 간극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과학기술 영역의 특수성(즉 '전문적인' 지식의 필요) 때문인 것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그러나 전문적인 과학지식이 과학기술의 문제 해결에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며, 전문가들만이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 역시 아님을 위에서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내놓은 주장의 객관성, 투명성, 문제 해결에 있어서의 중심성과 같은 의제들이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기술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1988년의 대규모 조사사업을 준비했던 이들은 PUS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었다. 이들은 과학이 모든 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알 필요가 있으며, 정책결정이 민주적인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논쟁이 선행될 필요가 있고, 과학기술의 개발이 사회적인 비용지출에 의해 후원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최소한의 인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들었다.(주22) 여기까지는 과히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시혜적 수준으로 격하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의 지식이 정책결정에 실제로 유용한 것이라는 '이론적 근거'가 필요한데, PUS의 새로운 프로그램은 여기서 그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반드시 과학기술의 세부사항들을 잘 알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지적이 내포하는 함의는 얼핏 보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과학기술 민주화'라는 실천활동의 이론적 근거로 전화되었을 때는 대단히 위력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미 주 >

(주1) '기술시스템'은 미국의 기술사가인 토머스 휴즈(Thomas Hughes)가 사용한 용어로서, 이 말에는 기술을 기계와 같은 인공물(artifact)과 등치해서는 안되며 정치·경제·사회적 요소까지를 그 속에 포함하는 일종의 '시스템'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담겨 있다. 그의 기술시스템론에 대한 개괄로는 토머스 휴즈, 「대규모 기술시스템의 진화과정」, 송성수 편역, 『과학기술의 형성과 현대사회의 구축: 기술 시스템의 사회적 구성』(새물결, 근간)을 보라.

(주2) Thomas P. Hughes, Networks of Power: Electrification in Western Society, 1880-1930 (Baltimore, 1983).

(주3) 울리히 벡, 홍성태 역, 『위험사회』(새물결, 1997).

(주4) 대형기술사고의 일상성과 그 속에 내재한 문제점들에 대한 '진부하지 않은' 고찰로는, 신병헌, 「대형사고와 실천논리」, 『문화과학』 7호(1995, 봄), pp. 143-167과 장경섭, 「복합위험사회의 안전문제」, 『녹색평론』 39호(1997, 3/4월), pp. 65-85를 참고하라.

(주5) 80년대 이전의 성과들을 비교적 충실하게 요약한 것으로, Paul T. Durbin (ed.), A Guide to the Culture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New York, 1980)을 보라. 그리고 80년대 이후의 성과들을 과학기술사회학 분야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으로는 Sheila Jasanoff et al. (eds.), Handbook of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London, 1995)이 있다.

(주6) 다양한 논쟁을 다룬 사례연구들의 모음으로는 Dorothy Nelkin (ed.), Controversy: Politics of Technical Decisions (Beverly Hills, CA, 1979; 2nd ed., 1984; 3rd ed., 1992)가 가장 훌륭하다. 넬킨의 이 책은 2판에서 3판으로 바뀌면서 사례들이 대폭 물갈이되었으므로 좀더 많은 사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2판과 3판을 모두 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외에도 H. Tristram Engelhardt and Arthur L. Caplan (eds.), Scientific Controversies: Case Studies in the Resolution and Closure of Disputes in Science and Technology (Cambridge, 1987)와 같은 책들이 사례연구 모음으로 유용하며, Social Studies of Science와 같은 저널에도 과학적 쟁점을 포함하는 사회적 논쟁의 사례들이 실리곤 한다. 예컨대 최근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수돗물 불소화 논쟁에 관한 사례연구로 Brian Martin, "Analyzing the Fluoridation Controversy: Resources and Structures," Social Studies of Science, 18 (1988), pp. 331-363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주7)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한 개관과 그것이 지니는 함의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는, 앤드루 웹스터, 김환석·송성수 역, 『과학기술과 사회』(한울, 1998)의 2장(pp. 31-52)이 가장 무난하다. 좀더 관심을 지닌 사람들은 이 장의 끝에 있는 참고문헌 목록에 수록된 문헌들을 보면 될 것이다. 그 외에 우리말로 된 문헌들로는 김경만, 「과학지식사회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사상』 10호(1994, 겨울), pp. 132-154와 윤정로, 「"새로운" 과학사회학: 과학지식사회학의 가능성과 한계」, 『과학과철학』 5집(통나무, 1995), pp. 82-110 등이 있다.

(주8) Alan Irwin and Brian Wynne (eds.), Misunderstanding Science?: The Public Reconstruc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Cambridge, 1996), pp. 3-4.

(주9) Royal Society,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London, 1985). 아래에 개괄될 과학대중화 모형에 대한 설명은 주로 이 보고서의 내용과 그에 대한 비판자들의 정리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이 보고서의 짧은 축약본으로는 Anonymous,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The Royal Society Reports,"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11:3 (1986), pp. 53-60을 보라.

(주10) 이 조사사업의 결과를 분석한 짧은 글로, John R. Durant, Geoffrey A. Evans and Geoffrey P. Thomas,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Nature, 340 (6 July 1989), pp. 11-14가 있다. 이 연구조사의 문제의식과 방법론, 좀더 자세한 결과분석까지를 담은 논문은 John Durant, Geoffrey Evans and Geoffrey Thomas,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in Britain: The Role of Medicine in the Popular Representation of Scienc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1 (1992), pp. 161-182을 보라 (이 논문을 포함해서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에 수록되었던 초기 논문들 중 상당수는 과학기술진흥재단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던 『과학과 문화』에 번역되어 실려 있으니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언급을 덧붙여야 할 듯한데, 원문을 참조하고 싶은 사람은 서강대 도서관에서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의 지난호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아래의 정리는 주로 Nature에 실린 짧은 글을 참조한 것이다.

(주11) Durant et al.,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pp. 13-14.

(주12) 대표적인 것으로 Richard Whitley, "Knowledge Producers and Knowledge Acquirers: Popularisation as a Relation between Scientific Fields and Their Publics," Terry Shinn and Richard Whitley (eds.), Expository Science: Forms and Functions of Popularisation (Dortlecht, 1985), pp. 3-28.

(주13) Stephen Hilgartner, "The Dominant View of Popularization: Conceptual Problems, Political Uses," Social Studies of Science, 20 (1990), pp. 519-539.

(주14) Helen Lambert and Hilary Rose, "Disembodied Knowledge?: Making Sense of Medical Science," Irwin and Wynne (eds.), Misunderstanding Science?, pp. 65-83, 인용은 p. 78.

(주15) 브라이언 윈의 저술은 대단히 방대하지만, 여러 저술들에서 반복되는 그의 입장은 비교적 명료하다. 아래에 개괄적으로 제시되는 그의 주장은 Brian Wynne, "Knowledges in Context,"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16:1 (1991), pp. 111-121에 가장 핵심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유사한 내용을 Alan Irwin and Brian Wynne, "Introduction," Irwin and Wynne (eds.), Misunderstanding Science?, pp. 1-10에도 찾아볼 수 있다.

(주16) '과학' 개념의 단일성을 비롯한 과학기술에 대한 여러 신화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으로, 김명진, 「과학기술에 얽힌 '통념'들, 혹은 과학기술의 '신화화'를 넘어서」, 『공동선』(1997, 7/8월)과 David Collingridge and Colin Reeve, Science Speaks to Power: The Role of Experts in Policy Making (London, 1986), chaps 2-3(pp. 7-27)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주17) 이러한 경향은 최근(11월 14-16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하여 국내 최초로 열린 '유전자조작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를 위한 합의회의 장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합의회의 장소에 출석한 전문가들 중 상당수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적' 사실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 시민패널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고 이들에게 '한수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번에 열린 국내 최초의 합의회의는 국내 PUS 연구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18) 이 용어는 Alan G. Gross, "The Roles of Rhetoric in the Public Uderstanding of Scienc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3 (1994), pp. 3-23에서 빌어온 것이다.

(주19) 1980년대 말부터 네 개의 대학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던 다섯 개의 연구프로젝트를 비롯해 다양한 사례연구들이 Irwin and Wynne (eds.), Misunderstanding Science?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연구들을 담은 책으로는 David Layton, Edgar Jenkins, Sally Macgill, and Angela Davey, Inarticulate Science? (Driffield, UK, 1993)와 Bruce V. Lewenstein (ed.), When Science Meets the Public (Washington, DC, 1992)가 있다.

(주20) 이 사례는 윈의 저술 대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만 들자면, Brian Wynne, "Sheep Farming after Chernobyl: A Case Study in Communicating Scientific Information," Environment Magazine, 31:2 (March, 1989), pp. 10-15, 33-39 (이 글은 Lewenstein (ed.), When Science Meets the Public, pp. 43-67에 재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Brian Wynne, "Misunderstood Misunderstanding: Social Identities and Public Uptake of Scienc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1 (1992), pp. 281-304이 있다.

(주21) 이하의 사례는 Brian Wynne, "Technology Assessment and Reflexive Social Learning: Observations from the Risk Field," Arie Rip, Thomas J. Misa and Johan Schot (eds.), Managing Technology in Society: The Approach of Constructive Technology Assessment (London, 1995), pp. 19-36 중 pp. 23-25로부터 인용하였다. 이 사례를 포함해 유사한 몇 가지 사례가 수록된 글로는, Brian Wynne, "Frameworks of Rationality in Risk Management: Towards the Testing of Naive Sociology," Jennifer Brown (ed.), Environmental Threats: Perception, Analysis and Management (London, 1989), pp. 33-47을 참조하라.

(주22) Durant et al.,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p. 11.

출전: 『연세』 50호 (1998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