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제기
100여년 전 영화가 처음 대중 앞에 공개된 이래로, 영화와 과학기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관계맺어 왔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등장과 그 변천이 20세기의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영화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는 수많은 관련 기술의 발전이 그 가능성을 제공해 왔고, 반면에 영화는 그 속에 다양한 과학기술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반영해 왔다. 이 글에서는 이 중에서 '영화 속에 반영된 과학기술'의 측면에 촛점을 맞추어 이 둘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려 한다.
영화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것이 비록 SF영화들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던 것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분석이 이루어져 왔다. 서로 다루는 대상의 촛점이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긴 하지만, 굳이 그것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① 우선 영화 속에 나타난 '첨단' 과학기술 - 예를 들어 냉동인간이나 앤드로이드, 가상현실, 심지어 타임머신에 이르기까지 - 을 소개하고 그 과학기술의 현황과 앞으로의 전망 등등을 조망하는 유형. 에컨대, <론머맨>에서 가상현실의 가능성을 보고, <블레이드 러너>에서 안드로이드의 가능성과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탐색하며, <데몰리션 맨>으로부터 냉동인간에 대한 논의를 끄집어내는 경우 등등이 이에 속한다. ② 영화들이 그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과 그것이 구현된 미래상에 대해 양면가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고 보는 유형. 'SF'라는 장르에 대한 분석이 대체로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즉, 영화들에 나타난 과학기술의 모습과 미래상이 긍정적인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도 역시 보여주며, 이러한 긍정·부정 양극단이 영화 속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분석. ③ 영화들이 그럴싸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이윤을 챙기기 위한 영화산업의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게 되면서 영화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의 모습이 철저하게 왜곡되었다고 보는 유형. 이러한 분석은 대체로 과학기술자들의 시각과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으며, 분명 진실의 일단을 담고 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글들에 대해서 나의 입장은 이러하다. 우선 ①의 경우, 이러한 유형의 글들은 특정한 기술의 전망을 탐색하면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깊이 고민하기보다는 대체로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②의 시각은 얼핏 균형잡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들을 살펴본다면 과학기술과 미래상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압도적임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주1) 그리고 2절의 (3)에서 언급하겠지만, 많은 영화들에서 과학기술의 '긍정적인' 성과들조차도 종종 쓸모없거나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③의 시각에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영화 속에 나타나는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의 모습이 지나치게 결정론적으로(즉, 주체적인 요인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으로) 등장한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영화 속의 과학기술상이 전적으로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영화 속에 묘사된 과학기술의 모습, 과학기술자의 모습, 그것이 구현된 미래세계의 모습에는 20세기 들어 과학기술이 걸어온 길과 그것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우려와 공포 - "과연 새로운 과학기술은 진정으로 인간의 존재조건을 향상시킬 것인가"라는 - 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려와 공포를 '전문가적'인 시각에서 '비과학적'이라고 재단해 버린다면 그것은 원자력발전소 찬반 논의에서 보이는 '전문가 신화' - 한마디로 말해 원전에 대한 반대를 '뭘 잘 모르는' 것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것 - 의 또다른 형태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나는 이제 대중영화들 속에
나타난 미래상과 과학기술자, 과학기술의 모습을 순서대로 3가지 유형 - (1)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상, (2)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와 자율성을 상실한
과학자/엔지니어, (3) 과학기술의 무용성과 그것의 치명적 결함 - 에 넣어 살펴보고,
20세기의 과학기술 발전과정에서 그 근거가 될만한 몇 가지 사건들을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중영화 속의 이러한 과학기술상이 함의하는
바를 간략히 생각해 보면서 앞으로의 강의에 여운을 남기려 한다.
2. 대중영화 속의
과학기술의 이미지
(1)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상
영화 속의 과학기술의 모습 중에서 지금껏 가장 많이
언급되어 온 것이 바로 SF영화가 그려 온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미래상의
측면이다. 이 미래상의 묘사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궁극에 있어 정치적, 환경적으로
재앙을 가져오거나 反민주적인 가치들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는 사고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미래사회에는 현재의 사회가 갖고 있는 각종의 모순들(특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련된)이 극대화된 모습으로 보여진다. 주요한 SF영화들이 그리는 미래상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① 현재의 계급모순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심화되며 심한 경우 극단에 위치한 두 계급으로 나뉜다(<메트로폴리스>,
<블레이드 러너>). ② 사회의 관료적 지배와 정치적 억압은 더욱더 강화되어
극단적인 관료주의적 관리사회가 나타난다. 그리고 첨단과학기술의 구현물인
컴퓨터 등등이 관료적 지배의 매개가 된다(
이러한 미래상의 묘사는 한마디로 '압도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상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묘사되는 - 혹은
적어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실질적인 복지나 자유의 증진에 별반 도움이
못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 것은 만일 우리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사실 놀랍기 이를 데 없다. 우리시대에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과학기술만능주의적인 주장들이나 테크노피아적인 신화를 고려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이러한 대중영화들을 위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이미지가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 이유는 3절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2) '미친 과학자'와 '자율성을 상실한 과학자/엔지니어'
그러면 이제 영화 속의 과학기술자의 이미지는 어떠한지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한마디로 묘사할 수 있는 용어가 아예 정립되어 있다. 즉,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과학자/엔지니어들은
종종 ① 냉혹하고 무자비하며('하얀 가운'이 바로 그 상징이다), ② 과학기술적인
문제 그 자체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도덕적·정치적인
함의를 미처 고려해 보지 못하며, ③ 프로젝트 그 자체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며(예컨대,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복종하고 대기업의 이해관게에
무조건 순응하여 프로젝트 유지를 위한 지원을 받아내는 등), ④ 자신의 과오를
결코 반성하려 들지 않고 고집불통이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업이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혼자서 믿는, 그런 사람들로 그려진다. 예로 들 수 있는
경우들을 보자: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의 대립 속에서 자본가쪽을 편들며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를 닮은 로보트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현혹시키고, 궁극에는 (말썽많은)
노동자들을 로보트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짠다(<메트로폴리스>). 도덕적·정치적
책임보다는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기술적'인 문제에만 매달린다(<멸망의
창조>). 스키너적(Skinnerian)인 행동공학 원리에 입각하여 비행을 저지른 사람을
사회에 순응적인 인간으로 '개조시켜' 버린다(<시계장치 오렌지>). 남아메리카의
오지에 열역학 원리만을 이용한 냉장고를 만들고 스스로가 '문명'의 전달자라고
자부하나 불의의 사고에 의해 모든 것을 잃는다(<모스키토 코스트>). 물체
전송기를 발명하나 그것으로 스스로를 전송시키다가 파리의 유전인자와 합성되어
버린다(<플라이>). 새로운 실험대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불문곡직하고 무조건
잡아들여 실험하고 싶어하며 그것의 도덕적인 함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앞에서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자율성을 상실한 과학자/엔지니어'의
이미지와 병치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서로 모순된다고? 그렇지 않다. '미친
과학자'가 자신의 작업이 갖는 도덕적, 정치적 함의를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자율성을 잃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과학기술자가 아예 처음부터 자율성이
없는, 외부의 권력에 의해 위협받는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여기서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과학기술자의 전형적인 한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그는
처음에는 오로지 기술적인 작업에만 매달린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그것의
성취를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이나 굴복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성취했을 때 그는 자신이 그 결과물에 대한 통제능력이 없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 프로젝트의 성취를 위해서 그가 끌어온 돈이나 사용한 장비 등등이 모두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자신을 고용한 대기업이나 정부조직에
예속된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궁극적인 파멸로 몰고간다." 여기에 해당되는
예는 대단히 많다. 가장 최근의 예를 들자면 <터미네이터 2>도 있고,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멸망의 창조>, <차이나 신드롬>, <드림스케이프>
등등의 예를 들 수 있다.
(3) 과학기술의 무용성과 치명적인 결함, 반인간성
첨단과학기술(또는 그것이 담고 있는 가치)의 묘사에 있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의 문제로 넘어가자. 이것 역시 대단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상당수의 영화들이 과학기술의 성과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의 결함이나 결정적인 상황에서의 무용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과학기술의 무용성을 얘기하는 예를 들어 보자: 전투에 있어서 첨단과학기술의 장비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종종 믿을 수 없거나 불필요한 것이 되며, 오히려 일종의 '감'에 의존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스타 워즈>). 사용법이 대단히 복잡한 첨단의 장비들은 종종 그것을 '두들겨팸'으로써 더 잘 동작한다(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음).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능하게 된 새로운 현상이나 상황들은 종종 전통적인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된다(대표적인 예로 <데몰리션 맨>의 사이버섹스). 과학기술의 발전은 종종 쓸모없이 보이는 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게 나타난다(미래사회를 다소 밝게 묘사하는 영화들에서 보이는 동화같은 배경들과 이상하게 생긴 집들, 이상한 옷차림과 타고 내리기에 더 불편하게 보이는 탈것들 등등). 과학기술을 거부하고 자연친화적인 가치를 유지하려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 대표적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하지만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예보다 과학기술을 더욱 치명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예도 많다. 복잡한 대규모의 과학기술은 종종 내부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어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이는 그것의 개발을 담당한 과학기술자가 자신감을 가지고 큰소리를 치면 칠수록 더욱 그러하다. 예상치 못한 우주선의 폭발(<아폴로13>), 우연히 끼여든 '파리'라는 요인(<플라이>, <브라질>), 냉전체제 하에서 피해의식을 보이는 장군(<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원한을 품은 컴퓨터기술자(<쥬라기 공원>), 엉뚱하게 끼여든 해커 소년(<위험한 게임>) 등등 위험요인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부터,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이는 거대과학기술체계 전반에 관한 일종의 불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위의 세 가지를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과학기술자는 종종 도덕적·정치적 함의를 잊고 오로지 기술개발에만 '미친'
사람으로 그려지며, 대기업, 정부 등등의 거대조직에 속해 자율성을 잃고 있다.
이들이 개발한 과학기술은 언뜻 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인간의 실질적인 복지
증진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며, 대부분 내부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어 궁극적인 파멸로 치닫는다. 그 결과 미래사회는 암울한 전망으로
뒤덮이게 되며, 무분별한 과학기술의 남용으로 환경은 오염되고, 과학기술자는
지배계급의 노예로 전락하며, 사회는 관료적 지배로 이어지고 과학기술은 이
지배를 실질적으로 돕거나 최소한 방조한다. 다소 어두운 전망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보는 대다수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전망들을 합치면 이러한 결과가
나옴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대중영화 속의
과학기술의 이미지의 근원 탐구
그러면 이제 '왜?'를 물을 차례이다. 20세기와 같이 과학기술의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고, 과학기술의 전망에 대한 낙관적인 해석들이 대중들 속에 널리 퍼져 있는 시기에, 왜 유독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는 대중영화 속에서는 이렇게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단 말인가? 왜 그럴까?
이것을 심각하게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특히 영화매체의 기능을 순전히 기분전환에만 한정하려는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 그 원인을 영화의 장르적인 특성에 돌릴 것이다. 즉, 미래를 어둡게 묘사하는 것은 SF라는 영화장르의 특성이며 따라서 그것에 굳이 '사회적'인 어떤 이유를 갖다붙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 역시 영화에서의 극적 전개를 위한 장치이며(갈등구조를 갖춘 이야기를 만들려면 누군가가 '나쁜 놈'이 되어야 하니까), 과학기술의 치명적인 결함 역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로 파악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주장은 상당부분 옳다. 아무런 생각없이 만들어진 '쓰레기같은' 영화들에서도 앞서 말한 특징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그런 영화들에서는 분명히 그 이미지를 일종의 '장르적 관습'으로 차용한 것임이 분명할 테니까).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모든 것을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왜 하필이면 과학자가 '나쁜 놈'이 되어야 하는가? 왜 하필이면 과학기술의 치명적인 결함이 서스펜스를 불러일으켜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오로지 사회와의 관련을 통해서야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른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과학기술의
이미지들이 전적으로 영화산업의 이해관계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그 결과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를 호도하고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역시 진실의 일단을 담고 있긴 하지만, 앞서의 이미지 전체에 대한 설명으로는
불충분하다. 나는 오히려 영화산업이 과학기술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편승한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둘간에 선후관계를 따진다는 것이
무의미하긴 하지만(이 둘은 끊임없는 상승작용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이미지를
재생산해 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럼 이제 과학기술에 대한 앞서의 이미지의 근원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과학자에 대한 이미지, 즉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사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기원을 18세기 말∼19세기 초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18년에 발표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자의 이미지는 거의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호기심에 이끌려 자신의 행위의 도덕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미친 듯이 연구에만 몰두하며, 결국에는 자신의 피조물에 의해 파멸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오늘날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의 이미지의 선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생각이 단지 놀라운 상상력의 수준에 머물렀으며 아직 그것의 현실적인 함의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가 당대의 과학자들의 모습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를 어느 정도 반영했을 수도 있다. 무언지 잘 알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 이상한 기구들을 늘어놓고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들, 즉 과학자들에 대한 당대의 대중들(즉, 과학에 무지한 사람들)의 반응이 여기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과 같이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과학자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에는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부상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출현이다. 이 둘은 그 이전의 과학들과는 확실히 선을 긋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이상한 연구를 자기들끼리만 하는, 사회와는 격리된 집단으로서의 '과학자'의 이미지가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2차대전 말미에 원자폭탄이 완성되면서 과학자들에게 덧씌워진 파우스트적인 이미지와 결합하였다. 과학기술에 무지한 대부분의 대중들로서는 자신들이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원리 - E=mc2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 에 기반하여 그토록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감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공포감은 원자폭탄에 대한 대중매체의 호들갑으로 말미암아 더욱 증폭되었다. 그 결과 대중들은 막연히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나름대로 뭔가를 하는 집단으로서의 과학자가 아니라 사회에 엄청난 실질적인 영향(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협적인 집단으로서의 과학자들을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2차 대전 이후의 과학기술 발전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뇌리에 계속 잠재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편, 이와는 약간 거리를 두어 존재해 온 엔지니어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과학자와 엔지니어(혹은 발명가)는 분명히 서로 구분된 영역에 존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의 對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나 발명가들은 19세기를 통해서 여러 모로 유용한 인공물들을 만들어내고 사회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토목공사 등을 관리하는 등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유용함을 증명해 왔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는 대단히 우호적인 것이었으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주된 동력으로서 이들을 찬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에디슨 같은 발명가-엔지니어에 대한 신화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를 거치면서 그동안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발명가와 엔지니어들이 대기업이나 정부기관에 예속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이 부분은 제 2강의 주된 주제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산업체 연구소에 소속되거나 전쟁 기간에는 정부로부터 직접 요청을 받고 군수물자의 생산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우려의 시각을 표명하였는데, 사회 전체의 자산이 되어야 할 과학기술의 개발이 결국에는 몇몇 소수의 대기업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그 성과가 악용되지는 않을지 하는 것이 그 우려의 주된 근거였다. 이러한 우려는 20세기를 관통하면서 과학자와 엔지니어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좁아지고 이 둘 모두가 거대한 조직들에 예속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정도를 더해 갔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앞서의 이미지들의 근저에
깔려 있는 대중들의 정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인간의
복지를 궁극적으로 증진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믿고 싶어하면서도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들이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반추하면서 그것이 악용되지는 않을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막대한 생산력의 발전의 성과물이 자신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은 그것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자신을 소외시키지는 않을지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중영화들 속에서 시각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이것을 단순한 반영론으로 보지는 말아 주기 바란다).
4. 함의
이상에서 대중영화들 속의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살펴보고 그러한 이미지가 나타나게 된 원인과 배경을 분석해 보았다. 나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한두 가지 함의가 도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선 나는 대중영화 속의 과학기술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앞서 1절에서 내가 예로 들었던 것처럼 단순하게 파악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과학기술의 통제에 있어서 '무지한' 대중들을 배제하고 과학기술자들만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하고자 한다(이 부분은 제 4강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궁극에 있어서 과학기술의 성과나 그것의 문제점들을 겪어야 하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대중들 자신이다. 따라서 그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은 의당 존중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의 통제 문제에서 널리 유포되고 있는 '전문가 신화'는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 미 주 >
(주1) 통계수치라는 게 별로 믿을
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하나 인용해 보자. 콤스톡(George Comstock)과
툴리(Heather Tully)가 1939년에서 1976년 사이에 미국 내에서 개봉한 영화
15000여편 중에서 중 약 1/3 가량을 임의로 샘플링해서 조사한 결과, 이들 중
162편이 과학기술상의 혁신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들 중 40%,
그리고 SF영화들 중 60%가 기술혁신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죽음, 상해,
천재지변)을 미친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나는 이러한 비율이 과학기술과
사회와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전면화된 76년 이후에 더욱 증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참 고 문 헌 >
이 주제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영역이므로,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참고문헌을 가급적 폭넓게 제시하려 애썼다. 강의에서는 다루는 영화들을 SF영화만으로 한정하지는 않을 터이지만, 현재 이용가능한 참고자료들은 거의 SF영화에 관한 것밖에 없는지라 SF영화와 과학기술에 대한 글을 주로 골랐다.
1. 박상준, 「세계 SF영화사」, 월간 『으뜸과버금』 1994. 4 - 1995. 5 (13개월간 연재).
이 글은 객관적인 사실정보 위주로 영화가 등장한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는 100년간의 시기에 만들어진 주요 SF영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일차적인 자료로 유용할 것이다. 이 글은 참세상을 비롯한 몇몇 통신망에 올려져 있으므로 활용하기 쉽다 (참세상에서는 go art 13 한 후에 661-667번 자료를 보면 된다).
2. 김진우, 『하이테크 시대의 SF영화』, 한나래,
1995.
3. 정재승, 「Cinetech: 스크린과 함께하는 과학여행」,
『과학동아』 1995. 12 -
2번과 3번은 앞서 강의소개에서 언급한 두 가지 유형 중 첫번째에 가까운 글들이다. 2번은 월간 『스크린』 1993. 5 - 1994. 7에 <연속테마기획: 영화와 공상과학>이라는 제목으로 15개월간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며, 3번은 현재 과학동아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그 성격이 서로 비슷하다. 이 글들에서는 주요 SF영화들을 중심으로 그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풍부한 참고자료들을 담고 있으므로 글의 관점에는 반드시 동의하지 않더라도 보아 둘만한 글들이다.
4. 오영숙, 「비디오로 보는 세계의 영화이야기 -
④ SF영화」, 월간 『영화저널』 복간 3호(1994.9), pp. 16-17.
5. 구회영,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한울, 1991, pp. 165-168.
6. 스티븐 C. 얼리, 이용관·영화언어연구회 역,
『미국영화사』, 예건사, 1993, pp. 234-252.
7. 김달선·오선희, 「SF, 테크놀로지, 포스트모더니즘
(from ET to 토탈 리콜)」, 월간 『로드쇼』 1991. 6. Dossier, pp. 185-199.
4-7번까지의 자료들은 SF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파악하면서, 그 장르의 특성이 무엇인지, 그 장르가 어떻게 사회와 상호관계를 맺어나가는지, 그 장르에서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등을 밝히고 있다. 이 자료들에서는 대체로 보아 SF영화가 테크놀로지에 대해 갖고 있는 양면가치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뚜렷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유보하고 있다.
8. 연세대 진예모, 「영상매체 속의 과학기술」, 제
3회 과학기술한마당 자료집, 1995, pp. 11-14.
9. ?, 「영화 속의 과학기술」, 『과학세대』 창간호,
동녘, 1991, pp. ?-?
8, 9번 자료는 영화 속에 다루어진 과학기술의 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글들이다. 이 글들은 비록 경청할 만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과학기술자 중심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어 과학기술과 사회간의 상호관계를 보는 것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들이다.
10. 주요한 SF영화/SF작가들에 대한 비평들.
이는 앞서의 두 가지 유형 중 두번째 유형에 속하는 글들이다. 주요한 SF영화들에 대한 깊이있는 비평문들은 (그것이 반드시 과학기술과 사회라는 테마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읽다보면 대단히 '피곤해짐'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글들임은 분명하다. 아래에 몇 가지 예만 들어 둔다.
이진경,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새길, 1995 중에서 <블레이드 러너><토탈 리콜><모던 타임즈>에 대한 비평.
<메트로폴리스> - 「프리츠 랑: 모더니스트에서 작가주의까지」, 『로드쇼』 1994. 11, pp. 160-164.
<닥터 스트레인지러브><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시계장치 오렌지> - 「영화작가읽기: 스탠리 큐브릭」, 『스크린』 1993. 5, pp. 207-210. 큐브릭에 대해서는 『키노』 1996. 2월호도 참고할 것.
<에일리언><블레이드 러너> - 「영화작가읽기: 리들리 스코트」, 『스크린』 1993. 6, pp. 199-203. <블레이드 러너>에 대해 벌어진 논쟁에 대해서는 박찬욱, 「블레이드 러너 - 복원된 가능성」, 『영화저널』 복간 4호, p. 17을 참고할 것.
<브라질> - 『한겨레21』 95호 숨은비디오찾기.
<로보캅> - 「영화작가읽기: 폴 버호벤」, 『스크린』 1994. 3, pp. 208-213.
<비디오드롬> - 「영화작가읽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스크린』 1994. 2, pp. 182-187.
이와 아울러 필자가 쓴 영화 <아폴로 13>에 대한 영화평(서울대 『공대저널』 20호 8면)을 본다면 필자의 글쓰기가 막연하나마 지향하는 바를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출전: 1996년 1학기 서강대 제2대학 과학기술강좌 1강 발제문